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고 싶은 글

거짓말시리즈 |안동 경계를 걷는다 (1) - (9)

이산저산구름 2018. 5. 17. 08:34


거짓말시리즈 |안동 경계를 걷는다 (1) - (9)
– 김옥희 선생님편(1) |  다시 읽고 싶은 글
  
 김옥희 선생님 편 (1)
 

우리가 생명평화라는 거창한(?) 수식어를 달고 한번 안동 둘레를 한 바퀴 걸어보겠다고 머나먼 첫 장도에 오른 것이 지난 2006년 3월 11일 토요일이다. 응당 그날은 날씨도 화창하고 쾌적하여 산행하기에 이만한 날이 없다고 하여야 하나 찜찜하게도 올 들어 최대의 황사가 불어 닥쳤다고 여기저기서 법석을 떤 날이다.(그러나 이날의 황사도 다음 구간인 4월 8일에 그 명예(?)를 물려줘야 했다) 그러나 안동시 경계를 걷는 우리의 걸음이 앞으로 몇 겁의 걸음을 보태야 할지 얼추 가늠할 수는 없는 일이겠지만 무릇 세상만사가 시작이 반인 법. 이억만 리 불청객 타클라칸 사막 황사의 호위 속에서 무사무탈 시산제를 안동과 영주의 한 언저리, 일출봉의 어느 자락을 깔고 앉아 거창하게 읍해 올렸다. 그 역사의 현장에 주목되는 쟁쟁한 분이 여럿 계시는데 그 중에 한분이 바로 이번에 소개할 김옥희 선생님이시다. 
불문 닉네임은 생뚱하게도 “가을하늘 ”이다.
하여튼,
내가 개인적으로 김옥희 선생님을 알게 된 것은 이번 안동 경계걷기프로젝트를 통해서다. 물론 그 전에 서너 번의 불문산행을 통해 선생님의 존재를 전혀 모르는 바는 아니었으나 이 분이 이런 뚝심과 오기로 뭉쳐진 결코 예사스럽지 않은 분인 줄은 미처 몰랐음을 고백한다. 한편 이번 안동 경계걷기에 관한 이런저런 소문을 내며 한동안 불굴의 동참자를 찾고 있었는데 언젠가 대뜸 선생님이 내게 힐문하듯 한마디 건넨 그 물음이 원뿔에 갇힌 맥놀이처럼 오랜 동안 뇌리에서 가시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가? 유난히 김옥희 선생님의 이미지와 그 물음이 자주 오버랩 되는 이 이상한 현상을...
“아니! 정확하게 말씀하셔야죠? 그렇게 어정쩡하게 넘어가면 내가 제대로 선택할 수가 없쟎아요.”
“... 아니 그게 아니라 안동 경계라는 것이 그렇게 험난하거나 위험한 것이 아니라는 전제하에서...”
아마 선생님은 자신의 체력을 자신하지 못하였거나 아니면 “경계”라는 모호한 선입견에 일종의 위축을 느껴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또 다른 짐으로 지워지는 것을 걱정한 타인에 대한 배려인데 나는 아마 그것을 너무 단순하게 짚은 것이다. 하여튼 그날 이후 나는 꽤 까다로운 분이 한 분 계셔 앞으로 신경 좀 쓰이겠구나하는 약간의 “경계”를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결론적으로 내가 지켜본 김옥희 선생님은 참으로 대단한 분이다. 먼저, 그 엄살(?)에 있다. 엄살이라고 하니 펄쩍 뛰실 것이나 꼭 그렇지만은 않다. 정확히 몇 구간 째인지는 모르겠으나 지난 번 경계걷기 도중 암릉 종주(릿지등반)가 간혹 군데군데 있었다. 내 기억으로는  선생님이 부러 빠진 구간은 없는 줄 안다. 물론 가니 못가니, 선천적 고소공포증에 호소하는 등 나름대로 너스레를 풀며 동정을 호소했지만 단 한 번도 뒤로 물러서 함께 걷는 우리의 길을 고단하게 만든 적을 기억해 낼 수 없다. 이만하면 엄살도 새로운 등급을 매겨야 할 판이다. 그러면서 다음 경계걷기 회차에 어김없이 개근하신다.
 
그러나 사실, 김옥희 선생님의 진정한 모습을 알게 된 것은 지난 9월 말, 충북알프스 속리산구간의 불문산행을 통해서다. 설악산의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비슷한 지형을 찾은 곳이 충북알프스였는데 사실 충북알프스는 우리나라 악산 중에서도 가장 손꼽히는 구간이다. 무릇 험난하기 이를 데 없음인데 의외로 선생님이 선뜻 자원했다. 내심 놀래면서 내 딴에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래서 가는 그날까지 내 머릿속에서 진입 코스에 대하여 이런저런 고민과 우려가 교차했는데 과감히 지난 경계 걷기의 학습효과를 믿기로 하고 최초의 원안대로 밀고 나가기로 했다. 그러나 역시 우려대로 문장대코스는 최악의 코스다. 문득 문득 선생님의 행보가 궁금하고 걱정됐는데 놀랍게도 항상 내 앞에 계신다. 안색은 긴장되었으되 행동거지만은 매우 신중하고 조신하다. 이 또한 함께 하는 동료에 대한 깊은 심원의 배려일 터. 자신을 감춰 전체에 맞춘다는 것. 그것은 흡사 준비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비범한 수양이 아니고 무엇일가? 갑자기 알 수 없는 짠-함이 솟구친다. 일종의 믿음이기도 하겠고 마음 깊숙이 각인되어지는 존경심이기도 하거니와 충만 되어지는 지순한 행복....  등등  
 
 김옥희 선생님의 불문 아이디가 “가을하늘”이란다. 아직 가을이 오지 않았을 때 경계를 걸으면서 종종 선생님을 훔쳐보지만 딱히 이것이 가을하늘만의 모습이다라는 특별한 것을 발견해 내지 못했다. 나의 우둔일 수도 있겠고 미련함일 수도 있겠지만 굳이 선생님께 따로 묻지 않았던 것은 어떻게든 나 혼자 힘으로 그 의미를 짚어보려는 욕심도 없질 않았다. 그런데 그 쉽지 않은 작업이 시간에 밀려 다가온 자연의 계절 “가을”이 멀끔히 해결해 주었다. 답은 “공주”다. 그러고 보면 언제부터인가 낙엽이 물드는 가을이 다가옴에 따라 선생님은 자연스럽게 공주로 불리는 때가 더욱 많아진 것 같다. (나만 모르고 다른 선생님들은 다 알고 계셨던 것일까?). 일반적으로 공주라면 예쁜 짓만 골라서 하는 미운 경우와 우아한 품세로 주위를 압도하는 선망의 경우가 있다면 내가 아는 공주 김옥희 선생님은 우리 경계걷기에 있어서 이 둘을 아우르는 탁월성이 있다고 본다. 굳이 그 이유를 묻는다면 선생님의 존재는 입술과 같아서 없음은 이를 시리게 하는 허전함을, 또한 함께함에는 부러움을 통한 누군가의 삐침을 유발한다고 해야 하나....(아부가 심했나?)  하여튼, 
무릇 , 앎이란 머리로 익히는 것 보다 가슴으로 느껴야만 그 진정성이 살아 있다고 한다. 기실, 올곧은 마음과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이기도 한데 오늘은 이 말을 우리 안동 경계를 걷는 사람들에게 조용히 대입해 본다. 경계의 “경계”는 우리 안경사 그 누구도 아직 가보지 못한 미답지이다. 조그만 지도 한 장과 컴파스 하나에 의지해 대오가 나란히 초심을 잃지 않고 앞으로 또 앞으로 간다. 과연 우리가 믿는 것은 정확한 지도와 컴파스인가, 아니면 서로에 대한 대동의 믿음과 신뢰인가? 고백하건데 처음 예고개 일월암 봉수산에서 거창한 수식어로 출발할 때는 최소한 우리 경계의 길은 지도와 컴파스에 더 가깝다고 믿었다. 일면 가슴보다 머리가 앞선 섣부른 잣대였다. 그래서 시행착오와 잦은 실수가 두려웠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길 노정은 머리보다 가슴이 더 뭉클해질 수 있고 또 구르는 눈덩이와 같은 엄청난 큰 힘이 될 수 있음을 알았다. 감히 그 가슴의 한복판에 김옥희 선생님이 계신다고 하면 대단한 실례일까? 혹여 헛기침 하나만으로도 흐트러진 우리의 길을 새삼 추스를 수 있는 무언의 신화와 같은 무거운 존재. 그런 분이 나와 함께 같이 한다는 것, 그런 사실 하나만으로도 알고 보면 이 얼마나 다행한 행복인가? 
   
일면 부끄럽고 놀랄 일이지만 김옥희 선생님의 담당과목이 윤리라는 사실은 얼마 전 불문 카페를 통해 알았다. 먼저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을 함께한 귀중한 분에 대한 예의치고 나의 무례와 무심을 깊이 반성하지 않을 수 없다. 눈을 감고 조용히 지난 기억을 더듬어 선생님의 경계 어록을 살펴보니 유난히 우리 사회의 비도덕적 상식과 어긋난 “관계”에 대해  강개어린 비토가 적지 않았던 것 같다. 그만큼 점점 각박해지는 이 사회에 아직도 식지 않은 깊은 애정과 또 인간에 대한 따뜻한 사랑이 강하다는 증거인 셈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번 17번째 경계산행을 마치고 우리 <안경사>를 자택으로 초빙하여 거나한 뒷풀이를 자청하신다. 하릴없이 얻어먹는 나야 두말할 것 없이 만세 삼창이지만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선생님의 훈훈한 동료애에 물씬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울컥해져온다. 안타깝게도 마지막 불미스런 개인적인 일로 인해 선생님의 자택을 방문하는 영광을 놓쳤지만 지금까지 가슴으로 걷는 우리 경계걷기의 경험으로 보아 이런 영광된 날이 또 오지 않을까 믿기도 하고 또 나 때문에 남겨줬을 과분한 과메기에 대한 공치사 셈이라도 해야 응당 사람구실을 하지 않을까하여 미력한 글이나마 김옥희 선생님께 감히 올린다.  
사람과山 06.12.03. 00:21
제가 거짓말(?) 운운한 것을 가지고 너무 확대해석한다는 말씀들이 있어 서둘러 올립니다. 통촉해 주시기 바랍니다. 경계 끝날때까지 시리즈로 묶어 볼까합니다(제게 맛있는 것 사 주시는 분 순서대로)
┗얀숙 06.12.03. 15:35
아뿔사, 이번 주 경게걷기 마치고는 뒷풀이를 우리집에서 하기로 했는데 우짜노. 대장님, 얀숙은 거짓말 시리즈에서 제발 빼 주이소. 킬랐다아  
얀숙 06.12.03. 15:29
그래서 '가을하늘'님이 '공주'입니다요  
병산 06.12.03. 20:09
아부가 심했다. 선거는 다가오고 우리 대장이 마음이 급했군! ㅉㅉ 대장 이야기는 내가 쓰지!!  
가을하늘 06.12.03. 23:04
김옥희를 제일 먼저 평가한 이유 1. 지난 주 과메기 때문. 2. 사실대로 쓰기는 머시기 하고 거짓말을 하자니 낯 간지럽고 그래서 빨리 해치우려고. 대장님, 맞지요!!! 이런 게 올라온 줄도 모르고 오늘 불문에 갔더니 시돌님이 앞으로 평가저지싸움을 하시겠다던데, 저는 이미 까발려졌으니 평가적극찬성운동을 하겠습니다요. 근데 대체 어떤 사진들을 올려놓으셨는데 안 뜨는지 겁납니다요.
불생불멸 06.12.04. 08:59
내용은 재미있고 좋은데, 한 번 할 때마다 몇시간이 걸릴텐데, 안 그래도 이 일 저 일 벌려놓은 것 많은 사람이 시간이 너무 소요되니 시리즈는 가을하늘을 대표로 한 사람만 하고 그 시간에 신선생님하고 시간 좀 보내는 것이 어떨꼬 ? 어쩌다 집에 한 번 일찍 들어와서는 컴퓨터 앞에만 않아있으면 좋아할 여자 없거든. 꼭 할려면 다른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용역을 주던지 ?
┗사람과山 06.12.04. 09:35
선생님의 배려 감사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고민인데 마침 "사람과산" 환경연재가 끝나서 큰 짐을 덜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께서 한번 이 작업반장이 되어 보시는 것이....
┗불생불멸 06.12.05. 08:55
나는 여러 사정으로 잘 안되고, 먼저 소개받은 가을하늘이 다른 사람을, 그 다음은 그 다음 사람이 하면 ?
┗얀숙 06.12.05. 08:58
평가저지! 투쟁!
김헌택 06.12.06. 16:44
아하! 대장님의 이렇게 깊은 뜻이 계셨구만이라...... 가을하늘 김옥희샘 첨으로 대장님으로부터 점지 받으셨으니 참 부럽습니다요! 샘도 좀 나네.
가을하늘 06.12.09. 00:47
내일 경계걷기를 앞두고 다시 읽어보니 대장님께 애쓰셨다는 인사도 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강준만씨인가요? 실명 평가를 주장하는 사람이! 사람을 앞에 놓고 쓰기가 쉽지 않으셨을 텐데 대원들에 대한 대장님의 애정과 처음 제가 참가했을 때의 대장님의 염려스러운 마음이 그대로 느껴집니다. 그래도 잘 보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박병한, 김인숙 부부 (2)
 근래 들어 산을 오르는 행위로서의 등산이 하나의 웰빙스포츠로 대두됨에 따라 주목할 만한 여러 형태의 등산방법과 형태가 우리의 시선을 즐겁게 하고 있다 . 심지어 이색적이다 할 정도를 넘어 약간의 질투를 동반한 부러움을 사는 형태도 종종 있는데 예를 들면 이런 류가 아닐까 ? “칠순 기념 백두대간 단독종주” ”뚜벅이 가족 대간가는 길” “부자 (父子 )가 함께 손잡고 , 여기에 “편견을 넘어 보통 지향” ”나이만큼 지은 죄를 지고 갑니다.” 이쯤 되면 괜한 눈시울이 불거진다. 대간길을 걷다 난데없는 이런 문구의 리본과 마주칠 때면 아무리 둔한 사람이라도 감히 발걸음을 함부로 하지 못하는 법이다 . 그러나 이런 형태의 등산은 그 내거는 이름만큼 무게가 결코 녹록치 않아 그 걸음걸음에서 정도의 여유와 자유로움을 읽어내기가 여간 쉽지 않다 . 하지만 이 땅의 종주 (宗主 ) 백두대간을 걷다 보면 가장 흔하게 발견되는 표시길 중 하나가 바로 누구누구 부부 , 몇 주년 기념종주니 축복산행이니 하는 정겨운 말들의 마주침이다 . 괜한 웃음이 묻어나면서 일순 작은 감동이 일렁이다 .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우리 경계 걷기에서 박병한 , 김인숙 부부가 가지는 그 유의미성은 결코 몇 마디의 말과 글로서 감히 흉내 낼 것이 못 된다.

