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3강 1207(목) : 집과 인물/김서령 작가
미래촌 美來村
김서령의 家
작가소개
저자 |김서령
김서령1956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 경북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사람과 사물의 바탕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일이 늘 흥미로웠다.
대구 중앙중 국어교사 시절을 거쳐 <매일경제신문>과 잡지
<샘이 깊은 물>에 오랫동안 인터뷰 원고를 썼다.
그러면서 문화. 예술계의 숱한 성공한 사람들을 만났다.
자연히 낯선 집을 드나들 기회가 자주 생겼고 사람과 집의 관계를
유심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현재는 월간 <신동아>와 <월간중앙> <동아일보>에
인물칼럼과 시사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목차소개
박태후 / 화가 박태후 씨의 나주 - 죽설헌
이성원 / 농암 이현보 종가 17대손 이성원 씨의 안동 - 긍구당
송혜근 / 소설가 송혜근 씨의 혜화동 - 조린헌
데니& 젬마 / 데니와 젬마의 무욕의 집 - 마운틴
윤명호 / 화가 윤명로 선생의 - 평창동 집
김기철 / 도예가 김기철 선생의 곤지암 - 보원요
변상태 / 디자이너 변상태 교수의 파주 - 세이재
이상철 / '틈만 나면 노는 여자'이상철 씨의 장흥 - 토담집
이윤기 / 소설가 이윤기 선생의 과천 - 과인재
최범석 / 차범근, 차두리 부자의 매니저 최범석 씨의 홍제동 - 학소도
송일근 / 담양군 무월리 송일근 씨의 - 허허공방
김인회 / 50평 미만의 땅에 지은 김인호 교수의 - 관산재
최환상 / 방송작가 최환상 씨의 성남시 분당구 - 와선재
하영휘 / 역사학자 하영휘 선생의 가회동 - 옥선관
김상신 / 김상신 씨의 부암동 - 중심서원
유영우 / 사진작가 유영우 교수의 남양주 - 어은재
김영작 / 김영작 교수의 - 구기동 한옥
윤영주 / '나무와 벽돌' 사장 윤영주 씨의 - 서오릉 집
이연자 / 우리 차 연구가 이연자 씨의 우이동 - 문수원
안명제 / 건축가 안명제 씨의 성북동 집 - 안명재
조은 / 시인 조은의 장난감 같은 - 사직동 집
최하림 / 시인 최하림의 양평군 문호리 - 수류화개명서지실
김서령의 家] '노는 사람' 이상철씨의 장흥 토담집
쉬었다 가오, 흙과 사람의 따뜻한 품안
자그만 흙집이 숲 사이에 묻혀 있다. 울도 담도 없는 집이다.
지나가는 길손이 방문을 열어봐도 주인은 놀라지 않는다.
되레 지나는 사람에게 차 한잔 하고 가라고 불러 앉히기 일쑤다.
송추~장흥 간 39번 국도 어름, 서울을 크게 벗어나지 않은 곳에 이런 무방비 상태의 집이 있다니. 집은 완전히 흙과 나무로만 지어졌다.강원도에서 베어낸 소나무와 양평과 장흥에서 난 황토를 버무려 벽을 세웠고 지붕은 지리산 청학동에서 가져온 산죽으로 이었다. 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벽과 지붕을 만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외관이 네모 반듯하지 않고 동그스름하다. 제 주장이 전혀 없이, 인공 구조물 같지 않게 자연 속에 한덩어리로 어우러지는 풍경을 이룬다. 그야말로 토종 우리 집이다.이 집 주인은 스스로 '노는 사람'이라고 소개하는 이상철(아내)씨와 남의 황토집 지어주는 데 앞장서 달려가는 홍명도(남편)씨. 둘은 산에서 만나 도봉산장에서 결혼한 산악인 부부다. 남편 홍씨는 오래 전 울산바위에서 암벽등반을 하다 실족해 한쪽 다리를 잃었다. 좌절한 그를 구해준 건 역시 산이었다. 한쪽 다리에 의족을 하고 불편한 몸으로 계속 산에 올랐다. 산 속에서 희망을 다시 찾았다. 서울산악회 출신의 그가 부산산악회 출신의 처녀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됐으니 산이 중매쟁이 노릇까지 해준 셈이다. 늦은 나이에 만난 둘은 데이트를 언제나 산에서 했다. 산행을 마친 뒤면 산골마을에 있는 흙집을 찾아다녔다. 주인이 버리고 간 옛 흙집들이 군데군데 남아 있었다. 어느 산, 어느 골에 가면 그게 있는지도 손바닥 들여다보듯 환해졌다. 굳이 그렇게 흙집을 찾아다닌 데는 물론 이유가 있었다. 한 다리로 불편한 산행을 감당한 그의 몸이 흙집에서 하룻밤 자고나면 감쪽같이 회복된다는 것을 체험으로 알게 됐기 때문이다. 흙집에서 자고 난 아침은 전날 아무리 무리한 산행을 했어도 늘 개운하고 상쾌했다. 도시의 아파트에서 자고 일어나면 도저히 회복되지 않던 몸이었다. 부부는 절로 흙집 예찬론자가 돼갔다. 절집 짓는 데를 따라다니며 흙집 짓는 법을 본격적으로 배웠다. 한 삼년 따라다닌 끝에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 둘이 살 흙집을 지어보기로 했다. 아이도 없이 단 두 식구, 방 둘이면 족했다.산에 미친 그들에게 돈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러나 사람사는 세상에는 늘 길이 있게 마련. 둘의 사는 모습을 어여삐 여긴 어느 고마운 분이 자기의 노는 땅 일부를 떼어 줬다. 느티나무들이 숲을 이룬 산자락, 햇볕이 유난히 맑게 모여드는 마을, 흙이 좋아서인지 이름조차 토다리인 이곳에 그들은 흙으로 된 둥지를 틀었다. 글자 그대로의 둥지였다. 흙벽을 두텁게 발라 겨울엔 따뜻하고 여름은 시원했다. 실내에 들어서면 커다란 품 속에 안긴 듯 포근하고 안온했다. 거실에는 커다랗게 벽난로를 만들었다. 물론 황토를 두툼하게 이겨 발랐다. 여기에 소나무 장작을 때 실내를 덥히면 춥지 않음은 물론 웬만한 감기쯤은 거뜬히 자가치료가 가능했다. 집짓는 재료는 돈 주고 새로 산 게 거의 없었다. 수몰지역에서 뜯어낸 문짝을 가져와 현관문을 달았고 헐어내는 집에서 버리는 오래된 벽장문을 주워 창문으로 썼다. 부부가 직접 손으로 만든 'DIY 주택'이니 원하는 위치에다 주워온 문짝 크기만한 구멍을 뚫으면 되는 일이었다. 흙은 그 모든 것을 훌륭하게 받아 안아줬다. 낡은 것과 새것이 화평하게 어울렸다. 부엌 싱크대도 송판을 잘라 손수 짰다. 손잡이 역시 허무는 집에서 떼내온 문고리를 가져다 달았다. 로맨틱한 남편은 거기에 나무로 꽃을 두어개 만들어 붙일 줄도 알았다. 벽에 두터운 나무 조각을 박아넣으니 훌륭한 그릇장이 됐고 헝겊을 잘라 벽을 가리고 그 위에 몇 바늘 수를 놓으니 세상 하나뿐인 아름다운 옷장이 됐다. 둘은 부족한 게 하나도 없었다.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었다.그게 1997년의 일이었다. 그 이후 친구 많고 사람 좋아하는 이 집 내외에게는 손들이 줄줄이 찾아왔다. 아는 사람도 있었고 모르는 사람도 있었다. 괜히 지나가다 하룻밤 묵어 가는 싱거운 사람도 있었다. 때로 간장을 퍼가는 이도 있었지만 오죽 맛있었으면 가져가랴 싶어 내버려뒀다. 모든 것을 열어뒀다. 집을 완전 개방했다. 이 집 벽난로 앞에는 서로 알기도 하고 모르기도 하는 사람들이 새처럼 빙 둘러앉는 풍경이 자주 연출된다. 총 연출자는 안주인 이상철씨다. 고구마를 구워 하나씩 나눠주기도 하고 돌아가며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이 집은 어느새 '노는 집'이 됐고 이상철씨는 '인간 복덕방'이란 별명을 얻게 됐다. 노는 게 직업이라고 내놓고 말할 만하니 노는 방법도, 가지수도 전문가답다. 도자기를 빚으면서 놀고, 장구를 치면서 놀고, 야채효소를 담그면서 놀고, 장아찌를 만들면서 놀고, 약초를 말리면서 놀고, 차를 덖으면서 논다. 국화철에는 국화를 따면서 놀고, 산에 가면 산삼씨를 심으면서 놀고, 연꽃철에는 연잎에 담긴 이슬을 받으면서 논다. 혼자서도 잘 놀고 여럿이서도 잘 논다. 마음이 동하면 훌쩍 고흥의 외나로도쯤에 가 한 보름 머물면서도 논다. 급기야 몇 달 전엔 '틈만 나면 노는 여자'란 책도 한권 써냈다. 발문을 쓴 개그맨 전유성은 "잘 노는 것도 재주고 재산이고 능력이다.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도 이제는 고쳐져야 한다. 열심히 일한 개미는 겨울에 잘 먹고 잘 살고 베짱이는 알거지가 되었다고 쓸 일이 아니다. 개미는 개미대로 잘 살고 노래 좋아하는 베짱이는 가수나 백댄서가 되어 또 잘 살았다고 써야만 한다"고 익살을 떨어놨다. 이 집에 오는 사람들은 제 먹을 것은 알아서들 싸들고 온다. 그리고 며칠이고 묵고간다. 두 식구 살림에 김장을 으레 삼백포기 담글 만큼 밥 먹고 가는 사람 수가 많다. 그 많은 손을 안주인 이상철씨가 마다한 적은 한번도 없다. 서른 명이 먹을 국수쯤은 호흡 한번 가쁘지 않게 콧노래를 부르며 삶아낸다. 놀랍게도 그는 10년 전 결혼 직후 말기암 선고를 받은 중환자였다 한다. 지금은 자신이 환자라는 사실도 거의 잊고 산다. 사람들과 어울려 유쾌하게 노는 중에 다 잊어버렸다. 사람 사는 일의 깊이와 다채로움이 눈부셔 나는 그저 입을 다물 뿐이다.방이 둘에 거실과 부엌. 실내는 스무평 남짓 된다. 너르지 않지만 좁지도 않은 공간, 안주인이 만들거나 주워오거나 얻어온 그릇들이 다양하게 놓여 있다. 이 집 물건들은 들여다볼수록 재미있다. 격식과 경직을 완전히 벗은, 바라보면 웃음이 솟는 장치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우선 거실 기둥에 그려진 시계. 둥근 나무의 단면에 시침과 분침을 만들어 붙였다. 물론 가지 않는 시계다.그것은 때로 엄숙하게, 때론 장난스럽게 이 집 주인 내외에게 시간의 의미와 본질에 대해 질문한다. 그리고 천장에 대롱거리는 풀로 만든 메뚜기들, 하도 정교해서 만든 물건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창문에 달아놓은 밀짚으로 만든 그 옛날의 여치집, 대추알 크기만하게 빚어 짚으로 매달아 놓은 메줏덩이들, 벽에 멀쑥하게 기대서 있는 고무신 파리채. 낡은 고무신의 밑창에 길다란 막대기를 붙여 천장까지 닿는 편리하고 조형적인 파리채로 되살려냈다. 이 집에서 반찬을 담는 그릇은 일제시대에 만들어진 사기접시다. 안주인의 친정어머니가 젊어서 쓰던 물건으로 원래는 무덤덤한 사기그릇이었겠건만 세월의 힘이 씌워져 골동같은 품위가 입혀졌다. 거실 한복판에 와불처럼 누워 있는 큼직한 떡갈나무 테이블은 스무 명이 한꺼번에 차를 마실 수 있다. 그러다 찻잔을 치우면 금방 식탁으로 변신한다. 바깥벽에 새침하게 걸린 댕댕이 소쿠리는 토담집에 절묘하게 어울리는 우편함이다. 집배원은 비어 있을 적이 많은 이 집 우편물을 여기다 넣어둔다. 마당엔 너럭바위같이 평평한 돌덩이가 있다. 얼마 전엔 여기에 돼지 한 마리를 잡아다 굽지 않았겠느냐고 이상철씨는 통크게 웃는다. "우리는 가진 게 아무 것도 없어요. 재산도 없고 자식도 없고. 그러나 부족한 것도 없으니 우리가 진짜 부자지요? 더구나 산과 들과 나무와 들꽃이 여기 무진장으로 있잖아요." 나는 그날 토담집 냉장고에 붙어있던 글귀 하나를 베껴와 우리집 냉장고 문에 큼직한 자석으로 꽉 붙여뒀다. '없는 대로- 불편한 대로-'.흙집 짓는 비용은 평당 2백50만원쯤. 공사기간은 석달 정도. 이 집은 자재를 미리 마련해둬 한달 반만에 뚝딱 지었고 비용도 훨씬 적게 들었다.김서령 생활칼럼니스트 <psyche325@hanmail.net>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김서령의 家] 전남 담양 송일근씨 '허허공방'
