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안동 문화

안동 하회마을을 다녀와서(길어온 글)

이산저산구름 2007. 9. 15. 09:43

안동 하회마을을 다녀와서

- 2007년 세계문화유산 답사기 공모전 동상 수상작 -

 

 봄날의 햇볕이 조금씩 따가워지는 5월. 전통 주택이 현재까지도 잘 보존되고 있는 안동 하회마을로 답사를 떠났다. 평소 전통 건축물 중에도 한옥, 전통 민가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하회마을에 간다는 생각에 마음이 설레었다. 아침 일찍 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도착하니 12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답사를 하기에 앞서 마을 입구 음식점에서 안동의 별식인 ‘헛제사밥’으로 배를 채워 두었다. 헛제사밥은 제사상에 올리는 음식과 같이 구성되는데 실제 제사에 올려지지는 않기 때문에 이와 같은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양반이 많이 살고 제사를 많이 지내는 지역이다 보니 이런 특이한 형식의 밥상이 생겨난 것 같았다. 


 하회마을 입구 앞에서 안내 책자를 받고, 본격적인 하회마을 답사를 시작하였다. 하회마을은 다른 전통마을과 같이 ‘배산임수’ 지형에 위치해 있지 않고, ‘河回’ 라는 이름 그대로 물길에 감싸진 형태로 위치해 있다. 따라서 다른 전통 마을의 경우, 뒷산에 기댄 경사진 배치 때문에 경사를 따라 올라가면 순차적으로 주요 주택들을 답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하회마을의 경우는 이러한 지형적 규칙이나 안대 없이, 중앙 돌출부를 중심으로 자유롭게 배치되었기 때문에 효율적인 답사를 위해서는 일정한 답사 순서가 필요했다. 나는 먼저 마을 안길을 따라 주요 주택을 둘러본 후, 돌아올 때는 외각 강가의 길을 따라 마을 전경과 강가 풍경을 감상하기로 계획하였다.

 

 사실 안동 하회마을은 내가 10여 년 전 초등학교 때 방문했던 기억이 있다. 지금 기억이 나는 것은 어머니가 기념품으로 사 주셨던 하회탈 목걸이와 민박집에서 누워 잘 때 보이던 휘어진 대들보 뿐이다. 그 당시 이 곳이 어디고, 무엇을 봐야 하는지도 모른 채 엄마 손에 이끌려 따라왔지만, 그 때의 어렴풋이 남은 기억들이 내가 스스로 이 곳에 올 수 있도록 불러들인 장본인인지도 모르겠다. 하회마을뿐만 아니라 다른 문화유산 답사지를 돌아볼 때면 수학여행 온 초등학생과 중학생들을 만나게 된다. 사실 그 모습을 살펴보면, 문화재를 한눈으로 보는 둥 마는 둥 하고, 선생님의 설명은 귀담아 듣지 않은 채 친구들과 떠드는 학생들이 대부분이라, 그 모습에 난 안타까움을 느꼈다. 하지만 지금의 나를 비추어 생각해 보면, 그런 정신없는 답사도 꽤 멋있는 답사라는 생각이 든다. 그 학생들에게는 친구들과 보냈던 즐거운 추억이 문화유산과 함께 기억되고, 언젠가 그 추억이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으로 연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위와 같은 답사가 그 당시 학생에겐 가장 좋은 답사 방식일지도 모르겠다. 나중에 나도 누구의 아버지나, 누구의 선생님이 되었을 때 아이들이 비록 답사지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할 지라도, 여러 곳을 같이 다니며 좋은 기억을 많이 심어 주어야겠다.

 

 어렴풋이 옛 추억을 되살리다 보니 어느새 첫 목적지인 ‘북촌댁’ 에 도착하였다. 영남의 대표적인 양반가답게 문간채를 지나자 커다란 규모의 안채와 사랑채가 눈에 들어왔다. 북촌댁은 현재도 후손들이 살고 계시기 때문에 집안은 볼 수 없었지만, 건물의 외관과 문간채에 붙어 있는 행랑채는 관람할 수 있었다. 주택 내부 구조가 궁금하여 안으로 슬쩍 들어가고도 싶고, 시원한 그늘이 들여진 누마루에 잠시 눕고도 싶었지만, 오랫동안 가옥을 지키며 살아오신 후손 분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 조용히 외관만 감상하였다. 사실 한옥은 주거를 목적으로 지어진 건축이긴 하지만, 외관만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큰 편안함을 가져다준다. 한옥의 어떤 면이 이런 기분을 들게 하는지 단정하여 말하긴 어렵지만, 자연스레 경사진 지붕 물매, 추녀의 귀솟음, 나란히 서 있는 나무기둥과 툇마루에 드리워진 처마의 그림자, 자연석으로 옹기종기 쌓여진 기단…. 이런 여러 요소가 서로 연결되어 어느 건축보다 자연스럽고 편안한 느낌을 주는 것만 같았다.