 물론 내가 과문한 탓이겠지만 소문만큼 유명한 박병한 님의 사진작품은 아직 직접 접해보지 못했다 . 간혹 불문 이곳저곳을 뒤적이며 박병한 님의 흔적이나 냄새를 맡을까 끙끙거려보았지만 아직 이렇다 할 호기심을 충족시키지는 못했다 . 스타는 마지막에 등장하고 조명이 없으면 무대를 오르지 않는다고 했으니 좀 더 지켜볼 일이지만 말이다 . 그런데 존경하는 이 분의 이미지는 항상 카메라와 오버랩 된다 . 그 이유를 명확히 설명할 수 없는 것이 꽤나 안타까웠는데 언제부터인가 이분의 안목과 시선이 결코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직감으로 알게 되었다 . 누가 그랬던가 ? 예술로서의 사진은 시작과 끝은 야생 (野生 )에 있다 . 살아있음을 제대로 살려내는 일 . 이것이 사각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진정한 진가다 . 그래서 그런지 종종 이 분의 번뜩이는 눈과 마주칠 때면 그 안에 담긴 그윽한 세계가 자못 궁금해진다 . 문득 세상을 제대로 볼 줄 아는 마술의 눈동자를 가진 사람들만의 특권일까 ? 이 분은 오직 자신의 눈만으로 블랙홀처럼 세상을 담을 뿐 아직 함부로 세상에 사각의 잣대를 들이대질 않고 있다 . 그러나 부질없이 세상의 부침에 민감한 촉수를 가진 내가 진정한 박병한 님의 흔적이나마 접할 수 있는 기회는 그 언제랄 지 .... 
혹 이상하게 들릴 진 몰라도 간혹 김인숙 선생님을 보면서 여성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여성의 정체란 무엇인가? 또는 여성의 힘은 어떻게 구현되는가? 이 정도쯤 되겠다. 재학시설, 정말 어수룩한 시절이 있었다. 이를테면 학년 중 100 일 산행기록 깨기가 있었는데 무모하게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런 기록들은 그렇게 쉽게 깨지는 것이 아니다 . 그런데 놀랍게도 이런 기록은 의외의 여성에 의해 다시 쓰여지게 되는 것에 이르면 그저 말문이 막힌다. 그런 여성 후배 2 명이 대구 앞산과 설악산 토왕폭을 오르다 비명 속 산에 묻혔다. 그 후배 중 하나가 여성산악인 남난희 를 매우 존경한다고 고백한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닮아 가겠노라고. 남남희는 84 년 초 우리나라 최초로 동계 백두대간 단독종주를 성공하여 이 땅에 백두대간 신드롬을 일으킨 장본인이며 또한 최초로 중량급 히말라야 초등을 여럿 이루어내면서 우리나라 여성 산악계에 때아닌 원정 붐을 주도한 인물이다. 그 바톤을 이어받은 여성산악인들 중엔 토왕폭 초등의 조희덕 씨와 에베레스트 원정대장 지현옥 씨가 있다 . 현재는 오은선 씨가 세계 7 대주 최고봉을 완등하여 화려한 조명을 받고 있는 중이다 . 왜 하필 김인숙 선생님을 통해 이런 인물들을 추억이냐고 굳이 묻는다면 딱히 답할 말은 궁하나 경계 걷기를 통해 보아온 선생님의 열정과 흔들림 없는 의지 등을 고려하면 이러한 연상이 전혀 설득력이 없다고는 하지 못할 것이라 답하겠다. 

흔히 부부는 살아가면서 서로 닮는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 일심동체라 하는지는 모르겠다. 하여튼 부부가 서로 닮아간다는 사실, 즉 경험상 “동체”보다는 “일심”에 더 무게를 두고 싶다. 혹 어긋놓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무쇠도 세월의 무게를 이길 수 없음인데 하물며 세파에 닳아 가는 인간에 있어서야.... 운운하며 적당히 타협하고 적당히 운신하는 보신주의로 말을 서둘러 마치려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여기서 닮아 가는 부부의 “일심 ”이란 단순히 세상을 사는 방법에 있지 않다 . 오히려 세상을 당당히 맞닥뜨리며 또 정면으로 헤쳐나가는 용기와 힘에 있다 할 것이다 . 무릇 천차만별한 사람에게 있어 그 추구하는 방법과 형태는 다양할 것이다. 내가 아는 박병한, 김인숙님 부부는 이런 면에서 아주 독특한 부부다. 그 추구하는 취미와 개성에 있어서 언뜻 확연히 다르게 느껴지는데 그 함께 섞여 맺어지는 조화와 평화가 매우 포근하다. 지난 연휴 때에는 함께 덕유산 자락을 밟고 왔다고 들었다. 나이가 들수록 함부로 멀어지기 쉬운 것이 우리 인간들이 맺는 갖가지 “관계 ”라던데 이들 부부만큼은 나무 속 나이테만큼이나 매우 견고해지는 모양이다 . 누군가 갈수록 앵꼽다 하더니만 이를 두고 하는 말은 아닐는지... 
 
 안동 경계 걷기를 통해 박병한, 김인숙 님을 보면서 종종 이런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진정한 중년의 삶은 무엇인가? 굳이 같이 가는 동행이라서 후한 점수를 염두에 둔 말이 아니다. 내 앞길을 먼저 간 분들을 통해 거울처럼 나 자신 들여다보기를 종종 환각처럼 즐긴다. 개중엔 떨쳐내야 할 길과 비켜가야 할 길, 그리고 닮아야 할 길을 스스로 분류해 나 자신의 참고서로 곧잘 활용한다. 그러나 고백하건대 불행하게도 내 주위엔 돌아가야 할 길이 더 많았다. 시쳇말로 돈에 울고 명예에 울고 허울에 목숨을 건 많은 가엾은 중년들이 내 주위를 서성이며 배회했다. 유혹도 많았고 가식의 웃음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내 자신이 그러한 길로 접어들 능력과 혜안이 없다는 것에 더 가슴 아파한 적이 더 많은 듯싶다. 뒤늦게나마 모범 답안지를 찾아 헤매지만 그 어디 쉬운가?
 내가 그 모범 답안 틀을 이들 부부에게서 약간의 계시를 받았다면 너무 무례한 것일까? 이를테면 떨어진 시간만큼 부부가 함께 할 수 있는 것들의 모색이다. 또 너무 가까워서 오히려 소홀해질 수 있는 것으로부터의 진정한 사랑의 추구다. 감히 말하건대 박병한 , 김인숙 부부에겐 있어 안동경계 걷기가 이들 부부에게 주는 또 다른 사랑의 소득이 아닐까 한다.

“배려”란 참으로 어려운 말이다. 배려의 말속에 자신의 손해와 마음의 양보가 함축되어 있다. 형제자매와 심지어 부모 간에도 이해가 맞지 않으면 으름장을 놓는 시대를 감안한다면 타인에 대한 배려란 참으로 어려운 실천을 요구하는 말이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하면 배려란 그렇게 어려운 말도 아닐 듯싶다. 우리가 경계로 나아가면서 체득한 사실 중 하나가 배려의 진정한 의미가 아닐까 한다. 즉 나의 의도된 작은 행동과 실수가 남에게 괜한 불편함을 끼칠 수 있다는 생각. 그런 생각을 가질 수 있는 것 자체가 타인에 대한 배려의 정신이 아닐까? 그 한 생각을 일으키는 순간 나 자신을 절제할 수 있고 작은 미소를 응답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진정한 배려의 정신이지 싶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안동 경계를 걷는 사람들” 모두는 최상의 콤비로 이루어져 있다고 확실히 믿는다. 그리고 이 중심에 우리 박병한, 김인숙 선생님 부부가 우뚝 하다고 한다면 다른 분들에게 너무 죄송한 것인가?  

 그저께 방영된 영남방송 속 지난번의 고라니 구출사건(?)은 두고두고 우리 마음에 깊숙이 각인될 듯합니다. 특히 생존을 위한 마지막 본능이 좌절되었을 때, 그리고 어쩔 수 없는 절망을 운명으로 받아져야만 할 때의 그 초점 잃은 아득한 눈빛이란 차마 떨쳐낼 수 없는 어떤 처연함 그 이상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무릇 사람은 위기에 봉착해서야 비로소 친구를 알아본다고도 합니다. 이번 위기에 빠진 고라니로서는 우리 안경사가 그의 평생 잊을 수 없는 진정한 친구라 생각하겠지요. 한편 생명평화를 모토로 하는 우리 안경사에겐 일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이런 당연한 일들이 또 다른 새로운 생명에겐 엄청난 의미로 다가온다는 평범한 사실을 새롭게 배운 계기도 되었음은 물론입니다. 그러나 이번 고라니 구출사건을 통해 무엇보다 내 기억에 강렬하게 아로새겨지는 것은 카메라에 잡힌 고라니의 초점 잃은 눈빛과 김인숙 선생님의 어쩌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진실된 눈빛이 상호 교차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생명에 대한 깊은 연민과 애정, 그리고 가여움에 대한 본능적 사랑이 없다면 그런 안절부절 맑은 눈빛들은 불가능하겠지요. 이런 이유로 우리 안경사가 아주 특별할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이유에 선생님을 덧붙입니다.  
이 정도면 지난번 먹은 음식 값은 제대로 갚았을는지 모르겠네요.
 
시돌 06.12.20. 21:41
내가 감히 이 글을 처음 읽었습니다. 김인숙과 박병한을 만난 것이 오래지 않은 것 같은데, 내가 이들에게 놀란 것은 이들이 서로 대단히 적극적으로 서로에게 술을 권한다는 사실이다.
snowblue 06.12.20. 22:11
대장님, 마지막 한 줄은 빼시옵소서. 박선생님의 사진을 까페에서도 많이 감상할 수 있다면!
가을하늘 06.12.20. 22:30
평가는 계속된다!! 이산님과 저산님(아주 가끔), 병산님과 백설님도 보기 좋지만, 박선생님과 얀숙님은 두 분의 무게만큼이나 우리 안경사에서 보기 좋은 부부이시지요. 근데 다음 뒷풀이는 아무도 안 할려고 하지 않을지....
얀숙 06.12.21. 09:08
아~하하! 이거, 뭐 민망해서리... 그릇됨과 미숙함을 사랑과 애정의 눈길로 봐 주시는 대장님 글고 함께하는 우리 대원들의 배려와 마음이 더욱 아름답고 빛납니다. 자우당간에 보내주신 찬사에 깊이 감사드리고, 대장님께서 자꾸 이렇게 나오시면 아무도 뒷풀이를 안 할려고 하지 싶습다요
불생불멸 06.12.21. 09:50
글의 주인공이나 글 쓴 사람이나 모두 대단하우. 그런데 이 것이 모두 거짓말이란 말이우 ?
그저물처럼 06.12.21. 11:15
참말이다마는....
박병한 06.12.22. 14:32
우리 안경사의 지도부 한대장님은 너무 과찬의 말씀을 하셔서 몸둘바를.. 실제 사람 사는 모습이 너나 할 것 없이 오십 보 백보이거나 대동소이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부부도 제가 부족하여 남모르게 많이 다투며 살고 있습니다. 우리대원들은 저가 볼 때 모두가 보통수준을 넘는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지금까지 여러 모임을 하고  있지만 우리 안경사만큼 수준 높은 사람들과의 모임은 처음입니다. 안경사 대원들에 비해 제 수준이 조금 모자란다는 뜻입니다 . 그러나 얀숙님 덕분에 좋은사람들 만나서 좋은 대화로 늦게나마 많이 배우고 있으며 정말로 좋은사람들이라 생각하고 늘 고맙게 생각합니다. 대장님은 근무지변경으로 정신없을텐데 대단하심..
김헌택 06.12.24. 16:05
박병한 김인숙님 부부를 대장님께서 제대로 보셨습니다! 저 또한 그렇게 많이 생각해왔으나, 워낙 게으르다보니, 대장님이 올린 글 제대로 읽기도 힘이 듭니다! 두 분의 겸손의 댓글도 돋보입니다요! 기쁜 성탄 맞이하시길..... 메리크리스마스!



