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호 전문기자의 한국서 길찾는 이방인 ] (1)
천주교 前 안동교구장 두봉주교
경북 의성군 봉양면 도원리 586-1
봉양마을 주민들에게
두봉(78·본명 렌 뒤퐁) 주교는
‘웃기는 괴짜 할아버지’로 통한다.
언제나 넉넉한 웃음으로
누구에게나 문을 활짝 여는
맘씨 좋은 푸른 눈의 프랑스 선교사.
목사님이나 스님이나 거리낌없이
방 안에 들어가 허물없이 이야기를 꺼내도
껄껄 웃으며 들어주는 외국인.
30여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이 문화마을에
두봉 주교는 없어서는 안 될,
그야말로 ‘분위기 메이커’인 것이다.
2004년 11월 이 봉양마을에 왔으니 올해로 4년째.
한국인보다 더(?) 한국말을 잘하며
거침없이 ‘나는 한국사람’이라고 말하는
두봉 주교에게 한국은
‘하느님이 명령한 선교 임지’에 앞서
어쩔 수 없는 ‘인연의 땅’이다.
1954년 11월 한국 땅을 밟은 뒤
53년간 단 한번도 한국 땅을 떠나지 않은 채
서슴없이 ‘한국 땅에 묻히겠다.’는 두봉 주교.
그에게 과연 한국은 무엇일까.
▲ 1990년 정년을 15년 앞두고
한국인 사제에 자리를 양보한채
천주교 안동교구장에서 은퇴한 두봉 주교.
1954년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로 부임해
53년간 한 번도 이 땅을 떠나지 않은
한국 천주교의 이방인이다.
안동교구가 거처를 마련해준
경북 의성군 봉양문화마을
집 텃밭에서 푸성귀들을 직접 키우며
“너무 잘 사는 것 같아 미안하다.”고 말한다.
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하느님의 뜻대로 살다 보니 이곳까지 왔습니다.”
왜 이토록 한국을 고집하느냐는 물음에
‘능력있을 때까지 그곳에서 최선을 다해 살라.’는
파리외방전교회의 지침을 따른
선교사일 뿐이라는 답이 돌아온다.
어쩔 수 없는 선교사의 사명에
목을 맬 수밖에 없다는 원론적인 대답에
‘한국은 나의 처음이자 끝’이라는
절절한 심중이 읽힘은 왜일까.
프랑스 오를레앙,
그러니까 잔 다르크의 전설로 유명한
그 고장에서도 한참 벗어난
궁벽한 농촌 마을의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난 두봉은 저 멀찍한 한반도의 부름에
이끌려 왔던 것으로 보인다.
다섯 형제, 아니 사촌형제 두 명까지
모두 7형제가 한 집에서 살며
어렵게 어린시절을 보냈던 두봉은
형제 중에 유일하게 ‘성소’의 뜻을 밝혀
신학자, 목회자의 길을 밟았다.
한국이라는 동양 끝
저쪽 나라의 이름조차도 알지 못한 채
신학교에서 신학수업을 쌓았던
그가 털어놓는 한국과의 인연은
거의 필연으로 다가온다.
오를레앙 신학교 2년을 마치고
군에 입대해 병영생활을 하던 말미에
한국전쟁이 터졌다.
“당시 한국전쟁에 참전한 동료들이
거의 다 전사했다.”는 소식을 접하고도
“내가 한국에 가리라고는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다.”는 그였다.
당시만 해도
‘위험지역에 선교사를 보내지 않는다.’는
원칙 때문에 “한국은 신학생인 나와는 상관없는
그저 먼 나라일 뿐”이라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던 참에 6·25전쟁으로 성직자들이
거의 전멸하디시피 한 상황에서
한국 교회가 파리외방전교회에 지원을 요청해
5명의 신부가 배정됐던 것.
휴전 한 달 전인 1953년 6월 발령을 받아
교육을 받고 일본을 거쳐
인천 땅을 밟은 게 1954년 11월.
처음부터 “한국에 올 생각이 전혀 없었다.”던
그에게 “한국인으로 한국땅에 묻히겠다.”는
변함없는 소신을 준 것은 과연 믿음일까, 삶일까.
전쟁의 끝자락에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폐허만 눈에 띌 뿐”
어느 한 곳 번듯한 게 없었던 한국 땅.
용산 성심여자고등학교 터에 있던
파리외방전교회 거처에서 6개월을 보낸 뒤
대전교구 대흥동본당 보좌신부를 맡은 게
한국 사목의 시작이다.