"虛虛虛" 주인처럼 집이 웃는다
미국 뉴저지에 이민가 사는 독자 김혜경씨가 e-메일을 보냈다. 자기가 고국에 숨겨 두고 떠난 마음 속 비밀의 화원을 소개하겠다고, 거기 가면 인간문화재 같은 부부가 산다고. 농사를 지으며 흙으로 사람 형상을 빚는 이들인데 직접 지은 살림집이 예술이라고, 꼭 한번 가보라고, 가보면 진정한 가(家)를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나는 마음이 급해졌다. 무월리에 전화를 걸었다. 어눌한 목소리, 수줍은 듯한 말 사이의 휴지(休止). "괜히 그러지요, 볼만한 게 벨로 없는디-." 볼만한 게 아주 많을 것이 통화 중에 이미 느껴졌다. 광주를 지나 창평 인터체인지에서 호남고속도로를 버려두고 시골길을 6㎞쯤 달렸다. 전남 담양군 대덕면 무월리(撫月里). 달을 어루만지는 마을. 감나무에 감이 딱 한개 달렸다. 까치가 제 밥인 줄 용케 알고 와서 쪼아먹고 있다. 자잘한 돌을 주워 각자 제집 담을 쌓았고 그러다보니 절로 생겨난 고샅길, 야물고 호젓한 길이다. 그 길을 따라 걷자니 사립께에 입을 쩍 벌리고 웃는 형상을 세워놓은 집이 나왔다. 흙으로 만든 웃음, 그 자체로 이미 해탈 지경을 보여주는 웃음, 허허 소리가 크게 쏟아질 것 같은 웃음이다. 그 앞에 한참 서서 웃는 사람을 지켜본다. 여기가 '허허공방'이다. 이곳은 농부이고 토우(土偶) 작가인 송일근씨의 집이다. 남의 손 전혀 빌리지 않고 부부 둘이서 집을 지었다. 아니 아이 둘이 함께 따라다니며 도왔으니 넷이 지었다고 해야 옳다. 서둘지 않았다. 천천히 지었다. 다 짓는 데 4년이 걸렸다. "지금은 걸핏하면 평당 얼마라고, 땅가격을 계산하지만 원래 집값은 그런 게 아니었거든요. 집 한채에 얼마 하는 식이지요. 이 동네 집값이야 뭐 10년 전에 한채에 1백만원 정도나 했으니까요. 땅 한평에 5천원이라고 하면 비싸다고 뒤로 벌렁 넘어갔으니까요. 이웃간에 돈받고 팔기도 야박하니까 그냥 살라고 줘삐리고 그랬지요." 송일근씨도 남의 허물어진 집을 두어 채 얻었다. 기둥이 40도 정도 기울고 지붕이 내려앉아 사람이 들어가 살 형편이 못되는 집이었다. "흙집이 오래 가요. 그래도 허무하게 주저앉질 않데요." 휘어진 기둥을 그대로 둔 채 양 벽을 시멘트로 든든히 받쳤다. 지붕이 내려앉은 대신 바닥의 구들을 들어내 천장을 높이고 하중을 버티도록 기둥을 몇 개 보강했다. 오래된 서까래 사이에는 백회를 입혔다. 맞춤한 위치에다 창문을 뚫었다. 어렵지 않게 튼실하고 안온한 공간이 만들어졌다."집을 지어보니 알겠데요. 겉보기엔 허술하게 지어진 것 같아도 웃대 어른들이 지어놓은 집은 더 보탤 게 별반 없어요. 어른들이 쓰던 가구의 맛도 차츰 알아지고 곡선의 맛도 알게 되고… 세월에 다져진 안목이 참 깊구나 싶데요. 구들만 해도 그래요. 주먹구구로 놓은 게 아니더라고요. 그게 기압과 집이 놓인 방향과 땅의 모양까지 다 계산해 불길이 오래도록 머물도록 만들었다는 것을 온돌을 몇 개 뜯어보고 알게 됐어요." 그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미감에다 나중에 쌓아올린 공부 또한 만만찮아 보였다. 어눌한 말 속에 드러나는 단어 선택, 의사전달 방식에서 그런 내공이 은연중 묻어났다. 자기회의와 내적 단련을 거친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민감한 표정이 허술한 농부 차림의 그에게 얹혀 있었다. 그가 만든 토우도 토우지만 나는 한옥 문살 이미지의 직선을 주로 사용한 비구상 작업들, 벽에 붙인 테라코타와 릴리프들을 잊을 수 없었다. 인도의 카주라호에서 보이는 에로틱 형상들이 에밀레종의 비천상처럼 허허공방 곳곳에 새겨져 있었다. 부드러우면서 기운차고 강렬하면서 수줍은 형상들이었다.도자기를 처음 시작한 건 1986년. 젊은날의 방황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오면서부터였다. 처음엔 분청에 관심을 가졌다. 그러다 차츰 분을 발라 화장한 그릇들이 부끄러워졌다. 내가 농사 짓고 있는 내 논의 흙으로 그릇을 만들면 안될까 싶어졌다. 투박하고 두껍고 한쪽이 찌그러져내리긴 했지만 논흙도 그릇으로 구울 수 있다는 걸 발견해냈다. 지금 허허공방에서 쓰는 그릇들은 모두 특별한 도자기용 흙으로 빚은 게 아니다. 여름에 나락을 기른 제 논의 흙을 퍼다 만들어진 놈들이다. "나를 농부이게 해주는 논흙으로 만든 그릇에 내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아 쓸쓸한 가슴, 시린 가슴들을 녹여주고 싶다." 슬쩍 훔쳐본 그의 작품 노트에 쓰인 말이다. 흙을 만지다 보니 자연 토우에 관심이 생겼다. 어느해 대규모 농민시위에 나갔다가 그들의 절규를 듣게 됐다. 시위 현장에 나가는 대신 농민의 아우성을 흙으로 주무르기 시작했다. 어둡고 함성을 지르는 군상을 수도 없이 만들었다. 그러다 우리 농민의 모습은 원래 이런 분노의 얼굴이 아니지 싶어졌다. 차츰 밝고 동심 어린 얼굴을 만들게 됐다. 시간이 더 지나자 얼굴은 다시 바뀌었다. 입이 커졌다. 해학적인 모습, 다 내놓고 허허 웃는 모습, 욕심없이 허허로운 지경에 이르는 커다란 인간의 원형, 요즘 그가 만드는 토우들이다.그는 아예 불에 굽지 않는 형상도 만든다. 지푸라기를 잔뜩 섞은 흙으로, 입 벌리고 하늘 보고 웃는 농사꾼을 만들어 거실 바닥에 눕혀 놨다. "불에 굽지 않으면 쉽게 부서지고 물에도 허물어지겠지만 그게 바로 내가 원하는 겁니다. 언제든 다시 흙으로 돌아가 다른 생명을 키울 수가 있거든요." 실내가 아무래도 좁은 듯해 벽 한쪽을 터서 오각형 황토방을 하나 덧붙여냈다. 원래는 리스닝 룸(이런 외래종 명칭이 가당하다면)으로 쓸 계획이었다. 오각형이 음악을 듣기에 가장 완벽한 형태라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한밤중에 밖에 나가지 않아도 차를 마실 수 있도록 수도꼭지도 하나 뽑았다. 수도 아래는 절에서나 쓸법한 커다란 돌확을 갖다놓고 파이프와 수도꼭지는 둥근 대나무로 가렸다. 방 모퉁이에 천연스럽게 옹달샘을 들어앉힌 셈이다. 허허공방의 따님(6세) 송현지는 유치원에서 돌아오자마자 여기서 손을 씻었다. 지금 이 방은 원래 의도와 다르게 허허선생의 안방이 되었다. 천장에는 절묘하게 휘어진 서까래들이 장식용 조형물처럼 리드미컬하게 박혀 있다. 서까래.기둥.벽면.선반을 만들면서 허허선생의 미감은 유감없이 발휘됐다. 자세히 살피니 천장 어디엔가 한지로 오려붙인 반달도 하나 떠있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사치스러운 방. 50㎝ 황토벽에 15인치 탄노이 풀레인지 스피커로 볼륨을 최대한 올린 첼로 소리를 듣는 호사를 재벌인들 맘대로 누릴 수 있으랴. 그걸 허허선생은 돈 한푼 안들이고 모조리 제 손으로 만들어냈다. 원래 있던 헌 집은 한 공간으로 너르게 터서 거실과 부엌 겸 작품 전시실로 쓴다."전에는 집을 동네 사람들이 서로 품앗이해서 지었잖습니까. 나무 하다 맞춤한 서까래감이 나오면 추려놓고 기둥거리도 따로 모으고 돌도 좀 갖다놓고… 그러다 때가 이르면 다들 모여서 영차, 하고 지었지요…." 그의 허허공방도 그렇게 '시나브로' 지어졌다. 지금 허허공방은 살림집.작업실.전시실 해서 장작가마 빼고도 집이 세동이다. 올겨울에도 그는 집 한채를 더 짓는 중이다. 바쁜 농사일 끝났으니, 그동안 만들어둔 그릇과 토우들을 진열할 전시공간을 좀더 넓혀볼 요량이다. 나무 자르고 흙 이겨서 천천히 조각하듯 작업에 임한다. 말이 없고 잘 웃지도 않지만 그는 지금 몹시 행복해 보인다. "여기 무월리는 남편 탯자리예요. 부모님 집에 함께 살다가 우리 집을 지으면서 살림을 났지요." 부인 정다정씨다. 이름처럼 다정하고 소박하고 따뜻한 마음결이 금방 전해져왔다. 그는 김치를 먹음직스럽게 잘라 남편이 만든 투박한 흙그릇에 담으면서 말했다. "김혜경씨 소개로 오셨다니 그분께 대접하는 마음으로 지금 김치를 썰었어요." 우리를 위해 노루처럼 재빠르게 밭에 나가 배추를 뽑아왔다. 쌈 씻는 걸 돕겠다고 얼씬거렸더니 한사코 밀어내며 말했다. "이런 호사는 저혼자 하게 놔두세요." 둘이 혼인한 지는 올해 8년째. 초등학교 1학년 아들 현준이가 그린 크레용 그림을 부엌 앞에 붙여뒀다. "저게 금강산 가는 기차래요." 지금 우리에겐 자기가 태어나 자란 마을에서 제 아이를 낳아 키우는 사람들이 희귀종이 돼버렸다. 아이와 함께 가족이 살 집을 짓는 사람은 더욱 드물어졌다. 그 귀한 행운을 송씨 부부는 누리며 산다. 얼마 전엔 감을 깎아 창문 앞에 주렴인 듯 늘어뜨렸다. 이웃노인에게 부탁해 짠 동그란 짚자리를 페르시아 카펫인 양 거실바닥에 펼쳐놓았다. 도자기 굽는 게 직업이니 바깥벽에는 빛 좋은 분청사발 몇 개를 아낌없이 쿡 쿡 박아넣고 진흙으로 무늬 넣어 구운 테라코타도 경복궁 안 화담처럼 군데군데 붙여뒀다. 제손으로 집짓는 일은 이렇게 즐겁구나. 대추벌 가족도 집주인을 본떠 이집 처마밑에 배구공 같은 집을 지어 매달아놓았다. 그 벌집의 조형과 색감 또한 집주인의 솜씨에 버금가게 아름답다. 허허공방 네 식구는 헌집 뜯어낼 때 주워온 옛날 마루짝으로 커다란 식탁을 만들었다. 거기 논흙으로 만든 그릇에다 같은 흙에서 농사 지은 쌀과 채소와 과일을 담아 먹는다. 햇살 고운 날은 첫물 찻잎을 덖은 녹차를 우려 마시고 날이 추우면 직접 고안해 열효율 최고인 벽난로에 한아름 장작을 지핀다. 돈 주고 사온 건 아무 것도 없다. 과연 '예술'이고 '자연'이다.김서령 생활칼럼니스트 <psyche325@hanmail.net>