거짓말 시리즈(3) 배용한 선생님 편 
 
  안동시 경계 걷기도 어느덧 종점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 무릇, 삶이 녹아 있는 살아있는 역사란 일상적으로 행해지는 작은 것들의 집합이라고 본다면 우리가 걷는 경계의 노정도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데 결코 소홀히 다룰 수 없다 하겠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함께하는 모든 이를 다 함께 칭찬하면서 뒤 말을 풍성히 하기 위해서라도 이 시리즈를 여하든 간에 끝까지 매듭 지우려 합니다.  
   
   몇 년 전 송강호가 열연한 임필성 감독 작 영화 “남극일기 ”는 남극이라는 지리적 조건을 이용 , 혹한의 추위와 또 그 속에서 인간의 접근을 저어하는 냉엄한 자연세계를 인간의 불굴의 의지로 도달불능점(극점)을 탐험하는 쉽지 않은 여정을 약간 섬뜩하게 담은 작품이다. 하지만 처음 감독의 들뜬 바람과는 달리 시장에선 그렇게 큰 기대를 모으는 데는 일정부분 실패한 작품이다. 그 실패한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
 
 생명 평화의 길, 안동시 경계를 걸으면서 “남극일기” 속 대장 최도형를 생각한다. 자신의 정서불안정으로 탐험대 대원들을 차례로 죽음으로 몰아넣는 얼음처럼 차가운 비정에 대하여. 그렇지만 그런 운명을 알면서 그의 곁을 묵묵히 따라가는 대원들은 또 뭔가? 그 보이지 않는 힘은?
 
 차가운 냉정과 비정을 제외한다면 내가 아는 시돌님은 영화 속 송강호처럼 알 수 없는 무서운 힘을 지니신 분이다 . 어딘가 모르게 한 곳으로 가지런하게 조율하는 놀라운 마력의 소유자처럼 보인다. 백 마디의 허언 보다 강렬한 눈빛 하나만으로. 이 점을 고려한다면 시돌님은 그런대로 영화와는 달리 어느 정도 성공한 것으로 보이는데 ….. 
 
  한때 시돌님을 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종종 들었었다. 이른바 수학(논리학)과 문학의 연관성이다. 비례관계? 아니면 그저 그런 관계? 나름대로 셈을 잘하고 계산에 빠르면 글도 잘 쓰고 말도 잘함은 물론 임기웅변의 재치도 곁가지로 가지게 되는 것인지? 하여튼 외양으로 풍기는 선생님은 단연 수학과는 일정한 거리가 있어 보인다. 놀랍게도 수학을 전공으로 하고 예전에 건축을 하셨다고 하니 더 더욱 경이롭게 느껴진다. 그런데 부끄럽지만 언제부터인가 그 놀람은 내 스스로 설정해 놓은 ”관계 ”에서 유발되는 일종의 선입관 내지 “낯 선 경계 ”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 이런 표현이 감히 어울릴지는 모르겠지만

시돌님의 글은 참으로 너무나 수수하다. 군데군데 곤란한 삶이 그대로 녹아 있고 표현 방식이 매우 우리네 일상과 닮아 있다. 이를 어찌 “셈”과 “논리”로만 이해하려고 했는지 뒤늦은 깨우침을 얻는다. 그러고 보면 이런 말도 들은 적이 있는 것 같다. “글도 건축이다. 집을 짓든 설계와 기초가 나름대로 튼실해야 되는 것이다.” 그 집의 기초는 물론 결코 녹록치 않았을 선생님의 일상 삶이었을 것이지만.  
 
  ‘생명 평화의 길, 안동시 경계를 걷는다’를 하면서 시돌님께서 친히 지도부(地圖部)를 이끌 것이라고 감히 생각지를 못했다. 욕을 바가지로 먹을 각오로 말하건대 일단 연륜이 그러하고 날렵한 몸맵시가 그러하다. 오히려 예전의 간단치 않은 선생님의 삶을 반추하여 긴 노정에 있어 반드시 드러날 나의 작은 실수와 허물이 어떤 상처의 흔적으로 남을 것이 더 두려웠다 할 것이다. 허나 자연스럽게 시돌님의 역할이 무겁게 엮어지면서 나의 허물들은 티끌처럼 묻혀지고 어느덧 의지하게 되었다. 사뭇 놀라운 변화인데 곰곰이 생각한다면 이러한 우려는 시돌님의 삶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나의 무지이기도 하다. 어찌 시돌님이 가만히 뒷전에 않아 지켜보고만 있을 것이랴? 
 
  우리가 걷는 길을 다 함께 생명 평화의 길이라고 부르고 있다. 듣고 보면 참으로 뜬금없는 말이기도 하다. 나도 즐겨 부르기엔 약간 낯간지러운 부분이 없진 않은데 시돌님을 보면서 이 생각을 한 순간에 고쳐먹었다. 우리가 가는 길 내내 선생님의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하찮은 짐슴의 “똥들”에게조차 무한한 애정과 그윽한 시선을 보낸다. 또 녹음이 우거진 무더운 한 여름, 얼기설기 소나무를 목 죄는 칡넝쿨이라도 발견할라치면 선생님은 어김없이 주머니를 뒤져 접이용 나도를 들이댄다. 그러면서 “이게 옳은 것인지 나도 몰라!” 허허한 웃음을 날리지만 평소 “옳음 ”에 대한 확신과 “실천”을 생활화 한 소탈한 삶만이 가능한 결코 싶지 않은 행동임을 누가 모를 것인가? 감히 생각하건대 적어도 시돌님이 있어 우리의 길이 이름에 무색하지 않다면 다른 분들에게 너무 실례일까?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함부로 걷지 말지어다. 오늘 내가 걸어간 발자국은 뒷사람의 길이 되리니.” 자신의 길에 확신을 가지고 있던 김구가 가장 깊이 간직했다던 사명대사의 경구다. “희망이란 길과 같다. 걷는 사람이 많아지면 결국 길이 된다.” 2007 계해년 새해 첫날,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문자메시지로 날린 노신의 말이다.
  “가입시더 !”
지난 3월 11일, 안동시 경계걷기 대장정에 나서면서 시돌님께서 남기신 어록(?)이다. 그 후 선두는 줄곧 시돌님의 몫이 되어 버렸다. 
 
사람과山 07.01.17. 18:23
이상하게 들릴 진 모르겠지만 오랜만에 약간의 여유를 가지니 온갖 잡생각들이 마구 마구 드네요.
snowblue 07.01.17. 22:15
시돌의 매력 = 산다람쥐 닮은 영원한 소년~~
┗안얼레지 07.02.08. 16:34
'호기심돌이 시돌샘'에 이어 한 표!!
시돌 07.01.17. 22:44
민망함을 무릅쓰고 제 블로그로 스크랩합니다. 대장님 성불하십시오.
김헌택 07.01.18. 08:42
시돌님의 지도부 역할에 다함없는 신뢰를 갖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베트남의 아버지 호치민과 같이 우리 민족 통일의 지도자로 거듭나시길 희망합니다!
가을하늘 07.01.19. 10:16
멀리서 볼 땐 무지 대하기 애러운 분으로 보였는데 가까이서 보면 백설님의 표현이 딱 맞지요. 점점 술이 늘어가시는 것도 참 보기 좋은데 얼마 전 골다공증 운운.... 해서 우리가 얼마나 배려해야 할지 헷갈립니다.
불생불멸 07.01.19. 13:52
사람은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해. 어떤 놈 시켜서 하면 죽어도 안할 것이다. 
 


거짓말시리즈 (4) - 박용제 선생님 편 


아주 오래 전 내가 읽은 책 중 가장 인상 깊은 책이 최영미의 “시대의 우울”이라는 책이다. 미술학도로서 치열한 학생운동 경력이 있는 한 여 작가가 서유럽의 여러 미술관과 박물관을 두루 돌며 그 감상과 감흥을 우리 현실에 빗대 매우 격조 있게 짚어낸 책으로 기억한다. 미술과 조각 등에 문외한이 내가 굳이 이 “시대의 우울”을 들먹거리는 것은 바로 우리 경계걷기 박용제 선생님의 우수와 우울에 약간 오버랩 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약간은 닮아 있다고 본다면 지나친 말일까? 무릇 “우울 ”이란 “체념”과 그리고 “회의”와는 전혀 다른 의미로 읽힌다면 삶에 있어서 매우 심오하고 근원적인 철학에 맞닿아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왜 선생님을 지켜보면서 이 “시대의 우울”이라는 작품을 떠올렸는지는 나로서도 잘 설명을 할 순 없지만 하여튼 그 알 수 없는 짙은 무엇이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그 연상의 정체는 무엇일까?  

 
 요즈음은 등산 황금의 시대라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일상에서 부딪히는 사람들 중 결코 적지 않은 사람들이 등산을 취미로 삼거나 생활의 일부분으로 즐겨 산을 찾는다. 어떤 이는 건강상의 이유로, 또 다른 이는 스포츠나 오락의 일부분으로서 산을 삶의 대상으로 삼기도 한다. 무릇 다양화를 추구하는 사회에서 결코 나쁘다고만 할 수 없는 현상이다. 그러나 나 역시 산을 즐겨 찾는 사람들 중 한 사람으로서 굳이 산이 좋다거나 각별하다며 생색내는 것이 오히려 궁상맞고 어색해졌다. 해서, 부러 누구에게도 그런 진부한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하지만 문득 문득 간절해지고 특이한 주제 산행을 하고 싶은 욕망을 감출 수 없을 때가 간혹 있는데 그 예가 여기 우리의 생명 평화의 길, 안동 경계를 걷는다가 아닐까 한다. 그런데 의외로 우리의 경계걷기가 시간이 갈수록 뚝심을 더해가는 데는 나름의 특별한 이유가 있다고 본다. 그 중심에 박용제 선생님이 있다고 보는데 그 이유는 이런 것이 아닐까? 산을 그저 등산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 풀어 쓰면 산은 우리들의 일상 삶이요 또 살아 있음의 증거이자 존재이니 그저 함께 어우러지는 대동의 세계일 뿐이다.  
흔히 “숙맥 (菽麥)같다”는 말은 콩과 보리조차 제대로 구별해내지 못할 정도로 어리석다는 의미로 약간의 측은한 감정이 이입된 말이다 . 하여튼 숙맥 같다는 말은 당사자에게 그렇게 유쾌한 말은 아닐 것인데 이 말을 예전에 왕왕 듣던 나는 이 말을 매우 경계하였는데 이번 경계걷기를 하면서 그만 선생님을 통해 은밀한 곳을 들켜 버린 기분을 지울 수 없다. 경계에 지천으로 가득한 봄꽃하며 방긋한 각종 야생화, 그리고 파릇한 각양각색의 나무에까지 제대로 불리는 이름을 나는 알지 못한다. 산에 대한 자자한 소문에 비해 주마간산으로 산을 오르내렸다는 치부를 제대로 들키기나 한 것처럼 부끄럽지 않을 수 없음인데 그런데 놀라운 것은 어떻게 자연과학을 하신다는 분이 그토록 세세한 이름까지 죄다 꿰고 있는지 그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겠다. 그런데 선생님의 품성을 살펴 곰곰이 따져보면 그렇게 놀라운 일도 아닐 듯싶다. 일상의 소소한 삶, 그리고 우리 주위에 널려 있는 작은 생명에 대한 관심과 애정 그리고 배려의 여유가 있다면 그것이 무에 어려운 일일까? 내가 왜 숙맥의 소리를 들어야 하는지 선생님께서는 조용히 실천으로 가르치고 계시는 셈이다.
     