 

 북촌댁 답사를 마치고 골목을 빠져나와 ‘삼신당 신목’으로 향했다. 삼신당 신목은 마을 중앙에 위치하며, 수령이 600년 가까이나 되는 웅대한 고목이었다. 삼신당 신목을 처음 맞닥뜨렸을 땐 과연 신목답게 성스러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나무의 크기 때문에 그런 신성한 느낌을 받은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신목을 찾아가는 좁고 긴 골목길이 이런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극적으로 연출시키는 것 같았다. 신목 주위에는 새끼줄이 둘러져 있어 사람들의 소원을 적은 종이를 묶어 놓을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나 역시 조그마한 종이에 소원을 적고 새끼줄 빈 곳에 꽁꽁 묶어 두었다.


 삼신당 신목 다음으로 향한 곳은 ‘양진당’과 ‘충효당’이었다. 양진당은 하회마을 풍산 유씨의 대종택이고, 충효당은 임진왜란 때 큰 업적을 남기신 서애 류성룡 선생님이 거처하시던 곳으로 하회마을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건물들이다. 양진당과 충효당은 마을 내에 서로 인접해 있으며, 평면 구성도 서로 비슷했다. 두 건물 모두 ㅁ자형 평면의 안채 공간을 가지고 있고, 이 ㅁ자 평면 한 모서리에 ㅡ자형의 사랑채가 이어 건립되었다. 이러한 평면은 자연스레 안채와 사랑채 두 공간을 구분 짓고 있었다. 이에 여성의 공간이라 할 수 있는 ‘안채’는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여 폐쇄적인 모습을 띄게 되고, 남성의 공간이라 할 수 있는 ‘사랑채’는 대문 앞에 정면으로 마주하여 개방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건립 당시의 사회 사상이 건축에 반영되었다는 것 자체가 매우 특이했다. 현재 이 두 건물도 후손들이 살고 있어 안채는 공개가 되지 않았고, ㅡ자로 나온 사랑채만이 공개되어 관람할 수 있었다. ‘남성’과 ‘여성’의 공간 구분이 현재는 ‘주인’과 ‘관람객’의 공간 구분으로 활용되고 있는 점이 무엇보다 흥미로웠다. 하지만 한편으로 주택의 가장 멋진 공간인 사랑채 영역을 관람객들에게 내주신 후손 분들에게 미안함과 고마운 마음이 같이 들었다. 문화재로 지정된 전통마을을 답사하다 보면 조상이 물려주신 한옥을 대대로 이어 사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느낀다. 위와 같은 관람객 문제와 설비 시설의 문제뿐 아니라, 주택을 수리할 때도 기본 형태에 맞추어 수리하다 보니 여러 어려움이 따르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불편함 속에서도 한옥을 지켜가며 생활하시는 후손 분들이 고맙고 존경스러웠다. 정부에서도 점차 이런 문제를 두고 여러 방안을 모색 중이라 하니 조만간 주민과 관람객 모두가 살기 좋고, 관광하기 좋은 전통한옥마을이 조성될 수 있으리라 기대해 본다.

 

 건물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 중심부를 벗어나 계획한 대로 마을 외각 강가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유유히 흘러가는 낙동강을 따라 만송정 솔숲을 걸으며 전통마을에서만 느낄 수 있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하였다. 만송정 솔숲은 유운룡 선생님의 젊은 시절, 주위에 산이 없는 하회마을의 풍수적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조성한 것이라 한다. 지리적 약점을 같은 자연요소인 숲을 이용하여 보완하려 한 점에서 과거 조상들의 조화로운 삶의 자세를 배울 수 있었다. 만송정 솔숲을 지나 입구로 돌아가는 길에 부용대가 훤히 보이는 모래밭에 편히 앉아 휴식을 취했다. 한낮에 뜨거웠던 햇빛도 시간이 지나 한풀 꺾여 따스한 온도로 나를 비춰 주었다. 부용대 절벽의 멋진 경관과 조용히 흘러가는 낙동강 물줄기, 바람, 손가락 사이로 전해지는 모래알의 따뜻함…. 이보다 기분이 편할 수 있을까?

 

 이번 하회마을 답사는 마치 어린 시절 시골에 내려와 할아버지 품에 안기는 기분이었다. 재미있는 옛날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고, 품속에 숨어 편히 쉴 수도 있었다. 다음에 다시 찾아올 때도 하회마을이 지금과 같이 아름답고 편안한 모습으로 나를 반기어 줬으면 좋겠다.

▶글 /사진 : 윤범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