[김서령의 家] 김상신씨의 부암동 중심서원
서울은 산의 도시다. 어느 동네에 가 봐도 산이 마주 보이지 않는 마을이 별반 없다. 눈앞에 마주선 산이 은연중 우리를 어루만진다. 산이 없었다면 서울 사람들은 그간의 과밀과 과속을 견뎌낼 에너지를 제대로 충전할 수 있었을까. 부암동 중심서원 마루에 앉았을 때 나는 서울이 깊은 산록 속에 깃들인 도시라는 것을 새삼 실감했다. 산은, 그게 비록 지리산이 아니더라도 신비한 골짝과 샘물을 지닌다. 그리고 거기 사람을 품어 안게 마련인 모양이다. 청와대 바로 뒤 자하문 고개 위, 북악의 산록은 용케도 마을 하나를, 고요하고 해묵고 그래서 슬쩍 남루해진 스무남짓 되는 마을 하나를 숨기고 있다.행정구역은 종로구 부암동, 전래말로는 뒷골. 봄이면 앵두꽃과 복사꽃이 마을 전체를 뒤덮어 말 그대로 자하(紫霞)를 이루는 동네다. 이런 마을이 광화문에서 5분거리 안에, 사람 때를 타지 않은 1960년대식 농촌의 모습을 유지한 채 숨어 있다니. 새삼 산의 너른 품에 놀란다. 뒷골 사람들은 산비탈에 씨앗을 뿌려 곡식과 채소를 거두고 겨울이 되면 그것들을 갈무리해 살며 울도 담도 없어도 남의 물건에 손댈 줄을 모른다. 원래 인간의 성정은 빼앗고 뺏기고 다투고 시샘하게 타고난 건 아니었을 게다. 좁은 땅에 여러 사람이 복닥거리며 살다 보니 제 식구 입에 밥 한술 더 넣기 위한 근시안적 사랑에서 생겨난 습성일 뿐.이 서울 속 별천지인 산속 마을에 산사람도 속인도 아닌 별종 인간이 하나 산다. 머리를 파랗게 밀고 휴대전화를 걸면 목탁소리가 울려오는 김상신(50)씨. 동생과 제수씨와 어머니와 딸린 가족들은 뒷골의 집에 모여살고 자신은 고개 너머 산마루에 독각선실을 지어놓고 공부하고 기도하는 반승 반속의 삶을 꾸리는 중이다. 그는 한때 승려생활을 하다 환속해 출판사를 경영하고 연극연출을 하고 배우 노릇도 하고 시를 쓰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래도 자신은 산을 떠나선 살 수 없을 듯했다. 오래도록 그 궁리만 계속하다 결국 여기 중심서원을 지으면서 중간 형태의 방식을 발견해낸 셈이다. 그는 자신을 승려가 아니라 낭인으로 불러달라고 말한다. 집 이름도 일부러 사원이 아니라 서원이라 붙여뒀다고 말한다. 낭인이라기엔 주머니가 너무 무겁지 않으냐고, 집이 좋은 것을 핀잔해 봤더니 여러 사람을 위해 열어놓기 위한 집이라고 얼른 유연하게 도망쳐버린다.독각선실이 있는 집의 이름은 '중심서원'. 중심서원의 뜻을 물었을 때 그는 대답하기를 "원래 우주의 중심이란 어디에도 없는 거지요. 없다는 것은 내가 앉아 있는 바로 거기가 중심이 될 수 있다는 말이지요. 세계의 중심은 나로부터 뻗어나가는 것이니 그런 의미에서의 중심이지요. 그리고 서원이라고 붙인 것은 도산서원이 그랬듯이 사람들이 모여서 공부도 하고 놀기도 하고 자고 가기도 하라는 뜻이지요"라고 했다. "정말 아무나 묵어가게 열어뒀다는 말이냐?"고 캐물었더니 "요샛말로 코드가 맞는 사람에게 열린 거지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에게 열렸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코드가 맞건 말건 진정 원하는 사람이라면 거리낌없이 열어야지요. 여지껏 여기와서 공부하다 간 사람이야 많았지요. 불교 공부뿐 아니라 시 쓰는 이들, 명상하는 이들, 건축 공부하는 이들이 와서 산바람을 마시고 사진들을 찍고 마음을 다스리고 가곤 했지요"란다.뒷골이 소박하게 지은 집이라면 중심서원은 마음먹고 잘 지은 집이다. 그는 기도도 하고 손님도 맞고 살림도 할 수 있는 집을 지어보려고 건축가를 물색하던 중 서점에서 건축 잡지를 보다 이공건축의 류춘수씨를 알게 됐다. 전통건축과 현대건축 간의 조화를 모색하는 그의 고민이 자신의 당면 문제와 일치했고 도가적 기질이 상통한다는 것도 알아챘다. 여러번 만나 여러 시간을 이야기했다. 땅은 예전에 미리 사 놓았다. 산속에 숨어있는 풍치지역이라 값은 아주 쌌다. 가까운 친지가 뒷골에 예전부터 살고 있어 건축 허가도 수월했다. 인왕산과 북한산이 집안 어디에 앉아도 눈앞에 장엄하게 펼쳐지는 집터였다. 건축가는 집이 놓일 위치에 반해 설계비를 자청해 반으로 깎아줬다. 대신 건축주가 자신의 설계에 대해 아무런 추가 요구를 하지 말아달라는 조건을 붙였다. 덕분에 이집 지붕은 용마루 대신에 빛이 쏟아져 내리는 천창을 낼 수 있었다. 분명 대들보와 서까래가 있는 목조 기와 지붕인데 가운데가 뻥 뚫려 그리로 하늘이 가득 들이차는 퓨전 스타일의 지붕을 만들었다. 고개를 젖히면 언제라도 날씨와 하늘빛을 확인할 수 있다. 밤이면 서까래 사이로 북악의 별들이 반짝이고 보름이면 달빛이 밤새껏 마루를 밝히는 멋진 명상공간이 만들어졌다. 독각선실 마루의 높이는 세 단으로 구분했다. 점층적 구조가 하늘을 우러르는 종교적 분위기를 만들어주고 편하게 걸터앉을 수도 있도록 배려했다. 이것 말고도 침실에서 자고 일어나 복도를 걸어 거실로 나서는 아침의 첫 순간, 북한산의 보랏빛 바위가 눈앞에 다가오는 경이를 이 집 주인은 중심서원 설계의 절정으로 치고 있다. 지하층은 서재, 일층은 침실과 거실과 부엌, 이층은 천장이 뚫린 명상공간을 가지고 지붕을 조선기와로 이은 중심서원. 유리와 나무로만 지어져 공간이 서로 투명하게 들여다보이면서 독특한 두께와 켜를 이루는 집이다. 마주한 산봉우리가 유리에 되비쳐 드는 구조가 의외의 깊이와 고요를 자아낸다. 그러면서 북악의 골짜기에 겸허하게 웅크리고 있어 일부러 찾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는다. 이 집의 다른 특징 하나는 툇마루가 많다는 점이다. 사람이 드나들 수 있는 문 앞에는 빠짐없이 툇마루를 놓았다. 신을 벗고 일단 마루를 밟은 뒤에야 실내에 들어갈 수 있고 바깥으로 나올 때도 마찬가지니 행동이 느려질 수밖에 없다. 그 느림을 일부러 유도한 장치가 툇마루다. 툇마루에 앉아 잠시 산을 바라볼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으니 그 산은 실제 거기에 솟은 북한산과 인왕산의 봉우리이기도 하고, 유리에 비친 허상이기도 하고, 그게 반복적으로 투영하는 산의 이미지이기도 하다. 오래 이 집에 살면 명상적 기질이 생길 수밖에 없겠다.또 하나 눈여겨 볼 것은 산자락을 허물어 집을 앉히면서 주변에 있는 나무를 최대한 살려내도록 세심하게 신경을 썼다는 점이다. 나무가 있으면 그 부분의 마루장을 망설임없이 잘라냈다. 마루를 잘라내고 제 자리를 잡은 은행나무.참나무.가죽나무는 집과 온화하게 공존한다. 나무는 조신하게 가지를 늘어뜨릴 뿐 세월이 지나도 웃자라 집을 짓누를 만큼 무성해지지는 않는다. 나무가 그렇게 자신을 제어할 줄 아는 염치를 가졌다는 것도 여기 와서 처음 듣는 깨달음이다. 집의 중심을 관통하는 나선형 계단, 거기서는 늙은 가죽나무가 내다보인다. 가죽나무 줄기를 타고 토종 능소화가 무성하게 줄기를 뻗어갈 때, 집을 뚫고 들어온 은행나무가 제 잎을 노랗게 물들여갈 때, 그럴 때가 중심서원이 가장 아름다운 계절이다. 김상신씨는 자신의 시집 서문에 '능소화 위를 비상하는 까마귀들에게 바친다'라는 헌사를 써뒀다.아무리 어린 나무라도 함부로 베어내지 않는 것은 뒷골의 살림집에서도 마찬가지다. 네모 반듯하지 않게, 둥그런 곡선으로 널찍하게 마루를 짜넣은 앞 베란다에도 군데군데 나무를 위한 구멍들이 뚫려 있다. 거기에 감나무가 있고 라일락이 있고 매실이 있다. 베란다에 앉아 라일락에 코를 가져다 댈 수 있고 손을 뻗어 감과 매실을 따 담을 수 있을 만큼 자연친화적인 풍경이다. 마당 있는 집을 지을 때 잊지 말고 일부러라도 응용해 볼 만한 공식인데, 나무에는 얼마간 가혹한 일이 될지 모르나 그걸 누리는 인간에게는 자연을 눈앞까지 바짝 끌어 당기는 묘미를 줄 것 같다.열말들이 배불뚝이 장독이 놓이고 '앞산이 진종일 수굿하게 집안을 들여다보고' 밭에서 손수 기른 무.배추로 엮은 시래기 다발들이 줄줄이 걸린 뒷골 베란다의 풍경이 내게는 수직 실크 커튼을 드리운 호화주택의 거실보다 한결 편안하고 풍성하게 여겨진다. 내 눈이 미처 도시적 세련을 모르는 탓인가.최근 어떤 인문학자에게서 "우리 도시 행정의 가장 심한 졸속은 산을 가리며 집을 짓게 허가해준 것"이라는 지적을 들었다. 물을 지키는 일 못지 않게 산을 지키는 일이 시급하며, 산수가 거기 깃들여 사는 사람들의 세계관에 깊이 관여한다는 말도 들었다. 눈앞에 산을 두고 사는 사람은 세상의 원경을 볼 줄 안다는 것이다. 귀가 솔깃해지는 통찰이었다.김상신씨 어머니 방에 들어갔다가 나는 참 읽을거리 풍성한 액자 하나를 발견해냈다. 8남매의 결혼 사진이 순서대로 한틀에 넣어진 사진이었다. 시인이고 소설가이고 '낭인'이고 목수인 자식들과 그 배필들이 일생의 맹세를 나눈 직후 긴장한 채 서 있다. 어머니는 거기에 대고 앉으나 서나 건강과 발복을 기원하며 손바닥을 비비신다. 그러다 눈을 들어 산을 본다. 거기에 펼쳐진 북악과 인왕과 북한산의 연봉을 내다보면 어머니는 괜히 편안해져 웃음을 지으신다고 한다. 중심서원은 서울의 중심, 산의 중심에 들어앉은 집이다. 그러면서 내가 중심이 되어 느긋하게 세상의 원경을 내다보는 집이다.
보다 읽기 쉽게 <월간중앙>10월호에 실린 글을 Joins에서 다시 옮겨 싣습니다.
Book Master @ Peace of Mind 김 종헌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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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령이 만난 사람의 향기] 마음의 평화는 빵 굽는 냄새를 타고…
‘애서가’ 남편과 ‘명품’ 빵 만드는 아내 김종헌·이형숙 부부“자유와 파격은 아름답다… 고서에 파묻힌 삶 행복해!”