  선생님의 아이디는 생뚱(?)맞게도 “불생불멸”이다. 불생불멸의 의미를 내 딴에 짧은 한자로 요리저리 저울질해 감히 이런 뜻으로 굳혀 버렸다. “대중의 세계에서 새로 생기거나 없어지는 것은 결코 없다.” 이쯤 될 듯싶은데 이 무슨 수수께끼 같은 심오한 의미일까? 노자와 장자를 따로 모시고 공부해봐야 할 듯싶지만 ……
올 겨울은 유난히 따뜻하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덥다고까지 표현한다. 지구온난화로 인한 엘니뇨현상 때문이라고도 하는데 이러다간 큰 재앙이 오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 섞인 목소리도 곳곳에서 들린다. 문득 난데없는 올 겨울을 보면서 “불생불멸 ” 선생님을 생각한다. 진정 새로 생기거나 소멸되는 것은 없다. 과연 무슨 뜻일까? 선문답 같은 화두 하나 잡고 시름에 잠기니 작은 무엇이 하나 잡힌다. 아뿔싸! 자연은 그저 그렇게 있는 것이다. 무수한 변화도 자연 섭리의 일부분이다. 사람이 나고 죽는 것도 자연이 허락한 작은 일부분일 뿐 그렇게 호들갑 떨 필요가 없음이니 …… 괜한 시비는 오로지 인간의 근본 없는 탐욕에서 비롯되는 것이로니……
 
 이번에 불문에서 겨울 덕유산 산행을 다녀왔다 . 사람 사는 아래 동네는 따뜻했다고 하지만 거대 산이 숨쉬는 고도의 세계는 아직 거친 칼바람을 토해놓고 있었다. 모두 각오했을 일이라 나의 허튼 말과 달리 그렇게 걱정하지는 않았지만 박용제 선생님의 차림을 보고 결코 안심할 수는 없음을 고백한다. 지난번 여름철 경계걷기 시 맨발에 슬리퍼로 작은 놀라움을 선사하더니 이번엔 증정용 실장갑을 끼고 오셨다. 혹 덕유산의 높이를 잊은 것이 아니라면 분명 각오한 터일 것이다. 그러나 살을 에는 칼바람에 얼마나 손이 아렸을까? 결국 말 한마디 거들지 못하고 마음으로 빌었는데 후에 선생님의 말씀이 오히려 내 귀를 의심케 한다.
 “이 시련 또한 곧 지나가려니 ……”
세상에나 만상에나 ! 
 
병산 07.02.07. 23:31
시대의 우울이라.... 그 남자에게서 우울이 느껴지기는 하지! 갈증을 애써 참고, 그 참을 수 없는 "참음"이 어느 순간부터 용서가 되면서 이윽고 道가 되는....그 남자에게서는 오베르 시절 고흐와 같은 우
울이 느껴지기는 하지.
┗능선 07.02.08. 11:46
이런 걸 '실존적 우울'이라고 하던가.
시돌 07.02.08. 10:11
이제 누군가가 대장을 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능선 07.02.08. 10:12
공부는 잘 되 가시는가?
능선 07.02.08. 11:46
일전에 명퇴하는 선배를 보러 멀리 갔었는데 이 친구가 술을 못한다기에 운전을 시켜 다녀왔는데 좀 미안! 그보다 선배들은 하나둘 떠나고 술을 끊는 사람도 자꾸 늘고...
최형석 07.02.08. 13:30
사진을 보는 순간에 마음이 편안해지고 웃음이 실실나오는데 나도 그 이유를 모르겠네요.
가을하늘 07.02.08. 14:50
너무 한쪽 버전으로 몰고 가는 것 아닌가요? 나는 불멸님이 큰소리 치면서 싸우는 걸 보고싶기도 하거던요. 이 글이 영 그 싸울 기회를 빼앗아 버리지나 않을지....
┗안얼레지 07.02.08. 16:27
큰소리치며 싸우면 말도 더듬습니다. 최형석샘 화나면 눈 커지는 것처럼 참 보기 힘든 장면이지요.
┗시돌 07.02.08. 21:24
나는 최형석 선생 눈 커지는 것도 본 적이 없다.
김헌택 07.02.08. 17:02
'불생불멸'님의 시대의 우울이라 기막힌 조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불확실성의 시대의 '불생불멸'님의 거짓말 시리즈는 가슴을 칩니다!
청포도 07.02.08. 21:21
박용제 샘은 "서늘한 그늘"을 가진 분이죠^^ 김지하가 "흰그늘"이 있다면. 시노래 중에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아,~~"도 아주 멋진 노래지요.. 음~~ 아무나 그늘을 가진 사람이 될 수 없지요^^.. 그리고 그 그늘을 느끼게 해줄 사람도 귀하지요... 전 지리산 산행에서 그 그늘의 일부를 느낄 수 있었답니다. (비밀^^)ㅎㅎ 아마도 영원히 잊지 못할 감동으로 남을 거 같습니다...
병산 07.02.08. 23:07
아! 나도 그 남자의 그늘을 느끼고 싶다. 막. 근데 지금까지 그 남자와 있다가 왔는데 그늘은 커녕 돼지고기 냄새만 났다. 그 남자에게선.
불생불멸 07.02.09. 23:53
학교에 인터넷 수리 중이라 퇴근 후 일마치고 지금 들어와서 보니 영 민망하구먼. 거짓말 시리즈가 딱 어울리네.
불생불멸 07.02.09. 23:52
별난 말 하나 첨부. 세인들아 자연을 보라. 무엇하나 쉼이 없으며 해로움도 없나니 오직 그대들 마음이 이 들을 해롭게 하고 있느니라.
이산 07.02.12. 19:28
자고로 '불생불멸'님의 말씀은 '서늘한 그늘' 그 자체 입니다!
이산 07.02.13. 16:29
"우리가 어느 한 장소의 혹은 한 사람의 본질을 가장 잘 깨닫게 되는 것은 그 속에 머물 때보다는 오히려 그것에 다가갈 때, 혹은 그것을 떠날 때인지도 모른다." 최영미 / '시대의 우울' 中에서 한번 옮겨봤어!



거짓말시리즈 5 – 한철희 편

<사진설명:2005년 8월 15일 서울 8.15대회에 함께 갔다가
나랑 세바스티앙 살가도 사진전을 보러 갔다>

 
목화씨를 우리나라에 들여온 건 문익점이지만
한철희를 불문에 들여온 건 나다!!


머리가 나쁜 탓에 사람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사람’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할 때 그 사람이라는 것은 이름과 만난 인연 소속 등등이다.
이 글을 쓰겠다고 대장과의 만남을 되짚던 나는 또 한 번 나의 기억력에 심각한 문제의식을 느끼며 얕은 꾀를 내는 수밖에 없었다.
 
대장이 안동평통사 카페 회원이 된 것은 2004년 5월 4일이다.
그러니까 내가 당시 몽양이라는 이름으로 안동 땅에 나타난 대장을 만난 것은 2004년 5월 4일 이후다. 그는 제 발로 먼저 청하지도 않은 평통사 카페에 가입했고, 제 발로 나를 찾아왔다. 그리고는 ‘몽양’다운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나의 환심을 샀고 무사히 평통사에 침투해 간부까지 하고 있다.
 
전에는 못 느끼던 것인데 어쩌면 그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간첩일 수 있다. 글을 쓰면서 그의 행적을 더듬어보니 거의 확신이 생긴다. 무서운 속도로 ‘평통사’와 ‘불문’ 두 개의 조직에 침투해 그 중 한 개는 대장질까지 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놀라운 공작력인가!!
 
<사진설명: 사실 나는 산을 별루 좋아하지 않았지만 대장에게
포섭되어 2006년 2월 백두대간의 한 구간을 함께 걸었다>
 
좀 더 이야기를 해 보자.
나는 대장과 처음 만나는 날, 대장에게 1만8천 원짜리 문익환 평전을 팔았다. 나도 대장 못지않은 실로 놀라운 상술의 소유자였다. 초면에 그 큰 거래를 성사시키다니!! 놀랍지 않은가?
 
대장과의 만남은 신선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우선은 ‘몽양’이라는 닉네임이 그랬고, 다음으로는 낯을 가리지 않고 아무데나 들이대는 그 적극성이 그랬다. 나보다 한 10년은 선배일 줄 알았는데 마누라와 동기라니!! 그 변장술도 놀랍지 않은가? 게다가 한전직원이라는 신분까지....놀랄 일은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리 시작된 인연으로 대장은 평통사의 중요한 일꾼이 되어 일을 함께 하게 되었고, 간첩답게 산에 밝았다. 특히 북과 연결되어 있는 백두대간에 밝았고 나는 자주 그쪽(?) 이야기를 그로부터 들었다. 포섭이 시작된 것이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산을 그닥 좋아하지 않았다. 다리도 아프고, 재미도 없고, 담배도 맘대로 못피게 하는 산이 뭐 좋을까! 그런데 이 무렵 내가 외로움(2003년과 2004년은 마누라가 나를 버리고 중국으로 달아나고 없을 때였다 아! 많이 추울 때였다)을 달래려고 불문을 기웃거리고 있었고 2005년 귀국한 마누라가 아이들을 데리고 함께 불문에 주력군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날, 넘치는 힘을 감당못한 마누라가 불문에 지리산 종주 이야기를 꺼냈고 시돌님을 비롯한 몇 몇 분들이 ‘그까이꺼 가지 머’ 이렇게 되었다.
시돌- ‘근데 거길 어예 가노?’
병산- ‘전문산악인이 있니더’
시돌- ‘데루 온나’
병산- ‘그라지요’ 

<대장의 등장은 안동의 산악사에 새로운 획을 긋는
사건으로 기록된다. 획을  쫘-----악! 그어부렀다.>
 
우리나라에 목화씨를 들여온 건 문익점이지만
불문에 대장을 들여온 건 나 피재현이다!


그 일이 결국 잘 한 일인지 못 한 일인지는 역사가 평가하겠지만, 몽양 한철희 선생은 이리하야 2005년 불문에 그 존재를 알리게 된다. 그의 행적을 좀 더 좇아보면 2005년 10월 11일에 불문카페에 가입을 했고 2006년 1월 13일 원정대를 이끌고 지리산 산행을 다녀온다.(그가 간첩이라는 확신은 여기서도 생긴다. 그가 간첩이라면 당연히 지리산 성지순례를 먼저 하는 것이 순서다!)
 
지리산 종주의 성공은 불문의 역사에 변증법적인 변화를 가져온다. 약산, 갈라산, 아기산, 덤산, 와룡산, 그리고 가끔 청량산, 대야산 정도를 다니던 불문은 지리산 종주 이후 간이 커졌고(이를 변증법적으로 이야기하면 양적인 발전이 질적인 발전으로 전환했다고 이야기 한다) 그해 3월 안동경계걷기에 나선다.
 
 저 위대한 중국의 붉은별 마오도 황산에 오른 후 대장정에 나서지 않았던가!! 이후의 역사는 여러분도 잘 알 것이다. 속리산 알프스, 금강산, 덕유산 종주로 이어지는 간 큰 불문의 산행은 대장을 빼놓고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문제의 심각성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진짜 문제는 이러한 간 큰 산행이 앞으로 펼쳐질 일에 비하면 서곡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장 우리는 이번 여름 중으로 울릉도 성인봉과 한라산 종주, 백두산 트래킹, 일본 후지산, 타클라마칸 종단, 황산 등정을 마쳐야 한다. 이 이야기는 내 이야기가 아니라 지난 경계 이후 뒤풀이자리에서 나온 이야기다. 대체로 우리가 뒤풀이에서 나온 이야기를 그대로 실행에 옮겨온 전례로 보면 이번 여름 계획 또한 성사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고 봐야한다.
 
아! 나는 나의 정체성이 의심스러워진다. 일주일에 3일을 산에 가 있는 나, 나는 전문산악인인가? 글쎄.... 이런 현상을 두고 평통사 강 모 사무국장은 한철희를 평통사에서 짜르지 않고는 평통사가 살아남을 수 없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사람들 데리고 산에 다니는 통에 일이 안된다는 것인데 사실 그 사정이야 안동의 다른 조직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어디 조직 뿐인가? 결혼식을 비롯한 경조사, 출판기념회를 비롯한 각족 행사, 심지어는 시정을 펼치기에도 상당한 차질이 빚어지고 있다는 지역 언론의 전언이다.
<그의 영도력은 뭘 마이 멕이는 데서 나오는 듯하다.
그는 끊임없이 뭘 멕인다>
 
한철희에 대한 몇 가지 덕담

덕담 1. - 그는 글쟁이다.
대장은 한국산악문학상 소설부문에 당선되어 등단한 소설가다. 잘 생각해보라! 우리는 그 당선 턱을 함께 얻어먹은 사람들이다. 인수봉에 얽힌 청춘의 이상을 내면화한 그 소설을 나는 재미있게 읽었다. 그리고 그 인연으로 대장은 ‘사람과 산’이라는 산악전문 월간지의 기자로 백두대간의 환경훼손 실태를 고발하는 기사를 쓰고 있다. 한 번은 취재에 동행해 사진을 찍어 준 적이 있는데 내가 사진 값을 요구할까봐 내 사진을 함께 책에 실어 내 입을 막는 센스를 발휘하기도 했다.


덕담 2. - 그는 품이 넓다.
나이로 세상이 살아지지 않는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다. 대장은 나와 불과 한 살 차이다. 그러나 그 품이 나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인자요산?仁者樂山이라 했던가! 인자는 산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산을 좋아하면 인자가 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대장은 산에 들 자격이 있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사람들을 아우르고 자신을 희생할 줄 알고 너그럽게 품을 줄 안다. 산 사람이 의당 갖춰야 할 덕목을 고루 갖추고 있다.
 
그래서 그 나이에 대장이 된 것이다. 젊은 나이에 대장이 되었으니 그가 죽기 전에는 대장할 기회도 없다. 아! 나는 언제 대장 한 번 해보나!
 