‘두봉’(杜峰)이란 이름은
당시 대전교구장이었던 오기선 주교가 지어준 이름.
두봉 주교의 프랑스 이름자에 맞춰 지었다고 하는데
두봉 주교는 “중국의 두보와 같은 성씨”라며
은근히 이름 자를 치켜세운다.
“두견새가 큰 봉우리에서 우니
세상에 이름을 떨치지 않겠느냐.”며
너털웃음을 터뜨린다.
중등학교 시절
‘가톨릭노동청년회(JOC)’
활동을 했던 때문일까,
‘눈에 밟히는 가난한 이들’을
도저히 지나칠 수 없었다고 한다.
대전 선화동 다리 밑에 50명쯤 되는
어려운 집 아이들이
집을 나와 움집을 짓고 살았는데
대전 JOC 청년회원들이
1년 넘게 같이 어울리며 살아
아이들을 집으로 돌려보낸 일은
지금도 감동으로 남아 있다.
당시 대전 MBC 라디오를 통해 진행한
‘5분명상’ 프로그램은
대전 지역 가난한 이들의
마음의 안식처가 되기도 했다.
대구대교구에서 안동교구가 분리돼
초대 교구장을 맡을 무렵
“바늘방석에 앉는 것 같았다.”고
당시의 심정을 털어놓는다.
두달 뒤 주교서품을 받았는데
주교 서품 때 응당 정하는 문장(紋章)과
사목표어를 내세우지 않아
당시 화제가 되었다.
주교라면 12사도 후손의 반열에 오르는
천주교의 큰 명예인데
굳이 문장이며 사목표어를
마다한 까닭은 무엇일까.
“문장은 귀족이나 갖는 것이지
서민인 내가 무슨 문장을 가져.”
한사코 문장이며 사목표어를
내세우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왔다.
“외국인 사제는
한국인 뒷바라지만 하면 됐지
뭐 교구장 자리까지 차지하느냐.”며
안동교구장 자리를 고사했지만
교황청의 내리누름에 밀려
할 수 없이 눌러앉았다.
지난 1990년, 22년 만에
안동교구장 자리를 내놓을 때까지
“한국인 사제를 교구장으로 임명하라.”며
네 차례에 걸쳐
로마 교황청에 탄원을 낸 인물이다.
전통 문화의 고집이 센
‘유림의 땅’ 안동에서
22년간이나 큰 탈 없이 천주교 교구장을
지낼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안동지역 최초의 문화회관을 만든 것을 비롯,
함창에 상지 여중·고를 세운 일,
한국 최초의 전문대학인
가톨릭상지대학을 설립한 일….
“지금 생각해도 그 의롭고 큰 일”들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유교와 불교의 전통이 강한 한국에서도
안동은 전통이 살아있는 유별난 지역이었지요.
그런데 유림들은 양심에 따라
인간관계를 아주 중시하는 성격을 지녔더군요.
천주교 교회가 추구하는 것이나
나의 가치관이 잘 맞았지요.
내가 부딪칠 이유가 하나도 없었어요.”
그럼에도 1979년 ‘안동농민회사태’,
이른바 ‘오원춘 사건’은
잊지 못할 큰 사건으로 가슴에 남아 있다.
영양군이 알선한 불량감자씨를 심은
농민들이 감자농사를 망쳐
피해보상을 받았는데
보상운동에 앞장선 오원춘이
정부기관에 납치되어 폭행당한 사실을
안동교구와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들고 일어서 전국에 폭로한 것.
서슬퍼런 군사정권이
교구장 두봉 주교의 출국명령을 내렸지만
로마 교황청이 나서 추방명령이 철회됐다.
두봉 주교에게 ‘한국 농민사목의 대부’라는
별명을 붙여준 역사적 사건이다.
“이젠 한국인 사제가 교구장을 맡아야 한다.”는
탄원이 받아들여져 교구장에서 은퇴한 게 1990년.
정년을 15년 앞둔 채였다.
고양시 행주외동의 조립식 가건물인
행주공소에서 능곡성당 신부를 도와
성직자와 수도자 신도들의 피정 지도를
14년간 하다가 지난 2004년
안동교구의 주선으로
이곳 봉양마을로 이주해 살고 있다.
