거조암을 찾아서 이종원 | ||||
거조암을 찾은 것은 연전에 다른 곳을 답사하러 가는 길에 잠시 들른 일이 있었지만 그야말로 수박 겉핥기에 지나지 않았고 오늘이 두 번째다. 집사람과 동행을 권유해도 대성사 법회를 봐야 한다니 혼자라도 갈 수 밖에 없다. 문화재청 홈페이지를 통해 문화재답사기와 사진을 공모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마감날짜를 기억하지 않고 있었고, 지난 밤 문득 생각이 나서 검색해보니 6월 19일이지 않은가. 며칠 남지 않았고 오늘이외에는 시간을 내기가 어려우니 혼자라도 비싼 기름 태워가며 찾게 된 것이다. 내가 살고 있는 대구 북구 태전동에서 거조암으로 가는 지름길은 국우터널을 통해 백안 삼거리에서 갓바위 방향으로 가다가 84번 도로로 바꿔 타고 919번 도로에서 좌회전하여 신령방면으로 곧잘 가다가 101번 도로로 좌회전하여 약 4km쯤 가면 된다. 대략 50km 거리다. 가장 쉽게 찾으려면 경부고속도로에서 포항고속도로로 바꾼 뒤 청통?와촌 나들목으로 나와 919번, 101번으로 바꾸면 된다. 대형차까지 절 마당에 갈 수 있으나 마지막 300m가 약간 무리가 따를 것 같다. 팔공산 동쪽 자락에 있는 거조암은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본사 은해사의 말사로 되어 있지만 창건은 은해사보다 60년 정도 빠르다. 거조암 창건은 신라 효성왕 2년(738년)이거나 경덕왕(742~764)때라는 주장이 엇갈리지만 은해사의 809년보다는 훨씬 앞선다는 것이다. 그 명칭에서 풍기듯 큰 스님이 머문 곳이며 고려 때만해도 거조사로 불리었고, 우리고장의 건축물로는 보기 드문 국보로 지정된 영산전(국보 14호)을 보유한 곳이기에 한층 애정이 쏠리는 발걸음이다. 절 앞에 이르면 시골 초등학교의 운동장만한 주차장이 있는데 승용차 10여대가 주차하고 있었다. ‘영산루’ 란 현판이 걸린 누각 좌우에 2단으로 된 돌담장이 든든하게 둘러쳐져 있고 맨 위에 흙 담장이 기와를 이고 나그네를 맞는다. 영산루 밑으로 만든 돌계단을 올라서면 정면에 영산전과 그 앞에 삼층석탑 그리고 좌우에 부속건물이 나타난다. 탑은 높이가 3.15m, 고려시대 탑의 특징을 잘 갖고 있다. 마침 부처님 오신 날이 많이 지나지 않아 연등으로 곱게 단장한 채로 있어 영산전이 한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영산전은 정면 7칸 측면 3칸으로 그 비율이 3:1정도 되며 양팔로 그 길이를 측정해보니 대략 30m 와 10m 쯤 되는 것 같다. 원통형 기둥은 지름이 50cm 정도 되는 것 같고 이런 기둥이 처마 쪽에 선 것은 짧고 건물 가운데 선 것은 길다. 이런 기둥이 모두 28개가 된다. 주심포에 맞배지붕이며 측면에 비바람을 막기 위한 판자막이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주심포는 순전히 지붕을 떠받치는 역할만을 생각한 듯 전혀 기교를 부리지 않았고, 동향으로 앉은 정면과 양 측면에 살창이 있는데 측면 살창은 아래 위 두 군데 나 있으며 벌레들의 출입을 막기 위해 모기장을 쳐 두었다. 벽은 회와 황토를 섞어 발라서 누르스름한 자연색이 눈에 거슬리지 않았으며 실내외 어디에도 단청을 하지 않았으니 절집에 왔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이다. 단순하면서도 튼튼하게 그리고 환기를 적절히 고려하여 내부의 문화재를 오래 보존하겠다는 생각이 가득한 건축물이다. 영산전에 들어서면 중앙 연꽃좌대(높이 약 70cm)위에 왼손은 선정인, 오른손은 오른쪽 가슴가까이에 대고 손가락은 대체로 오므린 특이한 모습을 한 석가모니불이 있는데 이 수인은 법화경을 설하는 모습이라는 정광스님의 말씀이다. 옷은 잘 익은 감색에 고운 무늬가 있는 비단으로 통견을 하고, 눈은 거의 감은 모습에 살아있는 사람과 흡사한 호분을 입혀 생동감 있는 불상(높이 약 70cm)이 광배의 도움을 받아 그 빛을 더욱 발하고 있다. 좌우에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협시하고 있는데 좌대는 약간 낮으나 입상으로 모셨기에 중앙의 불상보다 약간 높고 양손을 다소곳이 앞으로 모은 자세에 호분의 색깔이 불상과 조화를 잘 이룬다. 불상 뒤의 탱화는 붉은 색 바탕에 석가여래와 4명의 보살, 4명의 불제자, 2명의 천왕만으로 영산회상을 단순하게 표현했다. 영산전의 명칭에 걸맞게 이곳에는 526나한상이 모셔져 있고 그 모습이 하나도 같은 것이 없이 표정이나 시선이나 차림이 제각각이다. 깨달은 사람답게 근엄한 표정도 없지는 않지만 익살스럽고 재기가 넘치는 모습을 보노라면 웃음이 절로 난다. 부처님의 10대 제자(① 사리불(舍利弗 Suriputra) ② 목건련(目建連 Maudgalyayna) ③ 가섭(迦葉 Kyapa) ④ 수보리(須菩提 Subhti) ⑤ 부루나(富樓那 Prna) ⑥ 가전연(迦延 Ktyyana)⑦ 아나율(阿那律 Aniruddha) ⑧ 우바리(優波離 Upli) ⑨ 라훌라(羅羅 Rhula) ⑩ 아난(阿難 ㅁnanda)와 빈두로파라타(賓頭盧頗羅墮,Pi olabharad ja)를 비롯한 16나한과 500나한이 한자리에 모셔져 있는 것이다. 