그런 대장이 요즘 쫌 힘들어 보인다.
지방에 동네 뒷산이나 다니는 조직이 하나 있어 한 수 가르쳐줄려고 살살 똥구녕을 간지렸더니, 아! 이 사람들이 이제는 너무 커서 마구 타클라마칸을 간다고 하질 않나, 하여간 너무 커서 이젠 대장이 따라다니는 격이 되고 말았다. 게다가 영덕으로 발령이 나 1주일에 한 두 번 집에 오기 바쁜데 올 때마다 산에 가야한다. 당연히 부부관계는 금이 간다. 내가 안사람이라도 그렇지, 누가 이런 서방을 좋아하겠는가!
그러나 천성적으로 다 보듬어 안아야 할 우리 대장은 처자식과 불문(정확하게는 산) 사이에서 이 두 쪽을 다 보듬느라 밤낮이 없다.
 
대장! 건투를 빈다!! 파이팅!!!
<애쓴다> 


덕담3. -벌에 쏘이고 잘 넘어진다.
아! 후회스럽다. 왜 그의 덕담 이야기를 이렇게 번호를 붙이면서 쓰기 시작했을까? 2번까지는 썼는데 막상 덕담 3이라고 써놓고 나니 별로 칭찬할 게 없다. 이 글을 쓰겠다고 나는 내 300기가짜리 외장 하드를 뒤져서 대장의 사진을 찾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수 천, 수 만의 사진을 뒤져 찾은 그의 사진이 고작 스무 장 남짓이다.
 
왜 그럴까? 못생겼다는 이야기다. 사진빨이 안받는 사람에게 사진사는 카메라를 들이대지 않는다. 원래 대장질하면 사진이 많아야 하지만 그의 독사진은 상당히 귀하다.(의심스러우면 불문 사진첩을 뒤져보라!)
곰곰 생각해보면 우리 대장은 잘 넘어지고 남 안 쏘이는 벌에도 쏘이고 ‘쫌’ 그렇다!!
 
이게 뭔 덕담이냐고?
확실히 이건 덕담이다. 대장은 품성이 그렇다. 풀이 다리를 걸면 넘어져줄 줄 알고, 벌이 달려들면 가만히 팔을 걷어 피를 나눠줄 줄 안다.(이 정도 되면 나도 한 아부 하지요?) 이건 내가 대장의 사진을 많이 찍지 않은 데 대한 변명이 아니다. 사람은 홀로 빛나는 존재가 아니다.
 
사람은 사람 속에서 빛이 나고 사람 속에서 그 가치가 드러나보인다. 한 발 먼저 가서 지도를 들여다보는 그의 모습에서, 한구석에서 라면을 끓이는 그의 모습에서, 덕유산 정상에서 슬쩍 들어 본 그의 배낭 무게에서, 한철희의 인격은 드러나고 각인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대장을 ‘좋은 사람’을 떠올릴 때 내 머릿 속에서 가장 먼저 만난다.

오랜만에 장문의 글을 써 본다.
그래서 할 말이 많다.
그러나 이보다 더 길면 아무도 읽지 않을 것이다. 내 글을 읽지 않는 것은 좋지만 내가 글을 길게 써서 우리 대장에 대한 거짓말을 아무도 읽지않게 만드는 것은 신하된 도리가 아니다. 그래서 그만 쓸까 한다.(반응 좋으면 연재는 할 수 있다)
 
그럼, 다음에는 대장 집에서 밥 주는가?
 
<아! 나는 이번 여름이 막 두렵다! 대장, 니는 괘안나?>

시돌 07.02.12. 12:03
용비어천가를 기다렸더니... 역쉬!!!
┗병산 07.02.12. 12:05
푸하하하하
병산 07.02.12. 12:13
대장을 간첩으로 볼 수밖에 없는 이유 1. 남들이 잘 들고 다니지 않는 지도, 나침반 따위를 들고 다닌다. 2. 독침에 강하다(벌에 쏘이고도 살아남는 것을 우리가 함께 보지 않았던가!) 3. 가끔 정부를 비난하는 발언을 한다.(은연중에, 적당히,) 4. 금강산에 다녀온 후로 심리적 안정을 찾았다.
┗얀숙 07.02.12. 12:16
ㅎㅎㅎ, ㅋㅋㅋ
┗가을하늘 07.02.19. 19:40
지금 다시 보니 4번이 압권입니다.
┗병산 07.02.19. 23:49
가을하늘님! 간첩 그 동네로 이사갔니더. 조심하소.
┗가을하늘 07.02.20. 17:45
언제, 어디루요? 정확히 말씀해 주시지요.
┗병산 07.02.20. 18:35
삼성1차라고 들었어요. 이사는 설 전날했구요. 곧 밥주겠죠 뭐^^
얀숙 07.02.12. 12:15
나도 일등해 봤당. 거짓말이 아니구만요. 참말인디 와이리 우습노. 혼자 소리내어 웃어 봅니다. 윗 글 200% 공감하며,한철희 대장님은 멋져요. 정말 덕유산에서 짐무게를 느껴본 사람 있나요? 김정석님의 짐도 마찬가지였지만, 겁나게 무거운 짐을 등에 짊어지고 점심(라면)해 먹이겠다고 앞서 뛰어가시는 대장님을 보고 숙연해지기까지 했답니다. 시돌님을 신격화 한다고 했다면, 한대장님은 팬클럽 회장으로 우리의 우상입니다.
┗얀숙 07.02.12. 12:16
에~이 다 쓰고 보니 일등에서 밀렸당!
가을하늘 07.02.12. 13:29
경계걷기나 덕유산이나 산행을 하고난 후면 늘 말로만 인사를 했습니다. 한대장님에게나 김정석씨에게나. 병산님은 이 길고 진한 글을 써서 그 원수를 일부 갚았겠지만 저는 어떻게 대장님에게 원수를 갚을 수 있을까요? 지난 한 해 저는 생각해보니 경계걷기에 참가한 것이 가장 가치있는 일인 것 같았습니다. 대장님, 고맙습니다.(또 말로....)
시돌 07.02.12. 13:46
병산이 대장을 좀 길게 썼다고 하여 다른 사람이 대장에 대하여 쓰지 못한다는 법은 본시 없습니다. 쓰십시오. 대장에 대하여는 여러 사람이 쓰면 좋을 것 같은디.. 혹시 대장이 골라서 상이라도 내릴지?
불생불멸 07.02.12. 16:14
무슨 일이든 나서는 사람이 있어야 일이 되는데, 여러 사람을 위해 자기 희생을 마다하지 않고 나서는 모습은 감동적임.
┗병산 07.02.12. 17:50
옛날 성적표 행동발달상황 같어요! ㅋㅋ, 선생님 평도 퍽 감동적임.
사람과山 07.02.12. 19:02
몇 가지 고백하건데 사실, 나는 "간첩"이 아닙니다. 둘째는 못 생겼다고 하는데 지금까지 그런 이야기를 여기서 처음 들어 봅니다. 셋째는 안동평통사에 자진 입회한 것이 무슨 엄청난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들리나 사실은 "놀 물"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또 하나 병산으로부터 첫 날 산 "문익환평전"은 이사할 때마다 엄청난 짐으로 둔갑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를... 마지막, 에구! 거짓말 시리즈의 진정한 목적은 이게 아니었는데....
┗사람과山 07.02.12. 19:09
안동MBC에 우리경계 걷기에 관한 저의 취재요청에 따라 조만간 담당 PD를 만나기로 했습니다. 3월중에 일정을 맞춰 보려고 합니다.
이산 07.02.12. 19:38
요새는 간첩 신고하면 기천만원 주지 않는감? 경계걷기도 다 끝나가는데 '타클라마칸'이라도 갈려면 밑천이라도 좀 있어야 될낀데...... 일이 점점 커지네! 둘이서 거짓말 시리즈를 써대니 우째 점점 불안해진다!
┗시돌 07.02.12. 20:36
이산 선생이 대장에 대하여 한 편 더 써보시지요.
이산 07.02.13. 14:57
전 아직 대장에 대해서 그 깊은 곳까지 알아내지 못해서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하겠습니다! 먼 훗날 우러나와 써보고 싶은 날이 오기를 기다릴 뿐입니다요!
이산 07.02.13. 16:41
분명 한대장님은 내가 회장을 하고 있을 때 전화로 회원 가입을 문의해 왔습니다1 그때 난 밤에 학교에서 학생들의 야간 학습지도를 하고 있다가 얼마나 기쁘고 흥분했던지.... 당장은 만날 수 없어서 시내 안동꽃집에 들리면 가입문제는 쉽게 해결된다고 했더니 과연 나중에 제대로 만나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고등학교 후배님이라..... 참으로 기쁘고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었는데, 지금은 이렇게 대장님으로 모시고 있으니 참으로 나에겐 더할 수 없는 영광이요, 호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려!
┗사람과山 07.02.14. 09:25
듣기 심하니더!
숲사람 07.02.15. 01:01
산사나이라 불러도 좋을 인간적 품성과 매력이 있는 건 분명한데..... 안동의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는 그것이 무엇인고? 위에 병산이 말한 것 말고도 더 있을 터. 
 


거짓말시리즈 (5) 김주철 선생님편
 
무릇 대개의 사람들이 이런저런 삶을 살아가면서 벌이는 여러 일이 처음의 초심을 지켜내기란 극히 어려운 일이다 . 한편 우리의 경계 걷기도 이와 크게 다를지 않을 것이라는 나름의 우려 속에 치사한 방법(?)이긴 하나 그 고민의 결과가 이 거짓말 시리즈의 배경이라면 배경이겠다. 좀 당사자에겐 민망한 일이지만 이 일로 한바탕 웃고 즐기며 또 꾸준한 뒷이야기의 풍성한 계기가 된다면 적어도 실패로 보이진 않는데 ………
 내가 좋아하는 문구 중에 “삼여 (三餘)”라는 글귀가 있다 . 원래 독서삼여에서 나온 말이지만 흔히 다음의 의미로도 곧잘 쓰이기도 한다. 대충 뜯어보면 삼여(三餘)란 하루 중 저녁이, 일년 중엔 겨울이, 그리고 일생 중엔 노년이 상대적으로 여유로워야 후회 없는 삶이 아니냐로 풀이되지만 사실 우리가 살고 있는 작금의 시대는 이런 호기나 여유를 결코 허용하지 않는다. 이미 분자, 원자를 거쳐 전자시대, 그리고 더욱 더 나아가 분열의 최종점 실체 없는 미립자시대 목전에 들어와 있다. 그래서 세상을 안다면 저녁의 여유, 노년의 여유를 감히 말하기가 여간 쉽지 않음인데 이런 시류를 거역하는 주목할 만한 분이 바로 김주철 선생님과 같은 분이 아닐까 한다. 이번 경계 걷기를 하면서 우리 안경사의 걸음이 많이 느슨해지고 또 곳곳에 살가운 웃음을 많이 쏟아낸 것은 바로 선생님과 같이 한 박자 “느림”을 즐기는 분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느림 ”을 통해 삶의 여유 , 또는 관조의 재미를 제대로 읽어내는 삼여(三餘) 정신을 일찍이 터득하지나 않았을런지 ……. 
 
“능선”은 산경표식 우리말로 “마루금”이다. 멀리 하늘을 갈라 아스라하게 펼쳐진 한 폭의 마루금을 보노라면 문득 알 수 없는 삶의 희열을 느낄 때가 있다. 이를테면 내가 그 선(線)의 일부분이 되어 보는 것인데 이런 상상만으로도 과히 즐겁다. 그래서 산이 많은 우리나라에 더욱 애착이 가는지 모를 일이다. 하여튼 안동경계도 80%이상이 능선, 즉 마루금으로 연결되어 더욱 경이로운 일인데 마침 우리 <안경사>에 늘 함께 있어 더욱 빛나는 <능선>이 있어 더욱 신비를 더한다. 언젠가 선생님께 꼭 여쭈고 싶었던 의문 하나. 왜 <능선>이죠? 예상되는 답변. ㅇ 우리 삶 속에 흩어진 모든 산은 언젠간 늘 능선에서 하나로 만나니깐! <길>은 삶의 나눔이자 소통이라더니 이제 <능선>이 산에서 그 길을 대신하고 있는 셈이다. 


좀 냉정한 말이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야생의 적자생존 정글과 꽤나 많이 닮아 있다. 즉 강자가 약자를 포식하는 먹이사슬이 당연한 것처럼 여러 계층하의 사회적 약자가 또한 그러한데 이러한 냉혹함이 유지되는 한 어쩔 수 없이 일등과 꼴찌는 반드시 나오게 마련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런 꼴찌를 바라보는 차디찬 사회적 편견과 시각이다. 내 기억으론 어릴 적 선생님이 제시한 성적 이하를 받게 되면 날 선 회초리가 여지없이 날아들었다. 그것도 싸늘한 시선과 함께. 불행하게도 내가 기억하는 일선 선생님의 이미지가 대충 이런 것들인데 언제부터인가 이런 편견이 점차 바뀌기 시작했다. 부연하자면 안동 경계 걷기를 하면서부터일 것 같은데 그 중심에 선생님께서 계셨기 때문이라면 어떨까? “꼬물꼬물한 고놈들 , 귀여운 것. 그래도 제 딴에 드러낸다고 머리치장도 하고 ……” 흔히 자신을 응시하는 시선에 의해 그 인생관이 형성된다고 한다. 적어도 능선님은 꼴찌, 아니 그 존재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한 이 시대의 적지 않은 교육자 중 한 분이시다.   
 
