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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에 개봉한 “꾸뻬씨의 행복여행”이라는 영화가 있다. 어느 한 정신과 의사 “헥터”가 행복의 진정한 비밀을 찾아 여행을 떠나는 내용의 작품으로 동명의 소설을 영화화 한 것이다. 그는 정신과 의사로 일을 하며 무수한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에게 제안한 치료법은 모두 ‘병원 상담실’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이루어진다. 그렇게 판에 박힌 생활만 하던 그는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찾기 위해 훌쩍 길을 떠난다. 행복의 치료약을 건네야만 했던 전문직 종사자인 그 역시 사실은 행복의 실체를 단 한 번도 마주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실로 여행은 우리가 사는 좁은 공간에서 벌어지는 무수한 문제를 해결하고 확장시켜주는 확실한 치료약이자 도구가 될 수 있다.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소장 독립운동가의 유물 가운데에는 ‘여행의 기록’이 한 점 있어서 이를 소개하고자 한다.
<사진1> 김재봉(서대문형무소 수형카드)
안동의 풍산에는 많은 명문가들이 자리하고 있다. 그 가운데 조선시대 명망 있는 많은 학자‧선비를 배출하고 나라가 혼란했던 한말부터 일제강점기까지 독립운동가를 다수 배출한 풍산김씨 문중이 있다. 이번에 이야기 할 김재봉(金在鳳, 1891~1944) 선생 역시 그곳에서 태어난 인물이다. 김재봉은 본관은 풍산, 자는 주서(周瑞), 호는 근전(槿田)이고, 부친은 김문섭(金文燮, 1871~1938)이다. 아우는 김재룡(金在龍, 1903~1919), 김재하(金在河, 1906~?), 김재홍(金在鴻, 1908~1932), 김재란(金在鸞, 1913~1942)이 있다. 그의 집안은 심곡(深谷) 김경조(金慶祖, 1643~1705)를 파조로 한 풍산김씨 심곡파(深谷派)의 후예들로 단식으로 자정순국한 죽포(竹圃) 김순흠(金舜欽, 1840~1908),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만주 등지에서 활약한 동전(東田) 김응섭(金應燮, 1876~1957) 등 뛰어난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명문가이기도 하다.
그는 풍북면 오미동(五美洞, 현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의 오미마을의 학암(鶴巖)고택에서 출생했다. 이 마을은 앞서 언급한 인물들 외에도 의열투쟁을 전개하며 니주바시[二重橋]에서 일왕 폭살을 기도한 추강(秋岡) 김지섭(金祉燮, 1884~1928), 서로군정서에서 활약한 김만수(金萬秀, 1893~1924), 3.1운동 예안시위에 참여한 김구현(金九鉉, 1900~?), 군자금 활동을 했다고 전해지는 위암(葦庵) 김정섭(金鼎燮, 1862~1934)‧창헌(蒼軒) 김창섭(金昌燮, 1870~1938) 등 다양한 계열의 독립운동가가 난 곳이기도 하다.
김재봉은 공산주의 운동을 통해 조국 독립을 실현하고자 평생을 노력했다. 특히 그는 조선공산당 제1차 책임비서를 지낸 한국 공산주의 운동의 태두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인민대표회의(극동민족대회)에 조선노동대회 대표 자격으로 참석하였다. 또 1925년 4월에는 서울에서 조선공산당 창립대회 개최를 주도하고 초대 책임비서로 선임되어 활동하던 중 그 해 12월 일제에 붙잡혀 징역 6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의 공로를 인정받아 정부는 200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그렇게 독립운동에 열성을 다했던 그가 모진 세파를 겪으며 노년으로 접어들자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해서였을까? 그가 남긴 유품들 가운데는 오로지 여행의 목적으로 집 밖을 나선 여행기록 『동해안주공소첩(東海岸走笻小帖)』이 전해지고 있다.
