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사에 있어서 안동은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다. 퇴계학의 전통을 이어온 보수유림의 터전으로 구한말 국권수호운동의 일환인 의병이 대대적으로 일어난 곳이기도 하고, 한 편 ‘혁신유림’으로 일컬어진 이들이 주도한 애국계몽운동도 어느 지역 못지않게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여기에서 ‘혁신’이라는 말은 잘못된 구습을 고쳐 새로워진다는 ‘혁구유신(革舊維新)’을 이른다. 유학자 집단 즉 유림(儒林) 출신으로서 기존 자신들이 몸담았던 보수유림 세계의 사고틀을 변혁·혁신하여 새로운 방향으로 이끈 이들을 혁신유림이라고 하며, 보수적 성향이 짙은 안동 지역에서 볼 수 있었던 특수한 현상이다. 대표적인 인물로 백하(白下) 김대락(金大洛, 1845~1914),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 1858~1932), 동산(東山) 류인식(柳寅植, 1865~1928), 일송(一松) 김동삼(金東三, 1878~1937) 등이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어린 시절 같은 학맥 아래 전통 유학을 수학하였고, 위정척사의 경향 아래 서원 복설 운동에 참여하기도 하고, 의병활동에도 적극 참가 또는 지원한 이력을 가졌다는 점이다. 이러한 이들이 변화하는 세계에 발맞추어 전통유학교육의 틀을 넘어 서구문화를 대상으로 한 계몽운동을 주도하였는데, 안동에도 여러 신식학교들이 설립·개교 되었지만 특히 1907년 무렵 내앞마을에 협동학교를 설립하기에 이른다. 협동학교는 “나라의 지향은 동국(東國)이고, 향토의 지향은 안동이며, 면의 지향은 임동”이므로 여기에서 ‘동(東)’자를 따고, 안동군 동쪽에 자리한 7개 면이 협력하여 세웠다 하여 ‘협(協)’자를 따서 학교의 명칭으로 삼았다고 한다. 처음 의성 김씨 문중의 서당인 가산서당(可山書堂)에 문을 열었다. < 사진1> 협동학교 교실로 쓴 가산서당(현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내) 이 학교는 3년제 중등과정으로 설치되어 1907년부터 폐교된 1919년까지 약 12년간 존속하며 안동 지역의 계몽운동을 이끌었다. 하지만 시작부터 폐교되기까지의 여정이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다. 이들이 감당해야 할 과제는 일제의 감독과 통제로부터 민족교육의 실제를 지켜내어야 했고, 혁신이라는 말에서 유추할 수 있듯 지역 내에서 뿌리 깊게 존재하던 보수유림의 반대를 무릅써야 했다. < 사진2> 동산 류인식의 저서 동산문고(출처: 안동대학교 도서관) 예를 들어 협동학교의 설립 주체 가운데 동산 류인식의 경우 스승인 척암(拓庵) 김도화(金道和), 생부인 서파(西坡) 류필영(柳必永)과 등을 돌리게 되는 격변을 겪었고, 지역 사회 안에서 그에 대한 비난과 좋지 못한 여론을 감당하고 무마해야 했다. 이러한 그의 고난은 그가 남긴 『동산문고(東山文稿)』에 여실히 드러난다. 「척암 선생님께 올리는 편지[上金拓庵先生]」와 같은 여러 편지글에서는 약육강식·우승열패로 대변되는 격변하는 시대에 대해 『주역』의 ‘수시변역(隨時變易)’의 논리를 들어 신식교육의 필요성을 극력 주장하고 있다. 또한 「우인난(友人難)」과 같은 사설(私說)에서도 자신의 행보를 비난하는 벗에게 고심과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그가 자신의 자화상을 보고 직접 지은 「화상자찬(畵像自贊)」이라는 시에는 그의 고난의 심경이 잘 드러난다.