“사소한 것에 목숨 걸지 말라.” 작년 내가 모신 상사 한 분이 무슨 심사인지 안동을 떠나면서 내게 선물한 책 제목이다. 별로 특이할 게 없는 내용인데 제목이 너무 강렬해 지금껏 인상에 남는다. 그러나 사실 나는 사소한 것에 결코 목숨을 걸지 않는 편이다. 하여튼 이 책을 덮으면서 문득 김주철 선생님을 떠올리게 된다. 나의 안일한 둔감과 달리 너무 예민한 촉수를 가져 자잘하고 사소한 것들에 있는 목숨을 다 거는 사람을 들라면 서슴없이 선생님을 들고 싶다. 산길을 걷거나 들녘을 지나칠라치면 결코 예사로 지나치는 법이 없다. 작은 풀뿌리 하나,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이웃의 세간살이, 그리고 올망졸망한 우리들의 아이들에게까지 어느 것 하나 생생한 삶의 시비를 걸지 않는 것이 없다. 때로는 웃음으로 묻고 때로는 격정으로 쏟아낸다. 어느 땐 가느다란 질곡의 비애가 절절 흘러 넘침을 느낄 때도 있다. 무릇 사람 사는 정을 제대로 느끼고 아는 자만이 내뿜을 수 있는 그런 내공의 무게가 아닐는지…… 

 이태 전 내가 처음 “불문 ”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의 그 감정은 아주 묘한 것이었다. “불문이라니?” 헤쳐 풀어 “묻지마!” 그 해석에 아주 묘한 여운이 남았다. 그런데 누가 처음 불문의 아이디어를 냈을까? 문득 우연히 알게 된 몇몇 산악회가 뇌리를 스친다. 이성부 시인이 이끄는 <만고강산>. 또 이돈명 변호사와 간첩 깐수로 유명한 정수일 박사의 <거시기> 그리고 시인 신경림과 소설가 현기영 등이 주축으로 활동하고 있는 <무명>등산회가 그것이다. 결코 예사롭지 않은 이들 이름이 말해주듯 이들 산악회의 공통점은 “즐김”에 있다. 산행을 즐기고 인생을 즐긴다고 한다. 그래서 이들 산행의 재미가 늘 궁금했는데 언제부터인가 그 궁금증이 뇌리에서 점차 사라졌다. 왜냐하면 설마 안동의 “불문”보다 나을까 하는 심사인데 그만큼 불문의 매력에 푹 빠졌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하여튼 작은 일상에 대한 심취, 그리고 소소한 삶에 대한 애정, 그리고 함께 나누는 배려가 지금의 불문에 그대로 녹아 있게 한 정신적인 지주가 바로 지금 말하고 있는 능선님이라고 감히 말한다면 너무 무안한 일일까?
 
그저물처럼 07.02.28. 22:03
아주 잘 보셨습니다요...대장님!
┗능선 07.02.28. 22:04
입력하는 사이 그물님글이 위에서..
능선 07.02.28. 22:09
무안하다. 그러나 서두에 민망해 하지 말라는 명이 있어서...해는 떨어지고 갈 길은 먼데 게을러 느적거리는 사람을 보면 속에서 천불이 날긴데, 그걸 여유라고 봐 주시니 너무 감사할 뿐. 사족, 능선이 이렇게 좋은 이름일 줄이야...
┗사람과山 07.02.28. 23:31
여기서 천불은 千佛이 맞지요?  
가을하늘 07.02.28. 22:58
가장 중요한 우리의 1%인 능선님을 드디어 대장님께서 갈구셨네요. 혹 다음 뒷풀이까지 정해진 건 아니겠지요
┗병산 07.03.01. 00:30
 갈하늘님은 배운걸 너무 착실하게 써먹는 것 같애^^
┗가을하늘 07.03.01. 09:55
이게 다입니다. 이제 그만 써먹을게요. 근데 3.1절 렌슬렛 어쩌고 하던 이야기는 3.1절이 되어도 소식이 없네요.
┗불생불멸 07.03.02. 08:46
랜슬렛은 연기했습니다. 번개 칠려는 순간 일이 생겨버렸습니다.
병산 07.03.01. 00:34
불문 어른들이요 다 내공이 깊은데 능선님도 한 삼십갑자는 되지요^^ 근데 우리 대장님 참 비위 좋으시다~~거짓말을 밥먹듯이 하고도 또 하시네?ㅋㅋ
┗사람과山 07.03.02. 21:58
우야노? 반을 돌아 버렸는데! 돌리기에는 너무 늦어뿌렸다!
청포도 07.03.01. 09:27
신영복 선생의 [강의]라는 동양고전 독법의 책을 보면 자신의 삶이 얼마나 진실한가는 역사와 시대가 그 속에 얼마나 포함되어 있나를 보면 안다고... 가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진실의 속도는 어느 정도로 달리는 것인가를... 이 기회를 빌어, 산을 오를 때 능선님께서 일러주시는 말씀(=속도)은 잘 모르는 언덕길에서도 언제나 든든한 힘이 되고 있다는 것을... ㅎㅎ 산에서 한(큰) 진실을 배우자면 자주 나가야 하는데....ㅠㅠ~~
┗불생불멸 07.03.02. 15:18
몸이 움직여야지. 자주 나오셔.
이산 07.03.01. 13:15
대장님의 거짓말 시리즈는 이제 '능선'님까지 이르렀습니다! 불문 회장님까지 거짓말(?)친다는 것은 거의 '막가자는 거'지요? 능선님 이제는 호를 다시 '마루금'으로 고치심이 어떨런지요? 꼭 신라시대 '니사금' '차차웅'과 같은 반열에 혹시 오르실 수도...... ㅋㅋㅋㅋ
┗능선 07.03.02. 12:15
그렇찮아도 그럴까 생각중입니다.
┗시돌 07.03.02. 13:30
"마루금", 좋은데... "마루"가 더 좋을 것 같네요 마루야 마루야
불생불멸 07.03.01. 18:29
최대 장점 : 어려운 상황를 쉽게 정리함. 다음 : 주변에 똑똑하나 짜증난 술친구들 많은데 토론을 통하여 상대방이 옳은 것이라 인정되면 받아들이는 넉넉함은 그의 그릇을 말해준다.
┗가을하늘 07.03.02. 22:12
어려운 상황을 쉽게 정리함  또 써먹었음
┗병산 07.03.03. 08:35
어려운 상황을 쉽게 정리한다기 보다는 우선 어려운상황을 어렵지 않다고 생각하고 그래도 어려운 상황이 있다면 그래도 어렵지 않다고 생각하시는 듯 함
능선 07.03.02. 12:17
참, 모두들 왜곡, 과장, 거짓말들을 잘도 합니다. 민망하고 민망타.
안얼레지 07.03.03. 21:24
가을하늘, 병산, 시돌님의 공통점, 화려한 뭔가를 쓴다 좀 갈키주이소.
┗시돌 07.03.04. 18:10

병산 07.03.05. 08:22

가을하늘 07.03.05. 10:35
안얼레지님, 한 수 갈쳐드리지요. 지금 얼레지님이 글을 입력하는 그 칸 바로 아래 '텍스티콘 사용'이 보이지 않나요 거기에 체크한 후에 텍스티콘 사용 자체를 클릭해 보세요. 그리고 맘에 드는 글자를 인한 후 이 글을 쓰면서 그런 글자를 넣고 '등록'을 누르는 순간  이렇게 되걸랑요
안얼레지 07.03.07. 16:32
 가을하늘님과 병산 시돌님의 다른 점 가을하늘님은 친절하게 갈키준다. 다른 님은 약만 올린다.
┗병산 07.03.07. 19:44
난 공주님(가을하늘)한테는 친절하게 갈켜줬다 뭐
가을하늘 07.03.09. 11:56
드디오 얼레지님도 입문. 아직도 독학이 안 되는 사람이 있음 얼레지님이 갈쳐 주세요. 근데 스스로 깨치고 누구에게 전수도 안 하고 가장 열심히 쓰고 있는 사람이 누군지 알지요
숲사람 07.03.13. 14:20
능선이나 마루금이라는 이름과 달리 낮은 곳이나 후미지고 가려진 곳에 서 있는 모습이 돋보입니다. 아마도 이름에서 뜻을 찾자면 능선이나 마루는 그의 시선이 머무르고 싶은 곳, 지향점이 아닐까요?
자강불식 08.02.28. 13:33
빙고~~ 선생님에 대한 정확한 표현이신듯 합니다...나이가 들수록 향기가 나는 분이라고 감히 말씀드립니다^^
 
 어수선한 시국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껐 진행된 수고를 감안,  거짓말을 계속 하지 많을 수 없음에 사부대중의 깊은 통촉 있으시길.... 
 


     거짓말 시리즈(일곱번째: 피재현,백설아 부부) 
 
 부부의 현재 배우자 만족도를 묻는 예전 어느 한 갤럽조사에서 아주 재미있는 결과가 나왔다. 즉 부부 열 쌍 중 일곱 쌍 이상의 반응이 매우 시큰둥하다는 의외의 결과인데 더욱 놀라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유지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물음에 이들 대부분이 한결같이 세월을 거슬러 “되 물릴 수 없음”을 들었다. 한편 그 실종된 삶의 행복을 위해 서로 어떤 노력을 하냐는 또 다른 물음엔 아무도 제대로 된 답변을 내놓지 못했다고 한다. 결국 자신들이 디디고 있는 현재를 일회용 포장지처럼 그날그날 아무렇게나 공허하게 구겨 버리는 셈이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무엇일까? 감수성이 풍부한 어느 시인이 말하길 이 지구상에서 가장 경이로운 것은 바로 새로운 “하루의 탄생”에 있다고 한다. 이 놀라운 하루를 아무렇게나 허비하니깐 늘 불행이 가까이 있다는 것이다. 그럼 하루하루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나는 감히 단언하건데 그 사표(師表)를 피재현, 백설아 부부의 일상을 통해 배워 보라고 권해 보겠다. 나누어서 더욱 커지는 일상의 즐거움과 더불어 같이 있는 시간만큼 더욱 다져지는 가정의 행복을.  

  수학에서의 변곡점이란 어느 일정한 선이 그 점을 중심으로 양태를 달리하는 판이한 기준점을 말한다. 그럼 우리네 인생에서 삶이 달라지는 그런 변곡점은 과연 어떤 경우일까? 그 하나가 바로 우리네 일상에서 흔히 일어나지만 그러나 아주 “특별한 만남”을 들 수 있다. 늘 그렇지만 새로운 것과의 특별한 조우는 항상 신선한 충격과 설렘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달뜸이 우리가 지금껏 살아온 구태한 삶의 일정한 부분을 수정하게 하거나 또는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준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병산 피재현과의 만남은 정말 놀라운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소위 나에겐 인생의 변곡점에 해당될 수 있다 하겠는데 옛 어느 성현 왈, 친구 셋 중 반드시 본받을 친구가 있으면 또 반드시 베풀 친구가 있다 하였는바 인정하긴 싫지만 곰곰이 따져 낸 결론은 애당초 내가 가당찮은 나이로 밀어붙여 본 되기는 오래 전에 틀렸지 않나 하는 것이다. 무릇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지만 귀감이란 세월을 넘나듦이다. 그래서 그런가? 우리가 생명 평화의 길, 경계걷기를 하면서 종종 그의 빈자리를 허전하게 느끼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 꼬마에게 읽어주는 동화 중에 권정생 선생님 작 “강아지똥”이 있다. 급한 강아지가 아무렇게나 실례한 한갓 “똥”이 어떻게 세상에 긴요한 것인지 그리고 그렇게 외면당하는 “똥”도 결국 세상에서 나름의 쓰임새를 위해 태어났다는 무척 단순한 내용이다. 처음 이 책을 보면서 나는 한동안 책에서 시선을 거들 수 없었다. 어린 시절, 나의 기억에 남는 동화란 주로 백마 탄 왕자나 공주, 그리고 우아한 귀족과 선녀 이야기로 결코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먼 나라의 이야기들이 대부분이 아니었나 싶다. 그런데 그 동안 부침하는 세월 속에 세상은 무척이나 많이 낮아졌는가 보다. 그런데 경계걷기를 하면서 어떤 연유로 예전의 어렴풋한 동심을 문득 문득 느낄 수 있어 기억이 새롭다. 백설아! 불림이 무척 동화적인데 행동거지만은 타고난 정중동(靜中動)이다. 자신으로 인해 티끌조차 남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적지 않은 배려와 또 항상 여유와 웃음을 잃지 않는 야무진 성정을 살피면 결코 예전 동화 속 백마 탄 왕자를 기다리는 박제 속 백설공주가 연상된다는 것이 어디 가당키나 할 것인가! 