빵 집 이름치고는 꽤 현학적인 ‘피스 오브 마인드(peace of mind)’. 김종헌(59)·이형숙(54) 부부가 당시로서는 파격적으로 혼인 전에 여행을 가 첫날밤을 보낸 영주 부석사 아래 ‘평화여관’繭遮?곳을 기념하기 위해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첫날밤을 보낸 여관 이름을 기억하는 부부가 몇이나 될까? 그것을 기억하는 부부와 잊어버린 부부는 삶의 질이 어떻게 다를까?나는 갑자기 실없는 흥미가 확 동했다. 그리고 그 여관 이름을 30년 후 인생의 완숙기에 이르러 자기들이 평소 꿈꾸던 공간을 만든 후 간판으로 척 내건 부부를 꼭 만나고 싶어졌다. 남편이 억대 연봉의 대기업 CEO를 포기하고 시골로 갔다거니, 아내가 제빵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위해 대학을 다섯 군데나 다녔다느니 하는 따위보다 내게는 그 이름 쪽이 더욱 흥미진진한 포인트였다. 남편이 아내에게 붓글씨로 써 보낸 청혼장이 액자에 담겨 벽에 높이 걸렸는데, 추사 글씨만 글씨가 아니지 않으냐고 혀를 휘휘 내두르는 소리도 들렸고, 해외근무 중인 아빠가 아이들에게 보낸 그림편지는 그 자체가 이미 예술이더라는 찬탄도 들려왔다. 소문의 내용이 그만큼 찬란했으니 ‘피스 오브 마인드’라는 산골 카페에 대한 내 기대 또한 알록달록했다. 자신들의 역사를 마디마디 그토록 소중하게 변환하고 재창조할 줄 아는 그들은 도대체 누굴까?올해 쉰아홉이라는 말을 듣고 갔는데, 마중 나온 남편 김종헌은 청년 같았다. 청바지에 면남방 때문이 아니라, 높은 톤의 경쾌한 음성 때문이 아니라, 열정이 뭉쳐 전해지는 기운 때문에 그랬다. 그는 두 시간 동안 잠시도 쉬지 않고 움직이면서 이야기했다. 보여주고 싶은 것이 너무 많고 이야기할 것이 너무 많아 그는 줄곧 지그재그로 카페 안을 누볐다. 나도 덩달아 흥분해서 그를 따라다녔다. 과연 볼거리가 무궁무진했다. 유럽 고성의 북카페에 매료돼그가 카페 안에 늘어놓은 컬렉션은 거의 2만 점에 가깝다. 희귀한 고서적 1만 점에 음반 3,000점, 고서화 수백 점에 타자기와 옛 라디오들과 고가구와 소반들, 그리고 로마·이집트·터키·남미·동남아시아를 돌면서 모은 민속품과 미술품이 나름대로 분류되고 정리돼 넓은 카페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규모는 작았지만 컬렉션의 수준은 충실한 박물관임이 분명한데 그 박물관 한쪽에서는 ‘피스 오브 마인드’ 특유의 빵이 달콤한 냄새를 풍겨 가면서 익고 있다. 바깥주인은 열정에 차서 물건에 얽힌 이야기를 추억하고, 미소 띤 안주인은 차와 떡을 조용하게 내온다. 뭔지 향긋하다. 사람에게서도, 음식에서도 허브향 같은 것이 난다. 과연 마음의 평화로구나! 명불허전이라고, 괜히 소문나는 것은 아닌 게 확실하다. 이 부부가 만년에 전원 카페를 만들기로 꿈꾼 것은 꽤 오래전 일이다. 여성 속옷 만드는 회사인 비비안에 근무했던 김종헌 씨는 1980년대 초 유럽지사장으로 일했다. 유럽 전역을 돌면서 수출입 업무를 하다 보면 중세에 세워진 성채나 방앗간을 개조해 만든 호텔이나 레스토랑에서 손님을 접대하는 경우가 자주 생겼다. 그때 그의 눈을 사로잡은 것이 옛 성주의 서재를 리모델링해 만든 카페였다. 책과 차가 동시에 있는 공간에 그는 금방 매료됐다. 진작부터 책을 좋아했고, 책이라면 닥치는 대로 사 모으던 중이었다. “풍광이 좋은 낡은 성에서, 고서로 둘러싸인 오래된 식탁에 앉아 옛 책을 꺼내 읽으며 식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분위기 탓인지 책 읽는 재미도, 차의 풍미도 깊어졌어요. 나중에 나도 이런 공간을 만들어 봤으면 하는 생각이 조금씩 익어 갈 수밖에 없었어요.” 그들이 살림을 하던 도시는 독일의 뒤셀도르프였는데 김종헌 씨는 아내에게 독일에 살면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뭐든 배워 두라고 강력하게 권한다. 아내 이형숙 씨는 이화여대 불어교육과에 다니다 4학년 때 결혼하는 바람에 아쉽게도 중도에 학업을 그만둔다. 김종헌 씨가 갑자기 일본 근무를 하게 되는 바람에 결혼을 서둘러야 했던 것. 당시 이화여대의 교칙은 결혼한 학생은 자동 퇴학하는 것이었고, 공부냐 결혼이냐를 두고 깊이 고민할 새도 없이 그만 김종헌 씨의 열정에 빨려들었다.
“처음에는 독일식 소시지를 배우라고 권했어요. 그런데 소시지는 돼지를 잡는 법부터 익혀야겠더라고요. 여자가 할 일로는 좀 험하다 싶었는데 마침 우리 이웃에 ‘헤라클레스’라는 독일에서 제일 가는 유명한 빵집이 있었어요. 거기서 제빵 기술을 배우겠다고 해요. 저 사람이 끈질긴 데가 있어서 꼬박 3년을 하루도 빠짐없이 도제식 수업을 받더군요.”그렇게 빵에 재미를 붙인 이형숙 쓴?제과·제빵과 전통요리를 공부하느라 대학을 다섯 군데나 더 다녔다. 이형숙 씨 또한 남편에게 전염돼서인지, 일에 바빠 혼자 아이들을 키우며 낯선 나라에서 단련돼서인지 대단하고 특별한 학구열을 보인다. 여리게 생긴 모습 속에 어디서 그런 에너지가 샘솟는지 신기할 지경이다. 김종헌 씨는 자신의 컬렉션을 설명할 때도 목소리에 신명이 나지만, 그보다 더욱 눈을 빛내는 것은 아내 자랑을 할 때였다. “헤라클레스에서 3년 배운 뒤 귀국해서 한국제과학교라는 곳에 다녔어요. 그곳을 졸업하고는 미국으로 유학가겠다고 하더군요. 미 농무부와 소맥협회가 세운 AIB(American Institute of bakery)라는 학교에서 풀 스칼라십을 받아내더군요. 거기서 2년을 공부하고 오더니 이번에는 아들하고 같이 정식으로 수능시험을 준비하는 겁니다. 아들과 같은 학번으로 배화여전 전통조리과에 입학했어요. 그곳을 마치고는 다시 산업대 식품공학과에 편입해 다녔지요. 제과·제빵 공부하러 5개 대학 다녀 그런 다음 고려대 생명과학대에서 석사를 마치고 지금은 무엇을 하는 줄 아세요? 동국대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어요. 아마 쉰아홉이 되기 전에 분명히 박사가 될 거예요. 지금도 대학의 전통조리학과에서 강의를 하고, 지금 저기 주방에서 일하는 청년들은 모두 우리 집사람에게 배운 제자들이에요. 내가 1947년 생이고 집사람이 1952년 생이에요. 어때요? 늙지 않았지요? 인생 후반부를 얼마든지 새롭게 의욕적으로 시작할 수 있다고요. 시골로 내려오면서 얼마나 건강해졌는지 몰라요. 몸무게가 10kg 이상 빠졌어요.”그러면서 달려가 예전 살집이 좋을 당시의 사진을 얼른 가져와 보여준다. “전에는 내가 이랬다고요. 만날 접대하느라 술 먹죠, 기름진 식사 하죠, 운동할 짬 내기도 어렵죠. 살이 찔 수밖에 더 있었겠어요?”그는 어느 날 과감하게 28년 일한 섬유회사 남영나일론에 사표를 낸다. 사직 당시 그의 직함은 사장이었다. 연봉은 1억 원이 넘었다. 사직서의 이유 란에 그는 이렇게 썼다. “베이커리- 북카페를 열기 위해서!” 흔한 ‘일신상의 이유’가 아니었다. 북카페를 열고 싶다는 독일에서의 막연한 꿈이 구체적 모습을 갖춘 것은 뉴욕에서였다. 소호에서 그가 발견한 한 북카페(아우징 워크스 유즈드 북카페)는 그를 단박에 사로잡았다.
▶억대 연봉을 받던 대기업 CEO에서 북카페의 주인으로 새 인생을 살고 있 김종헌 씨.
“고풍스러운 건물 1층에는 3면 가득 2층으로 짜인 책장이 있어요. 안쪽의 한 면에는 스탠드바가 있고, 거기서는 스낵과 음료를 팔아요. 그 카페의 책은 대개 기증받은 것들이고 카운터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무보수 자원봉사자들이에요. 가끔 손님들이 무대에 나서서 연주를 들려주기도 하고, 은은한 조명 아래 책과 음반을 찾는 사람들은 읽기도 하고 사 가기도 하지요.” 사표가 수리된 후에도 뉴욕에 몇 달 더 머물렀다. 맨해튼의 책방을 다 뒤졌다. <책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한 뉴욕의 50군데 베스트 책방>이라는 책을 구해 그 책에 나온 책방을 남김없이 찾아다녔다.“두 달 동안 뉴욕의 책방을 섭렵하면서 느낀 희열과 아이디어는 지난 30년간 느꼈던 모든 희열과 아이디어를 합친 것보다 더 컸다고요.”드디어 젊은 날 유럽의 고성에서 책을 읽으며 꿈꾸던 조건이 얼추 갖춰졌다. 수만 권의 진귀한 책이 모였고, 아내는 제빵의 달인이 돼 있었다. 수중에는 퇴직금과 살던 아파트를 처분한 돈이 두둑했다. <피스 오브 마인드 베이커리 &북카페>를 상표등록했다. ‘이형숙 허브빵+떡연구소’라는 간판도 디자인했다. 남은 문제는 장소였다. 부부는 북한산과 청계산과 관악산과 강화도 등지를 물색하고 다녔다. 물론 열심히 인터넷도 뒤졌다. 강원도 홍천의 공작산 아래 동네를 낙점했다. 드디어 그들은 트럭 14대의 이삿짐을 싣고 서울을 떠나 홍천에 정착한다. 딱 3년 전이었다. 그리고 이번에 다시 25대의 이삿짐을 싣고 홍천을 떠나 춘천으로 이사했다. 3년간 이삿짐이 딱 두 배로 늘어났다. “그동안 현금이 늘어난 것은 없는데 짐은 늘어났더라고요. 사람들을 많이 사귄 것(이 집 빵을 대놓고 먹는 카페 회원이 2,500명이나 생겼다), ‘피스 오브 마인드’라는 브랜드 이름을 키운 것, 체력이 좋아진 것, 세 권 분량의 책을 쓴 것, 부부 금실이 더욱 좋아진 것이 지난 3년간의 수확이에요. 짐은 친구들이 옛 물건이나 옛 책이 있으면 무조건 내게 가져오는 바람에 늘어난 거고.” 그는 은퇴 후부터 본격적으로 글을 썼다. 그토록 북카페를 고집한 것도 책이 쌓인 카페 한 모서리에 그의 서재 겸 집필실을 두고 조용히 앉아 글을 쓰고 싶은 속셈이 없었다고는 말 못한다. 빵 굽는 주방을 마주 보는 자리에 서재를 마련했다. 컴퓨터를 본격적으로 배워 홈페이지도 손수 만들었다. 글은 그동안의 지적 온축과 구체적 경험으로 저절로 줄줄 나왔다. 결혼 30년을 기념한 부부 글집 <빵 굽는 아내와 CEO 남편의 전원카페 피스 오브 마인드>와 인생 후반의 삶의 방식을 충고하고 계몽하는 <남자 나이 마흔에는 결심을 해야 한다>, 원고를 다 끝내 출판사에 넘겨 놓은 상태인 <추사 김정희를 뛰어넘어라(가제)> 등 세 권이 이미 완성됐다. 북카페 차리기 위해 사표를 던지다앞으로 준비 중인 것도 다섯 권쯤 된다. <추사 김정희를 뛰어넘어라>가 시·서·화에 능한 조선 선비들의 이야기라면 이번에 다시 시작하려는 책 내용은 그림 그리는 승려들에 관한 이야기다. “시·서·화는 선비들의 전유물만이 아니거든요. 불교에 입문한 승려들도 시·서·화로 자신의 깨달음의 경지를 표현한 이가 많았다고요. 그런 승려들을 모아 이야기로 엮어 보는 것도 재미있겠더라고요. 나는 전문가가 아니니, 잘못된 것이 있나 겁낼 것도 없다고요. 그저 내 눈에 비친 대로, 내가 느낀 대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면 그만이거든요. 그런 면에서 내 글쓰기는 학자들보다 훨씬 자유로워요.”이야기 도중 그는 몸 빠르게 팔대산인의 대형 화첩을 가져와 보여준다. 그리고 간결한 선으로 그린 물고기 그림, 어눌하고 소박하고 담담해 한눈에도 한 소식 얻은 사람의 선적인 기운이 물씬한 그림에다 얼른 견출지를 갖다 붙인다.“이 그림에 대해 설명해 봐야겠어요. 예전부터 이런 것을 눈여겨봐 왔거든요. 중학교 때부터 서예를 했으니까요. 서예란 공간과 선을 처리하는 방법이라고요. 그림 보는 눈이 절로 훈련될 수밖에 없지요.”
▶김종헌 씨는 1만 권의 책을 읽고 모으고 1만리 길을 여행하는 삶을 살고 싶다고 한다.
그는 평생 두 가지 일을 실천하며 살려고 애쓰는 사람이다. 하나는 1만 권의 책을 읽고 모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1만리 길을 여행하는 것이다. 동양의 대각들이 만들어 놓은 문장은 확실히 우리의 길을 밝혀 주는 등불이다. 김종헌 씨는 열두어 살 때부터 그 등불로 제 앞길을 밝힐 줄 알았다. 어릴 적 들은 ‘득만권서(得萬卷書) 행만리로(行萬里路)’를 명심했다. 그 말을 뇌리에 둔 채 인생을 관통해 나갔다. 삶의 지침 된 ‘득만권서 행만리로’물론 개발연대의 제조업체에서 수출업무를 맡아 최고경영자의 직위까지 올랐던 사람이니 접대하고 상담하고 판촉하는 데 온 신경을 쏟아야 했지만 그래도 남는 틈틈이 ‘만권서’를 구하고 읽었다. 독일·미국·홍콩지사에 근무한 것을 합하면 10여 년의 외국생활도 경험했다. 그러니 일하는 틈틈이 ‘만리행’도 실천했다. “고전은 역사를 수직으로 꿰뚫게 해주고, 여행은 이 세상을 수평으로 경험하게 해 주잖아요. 인간은 독서와 여행으로 사고가 깊어져요. 균형 잡힌 판단력도 길러지고…. 나는 물론 대단한 장서가도 아니고 고서를 연구하는 서지학자도 아니에요. 다만 책을 좋아하고 즐겨 모아 간직하고 열심히 읽고 사랑하는 애서가일 뿐이에요. 꼭 불러야 할 호칭이 필요하다면 ‘북 마스터’라고 불리고 싶어요. 그래서 거기 내 명함에도 북 마스터라고 쓰여 있잖아요?” 그가 책에 관심을 가진 것은 오래전 일이다. 그는 종로 토박이로 유치원에서 대학까지 모조리 종로에 있는 학교에 다녔다. 효제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종로 5가에 살아 집 근처에 헌책방과 고서점이 즐비했다. 자연히 고서를 뒤적거리는 일이 잦았다. ‘맹모삼천지교’라고 고서적상 곁에서 아이를 키우면 북 마스터가 될 확률이 높아지겠다. 경희궁 터에 있던 서울중·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매일 종로 길을 걸어서 통학했다. 종로 3가 단성사 곁에 활판 인쇄 책을 출판하는 <세창서관>이라는 서점이 있어 그 서점에 자주 들렀다. 거기서 <천자문> <동몽선습> <소학>을 사서 혼자 읽었다. 딱지본 <춘향전> 판소리 대본도 사서 읽었다. 영리한 소년이었으니, 그러면서 점점 혼자 문리를 터득해 나갔다.