“고향격인 안동 지역에서 살게 해달라는
주문이 받아들여져 이곳에서 살게 됐는데
너무 잘 살아서 미안하다.”고 말한다.
“사는 집에 따라 마음가짐은 물론
삶을 대하는 자세마저 달라진다.”며
한사코 번듯한 집을 마다했던 그다.
“한국 천주교 성인 반열에 오른 103위 중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 10명은
나의 모범 선배”라는 두봉 주교.
그 10명은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이라고 강조한다.
사목표어는 만들지 않았지만
마음속 표어는 있지 않으냐는
짓궂은 물음에 마지못해 떠듬떠듬 말한다.
“기쁘고 고맙고 떳떳하게….”
“기도 많이하고 남과 함께 살다가
주님의 뜻이 뚜렷해지면 주님 뜻대로 하겠다.”
신부로 15년, 주교로 21년 한국에서
40여년을 선교한 끝에 일선에선 물러났지만
지금도 한 달에 절반은
피정에, 강의에 아주 바쁘다.
인터뷰를 마친 뒤
고추며 가지며 텃밭에서 손수 키운
푸성귀들을 주섬주섬 챙긴 주교가
거실 벽에 걸린 문구를 가리킨다.
두봉 주교 은퇴 후에
안동교구 사제들이 뜻을 모아 만든
사목표어란다.
‘우리는 이 터에서
열린 마음으로 소박하게 살고
생명을 소중히 여기며
서로 나누고 섬김으로써
기쁨이 넘치는 하느님 나라를 일군다.’
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두봉 주교는
▲1929년 프랑스 오를레앙 출생
▲1949년 오를레앙 대신학교 철학과 졸업
▲1951년 파리외방전교회 대신학교 신학과 졸업
▲1954년 로마 그레고리안 대신학교 대학원 신학과 졸업
▲1953년 사제 서품
▲1954∼1955년 파리외방전교회 한국지부
▲1955∼1965년 대전교구 대흥동 본당 보좌신부
▲1967∼1969년 파리외방전교회 한국지부장
▲1969년 초대 안동교구장 임명. 주교 서품
▲1982년 프랑스 나폴레옹훈장
▲1990년 안동교구장 사임, 은퇴
▲1991∼2003년 행주외동 행주공 소 피정 지도
▲2004년∼ 봉양문화마을 거주
천주교 前 안동교구장 두봉주교
경북 의성군 봉양면 도원리 586-1
봉양마을 주민들에게
두봉(78·본명 렌 뒤퐁) 주교는
‘웃기는 괴짜 할아버지’로 통한다.
언제나 넉넉한 웃음으로
누구에게나 문을 활짝 여는
맘씨 좋은 푸른 눈의 프랑스 선교사.
목사님이나 스님이나 거리낌없이
방 안에 들어가 허물없이 이야기를 꺼내도
껄껄 웃으며 들어주는 외국인.
30여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이 문화마을에
두봉 주교는 없어서는 안 될,
그야말로 ‘분위기 메이커’인 것이다.
2004년 11월 이 봉양마을에 왔으니 올해로 4년째.
한국인보다 더(?) 한국말을 잘하며
거침없이 ‘나는 한국사람’이라고 말하는
두봉 주교에게 한국은
‘하느님이 명령한 선교 임지’에 앞서
어쩔 수 없는 ‘인연의 땅’이다.
1954년 11월 한국 땅을 밟은 뒤
53년간 단 한번도 한국 땅을 떠나지 않은 채
서슴없이 ‘한국 땅에 묻히겠다.’는 두봉 주교.
그에게 과연 한국은 무엇일까.
▲ 1990년 정년을 15년 앞두고
한국인 사제에 자리를 양보한채
천주교 안동교구장에서 은퇴한 두봉 주교.
1954년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로 부임해
53년간 한 번도 이 땅을 떠나지 않은
한국 천주교의 이방인이다.
안동교구가 거처를 마련해준
경북 의성군 봉양문화마을
집 텃밭에서 푸성귀들을 직접 키우며
“너무 잘 사는 것 같아 미안하다.”고 말한다.
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하느님의 뜻대로 살다 보니 이곳까지 왔습니다.”
왜 이토록 한국을 고집하느냐는 물음에
‘능력있을 때까지 그곳에서 최선을 다해 살라.’는
파리외방전교회의 지침을 따른
선교사일 뿐이라는 답이 돌아온다.