  무료한 주말, 간혹 심야에 방영되는 TV 개그 오락프로그램을 보면서 곧잘 이런 질문을 해본다. 이를테면 개그와 유머의 차이에 대한 것인데 고민 끝에 어렵게 내린 답은 이렇다. 개그는 억지웃음을 만들어 내며 곧 허공에 흩어지지만 유머는 감동과 진한 웃음을 통해 시간을 타고 여운을 남긴다. 미국의 대통령, 링컨이 하루는 따사로운 햇볕 아래 구두를 무심코 닦고 있었다. 명색이 대통령인데 그런 모습이 딱해 누가 핀잔을 주자 그가 답했다. “내가 항상 다는 사람의 구두만 닦을 수는 없질 않겠소.” 묘한 여운인데 사실 이런 즉각적인 임기응변식 유머는 평소의 품성 그리고 본성과도 관련 있다고 본다. 흔히 세상은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하지만 사실 세상이란 그 애착 크기에 비례해 그 사랑이 깊어지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병산 피재현 님은 이 시대에 보기 드문 넓은 사랑을 가진 유머리스트가 아닐 수 없다 . 더욱이 진정성이란 백 마디 말보다 한 가지 실천이 앞서야 그 가치가 빛나기 마련인데 우리와 함께 걷는 병산님이야말로 감히 누가 흉내 낼 수 없는 고독한 실천가임을 감안하면 그가 무심결에 툭툭 한 마디씩 토해내는 유머의 한 단편들이 우리들 가슴에 잔잔한 파문을 남긴다.
“생명 평화의 길 , 좀 너무 고상한 것 아닐까?”
  “그렇다고 생명 파괴의 길이라고 부를 순 없잖아? 안 그래?”
 

  나섬학교는 “나아가 섬긴다”는 가톨릭 봉사 정신에서 최초 출발했다고 들었다. 그러나 그 고상한 이름과 달리 그 학교 관계자들의 고충과 애로는 사실 이만 저만한 것이 아닐 것이다. 특히 어떤 이유로 일선 교육제도로부터 일탈한 아이들을 따로 모아 끊임없는 감화와 총화로써 보듬고 안아 보겠다는 그 강단 찬 포부가 사뭇 무모하게 보일 터인데 스스로 그 짐을 떠맡고 악역을 자처했으니 아무리 담금질 된 심장을 가졌다 한들 그 앞길이 어찌 순탄하랴! 그런데 놀라운 것은 사랑을 무기로 사람이 하는 일은 결코 불가능이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 경계걷기 대열에 나섬학교 학생들이 스스로 동참하게 된 것은 거의 기적 같은 일이다. 다른 일과 달리 힘든 일정이 예견되어 있고 또 손과 발의 수고로움을 아이들이라고 모를 리 없건만 스스로 그 길로 나왔다는 단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아이들에 대한 지고한 사랑과 믿음이 피워낸 값진 희망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그 희망을 만들어 낸 주인공이 바로 병산이다. 한편 그 병산을 진정한 이 시대의 병산으로 우뚝 서게 한 숨은 주인공이 있을 듯 한데 이는 바로 지금까지 겪을 수밖에 없었을 온갖 시련을 감내하고 인내하며 묵묵히 따라와 준 평생의 반려자, 백설아 님이 아닐까? 아, 그러고 보면 경계걷기도 나섬학교 감화 교육의 한 커리큘럼이 아닌지 모를 일이다.
 
사실, 이제 와서 말인데 우리가 걷는 1년 남짓 안동시 경계걷기 이벤트가 생명평화라는 긴 꼬리표의 이름을 가진 것은 순전히 병산의 아이디어다. 처음 나의 단순한 계산식은 지도상의 선을 찾아 “돌격 앞으로”하면 될 것으로 착각했는데 그 전차에 알맞은 궤도와 적당한 기름을 채워준 이가 바로 병산이다. 더군다나 거기에 병산 일가라는 대군을 이끌고 합세함에 따라 그 세가 결코 허투루 볼 수 없었음인데 다시 말해 우리 <안경사>의 그날 행복지수는 병산 일가의 눈치로 통해 얻어지는 불안한 운명이 된 것도 일정부분 사실이다. 한편 어느 특정한 개인에 대한 대중의 강한 믿음이나 신뢰는 흩어지는 신기루처럼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것은 결코 아니라 믿는다. 즉 일상을 통해 공고히 다져지는 신뢰와 조신한 언행을 통해 확신되는 믿음만이 스펀지처럼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고 믿는데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하긴 좀 뭐하지만 이런 이심전심의 상호 믿음이 있었기에 우리 <안경사>가 병산 일가에게 의지하는 바가 비록 컸어도 그 불안은 오히려 적었다. 하면 어떨까?
“….. 여차해서 우리 일가가 빠지면 뭐 오합지졸이 따로 있나? 그러니깐 잘해!”
 결코 밉지 않은 괜한 소리로 들린다. 
 
그저물처럼 07.03.12. 20:15
병산의 어깨가 꽤나 무거워지겟습니다 그려....ㅋㅋ
┗병산 07.03.13. 19:18
제가 대장 집살 때 돈을 좀 빌려줬는데 그거 안 갚을라고 대장이 발악을 하네요^^ 근데 제가 누굽니까? 그게 가능한 일이 아니지요? 한철희!! 어림도 없다 빨리 돈 갚아라!!!!!!
┗사람과山 07.03.14. 14:07
잉! 먼 돈? 눈 먼 돈?
시돌 07.03.12. 23:15
1월 27일 낙동강에서 서슴없이 발을 벗었던 백설이다.
불생불멸 07.03.13. 08:54
신뢰로 맺어진 부부애에 경의를 표합니다.
가을하늘 07.03.13. 09:08
드디어 화살이 병산, 백설 내외에게로 옮겨 갔네요. 어쩌다 나도 두 사람을 알게 되고 익숙해졌는지 이미 모를 일이지만 참 고마운 일입니다.
불생불멸 07.03.13. 09:10
뛰어난 기획력과 추진력은 열정과 정성이 합하여 이루어진 것일진데, 세월 지나도 그 마음을 간직하게나.
마루금 07.03.13. 09:38
내 기억이 맞을런지 모르겠는데, 강변 벚꽃이 날리며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햐! 고것 참..'이라고 묘사한 백설아의 시를 보았는데, 백설아 하면 자꾸 그 시가 생각나는데...기억이 틀리면 큰 실례인데...
병산 07.03.13. 11:27
먼 복수를 이쿠로 씨게 하니껴?
얀숙 07.03.13. 13:35
백설님의 하얀 치아가 활짝 웃는 모습이 떠 오릅니다. [조중동] 너무 적합한 표현입니다. 그 내공을 나도 습득하고 싶습니다.
박병한 07.03.13. 14:01
이 대목이 제일 압권, 나는 감히 단언하건데 그 사표(師表)를 피재현, 백설아 부부의 일상을 통해 배워 보라고 ......
숲사람 07.03.13. 14:08
한 마디로 잘 어울리는 한 쌍입니다. 둘이서 더 많은 짐도 기꺼이 지고 갈 수 있지 싶습니다.
┗사람과山 07.03.13. 17:44
주로 내역을 알 수 없는 빈 소주병이나 또는 땅에 묻흰 누런 밥그릇에 많은 짐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나눠 지는 모습을 본 적이 없네요.
박무식 07.03.13. 15:17
병산님, 그리고 설아님 꼭 공부해야 뎁니데. 그런데 무슨 공부를 할까-내한테 물어좀 줘봐
┗사람과山 07.03.13. 17:47
평화교육사상, 고병헌, 학지사는 아닐테고
┗병산 07.03.13. 19:22
무슨 공부를 할까요?
이산 07.03.13. 17:02
참말로 부럽데이....
┗병산 07.03.13. 19:24
거짓말 써주께, 너무 부러워 말고 쪼끔만 기다리소!
청포도 07.03.13. 20:53
부부 이야기를 하니, 참, 뭐라 거들 수가 없네요.. 이땅의 3%에 드는 부부라니~~ 부럽네, 두 가지가^^ㅎㅎ(알까?)
이산 07.03.14. 20:16
이거 정말로 거짓말 아닌가보지?
저 언덕 너머 07.03.17. 04:48
오손도손 나누는 얘기를 들으니 경계걷기 가족들이 부럽습니다. 백,피 부부네 이야기도 정말 훈훈하고요. 경계걷기처럼 험난한 인생길 같이 걸으면 늘그막에는 그 어떤 부부도 서로를 연민의 눈으로 보게됩니다. 그렇게 될 때 부부간의 사랑도 완성된다고 봅니다. 
 


거짓말시리즈(8) - 이산, 저산 부부
 
 한 마을에 거나한 축제가 벌어졌다. 돼지를 잡고 소를 잡는데 그때마다 이래라 저래라 말참견을 하며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유별난 사람이 있었다. 이런 일로 마을에선 딴에 여기저기 입방아를 찧어대며 그 사람 흉보기를 일삼아 즐겼는데 한 날은 그 사람이 출타중인 날을 골라 마을 잔치를 열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신명 날 줄 알았던 마을 잔치가 홀연 휑한 찬바람이 지나간 듯 허전한 것이 쓸쓸하기 이룰 데 없었다. 이유가 무엇일까? 축제가 진정한 축제로 이어지지 못하는 원인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경계 걷기 어느 날 김주철 선생님이 김용택 시인의 시구를 빌어 선문답처럼 내던진 말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날은 김헌택 선생님께서 경계걷기에 결석한 날이다. 우리 모두는 이날의 허전함에 대한 정확한 원인도 모른 채 엄숙한 순례자처럼 지도상의 경계를 이리저리 헤매고 있었을 뿐이었는데 역시 감성이 예리한 김주철 선생님께선 그 답을 미리 알고 계셨던 것이다 . 김헌택!  이름 석자를 떠오르고서야 우리 모두는 손뼉을 치고 탄성을 질렀다. 다시 말하건 데 우리가 걷는 <생명평화의 길, 안동 경계를 걷는다>가 지금까지의 축제로 연결될 수 있었던 기저에는 김헌택이라는 결코 가볍지 않은 축제의 거간꾼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감히 진단해 본다.  


알다시피 우리 <안경사>에 참여하고 있는 부부로는 모두 세 쌍이 있다. 얀숙님, 백설아님 그리고 여기에 정미옥님 부부가 그들이다. 여담이지만 부부가 이런 대장정에 함께 나서 긴 여정을 같이 한다는 것은 사실 엄청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본다. 무엇보다 새로운 형태와 시각으로 서로를 더욱 이해하는 일이다. 집안이라는 특수하고 제한된 일상 틀을 벗어나 대자연을 맘껏 호흡하며 또 그런 과정에서 얻어지는 고결한 땀의 의미를 통해 부부의 새로운 면을 상호 존중해주는 것이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이번 경계걷기를 통해 이들 세 부부의 부부애는 보다 돈독해졌으리라 확신한다. 누구의 말이었던가? 대개 부부의 사랑이란 것이 깨지기 쉬운 유리 같아 늘 위태한 것인데  여기에도 나름의 기술이 필요하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무뎌지기도 하고 엷어지기도 한데 때로는 해일과 같은 엄청난 위기에 봉착하기도 한다. 이는 모두 내가 주는 사랑보다 받는 사랑을 크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 마음 크게 바꾸면 사랑이란 오히려 커질 것인즉 ……  그런데 김헌택, 정미옥 부부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 글귀가 주는 가르침이 너무도 분명해진다. 정미옥님의 왈 “내가 경계걷기에 순전히 따라나선 건 그래도 내가 있어야 김헌택 선생님이 조금이라도 긴장을 하기 때문이다.” 매우 아리송한 말인데 해석인즉, 아직 긴장할 수 있는 애정을 매우 지능적으로 관리하는 것은 아닐까? 


처음 의도한 것과 달리 회가 거듭될수록 이 거짓말 시리즈를 거짓말로 보지 않는 분들이 꽤나 있는 것 같아 이제는 정색하고 진짜 거짓말을 할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매우 아찔하고 조심스러운 부분인데 여기서 약간 해명하고 넘어갈 것이 있다. 다름 아닌 거짓말시리즈의 배경이랄 수 있는데 사실 거짓말시리즈의 출발과 종점은 김헌택 선생님으로부터 비롯되고 나의 비겁(?)에서 출발했다. 지난 해 월간 <사람과 산> 환경훼손 르뽀 취재차 설악산을 찾은 적이 있다. 거기서 설악녹색연합 대표 박그림씨를 만나 그의 산양이야기와 초인간적 삶을 옆에서 지켜보며 많은 것을 배우고 느꼈다. 그런데 그가 올무에 걸려 안타깝게 죽은 산양이야기를 하다 돌연 눈시울을 붉히며 산양똥 몇 알을 입안에 털어 넣는 것이 아닌가! 분위기상 나도 흉내는 내어야 할 터인데 차마 비위가 맞지 않았다. 그리고 몇 회째이던가? 경계걷기를 하면서 김헌택 님께 그 짜릿한 이야기를 전하였더니 주저 없이 한 움큼 산양똥을 입에 가득 질겅질겅 씹어 삼키는 것이 아닌가! 매우 돌연한 사태인데 그 당사자는 너무나 태연했다. “산양의 애처로움을 제대로 느끼려면 내가 산양이 되어 보는 수밖에, 이것이 바로 우리가 추구하는 생명평화의 길이지.” 박그림, 그날 그 분이 내게 했던 그 말과 너무도 똑같다. 내가 어찌 거짓말쟁이라는 오명을 받을지언정 이런 성자(聖子)를 따로 기억해 내지 않을 수 있을 것이냐! 