▶고서에 파묻혀 책을 읽는다. 여기에 허브향의 차까지…. 마음의 평화 멀리 잇지 않다.
중학교 때는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삼국지>에 한창 빠져 있었는데 고서점에서 우연히 삼국지 목판본을 발견한다. 한문으로 된 책이었지만 등장인물들이 목판화로 찍힌 것이 아름다워 중학생 주제에 그 책을 탐내 사들였다. 서예에 관심을 가져 붓글씨를 쓰러 다녔고, 그러는 사이 절로 불교 근처에도 기웃거리게 됐다. 그게 자연스럽게 서울대에 진학할 때 철학을 전공으로 택하게 하는 나침반이 돼 줬다.“중학교 때 <삼국지> 원본을 샀으니 한문 많은 그 책을 언젠가는 읽겠다는 야심이 있었죠. 내가 한문 공부를 열심히 하게 된 계기도 아마 거기 있었을 것입니다.” 아이 기르는 부모들이 참고할 만한 대목이다. 스스로 동기부여를 하게 하는 것. 그는 나중에 <삼국지>처럼 목판화로 등장인물이 찍혀 나오는 <수호지> 한 질도 구했고, 10여 년 전에는 우연히 목판본 <삼강행실도>를 입수했으며, 김홍도의 목판화가 잔뜩 들어 있는 금속활자본 <오륜행실도>까지 손에 넣게 된다. 나를 <오륜행실도>가 놓인 유리장 앞에 세워 두고 그 책을 구하기까지의 무용담을 신이 나서 설명하는데, 쉰아홉이 조금 넘은 김종헌의 키가 돌연 우뚝한 거인으로 느껴진다.“지방 출장을 가면 들르고는 하는 마산의 한 골동품 가게에서 연락이 왔더라고요. 회사에서 1,000만 원을 가불해 일요일에 비행기를 타고 김해공항을 거쳐 마산으로 갔지요. 가는 내내 가슴이 뛰었어요. 집에 돌아와서는 밤 늦도록 책을 보다 품에 껴안고 잠이 들고 새벽에 일어나 다시 책을 껴안고 들여다보고…. 이 책은 김홍도의 삽화도 아름답지만 한문으로 된 본문에 이어 우리글로 쓴 언해가 있다는 점이 더욱 소중하지요”희귀 장서가 진열된 카페의 오른쪽 공간 이름은 ‘임지헌(臨池軒)’. 그의 서예 스승 강창원 선생의 옥호를 따왔다. “임지헌은 본래 서예에 정진한다는 말이에요. 왕희지가 못 가에 살며 하도 열심히 글씨를 써서 붓과 벼루를 씻은 연못물이 검게 되었다는 이야기에서 나온 이름이지요.”그리고 집필실로 쓰는 서재 이름은 덕한재, 큰 글이라는 뜻이라는데 뜻이 크면 인간은 외양에서 풍기는 아우라까지 따라서 확장되는 것이 맞나 보다. 그는 학생시절 불교 단체인 ‘룸비니’ 활동에 맹렬했다. 불교 경전 강의도 직접 하고 각종 행사 기획도 하고 후배들을 이끌고 절집을 쫓아다녔다. 대학시절 그는 ‘김종헌팬클럽(KFC)’이라고 칭하는 이들을 한 무리 이끌고 다니는 인기 충천한 학생이었다. 켄터키프라이드 치킨이 이 땅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KFC가 이 땅 젊은이를 열광하게 했던 것이다.
▶북카페 <피스 오브 마인드>.
룸비니에서 보광사로 떠나는 수행대회가 있었다. 4박5일 예불하고 참선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시간만 나면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는 청춘남녀들 사이에서 유독 한 여학생만이 간밤에 법당 바닥에 떨어진 촛농을 떼며 청소하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는 그 특별한 여학생에게 갖은 방법을 동원해 가까이 다가갔다. 그가 바로 부인 이형숙 씨였다. 친구들을 불러 뻑적지근하게 약혼식을 치렀다. 친구 하나가 자작 축시를 낭독하고, 청혼문을 표구해 친구들 앞에 공개하고, 처가 마당에서 전축을 꺼내놓고 당시 유행하던 트위스트를 추었던 멋진 약혼식, 그리고 이어서 결혼식. 신혼방에 둘만 들어앉아 살게 됐을 때 신랑 김종헌은 벽에 붉은 글씨로 구호 하나를 써 붙였다. “결혼했다 방심 말고 오는 연적 막아내자!” ‘결혼했다 방심 말고 오는 연적 막아내자’그는 과연 있는 사실을 그저 그대로 덤덤하게 받아들이는 고지식한 ‘진실남’이 아니었다. 뭔가 재미있게 일이 되어 가지 않으면 심심하고 지루해 견디지 못하는 인생의 각색자이자 연출자였다. 그의 친구가 쓴 글 중 김종헌을 아주 잘 보여주는 한 구절이 있다. “대학시절 이래 한때나마 그의 관심사가 안 된 이슈는 아마 없었을 것이요, 그가 언급하지 않은 세상사란 아마 없었을 것이다. 어디 생각과 말뿐이었나. 그가 행동으로 건드려 보지 않은 일이 어디 있으랴. 그는 늘 꿈을 꾸며 살았으되 현실에서 멀리 떨어져 나간 허황된 일에 마음을 둔 적이 없었으며, 늘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못 살았으되 그의 말이 어느 누구를 불쾌하게 하거나 마음 아프게 하는 일은 없었다.무슨 사치인가 싶을 정도로 그는 내용이 있을 성싶은 책이 눈에 띄면 주저 없이 그것을 샀다. 그래서 아는 것도 많다. 철학이나 불교나 서예, 또 무역이나 경영 등 가히 그의 전문 분야라고 하는 영역에 대해서는 그렇다고 치자. 그는 고대 중국의 야사를 말하는가 하면 야생 약초의 생리를 말하기도 하고 아즈텍 문명의 원시신앙에 대해 말하기도 한다. 실크에 대해, 차에 대해, 와인에 대해…, 아니, 근자에는 떡과 빵에 대해 그가 나 모르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할라치면 나는 그동안 무엇을 하고 살았나 자문하게 될 정도다.”딸 세경과 아들 형태는 이미 결혼했다. 둘 다 아버지 뒤를 이어 학부에서는 철학을 전공했다니 그것도 희한한 일이다. 온순하고 따뜻한 심성의 아들은 어머니를 쫓아 빵을 만들고 싶어 했다. 그러나 젊어서는 조직 안에 들어가 세상 돌아가는 것을 배울 필요가 있다는 아버지의 설득으로 신기하게도 아버지가 다니던 남영나일론에 입사했다. 며느리도 거기서 만났다. 대를 이은 비비안 가족인 셈이다. 딸 세경은 아버지를 꼭 닮은 지적이고 논리적인 성향의 아가씨로, 미국에서 IBM 계열사에 다니다 현재는 혼인해 아이를 키우고 있다. 손자가 둘이나 되니 그들은 이제 할머니 할아버지다. 그러나 여전히 신혼 때처럼 ‘결혼했다 방심 말고 오는 연적 막아내자!’는 구호를 마음속에 딱 붙이고 살아간다. “둘 사이를 훼방하는 연적들은 작은 불만이 계속 쌓이게 방치하는 것이에요. 가장 무서운 연적은 서로 존중하는 마음을 허물고 상대방에게 인격적인 상처를 입히는 일입니다.”그런 연적들을 효율적으로 물리치고 둘은 잘 찍은 영화처럼 함께 예쁘게 늙어간다. 장난스럽고도 진지하게, 열정적이고도 드라마틱하게! 낡은 오디오에 바흐의 무반주 첼로곡베이커리 북카페의 실내는 넓은 거실 같다. 테이블과 소파가 많고 볼거리가 다양하지만 절대 눈부시게 튀지는 않는, 편안한 공간을 지향했다. 카페 문을 열고 들어오는 곳에는 호랑이 새끼 모양의 도자기를 둬 책을 지키는 수호자의 역할로 삼았다. 주방 정면에는 불을 삼키는 화강암 해태를 놓았다. 돌해태는 당연히 이 집의 소방수 노릇을 맡는다. 곳곳에 아이들 어릴 때 사진과 부부사진을 걸어 놨다. 그는 고서점에서 우연히 개화기 때 역관을 지낸 외조부가 쓴 책도 발견했다. “그 책을 펼쳐 보니 발행처에 어머니가 어릴 적 사시던 주소가 나왔어요. 아흔이 다 돼 가는 우리 어머니가 어찌나 기뻐하시던지…. 헌 책을 좋아하다 보니 그렇게 효도할 일도 생기던데요.”테이블 한 구석에는 자신의 가족들이 쓴 책들만 가지런히 모아뒀다. 물론 김종헌이 이번에 낸 책들도 그 한쪽을 차지하고 있다. 개인사의 모음이 곧 국가의 역사이고 인류의 역사다. 19세기 외조부의 낡은 저술과 21세기에 출판된 외손자의 신식 책이 나란히 놓인 공간, 나는 이런 풍경에 특히 감동받는다. 거기서 흘러나오는 숱한 이야기가 자꾸 귓가에 간지럽다. 요컨대 ‘피스 오브 마인드’에는 이런 이야기들이 가득 들어차 있다. 김종헌은 내가 카페에 들어서자 낡은 오디오에 바흐의 무반주 첼로곡을 올려놨다. 추사 그림이 새겨진 블라인드로 비쳐드는 초가을의 햇살, 오래된 책들, 한구석에 덤덤하게 놓인 백제 토기…. 평화를 만드는 효모가 있다면 그 안에서 서서히 부풀어 올라 발효될 수밖에 없는 분위기를 김종헌·이형숙 부부는 자기들의 공간 안에 넘치도록 채워두고 있었다. 낡은 책 냄새에 섞인 허브와 버터 녹는 냄새, 첼로의 장중한 음향, 아이를 업고 엎드려 책을 읽는 엄마가 있는 이철수의 초기 판화, 그 실내를 긴 스커트를 입은 이형숙 씨가 물고기처럼 우아하게 걸어다녔고, 나는 괜히 좋아서 자꾸 입을 벙싯댔다. 과연 평화였다.
[2006년 10월호] 2006.09.28 입력
[문화칼럼/김서령]청계천 휴머니즘
버들치가 청계광장 폭포 아랫부분까지 올라왔다는 뉴스를 듣는다. 생태학자들이 폭포 아래 장기 서식하는 그놈들을 관찰했다 한다. 갑자기 향내가 코끝을 휙 지나간다. 버들치의 향내를 맡아 본 적이 없건만 청계천에 사는 버들치란 이름 자체에서 싱그럽고 산뜻한 기운이 내 머릿속에 불어온다. 야호! 청계천은 이제 더는 급조된 시멘트 물길이 아니다. 장마가 지난 뒤 청계천에는 버들치뿐 아니라 줄납자루, 끄리, 대륙송사리 같은 물고기가 23종으로 늘어나고 큰개여뀌, 개갓냉이, 석죽, 털별꽃아재비 같은 물가 식물이 자라고 민물가마우지 같은 새가 무시로 날아온다 한다.
청계천을 복원한 지 이제 일년이다. 서울 종로구 세종로 동아미디어센터 앞에서 성동구 마장동 신답철교까지 불과 5.8km의 물길. 그게 서울 사람의 삶의 양식과 기운을 바꿔 놓았다. 청계천가에 한번도 나가 보지 않은 사람이라도 거기 물길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커다란 위안이다. 도시는 위로만 사납게 뻗어 가는데 물은 천천히 누워서 흐른다. 사람들은 누워서 흐르는 물을 보러 자꾸만 물가로 나간다.