어쩔 수 없는 선교사의 사명에
목을 맬 수밖에 없다는 원론적인 대답에
‘한국은 나의 처음이자 끝’이라는
절절한 심중이 읽힘은 왜일까.
프랑스 오를레앙,
그러니까 잔 다르크의 전설로 유명한
그 고장에서도 한참 벗어난
궁벽한 농촌 마을의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난 두봉은 저 멀찍한 한반도의 부름에
이끌려 왔던 것으로 보인다.
다섯 형제, 아니 사촌형제 두 명까지
모두 7형제가 한 집에서 살며
어렵게 어린시절을 보냈던 두봉은
형제 중에 유일하게 ‘성소’의 뜻을 밝혀
신학자, 목회자의 길을 밟았다.
한국이라는 동양 끝
저쪽 나라의 이름조차도 알지 못한 채
신학교에서 신학수업을 쌓았던
그가 털어놓는 한국과의 인연은
거의 필연으로 다가온다.
오를레앙 신학교 2년을 마치고
군에 입대해 병영생활을 하던 말미에
한국전쟁이 터졌다.
“당시 한국전쟁에 참전한 동료들이
거의 다 전사했다.”는 소식을 접하고도
“내가 한국에 가리라고는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다.”는 그였다.
당시만 해도
‘위험지역에 선교사를 보내지 않는다.’는
원칙 때문에 “한국은 신학생인 나와는 상관없는
그저 먼 나라일 뿐”이라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던 참에 6·25전쟁으로 성직자들이
거의 전멸하디시피 한 상황에서
한국 교회가 파리외방전교회에 지원을 요청해
5명의 신부가 배정됐던 것.
휴전 한 달 전인 1953년 6월 발령을 받아
교육을 받고 일본을 거쳐
인천 땅을 밟은 게 1954년 11월.
처음부터 “한국에 올 생각이 전혀 없었다.”던
그에게 “한국인으로 한국땅에 묻히겠다.”는
변함없는 소신을 준 것은 과연 믿음일까, 삶일까.
전쟁의 끝자락에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폐허만 눈에 띌 뿐”
어느 한 곳 번듯한 게 없었던 한국 땅.
용산 성심여자고등학교 터에 있던
파리외방전교회 거처에서 6개월을 보낸 뒤
대전교구 대흥동본당 보좌신부를 맡은 게
한국 사목의 시작이다.
‘두봉’(杜峰)이란 이름은
당시 대전교구장이었던 오기선 주교가 지어준 이름.
두봉 주교의 프랑스 이름자에 맞춰 지었다고 하는데
두봉 주교는 “중국의 두보와 같은 성씨”라며
은근히 이름 자를 치켜세운다.
“두견새가 큰 봉우리에서 우니
세상에 이름을 떨치지 않겠느냐.”며
너털웃음을 터뜨린다.
중등학교 시절
‘가톨릭노동청년회(JOC)’
활동을 했던 때문일까,
‘눈에 밟히는 가난한 이들’을
도저히 지나칠 수 없었다고 한다.
대전 선화동 다리 밑에 50명쯤 되는
어려운 집 아이들이
집을 나와 움집을 짓고 살았는데
대전 JOC 청년회원들이
1년 넘게 같이 어울리며 살아
아이들을 집으로 돌려보낸 일은
지금도 감동으로 남아 있다.
당시 대전 MBC 라디오를 통해 진행한
‘5분명상’ 프로그램은
대전 지역 가난한 이들의
마음의 안식처가 되기도 했다.
대구대교구에서 안동교구가 분리돼
초대 교구장을 맡을 무렵
“바늘방석에 앉는 것 같았다.”고
당시의 심정을 털어놓는다.
두달 뒤 주교서품을 받았는데
주교 서품 때 응당 정하는 문장(紋章)과
사목표어를 내세우지 않아
당시 화제가 되었다.
주교라면 12사도 후손의 반열에 오르는
천주교의 큰 명예인데
굳이 문장이며 사목표어를
마다한 까닭은 무엇일까.
“문장은 귀족이나 갖는 것이지
서민인 내가 무슨 문장을 가져.”
한사코 문장이며 사목표어를
내세우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왔다.
“외국인 사제는
한국인 뒷바라지만 하면 됐지
뭐 교구장 자리까지 차지하느냐.”며
안동교구장 자리를 고사했지만
교황청의 내리누름에 밀려
할 수 없이 눌러앉았다.