협동학교는 처음 가산서당에 자리 잡은 이후, 보수유림의 일원이었다가 신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자신의 집을 희사하여 학교의 교실로 사용하게 했던 백하 김대락의 영향력으로 1909년에는 그 교세를 확장하는 계기가 되었고, 1911년에 이르러 1회 졸업생이 배출되었다. < 사진3> 백하 김대락 선생의 집 백하구려(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제공) 하지만 보수유림 사회에서 허용되기 힘들었던 여러 사항들 가운데 특히 ‘단발’이라는 문제는 더욱 심각한 갈등을 야기하였다.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에 소장된 동산 류인식 선생 집안으로부터 수증한 유물 가운데는, 협동학교의 설립과 교사로서 활약한 하중환(河中煥)의 간찰이 있다. 이 간찰은 봉투가 따로 존재하지 않고, 발급한 날짜는 있지만 연도가 없다. 따라서 이 편지의 수급자를 정확히 알 수도, 내용상 어떤 시대에 정확히 맞물리는지도 알 수 없지만, 편지의 내용을 통해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다. < 사진5> 1909년(추정) 11월 19일 하중환 간찰 일단 하중환의 편지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위의 내용에서 볼 수 있듯, 당시 신식학교의 설립에 대한 향촌 내 여론이 매우 좋지 않았고 특히 머리를 깎는 ‘단발’에 대한 문제로 매우 시끄러웠던 점을 알 수 있다. 본문에서 언급한 ‘하얼빈 사건’의 경우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 사건으로 추정하고, ‘국가독립기관’의 경우 석주 이상룡 선생이 지회장을 맡은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의미한다면 이 편지의 발급 연도를 1909년으로 추정 할 수 있다. 아무튼 하중환은 상대에게 ‘단발은 형식을 바꾸는 일에 불과’한 것이라고 언급하며, 당시 들끓던 향론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이러한 갈등은 실제로 이듬해에 유혈사건으로 불거졌다. 1910년 7월 18일 예천·영주 등지에서 활동하던 최성천(崔聖天) 의병부대가 협동학교를 습격하게 된 것이다. 이때 교감 김기수, 교사 안상덕, 서기 이종화 세 사람이 피살되고, 백하 선생의 아들 월송(月松) 김형식(金衡植)은 단발은 했지만 다시 상투를 틀었다는 이유로 화를 면하였다. 이 사건은 크게는 신식학교인 협동학교를 둘러싼 신구갈등, 즉 보혁(保革)갈등의 일환으로 볼 수 있고, 작게는 보수적 성향의 의병이 처단해야 할 대상의 기준을 단발의 여부로 삼았다는 점에서, ‘단발’이라고 하는 사안이 당시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지는가를 볼 수 있다. <사진6> 협동학교 습격에 관한 기사(황성신문 1910년 7월 22일자(1면 5단)) 결국 이 사건으로 인해 협동학교는 존폐의 위기를 맞았지만, 중앙의 신문에 연일 보도되면서 안동지역의 보수유림에 대한 격렬한 비난으로 번졌고, 전국 각지의 계몽운동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후 평양 숭실중학교 출신의 김하정 등이 신임교사로 자원하고, 보조금 및 토지를 기부 받는 등 다시 활기를 띠며 확장이 가능하게 되었다. 협동학교의 위기는 1910년 나라가 무너지자 다시 찾아왔다. 안동지역에서 계몽운동을 주도하던 인사들이 대거 만주망명을 하였는데, 그 중심에는 협동학교를 설립한 주역들이 다수였다. 이로 인해 협동학교는 1912년 다시 임동 수곡 한들에 있었던 정재종택(定齋宗宅)으로 옮겨가게 되었고, 류연갑(柳淵甲)이 교장을 맡아 1915년 4월에 제2회 졸업생을 배출하는 등 1918년까지 꾸준히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당시 정재종택으로 학교를 옮기면서 지역사회에 돌린 통지문이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 사진7> 협동학교 이전·개학식 통지문(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제공) 이 통지문의 내용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통지문은 세로쓰기 필사본을 모본으로 하여 등사한 낱장문서이다. 처음 학교의 위치를 대평리[한들]로 이전했음을 알렸고, 다음으로 1912년 10월 27일에 개학식을 시행하면서 새로 학생을 모집한다고 하였다. 개학식 날 상대를 초대한다고 하면서 식이 거행될 날짜보다 약 3일 전인 24일에 통지문을 발급하였다. 발급인은 당시 교장이었던 류연갑이다. 발급인 성명 아래에는 붉은색 사각형 인장이 찍혀있는데, 내용은 “사립협동학교교장장(私立協東學校校長章)”이다. 좌측 끝에는 수급자 “김제식(金濟植)” 성명이 세필로 필사되었다. 아마 이 문서를 발행 할 때는 이 부분이 비워져 있었을 것이다. <사진8> 안동댐 수몰로 인해 이전한 현재 정재종택의 모습 이 문서는 협동학교가 옮겨지게 된 실제 상황을 보여주는 자료이자 단서이다. 협동학교의 설립과 운영에 깊숙이 관계한 인사들의 국외 망명, 지역에 남아 신식교육과 민족운동을 지속해야 했던 이른바 ‘뒤를 책임져야 했던’ 협동학교의 고민. 이는 결국 국권이 상실된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보수의 가장 중심지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의 종택에 뿌리를 내리게 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아이러니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국난에 맞선 안동인의 단결력과 생명력을 보여주는 일부분이 아닌가 한다. 협동학교는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협동학교 학생과 출신자들이 임동면 독립만세를 주도하면서 막을 내리게 된다. 임동면 만세운동은 전국에서도 손꼽을 만큼 격렬한 시위 중 하나였다. 결국 이것이 빌미가 되어 휴교령이 내려졌고, 이후 이곳 학교 출신의 만세운동 관련 인물들이 붙잡히는 바람에 끝내 폐교 당하였다. 이는 계몽운동의 일환으로 설립된 근대 신식학교로서 약 12년간 존속하는 동안 갖은 수난을 당했지만, 끝까지 민족의 자립을 위한 교육 방략을 놓지 않았던 결과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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