흐르는 물이 무슨 특별한 구경거리일 리 없건만 물은 예전부터 사람을 자꾸만 제 곁에 불러 모았다. 흐르는 물 곁에서 물을 바라보는 사람은 제 본성의 가장 깊은 곳과 연결된다. 물은 우주 저 멀리와 내가 선 이곳을 연결한다. 청계천가에서 물을 보며 걷는 사람은 종로의 아스팔트 길을 걷는 사람과 다르다. 어깨를 부딪쳐도 상대에게 대뜸 화를 내지 않는다. 곁에 흐르는 물이 마음속의 화를 꺼 주기 때문이다.
도시에 물이 필수인 건 생활용수로서의 효용 때문만이 아니다. 빌딩과 도로와 자동차의 딱딱하고 강하고 거친 기운을 눅이고 어루만지는 부드럽고 순한 무엇인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게 물이다. 아무리 폭이 좁더라도, 아무리 억지로 끌어올리더라도 도심에 물이 흐르는 것과 흐르지 않는 것은 삶의 질 면에서 천양지차라고 나는 생각한다.
물가에 사람이 모여드니 자생적으로 축제가 벌어진다. 신명을 돋우는 일이 자꾸 새롭게 궁리된다. 춤추고 노래하고 피리 불고 장구 치고 달리고 얼싸안는다. 물가에서 우린 다들 너그러워진다. 어릴 적 기억을 되살려 봐도 강변에서 싸움이 일어나는 일은 잘 없었다. 긴 겨울밤 남의 집 사랑방에 모여 묵 내기 화투를 치던 사람들은 큰소리를 내며 멱살을 잡기도 했지만 여름밤 강변에 모여들어 호박전을 부쳐 먹던 사람들은 드잡이하며 다투지 않았다.
물 곁에서 인간은 부드러워진다. 선해진다. 물 기운은 사람 안에 내재한 공격성을 죽여 놓는다. 그러니 춤추고 노래 부를 수밖에 없다. 청계천가에서 크고 작은 문화행사가 자생적으로 열리고 있다. 한화그룹 본사 앞에선 금요 정오음악회가 열리고 청계광장에서는 수요예술제가 정기적으로 개최된다. 한 달에 36개 팀이 250회의 공연을 하고 있다고 한다.
교보빌딩에 볼일이 있어도 나는 웬만하면 횡단보도를 지나 청계천 물을 보러 간다. 컴포넌트 오디오를 가져다 놓고 군데군데서 춤추는 청년, 갈대와 부들을 헤치며 물가에서 사진 찍고 깔깔대는 처녀…. 그들의 신명과 젊음이 내 피 안에 고대로 전염된다. 괜히 슬금슬금 웃음이 난다. 물에서 유유히 헤엄치는 물고기, 그게 갑자기 위로 휙 솟구치자 사람의 입에서 맑은 외침이 튀어나온다. 고층의 최신 인텔리전트 빌딩 앞에서 햇빛을 반사하는 물고기의 비늘이라니!!
청계천에 물을 흘려 놓고 거기 다시 버들치를 살려 놓았다. 그걸 보고 질러 대는 처녀아이의 환호성, 그 이상 가는 고급 문화가 또 있을까.
김서령 생활칼럼니스트
[이 사람의 삶]
‘설위설경(設位說經)’ 인간문화재, 장세일 법사
“원 좀 풀겠다고 들러붙은 귀신들, 잘 달래 제 갈 곳 보내줘야지”
김서령 자유기고가 psyche325@hanmail.net
귀신은 존재하는가. 구천을 떠도는 영혼과 어떻게 소통하는가. 끊이지 않는 질문에 그는 빙긋 웃기만 할 뿐이다. 설위설경 인간문화재, 장세일 법사. 그는 오늘도 흰 너울을 서리서리 걸어놓고 놋양푼으로 장단 맞추며 이승을 떠도는 귀신의 한을 위로한다.
그와 서른 마디쯤 했을까. 이렇게 말이 없는 인터뷰이는 보다보다 처음이다. 시가지에서 한참 벗어난 사무실에서 충남 태안 시외버스 정류장까지 나갈 일을 난감해했더니 장세일(張世壹·73) 법사는 말없이 오토바이에 올라탄다. 뒤에 타란 말 같은 건 없다. 그저 묵묵히 오토바이를 앞에 대놓고 기다린다. 눈치 채고 뒷자리에 탔더니 다시 말없이 달린다. 그리고 정류장 앞에 멈춘다. 역시 말은 없다. 그저 빙긋 웃기만 한다. 이렇게 말을 않고도 살 수 있는가.
말이 없다고 냉랭한 건 천만 아니다. 아무 말 없어도 정다운 훈김이 전달된다. 은근하고 미쁘고 뿌듯한 침묵이다. 뭐든 말로 분명하고 명확하게 전달하지 않으면 안심이 되지 않고, 성에 차지 않는 우리의 소통방식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침묵이다.
태안 시외버스 정류장 앞엔 ‘햇살 가득한 약국’과 ‘뜰에 봄 약국’이란 이름의 약국 둘이 서로 마주보고 있다. 태안반도 앉은굿의 맥을 잇는, 저토록 말없이 웃기만 하는 장세일 법사가 보여주는 평화와 고요가 그대로 녹아 있는 이름이라 나도 혼자 웃는다.
‘앉은굿’과 ‘선굿’
‘앉은굿’은 말 그대로 앉아 하는 굿이다. 무당이 맡아 하는 ‘선굿’과 대비되는 말이다. 한강을 기준으로 이남은 대개 앉은굿을, 이북은 선굿을 행해왔다는 게 일반적 분류다. 앉은굿은 앉아서 경문이나 불경을 외며 혼자 북과 양판이란 악기를 두드리며 귀신을 쫓는다. 전에는 전국적으로 행해지던 굿이었으나 지금은 충청도를 중심으로 명맥이 유지되고 있으며, 그중에서도 태안·서산·보령·서천 같은 충남 서북부 해안지방에 그 형태가 가장 많이 남아 있다.
앉은굿은 악귀를 몰아내고 수복을 기원하기 위해 낭송하는 설경(說經)과 종이를 접고 오려 여러 신의 그림이나 글씨를 새겨 굿판 주변에 걸어두는 설위(設位)가 함께한다. 그래서 굿이란 이름대신 ‘설위설경’이라 부르며, 굿을 주도하는 이의 칭호도 무당이 아니라 법사라고 한다. ‘송경법사(誦經法師)’를 줄인 말이다. 충청도 사투리로는 ‘정 읽는다’고도 했다.
병원이 멀던 시절, 집에 우환이 생기면 굿보다 한결 점잖은 방법으로 집에 법사를 불러 경을 읽었다. 귀신을 겁주고 얼러 쫓아내는 내용의 경문을 밤새 읽으면 병을 불러온 악귀들이 맥없이 물러난다. 경만 읽는 걸로는 부족하니 사방에 울타리를 둘러치고 귀신을 위협하는 물건을 만들어 걸었다. 종이를 접고 오려 만든 장치들이었다.
나는 장세일 법사가 굿을 할 때 사방에 걸어둔다는, 조선종이를 칼로 오려낸 설위작품들을 찬탄하며 들여다봤다. 1㎜도 안 될 정교한 선을 잇댄 각종 문양들, 이 다양하고 정밀한 문양들은 몇 번의 칼질만으로 한지 위에 주르륵 나타난다. 펼친 모양은 오직 머릿속에 들어 있고 눈에는 보이지 않다가 칼질이 끝난 후 접은 종이를 펼칠 때라야 비로소 드러난다. 이를 종이 ‘까순다’고 하는데 물감으로 그린 회화와도, 덩어리에 형태를 새겨 넣는 조각과도 다르다. 그러나 분명 종이 ‘까수기’는 그 자체로 독립된 장르의 예술이 될 만큼 아름답고 신비하고 독특하다. 게다가 오랫동안 이 땅의 민간에서 행해져온 전승예술이다. 그래서 충청남도는 몇 해 전 설위설경을 충청남도의 무형문화재 24호로 지정했다.
서해와 연한 태안반도는 산이 낮은 구릉지이지만 숲이 울창하고 경치가 아름다워 예로부터 ‘검은산 안’이라 불렸다.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는 어촌이 많으니 무속신앙이 성행했고, 아직도 태안을 중심으로 80여 명의 무속인이 활동하는데 종이 ‘까수는’ 솜씨로도, 경 읽는 솜씨로도, 몸에 밴 역사로도 으뜸가는 이가 바로 장세일 법사였다.
그는 이 일을 스물셋에 배우기 시작했는데, 지금껏 50년 동안 오려낸 종이만도 트럭으로 열 트럭 분량은 될 거라 하니 솜씨도 솜씨지만 앉은굿이 태안에서 얼마나 자주 행해졌는지 짐작할 만하다. 종이 오려 설치하는 설위는 경을 읽는 설경이 끝나면 대개 불살라 없애버린다. 아무리 정교하고 아름다워도 살아남지 못하는 운명이다.
설위가 그 자체로 훌륭한 그림이라는 걸 사람들이 깨달은 뒤부터 장 법사는 굿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를 음미하고 후세에 남기기 위해 종이를 접고 오린다. 그걸 배우는 전수생들을 위해 그가 오려내는 그림의 종류는 기본형이 서른 가지쯤 된다. 그렇지만 온갖 변형이 가능하니 거의 숫자를 셀 수 없는 만큼 다양하다. 창을 든 사람도 사천왕상도, 鬼 壽 福 皇帝 같은 각종 한자도, 나비와 꽃과 새들도 그는 칼질 서너 번에 자유자재로 오려낸다.
“양각을 하면 남자가 힘써”
“전에는 음각을 주로 했거든. 요즘은 내가 양각을 해. 음각을 했더니 음이 너무 성해서 못쓰겠어. 어딜 가든 여자들이 더 세게 나대잖아? 그래서 힘이 더 들어도 양각을 하기로 했어. 이제 양각을 한동안 하고 나면 다시 남자들이 힘을 쓸 날이 올 거야.”
여자들이 사회활동을 많이 하고 목소리가 높아지는 현상을 설위에다 두는 해석이 재미있어 나는 그에게 자꾸 말을 시킨다.
“양각을 하면 남자들이 힘이 더 세질까요?”
“그으럼.”
“아직은 음각을 좀더 해도 괜찮지 않을까요? 그래야 조화가 맞을 것 같은데.”
“음각도 아주 안 하는 건 아니여. 조화에 맞게 한다 이 말이지. 전에는 아주 음각만 했거든.”
전에는 이 지방에서 경 읽으러 다니는 사람과 목수일 하는 사람의 품삯을 같이 쳐줬다. 설위설경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행해졌기에 낮도 하루품, 밤도 하루품이었다. 그러니 한때는 품값도 수월찮이 벌었지만 그게 모이지는 않았다. 태안에서 8대째 터잡고 살아온 이 동네 토박이인 그는 경 읽으러 다닌다 해서 천한 취급을 받은 적은 한 번도 없다. 외려 경을 읽어 축귀(逐鬼)를 한다 해서 선비에 버금가는 예우를 받았다.
“귀신이 실제로 있느냐?”고 물었다. 장세일 법사는 또 예의 그 따스한 웃음을 웃더니 딱 한마디로만 대답했다.
“있으니 하제 없으면 하것어?”
“신장이 움직이니까 알제”
한참 있다 다시 “귀신이 없는데 어뜨케 평생 이일을 하남?” 했다. “그럼 귀신을 봤느냐?”고 다시 물었다.
“귀신이 어데 눈에 보이간?”
“그럼 귀신이 있는지를 어떻게 아느냐?”고 덮어놓고 또 물어봤다.
“신장(신이 내린 막대기)이 움직이니까 알제.”
신장은 누가 잡느냐, 혹시 일부러 움직이는 건 아니냐, 최면상태가 돼서 흔드는 것 아니냐, 신장이 움직인다 해서 그게 무슨 귀신이라는 증명이 되냐, 귀신이 쫓겨 나가면 병이 금방 낫느냐, 그럼 무슨 병이든 병원 가지 말고 귀신만 쫓으면 되느냐… 별별 질문을 다 해봐도 그는 끄떡없이 웃고 앉아 있었다.
“허허 그거야 모르제…. 어디 말로 할 수 있간?”
그러나 먹지도 못하고 곧 죽어가던 사람을 독경으로 벌떡 일으켜놓은 경험은 손가락으로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밤새 독경하고 나면 낯빛부터 달라지는 걸 여러 번 봐왔다. 그는 귀신을 쫓아서 낫는 병도 있고 그런 종류가 아닌 병도 있다고 여기는 모양이다. 종이로 오려 만든 신장에 신장 내림경을 읽으면 신이 강림한다. 그가 하는 방식은 그 신장에다 물어서 일의 사태를 파악하는 방식이다. 귀신이 들어 이 병이 생겼느냐, 물으면 신장이 대답한다. 아니면 흔들고 맞으면 끄덕이는 식으로!
“내야 뭘 아나, 신장이 그렇다니 그런 줄 알제.”
과장도 흥분도 없다. 우직하고 순정한 눈이 끔벅끔벅 뿐이다.