나한상은 고려시대에 제작한 것으로 한분의 무게가 60~80kg이며 청석을 다듬어서 형태를 만들고 채색을 했다는 설과, 청석이 아니라 경주 남산돌인데 나한 스스로가 제 모습을 나타냈다고도 하니 제작과정에 신통력이 발휘되었음을 암시하는 대목에서는 선뜻 믿어지지 않는다. 청석은 시루떡처럼 층이 나는 돌이어서 얇게 쪼갤 수는 있지만 이런 모습으로 다듬을 수는 없을 것 같고, 아무래도 화강석이 재료가 된 것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어떤 나한은 어깨위로 다리를 뻗쳐 있고 얼굴은 안쪽으로 들어간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는가 하면 호랑이를 끌어안고 있는 모습도 있다. 지금 이 절에 주석하고 계신 세분 스님 중 한 분인 정광(正光)스님이 처음 만난 나그네에게 친절하게 설명하신 내용이다. 나한(羅漢)이라면 부처님의 제자를 일컫는다. 아라한에서 온 말로 아라한(阿羅漢)은 범어 아르한(arhan)의 음역으로 보통 줄여서 ‘나한’(羅漢)이라고 한다. 아라한을 응공(應供)이라고 하는데, 이는 공양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 존경 받을 만한 사람을 의미한다.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 성자’ ‘번뇌를 끊고 불생(不生)의 경지에 도달한 성자’ ‘진리에 상응하는 이’로 모두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렇든 깨달음을 얻은 성자인 만큼 그들에게 존경심을 나타내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마침 휴일이라 절을 찾은 신도중에는 일일이 한 분 한 분 나한상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기도 한다.
어떤 절에서나 불상이나 탱화 등을 촬영하지 못하게 하지만 더러는 몰래 찍어 활용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오늘은 당당하게 허락을 얻고 촬영을 하리라 생각하고 마침 법당 보살에게 취지를 이야기하고 플래시를 터뜨리지 않고 몇 장만 찍겠다고 사정했지만 통하지 않는다. 종무소에 부탁해 봐도 같은 대답이다. 그 대신 절에서 만든 달력에 나한상이 있다면서 한부 주었고, 인터넷에서도 ‘거조암 나한상’이라 입력하면 나한상을 쉽게 구할 수 있으니 그것을 이용함이 좋겠단다. 응하지 않을 수 없지 않은가. 우리나라에서 오래된 사찰 당우 중에 처음 지은 그대로 있는 것은 예산수덕사 대웅전, 영주부석사 무량수전, 안동봉정사 극락전, 그리고 영천거조암 영산전 뿐이라고 하니 이 건물이 국보가 되지 않을 레야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중간에 부분적인 중수는 거쳤겠지만 말이다. 영산전도 약 5년 전에 보수를 했다고 하는데 지표면에 맞닿은 벽의 흙이 약간 떨어지기도 했고 장마철도 아닌데 뒷담장이 무너져 내렸고 일부는 곧 무너질 위험에 노출되어 있기도 하다. 특히 거조암이 유명한 이유는 보조국사 지눌이 33살 때 정혜결사문(定慧結社文)을 공포하고 8년이나 머물면서 이 운동을 주도한 사찰이기 때문이다. 정혜결사란 선정(禪定:참선)과 지혜(智慧: 경전)를 근수(勤修)하는 결사(結社)이다. 다시 말하면 마음 닦는 일과 지혜를 깨우치는 일은 함께 해야 하며(정혜쌍수: 定慧雙修) 마음이 바로 부처이니 나와 남에게 이롭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눌 스님은 그 뒤 많은 신도들이 운집하자 협소함을 느껴 송광사로 옮겨 이 운동을 계속하였고 오늘날의 조계종이 있게 한 큰 스님이 된 것이다. 거조암이 위치한 곳은 골짜기의 끝자락이다. 앞뒤가 그리 높지는 않지만 산으로 둘러싸였고 절 입구에 작은 저수지가 있어 운치를 더해준다. 아늑한 숲속에 안긴 이런 곳에서 몸과 마음을 수행하는 삶이 참으로 값지다는 생각을 해 본다. 이 저수지에는 방생하기 좋도록 물위에 시설물을 설치해 두었다. 방생의 진정한 의미는 죽음에 처한 물고기를 살려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생명체를 존중하는 마음이 방생을 통해 더욱 돈독해지고 우리네 삶이 자비로워지기를 비는 마음이다. 오늘 하루 거조암에서 정광(正光)스님으로부터 유익한 말씀을 많이 들었다. “산은 산이 아니기에 산이요, 물은 물이 아니기에 물이다.” “마음수행에 더욱 정진하는 생활인”이 되어야겠다는 말씀을 새겨들으며 다시 찾을 날을 기약해 본다. 거조암이여, 영산전이여! 오늘의 이 모습 그대로만 간직해 다오. 정결하고 아늑한 분위기 속에서 여유롭고 익살 넘치는 나한의 모습을 두고두고 볼 수 있도록 말이다. 526나한상이 지금은 비록 문화재로 등록되어 있지 않지만 그럴 날이 올 것을 기대하면서 글을 맺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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