지난 1990년, 22년 만에
안동교구장 자리를 내놓을 때까지
“한국인 사제를 교구장으로 임명하라.”며
네 차례에 걸쳐
로마 교황청에 탄원을 낸 인물이다.
전통 문화의 고집이 센
‘유림의 땅’ 안동에서
22년간이나 큰 탈 없이 천주교 교구장을
지낼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안동지역 최초의 문화회관을 만든 것을 비롯,
함창에 상지 여중·고를 세운 일,
한국 최초의 전문대학인
가톨릭상지대학을 설립한 일….
“지금 생각해도 그 의롭고 큰 일”들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유교와 불교의 전통이 강한 한국에서도
안동은 전통이 살아있는 유별난 지역이었지요.
그런데 유림들은 양심에 따라
인간관계를 아주 중시하는 성격을 지녔더군요.
천주교 교회가 추구하는 것이나
나의 가치관이 잘 맞았지요.
내가 부딪칠 이유가 하나도 없었어요.”
그럼에도 1979년 ‘안동농민회사태’,
이른바 ‘오원춘 사건’은
잊지 못할 큰 사건으로 가슴에 남아 있다.
영양군이 알선한 불량감자씨를 심은
농민들이 감자농사를 망쳐
피해보상을 받았는데
보상운동에 앞장선 오원춘이
정부기관에 납치되어 폭행당한 사실을
안동교구와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들고 일어서 전국에 폭로한 것.
서슬퍼런 군사정권이
교구장 두봉 주교의 출국명령을 내렸지만
로마 교황청이 나서 추방명령이 철회됐다.
두봉 주교에게 ‘한국 농민사목의 대부’라는
별명을 붙여준 역사적 사건이다.
“이젠 한국인 사제가 교구장을 맡아야 한다.”는
탄원이 받아들여져 교구장에서 은퇴한 게 1990년.
정년을 15년 앞둔 채였다.
고양시 행주외동의 조립식 가건물인
행주공소에서 능곡성당 신부를 도와
성직자와 수도자 신도들의 피정 지도를
14년간 하다가 지난 2004년
안동교구의 주선으로
이곳 봉양마을로 이주해 살고 있다.
“고향격인 안동 지역에서 살게 해달라는
주문이 받아들여져 이곳에서 살게 됐는데
너무 잘 살아서 미안하다.”고 말한다.
“사는 집에 따라 마음가짐은 물론
삶을 대하는 자세마저 달라진다.”며
한사코 번듯한 집을 마다했던 그다.
“한국 천주교 성인 반열에 오른 103위 중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 10명은
나의 모범 선배”라는 두봉 주교.
그 10명은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이라고 강조한다.
사목표어는 만들지 않았지만
마음속 표어는 있지 않으냐는
짓궂은 물음에 마지못해 떠듬떠듬 말한다.
“기쁘고 고맙고 떳떳하게….”
“기도 많이하고 남과 함께 살다가
주님의 뜻이 뚜렷해지면 주님 뜻대로 하겠다.”
신부로 15년, 주교로 21년 한국에서
40여년을 선교한 끝에 일선에선 물러났지만
지금도 한 달에 절반은
피정에, 강의에 아주 바쁘다.
인터뷰를 마친 뒤
고추며 가지며 텃밭에서 손수 키운
푸성귀들을 주섬주섬 챙긴 주교가
거실 벽에 걸린 문구를 가리킨다.
두봉 주교 은퇴 후에
안동교구 사제들이 뜻을 모아 만든
사목표어란다.
‘우리는 이 터에서
열린 마음으로 소박하게 살고
생명을 소중히 여기며
서로 나누고 섬김으로써
기쁨이 넘치는 하느님 나라를 일군다.’
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두봉 주교는
▲1929년 프랑스 오를레앙 출생
▲1949년 오를레앙 대신학교 철학과 졸업
▲1951년 파리외방전교회 대신학교 신학과 졸업
▲1954년 로마 그레고리안 대신학교 대학원 신학과 졸업
▲1953년 사제 서품
▲1954∼1955년 파리외방전교회 한국지부
▲1955∼1965년 대전교구 대흥동 본당 보좌신부
▲1967∼1969년 파리외방전교회 한국지부장
▲1969년 초대 안동교구장 임명. 주교 서품
▲1982년 프랑스 나폴레옹훈장
▲1990년 안동교구장 사임, 은퇴
▲1991∼2003년 행주외동 행주공 소 피정 지도
▲2004년∼ 봉양문화마을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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