“우리 경전은 불경과 무경(巫經)이 짬뽕이 된 거여. 내가 천수경(千手經)을 아는데 천수경과도 비슷한 데가 많어. 무경은 불경보다 역사가 깊을 겨, 나중에 불경을 따라간 건지는 몰라도. 우리는 이게 언제 어디서 왔느냐고 집이처럼 물어보질 않았어. 그런 거 물으면 안 되는 줄 알았네. 그저 외고 까수고만 했제. 역사니 그런 거는 궁금혀도 안 했어.”
그는 1932년생이다. 논이 없는 농부의 둘째아들이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당에 한 2년 다녔다. 한문이 눈에 쏙쏙 들어왔다. 이웃에 경문을 공부하는 사람이 있었다. 담 너머 글 읽는 소리가 들려왔다. 조용한 밤이면 더 잘 들렸다. 그 소리가 이상하게 귀에 쟁쟁했다. 낮에 밭일하고 밤에 마실가는 거 말고는 별 오락이 없는 시절이었으니 그 집에 가서 경문을 구경했다. 한자로 된 경문의 뜻이 환하게 보였다. 의미도 마음에 쏙쏙 닿았다. 읽는 소리도 뜻도 자꾸만 좋아졌다. 그러느라 절로 공부가 된 것이다.
“나는 선생이 따로 없어. 그냥 혼자 헌 거여. 아무리 긴 경문도 서너 시간만 들여다보믄 다 외워져버려. 내가 기억력 하나는 참 좋았어. 그걸로 법 공부를 했으면 육법전서를 줄줄이 외는 거는 일도 아니었을겨. 지금도 후회를 한다니깬. 내가 그때 경문 대신 법조문을 외웠으면 지금쯤 요로고 있지 않고 법관이 되얏을 낀데….”
100여 가지 경문 채록
그러나 진정 후회하는 기색은 전혀 아니다. 나중에는 이웃집 경문 공부하는 사람보다 훨씬 앞서가게 됐다. 숱한 경을 혼자서 다 외웠다. 그게 소문나 진짜 경꾼들이 손이 달리면 장세일 청년을 앞세워 경읽기를 다니곤 했다.
그는 지금 자기가 외운 경을 다시 종이에 기록하는 일을 진행 중이다. 채록해놓은 십수권의 책을 내게 보여준다. 반듯하고 유려한 서체로 깨알같이 박아 쓴 글씨다. 자주 쓰지 않는 어려운 한자들도 빼곡하다. 이렇게 훌륭한 구비문학 채록작업이라니. 나는 그걸 산발적으로 베껴왔다. 운에 맞춰 읽으면 심신이 절로 안정될 듯했다. 내용도 당시 사람들의 세계관이 그대로 담겨있어 옛 이야기를 읽듯 재미가 있었다.
“사귀야 듣거라, 일락서산하고 월출만공연한데 천신만귀(千神万鬼) 다 부르는 게 아니라 금차가중(今次家中) 모(某)생 신상사지육신(身上四肢六身) 중에 소침(所侵)하여 흥아 작란하고 탈인정기 인간작해 하는 사묘지물이 있다기에 부르는 게니 지체 말고 썩 나서거라!… 속담에 이르기를 악한 귀신은 악하게 대접하고 유한 귀신은 유하게 대접하라 했으니… 이저러리 다니다가 배가 고파 기진하고 목이 말라 갈증 나서 요기하러 들어왔다고 할 것 같으면 아무리 빈한한 가정일지언정 일년 여름바지 농사지어 상생미 중생미 하생미 다 골라 삼칠(三七)은 이십일(二十一) 스물 한번 쓸고 쓸어 흰밥 짓고 미역국을 가마솥에 한솥 끓여….”
물론 이런 한글 경문이 아닌 순한문 경문도 여럿 있다. 장세일 선생이 외고 있는 경문 수는 100가지가 넘는 듯했다. 대강 짚어봐도 천수경, 축원경, 성조(成造)경, 조왕경, 지신경, 명당경, 부정(不淨)경, 팔문경, 기문(奇問)경, 팔양(八陽)경, 조상경, 백살(百殺)경, 삼재경, 육모적살경, 육계주경, 친축경, 옥갑경 등이 있고 각 경문 안에 다시 작은 장으로 나뉜 경이 있는데, 그걸 책 하나씩으로 묶어 기록해나가는 중이다. 경문마다 길이가 다르긴 하지만 경 하나를 두세 시간에 외는 게 보통이고 공들인 앉은굿 자리에서는 이레 밤낮을 꼬박 경을 외기도 했다. 그리고 경마다 종이를 오리는 방식과 종류도 다 다르다.
종이를 오려 만든 여덟 문 여덟 진을 친 장엄한 경청. 그 안에서 펼쳐지는 낭랑한 독경, 북과 징으로 맞추는 장단. 종이고깔을 머리에 쓴 법사가 펼치는, 음악과 미술과 문학이 어우러진 이 앉은굿은 그대로 완결된 복합 행위예술이다. 그 안에서 신인(神人)이 서로 만나 그간 쌓인 설움과 원한을 한바탕 사설로 풀어낸다. 귀신은 제 갈 곳으로 편하게 물러가고 인간은 스트레스에서 놓여나 안정을 회복한다. 이게 굿이다. 미신이 아니라 무의식을 건드리는 섬세하고 정교한 심리치료가 아닐 수 없다.
설위설경이 언제부터 시작됐는지는 장세일 법사도 알지 못한다. 필사본으로 전해지는 무경을 읽어가며 공부하긴 했다. 워낙 오자와 탈자가 많은 책이었다. 나이든 지금 그걸 자신이 직접 기록해놓지 않으면 사라질지 모른다는 안타까움이 있다.
“매일 조끔씩 써놓으려고 해도 그게 안 돼. 죽기 전에 다 써놔야 할 텐데….”
“칼질 많이 해봤는가가 솜씨여”
종이 오리기도 직접 가르쳐준 선생은 없었다. 눈썰미가 있으니 따라다니다 그저 어깨너머로 배웠다. 경 읽는 경꾼들은 당시만 해도 수요에 비해 공급이 딸렸다. 일이 많으니까 경을 채 다 외기도 전에 설위설경판으로 따라다녔다. 미리 가서 며칠 전부터 종이를 오려 팔진팔문을 만들었다. 그때 주로 따라다닌 사람이 태안반도 앉은굿의 대가이던 한응회 선생이다.
“어딜 감히 물어봐. 어려워서 감히 물어볼 수가 있남? 혼자 자꾸 해보니까 그냥 되데. 칼질을 하도 많이 해봤으니께 밑그림 없이 밑글 없이 그냥 막 파도 글자가 나오는 거제, 첨부터 그리 되간? 눈으로 봐서 저건 저렇게 접고 요건 요렇게 접고 저기를 까수어내면 요런 모양이 나온다는 걸 머릿속에 짐작해두고 요리조리 칼질을 해본 겨. 얼마나 칼질을 많이 해봤는가가 솜씨여. 딴 거 어. 그래도 나는 뭐이든 한번 보믄 따라 했어. 같은 값이믄 보기 좋게 하려고 요리조리 혼자 연구를 했제. 밤에 자려고 누우면 종이 까수는 모양이 머릿속에 영화가 돌아가듯이 환하게 떠올라. 그라믄 얼른 일어나서 연필로 그걸 그려놓제. 안 그러면 이튿날 다 잊어불거든. 저런 것들도 다 그렇게 맹근 거야.”
그는 6·25 참전용사다. 서당공부를 몇 년 한 후 집에서 농사를 거들다 전쟁이 나자 징집됐다.
“그전에는 국민방위군 훈련을 받으러 다녔어. 2개 면이 1소대였을 걸. 나는 스무 살도 안됐는데 제주도 가서 훈련 받고 강원도 7사단에 배치됐어.”
사방에 시체가 산더미같이 쌓여 있었다. 걸어가려면 시체를 발로 치우고 갈 수밖에 없었다. 총알은 연신 귀 뒤로 머리 위로 날아가거나 떨어지곤 했다.
설위설경은 충청남도 무형문화재 24호로 지정됐다.
“무서웠겠네요” 했더니 그는 “무섭고 안 무섭고 그런 생각이 나나?” 한다. 혼인 말이 오가는 중에 갑자기 군에 가게 됐기에 입대 몇 달 뒤에 잠깐 휴가 나와서 결혼식을 간단히 올린다. 혹시 전사하더라도 총각귀신이 되게 할 수는 없으니 혼인은 해놓고 가야 한다는 어른들의 성화 때문이었다.
그러다 진짜 전사해버리면 신부 인생은 뭐가 되냐니까 그저 웃기만 한다. “금방 헤어졌으니 색시가 몹시 보고 싶었겠네요?” 해도 그의 대답은 역시나 싱겁기 짝이 없이 “그런 거 몰랐어”다. 세상에 갓 결혼한 색시가 안 보고 싶었단 말이냐고 펄쩍 뛰어봤더니 “죽나 사나 그 생각뿐인데 색시 보고 싶고 말고가 어디 있간?” 한다. “맘에 안 들었던 건 아니냐?”며 대답이 뭐가 나오는지 궁금해 일부러 자꾸 물어본다.
“아, 들먼 어떻고 안 들먼 어떠남? 그저 부모가 시키는 대로 하라니까 하는 거지.”
그가 참전한 게 그 유명한 금화전투였다. 작전을 벌이던 중 어깨에 포탄 파편을 맞는다.
“총알 맞는 것보다 파편 맞는 게 더 아파. 전쟁에서 마취란 게 어디 있나. 그냥 생살을 파헤쳐서 파편을 몇 개 끄집어냈지. 대전 병원에 와서 누웠는데 그 이튿날로 휴전이 됐다 하드만. 상처가 아물면서 제대를 했제.”
장세일 법사에 따르면, 귀신이 있긴 분명히 있되 사람이 죽는다고 저마다 귀신이 되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시집장가를 못 가고 어려서 죽었거나 갑자기 비명횡사를 했거나 누명을 쓰고 죽었거나 가슴이 한이 많이 쌓였거나 그렇게 이생에 미련이 많이 남은 영혼들이 저승으로 가지 못하고 이승을 몸 없이 떠도는데 그런 무리를 일컬어 귀신이라 부른다는 것이다. 이건 도올 김용옥 선생의 말과 같다. 혼(魂)과 백(魄)이 합한 것이 사람이니 죽으면 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백은 땅으로 내려간다. 혼과 백이 분리되는 게 죽음인데 이 분리가 예상치 못하게 갑자기 이뤄지면 혼이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고 인간세상을 떠돌게 된다는 말을 전에 도올에게서 들은 적이 있다.
“그렇다고 귀신이 아무한테나 붙는 것은 아니야. 신수가 안 좋거나 심신이 허하거나 하는 이에게 들러붙어 앓게 하거나 해롭게 하지. 누군가를 성가시게 해야 뭘 좀 얻어먹잖아. 귀신들이 원 좀 풀겠다고 그러는 걸 잘 달래 제 갈 곳으로 보내줘야잖어. 말 안 듣고 유달리 어렵게 하는 귀신이 있으면 몇날 며칠 밤을 새우고 경을 읽어야 혀. 그래야 귀신과 대적이 되제.”
한 많고 불쌍한 귀신을 달래 좋은 곳으로 편하게 보내주는 방식이 설위고 설경이고 굿이고 천도재(薦度齋)인 모양이다.
“경문에도 있어. ‘의약치병해도(의약으로 치료해도)’ ‘종무소차라(아무 차도가 없다)’ 이거여. ‘원자천문 근자복문’ 헌즉, 점쳐서 하늘에 묻는다는 소리여. ‘필시귀책’이라, 반드시 귀신이 침투했다 그 소리여. 그래서 아프믄 독경을 하러 가제. 뭣 땜에 아픈가 보려고 하믄 언제든지 시작은 저녁에 하니께 그날 저녁에 차려가지고 독경하고 성주를 내려가지고 물어봐. 옛날에는 한 7일 정도 종이 철망을 맹글어서 방뿐 아니라 뒷간이고 문간이고 다 빙 둘러싸지. 그래놓고 신령들 위패를 써붙여. 그러고 난 다음 독경을 해. 예쁜 꽃과 새를 까수는 건 귀신들도 그거 보고 마음이 기쁘라고. 달래주는 거제.”
설위, 설경, 굿, 천도제
장세일 법사가 ‘태안문화’라는 잡지에 써놓은 글이 있다. 경문 읽기가 증세에 따라 달라진다는 걸 설명해놓았다. 그는 아무래도 말보다는 글이 편한 것 같다.