<사진6> 동해안주공소첩
이 유물은 1937년 8월 10일(양 9.14)부터 9월 6일(양 10.9)까지 약 26일간 동해안을 거쳐 금강산(金剛山)을 여행한 뒤 그 정경을 읊은 11수(首)의 시를 모아 엮은 시첩(詩帖)이다. 절첩(折帖, 부채처럼 접힌 형태)의 형태로 만들어져 있고, 2~4면에는 외금강(外金剛)의 대화암(大花巖), 금강산의 신계사(神溪寺) · 구룡폭포(九龍瀑布) · 구룡연차점(九龍淵茶店) 등에서 기념으로 찍은 스탬프도 8종류가 찍혀 있다. 표제는 “東海岸走笻小帖”으로, 여기에서 ‘주공(走笻)’은 넓은 의미로 ‘유람(遊覽)’을 뜻한다.
<사진7> 속지에 찍힌 각종 기념 스탬프
책머리에는 이 여행에 대한 간략한 서문을 기록하고 있다.
“丁丑八月初十日 以輕鞋短笻發程 此行但徒步踏破八百餘里 槿田”
내용을 살펴보자. 그는 여행을 출발 할 때, “정축년(1937) 8월 10일에 가벼운 신발[輕鞋]과 짧은 지팡이[短笻]를 가지고 길을 나섰다. 이번 여행은 단지 도보로 800여 리(里)를 간 것이다.”라고 기록하였고, 끝에 “근전(槿田)”이라고 자신의 호를 썼다.
<사진8> 속지에 기록된 서문
그의 여정은 ‘대관령 정상(8.14)-강릉여관(8.15. 추석)-양양 낙산사(8.16)-청간정(8.17)-동해안과 외금강 온정리(9.3)-금강산 만물상(9.4)-신계사(9.5)-옥류동·구룡폭포·비로봉(9.6)’ 순서로 이루어졌다. 각각의 장소에서 7언 율시(律詩) 1수씩 총 11수의 한시를 지었고, 간혹 특이한 경물이 있는 경우 이에 대한 설명을 간단히 곁들였다. 그는 9월 14일에 본가로 돌아온 후 이렇게 지은 시고(詩稿)들을 다시 필사하여 이 첩으로 엮었다.
실제로 김재봉은 1931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옥한 이후 수많은 풍파를 겪었다. 모친상과 뒤 이은 아우 재홍(在鴻)의 상을 치렀고, 늘 일제 경찰의 감시를 받고 있으면서 건강조차 제대로 유지하기 힘들었다. 그는 자연과 벗 삼고자 소일거리로 양봉을 하는 등 모진 세파에 그럭저럭 삶을 유지하다가, 이 해에 여행을 떠나게 된 것이다. 도보로 그 긴 거리를 왕복한 사실은 지금의 우리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안동 풍산의 오미동에서 동해안을 따라 금강산까지 먼 거리를 그는 하염없이 걷고 또 걸었을 것이다. 당시 그에게 마음을 치유하고 고난을 달랠 “힐링 여행”은 무척이나 필요하고도 또 해야만 했던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순례자의 숭고한 정신이 느껴진다.
<사진9> 김재봉 어록비
현재 오미동 학암고택 앞에는 김재봉 선생의 어록비가 세워져 있다. 비석에는 “조선독립을 목적하고” 라는 어록이 새겨져있다. 이는 1922년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 개최 당시 참석자들이 작성하여 제출해야 할 조사표(調査表)의 9번 항목 “(대회를 참여하는) 목적과 희망”을 적은 란에 자필로 쓰인 것이다. 그가 한 평생 목숨 바쳐 이루려했던 목적은 이 한 마디의 말로 대표된다. 예부터 돌에 글자를 새기는 것은 오래토록 그 말이 잊히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오미동과 학암고택을 찾는 이들은 이 어록비를 통해 그의 정신을 깊이 새기고 그가 목적한 의도를 한 번 더 기억하는 것이 고난의 삶을 살았던 한 독립운동가를 기리는 올바른 방법이 아닐까 한다.
<사진10> 학암고택 처마에 걸린 노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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