“별안간 눈에 가시가 들어간 것 같고 눈물이 쏟아져 나오면서 통증을 견디지 못할 때는 집에 물건이 잘못 들어와 생긴 병이다. 이런 때는 칠쌈이라 하여 문제되는 물건을 다른 장소에 옮기기만 해도 병이 낫는다. 또 객귀침탈이라 하여 배가 몹시 아플 때는 된장국밥을 해서 칼로 절면서 진언호통해 물리치면 곧 축귀가 되어 낫는다. 느닷없이 토하고 설사하는 토사곽란에는 아궁이 흙을 파서 토수(土水)물을 해먹이면 즉시 효험이 있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병원에서 불치병이라 진단받고 돌아온 환자가 독경 7일 기도 후 완치되어 건강하게 생활하는 산 증인도 여럿 보았다. 현대에는 드물지만 안택경이라 하여 예전에는 매년 정월이면 집집마다 1년 동안 편안케 해달라는 안태기도를 올렸다. 환자에 대한 경은 탈에 따라 다른데 축사(逐邪)에는 단을 모아 청수발원하고 경청을 꾸미는데 한지에도 격에 맞는 무늬를 만들고 부적을 그려서 장식한다. 그 앞에 종이로 만든 대철망을 치고 귀신을 잡아 가둔 다음, 병철망 삼기팔문진, 백살금진을 다시 덧씌운다. 그 앞에서 축사축귀 경문을 통경한다.
독경일수는 3일, 5일, 7일을 하며 이 일수는 주야를 말한다. 7일 기도 이상이라야 검무(劍舞) 화전(火戰)을 펼칠 수 있다. 검은 대개 참나무를 칼 모양으로 만들고 그 끝에다 종이 수술을 길게 달고 독경법사가 검무 장군을 청하면 ‘예-이’ 대답하고 법사의 명에 따라 검무를 한다. 먼저 환자에게 침책한 축귀를 하고 다음은 화전을 치는데 화전 재료는 소나무 껍질을 잘 말린 다음 절구에 빻아서 고운 체로 친 다음 볶아서 만든다. 그 가루를 횃불에 흩뿌리면 온통 불바다처럼 된다. 이것을 먼저 환자에게 한 다음 집주변을 돌면서 뿌려 숨어 있는 귀신을 축귀한다.”
태안 변두리에 마련된 ‘무형문화재 장세일 법사 설위설경 전시장’에는 앉은굿에 필요한 재료들을 쭉 전시해뒀다. 거기엔 소금, 붉은 팥, 고추같이 주변에서 흔히 보는 귀신 쫓는 것들도 있었지만 몇 가지 낯선 물건들이 보였는데 그게 바로 화전가루다. 그게 뭔지 물어도 장 법사는 별 신통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다 귀신 쫓는 데 쓰는 거여” 하더니, 글에는 그게 분명히 적혀 있다. 소나무 껍질을 빻아서 볶은 것이라고!
“귀신은 형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자취가 나는 것도 아닌 무형무적이거등. 그런다고 없남? 그건 아니거든. 나도 신장 행동을 보고 아는 건데 경을 정성 들여 읽다보면 언제부턴가 그게 보이기 시작하제. 남들 보면 나 혼자 씨부렁거리는 거 같겄지만 그게 다 귀신에게 호통치고 달래는 것이여. 다 쫓고 나면 진이 다 빠져부러. 그래도 속은 얼매나 시원타고!”
머릿속에 들어 있는 수백 종류의 경문과 종이로 ‘까수는’ 숱한 형상들말고도 그에겐 솔가루를 빻아 만든 화전용(火戰甬) 무기도 있었다니 흥미진진하다.
서른셋에 모신 법당
설위설경의 구체적 방법에 대한 기록도 있으니 읽어보자. 나는 직접 굿하는 현장을 보진 못했다. 요즘은 굿을 청하는 이가 그리 많지 않다. 한 달에 한 번쯤 부르는 사람이 있어도 간단히 경문만 읽고 돌아오는 경우가 많아 화전까지 치르는 굿판은 매우 드물다. 왼손으론 북을 치고 오른손으로는 놋양푼을 엎어놓고 징 대신 치면서 경문을 읽는 장세일 법사를 본 건 여러 번이다. 진짜 앉은굿이 아니라 축제행사장에서 옛굿을 재현하는 형식으로였다. 그는 그런 재현을 시덥지 않아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몇 시간씩 경을 해야 시원할 것을 겨우 20~30분 천수경이나 축원경 일부를 외다 말고 신명이 채 잡히기 전에 일어서야 하기 때문이다.
‘동토적살에는 복숭아 나무 채와 절구대를 들고 법사가 태세경을 읽으면서 나무태세를 선창하면 이웃 사람들이 복창하면서 집안 밖 사면을 돌면서 동토(動土)난 자리를 절구대로 찧고 복숭아 나무채로 후려치면서 축귀한다. 또 한 맺힌 원혼을 천도하는 해원경을 할 때는 굿청의 설경을 다르게 꾸미는데 종이를 여러 모양으로 무늬도 팔보살, 사천왕 원앙오행진을 치고 십대왕 거목과 문 양쪽에다 줄을 띠우고 연등과 조화등으로 장식하고 남망자(男亡子), 여망자(女亡子)의 옷과 길포 등으로 치장하고 구슬픈 해원경이 독통되고 나면 해원신이 내려와서 길포를 갈라 나아간다.
용궁수배탈(龍宮隨陪)에는 배를 만들어 오색기를 화려하게 꾸며 수배신을 불러 용궁으로 행차시킨다. 나쁜 살이 끼면 화살을 만들어 쏘며 오곡을 볶아 흩뿌리면서 제살(除煞)을 한다.… 기타 성황제 칠성제 산제 용왕제 당제 뚝제 노신(路神)제 참봉제 횡수막이 고사(告祀) 등 무형무적이라 영신의 이름을 불러가며 두 손 모아 애걸복걸 도움을 간청하며 매달릴 제 지성이면 감천이라 유형유적하게 소원을 이룰 수 있다.’
굿할 때 그는 제사장이지만 평소에는 그저 말없이 인자한 농부다. 한창 농사철에도 부르는 데가 있으면 매던 논을 버려두고 달려가야 했으니 실한 농사꾼이라고는 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 농사일을 대신해준 건 6·25전쟁 때 잠깐 휴가 나와 혼인했던 부인 권씨이다. 집 한쪽에 차려놓은 법당을 관리하는 일도 부인 몫이다. 부인은 남편과 달리 걱실걱실하게 이야기를 잘 한다.
“이 영감은 젊어서부터 1년이믄 반년도 함께 못 산 사람이여. 애들 어려서 혼자 다 키우고 (슬하에 3남1녀를 뒀다) 맨날 소 하나 먹여가며 길쌈해가며 만고강산 다 겪고 살았는디. 이 영감은 평생에 나가 댕기니 돈이야 벌지 모르제. 그래도 나한테는 평생에 목돈 한번 안 갖다주네. 한푼, 두푼 타서 쓰제. 저 영감하고 50년 넘게 살면서 아실아실한 정이 있지는 않아도 글타고 정 없이 살지도 않았네. 조강지처니께 살고 애들 부모니께 살고 그라지 뭐.”
설경을 배운 건 스물셋이었지만 서른셋쯤 되자 신명이 와서 할 수 없이 집에 법당을 모셨다. 동네 여인들이 곡식 몇 되를 이고 장 법사를 만나러 와 하소연도 하고 부적도 써달라고 했다. 말하자면 한 시절 그의 집은 신앙의 장소였다. 그는 그곳의 충실한 사제였다. 지금 사람들은 법사가 귀신을 불러 대화하고 영접하고 쫓아보내는 과정에만 관심을 기울여 무형문화재로 지정한다, 채록을 한다 호들갑을 떨지만 그건 다 형식일 뿐이다. 장세일 법사에게 중요한 건 한맺힌 귀신들 자체다. 귀신들의 원을 풀어 곱게 돌려보내주는 것이 그의 선결과제인 것이다.
밤새워 종이를 오리는 것, 종이 진지를 구축하는 것, 새로운 형상을 구성하는 것, 이제는 몸에 완전히 밴 경문을 읽은 것도 그 자체가 중요하다기보다 그걸 도구로 귀신을 쫓을 때만 유효한 과정이다.
“안 믿는 사람은 소용 없어”
집에 법당을 설치할 때의 권씨 할머니 얘기가 재밌다.
“신명이 내렸으니 워치케 혀. 거 각성(各姓)받이 해서, 각성받이라는 기 처음에 법당에 부처님 앉힐 때 동네 다니면서 성이 다른 사람한테 쌀을 걷어야 혀. 그러고서 법당 모시고 경꾼들 데려와 몇날 며칠 두드리는 거지. 우리 집이 사람들로 백설 치듯이 허옇게 다 찼어. 그 사람, 그렇지 않을 사람이 이런 일을 한다는 게 너무 신기해가지고 동네 사람들도 구경한다고 다 모였어. 술을 닷 말을 하고. 저 영감 신명을 그렇게 해가지고 풀었으니 바깥에 돌아댕기고 해도 아무 지장이 없을 거여.”
장세일 법사는 북을 치고 경문을 읽으며 귀신의 한을 달랜다.
그러나 두어 달 전 내가 처음 태안에 내려갔을 때 그는 오토바이 사고가 나서 병원에 있었다. 잠깐 문병하고 서울로 올라오며 귀신과 통한다는 사람이 교통사고 나는 일에 대해 동행들과 설왕설래한 적이 있다. 이번에 그걸 물어봤다.
“교통사고 같은 건 귀신이 그렇게 만든 걸까요? 단순한 사고일까요? 선생님은 보통사람과 다르니 사고 날 걸 미리 예감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이런 질문에 그는 당당했다. 일부러 하는 당당함이 아니라 일점 의혹이 없어 보였다.
“일진이 나빴던 거지.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우리 같은 사람도 하루도 안 빼고 일진을 짚어볼 수야 없제. 그래도 일진을 짚었으면 알기야 미리 알았겠제.”
두려움은 없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그게 귀신의 장난이면 귀신을 다루고 쫓아내는 방법에는 통달했다고 믿고 있다.
“안 믿는 사람들한테는 소용없어. 암만 조심하라고 해도 어디 내 말을 믿어주나.”
그가 말을 않고 입을 다무는 것은 그런 이유일지 모른다. 종이 고깔을 쓰고 낭랑하게 경을 외는 법사의 무표정은 그게 귀신을 불러들이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게 축제의 한 과정, 전승문화 이벤트 중의 하나로 전락했다는 난처함 때문인지 모른다.
그래서 그는 지금 그걸 남기는 일에 주력한다. 시간 나면 사무실에 나와 칼로 종이를 오린다. 이제는 귀신을 위협해 태울 목적이 아니다. 가르치기 위해, 보존하기 위해 종이를 ‘까순다’. 실은 배우겠다는 사람도 흔치 않다. 전적으로 매달리는 사람은 전수자 둘뿐이다. 종이 오리기는 동아시아 3국에 두루 있는 전통이다. 중국엔 지엔즈(剪紙), 일본엔 기리가미(切紙)라 하여 제각기 전통 무늬의 본을 삼고 국가적인 자랑으로 여기고 있다.
어르고 달래고 부비며
우리는 그 가치를 아직 잘 모르는 듯하다. 국학자 심우성 선생이 노력해 그가 충청남도 무형문화재로 겨우 지정됐지만 제대로 된 대접을 받는 것 같지는 않다. 일흔을 넘긴 장 법사가 오늘 아침 오렸다는 희디 흰 설위는 정교하고 치밀하고 눈부시고 황홀하다. 이게 신을 부르고 쫓기 위한 것이니 이렇듯 공을 들였지 예술로 여겨 오렸다면 배가 고파서라도 그 긴 세월 변함없이 칼질을 하기는 어려웠으리라.
따로 본을 뜨는 법도 없이 눈썰미만으로 모양을 척척 오려내는 신기를 탄복하며 바라본다. 묵은 달력을 들치자 이미 오려놓은 그림들이 연이어 나온다. 마치 마법과도 같이.
흰 너울을 서리서리 걸어놓고 놋양푼으로 장단을 맞추며 무욕하고 어진 법사 하나가 침착하게 앉아 경을 왼다. 귀신은 거기 와 차려진 음식을 흠향(歆饗)하며 맺힌 한을 굽이굽이 풀어놓는다. 경문 속에는 귀신을 위협하는 내용말고도 삼라만상과 천지조화를 갈망하는 시적 언어가 가득하다. 그는 애절하고 청아하게 독송하며 접신한다. 천지가 거기 조용히 감응한다. 착한 백성은 괜히 한숨을 쉬며 눈물을 찍어낸다. 이게 우리네 삶의 모습이었다.
그는 인간의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법사와 인터뷰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맘속에 따스한 물이 천천히 고여들 듯 나 또한 태안에서 넉넉한 평화를 얻고 돌아왔다. 장 법사가 50여 년 머릿속에 새겨진 말들을 다 기록하길 빈다. 손끝에 맺힌 종이 오리는 기술을 다 누군가에게 잘 넘겨줄 수 있길 빈다. 그래야 앞으로도 한 맺힌 귀신들이 와서 하소연할 때 그들의 쌓인 한을 풀어줄 수 있지 않겠나. 달래고 어르고 같이 흐느끼고 어깨를 부비면서.
그 방법을 일러주기 위해 그는 오늘도 종이를 오리고 경문을 기록한다. 아주 가끔 진짜로 귀신을 불러달라는 청이 오면 북과 놋양푼을 오토바이에 싣고 바람같이 달려간다. 신이 나서 종이를 까수고 천지를 어루만지는 목소리로 기운차게 경을 왼다.
출처: https://eastpeak.tistory.com/3384 [동쪽봉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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