많은 반론에도 불구하고 <안경사>가 가는 길은 오로지 생명평화의 길이다. 그런데 사실 역설적이게도 <안경사>가 가는 진짜 길은 술과 먹거리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까지 대면한 술만도 종류가 하도 많아서 다 언급할 수 없을 정도다. 여기에 갓 가지 맛난 별미에 찬을 더하자면 우리의 길이 생명평화의 길로 명명한 것 자체가 무안할 정도다. 그런데 그 술 담당 총무가 김헌택 선생님이다. 하지만 항시 술을 검사하겠다는 엄포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 책무를 수행하는 것을 지켜보질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리 쉼 할 때마다 꼬박꼬박 끊이지 않는 술을 보노라면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여기서 매우 혼란스러운 일은 술총인 김헌택 님이 술 검사뿐만 아니라 술을 다 마셔야 되는 것으로 책무를 잘못 알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이다. 그만큼 즐겨 한다는 말도 되겠는데 솔직히 그 주량만큼 나의 불안감은 커진다. 김헌택 선생님의 닉네임이 “이산 ”이라던데 혹시 이산, 저산 모두가 이 분의 안방이거나 혹은 잠자리 역할을 염두에 둔 애명은 아닐는지 모를 일이다. 하여튼 이런 일로 경계 속에서 이분만큼 속 편한 분도 없다. 내 한 몸 누이면 우주 삼라만상 다 내 것 아닌 것이 또한 없으니 …… 어느 옛 시인의  시구를 읊조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삶”이 “살다”에서 파생된 형태라고 보면 “산 (山)”은 그런 삶을 풀어내는 무대로서의 명사다. 또 그런 삶의 주체를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면 “살다” "삶”, “산”, "사람”은 결국 어머니를 같은 조상으로 모시는 형제들인 셈이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 인간은 유별나게 삶터로서의 산을 매우 동경해왔다. 비록 이런저런 일로 몸은 도회지에 있어도 마음만은 늘 산에 닿아 있는 것이 현대인의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그래서 그런지 최근 인터넷에 올려진 불리어지는 각종 이름 중에 유별나게 산과 관련된 이름이 두드러진다. 이런 이유로 처음 <이산, 저산>도 그 중에 하나로 보았다. 그러나 추후 “이산 ”은 우공이산이라는 유래에서 따온 이름이라는 이산님의 부연 설명을 듣고서야 그 깊이가 결코 예사롭지 않음을 느꼈다. 하지만 여전히 그 예사롭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산에서 풍기는 가까움, 즉 우리 이웃마을의 작은 야산과 같은 살가움이 느껴져 부르기가 여간 정겨운 것이 아니다. 여기에 저산까지 가세한다면 우공이산이라는 신비가 오히려 저만치 멀다. 하여튼 이산 저산 그 불림이 대단히 흥겨운데 부디 작은 바람이 있다면 그 불리는 이름만큼 부름을 필요로 하는 주위사람들에게 늘 적당하게 남아 달라는 것이다. 하기야 아무리 우공이산이라지만 늘 있어 편안한 이산 저산이 그렇게 쉽게 옮겨지는 것은 아닐 테지만 말이다. 


저 언덕 너머 07.03.22. 05:49
김헌택이라는 결코 가볍지 않은 축제의 거간꾼,,,“내가 경계걷기에 순전히 따라나선 건 그래도 내가 있어야 김헌택선생님이 조금이라도 긴장을 하기 때문이다.” 주저 없이 한 움큼 산양똥을 입에 가득 질겅질겅 씹어 삼키는 것이 아닌가! 이런 일로 경계 속에서 이분만큼 속 편한 분도 없다. 내 한 몸 누이면 우주 삼라만상 다 내 것 아닌 것이 또한 없으니…… “살다” "삶” “산” "사람”은 결국 어머니를 같은 조상으로 모시는 형제들인 셈이다. ...... 이런 글이 오르는 것을 보고 있으니 소설의 절정처럼 경계밟기(?)도 이제 대단원의 막을 눈 앞에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이네요
마루금 07.03.22. 08:38
사족: 그 날의 '돼지잡기'는 축제가 아니라 아이들 몰래 치뤄진 '살생'이었다.
시돌 07.03.22. 08:53
저산이 마음 먹고 산에 다니면 따라 다니기 어렵지 않을까 걱정이다. 간혹 바위를 탈 때 보면 이산은 불안해 보이지만, 저산은 오르막이나 내리막이나 바위 길이나 어떤 길이라도 잘 다닌다. 저산은 언제나, 이미 저산이다.
불생불멸 07.03.22. 09:29
어릴 때 생사의 갈림길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난 것은 안동에 와서 많은 일을 하라는 하늘의 보살핌이었으리. 후덕한 저산을 만난 것도 같은 연(緣)이겠지.
가을하늘 07.03.22. 11:21
이산저산 두 분이 사는 모습이 참 아름답습니다. 두 분이 천생연분이라고 한다면 이산님이 또 농담으로 뭐라고 하실지 눈에 선합니다. 다 엄살이지만요.
얀숙 07.03.22. 14:18
맞다, 게보린! 안경사의 재롱둥이(어른보고 죄송)이요, 앙꼬 없는 진빵이요. 트리 없는 크리스마스요, 송편 없는 추석이요. 대파 없는 라면이요. 꼬무줄 없는 빤스입니다.
저산 07.03.22. 23:20
고맙심다...거짓말이라 캐도..ㅋㅋㅋ 이산이 술총맡았다고 신바람나서 술병을 대구마구 챙길 때마다 속이 탔슴다...가방검사해도 끄덕없이 술없는 베낭으로 나가설랑 어떻게든 술과 더불어 산행을 한다는 걸 알지요...하도 날마다 정말 '에니 데이' 여서 '류병원' 보낸다고 협박(?)도 햇슴다. 대장님의 거짓말처럼, 이산이 있어 주변이 즐겁고 이산 또한 행복하다면, 그 행복의 길이을 늘이기 위해 저산은 악착같이 감히 '크산티페'를 자청할겁니다 ㅎㅎㅎ
 
┗병산 07.03.23. 09:41
그럼, 이 산이 소크라테스? 어쩐지...맨날 "잔 비어쓰" 이러고 다니더라니....
┗불생불멸 07.03.23. 10:02
자신을 잘 아는 사람들이구만
┗사람과山 07.03.23. 10:21
크산티페가 뭔 말이로?
┗시돌 07.03.23. 13:07
저산이 크산티페를 자청한다는 표현에 저는 감히 실망입니다.
┗청포도 07.03.23. 14:03
불문 부부의 특징은 3%에 안에 드는 '연리지'라는 건가요^^ㅎㅎ, 또, 대장님의 거짓말을 들어야 하는 당자는 엄살버전이군요. 악처라고 써서, 극구 3% 안에 든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이군요. 아름다운 부부를 만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지요.ㅎㅎ~~
시돌 07.03.23. 14:44
거짓말시리즈 번호가 틀렸니더!! 1.김옥희, 2,박병한김인숙, 3.배용한, 4.박용제, 5.한철희, 6.김주철, 7.피재현백설아, 8.김헌택정미옥, 9.김정석(?)
┗사람과山 07.03.23. 15:29
크~아!
이산 07.03.23. 18:53
지는 아무 할 말이 없습니다. 대장님의 대단하신 거짓말(?)에 모두들 댓글로 다 평가해주시니......
그저물처럼 07.03.24. 22:24
네 번째 사진이 이산의 면목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사진인 것 같다. 근데 혼자 와저카고 있노? ㅋㅋ
숲사람 07.05.14. 10:30
저절로 기분이 좋아집니다.



거짓말 시리즈(아홉 번째 – 김정석 님 편) 
 
 설마 설마 하던 한미 FTA가 결국 우여곡절 끝에 타결됐다. 그런데 그 이해득실 셈법에 있어서 이 나라 사회 전체가 폭발전야 아우성이다. 그럴듯하게 점잖을 빼는 어떤 이는 태평양을 가로지르는 새로운 실크로드가 열렸다 하고 또 노기 띤 어떤 이는 나라에 깊은 망조가 들었다고 시름이 깊다. 그러고 보면 언뜻 이 나라는 한껏 달아오른 백가쟁명시대다. 누군가가 자본주의를 살아내는 일은 철저한 장사꾼으로 살아내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 철저한 장사꾼이란 뉘앙스가 묘한 여운을 남긴다. 하여튼 셈에 의해 관계가 맺어지는 이 사회는 그야말로 계산의 시대라 할만하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은 누구를 새롭게 만난다는 건, 그래서 무슨 일을 도모한다는 건 그건 정말 매우 어려운 일이 되고 말았다. 특히 난 이런 장사꾼이요 하는 사람을 만날 땐 왠지 모르게 일정한 거리를 두고 더욱 낯설어지게 마련이다.


우리 <안경사>는 전원이 일선 학교 선생님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일하게 나와 김정석 님이 의외라 할 수 있는데 특히 김정석 님은 시장 터 사람이다. 옛말에 맹모삼천지교라 해서 시끌한 시장에 괜한 터부도 있을 수 있지만 김정석 님은 전혀 천박한 시장 냄새를 풍기지 않는다. 아주 예전 이분의 생업을 진지하게 몇 번 물어본 뒤에야 겨우 웃음 속에서 시장 냄새를 맡을 수 있었을 정도였다. 아, 그러고 보면 현 시대를 훑는 신자유주의라는 괴물이 최소한 이런 장사치를 겨우 흉내만 낼 수 있어도 작금의 자본주의 미래를 그렇게 암울하게 보지는 않을 것이건만 …… 

우리 <안경사>가 번번이 술을 즐겨 하는 핵심에는 김정석 님이 계시다. 더군다나 맡은 중책이 안총이니 실과 바늘의 관계상 술을 빼놓을 수는 없는 듯이 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좀 과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늘 뒤가 궁금했다. 항상 뒤의 걱정을 놓으라고 하지만 어디 그런가? 모르긴 몰라도 <이산>님과 세월을 낚으며 이 풍진 세월을 핑계로 이런저런 풍월을 읊고 흥얼거리지나 않을는지 …… 사실, 이 분이 우리 <안경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그렇게 가볍지 않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왜냐하면 다른 분은 몰라도 이 분만큼은 끝까지 안동 경계를 완주할 분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아직 공개되지 않은 그 믿음의 배경에는 다음의 연유가 있다. 그러니깐 몇 년 전, 호남정맥을 하면서 처음 만남이 있었을 때다. 어느 날 김정석 님이 안동경계를 하자는 느닷없는 제의를 했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씀. “철희! 맨 마지막엔 내가 있을 거다. 그러니 일단 출발만 해라!” 하지만 믿음만큼 걱정이 큰 것도 사실이다. 왜냐하면 내가 미처 모르던 엄청난 주량(?)이 맘에 켕기기 때문이다. 그 배후에 <이산>님도 한 몫 …… (생략) 

 우리 <안경사>는 우리 지역의 최외곽, 즉 지도상의 변두리를 따라 걷는 일을 평화생명의 길이라는 이름으로 지금껏 걷고 있다. 그리고 어느덧 그 끝을 준비하고 있다. 돌이켜보면 참 새삼스런 일이기도 하다. 먼저 평화도 그러하거니와 생명도 그렇다. 우리가 걷는 노정 내내 공허한 생명평화의 선언적 의미는 수 없이 되뇌었으나 보다 풀어낼 구체적인 의식과 실천의 결핍이 내내 밟혀왔다. 이런저런 고민이 여러 작은 이벤트의 졸작(?)으로 이어진 감이 적지 않아 돌이켜보면 씁쓸한 웃음도 묻어난다. 혹, 마지막 고백치고는 치졸하다고 할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말 나온 김에 한마디 더 부연하자면 나는 이 생명평화의 길이라는 의미를 좀 더 다르게 해석했다고 해야 하나. 하여튼 나의 욕심은 어떠하든지 간에 안동 경계라는 완벽한 완주에 있었다. 이름이 어떠하든 그 이름을 중심으로 흔들림 없이 다 함께 이뤄낼 수만 있다면 ……  이런 의미에서 나는 우리 <안경사>가 걸은 이 안동경계를 더 없는 생명평화의 길이라는 해석엔 이의가 없다고 본다. 그런데 언젠가 김정석 님이 흘리듯 한 말이 뇌리에서 좀처럼 지울 수 없다 . “철희야 , 그런데 생명도 좋고 평화도 다 좋은데 내 생각엔 굳이 밖에서 찾을 필요는 없을 것 갔다. 이렇게 함께 산을 걷는 것 자체가 생명이고 평화지 뭐 별것일까?” 내가 의식적으로 허둥댄다는 것을 알아채기라도 할 것일까? 평화란 균형과 조화, 그리고 분열 없이 함께 참여함에서 자발적으로 얻어지는 상태라고 강변하던 나섬 학교 피 선생이 김정석 님 위에 함께 오버랩 되면서 뭐라 질책하는 것 같아 못내 무안하다 . 


우리 <안경사>에도 백두대간을 완주한 분이 있다. 바로 김정석 님이시다. 무릇 백두대간하면 우리나라 산줄기의 대명사로 통한다. 백두산 병사봉에서 지리산 천왕봉까지 장장 1400km에 걸친 장대한 일군의 산줄기를 말하는데 불행히도 지금은 분단에 의해 진부령까지 약 670km 정도를 일반인이 갈 수 있을 뿐이다. 한때 전문 산악인의 첫 관문처럼 여겨지던 백두대간 종주가 지금은 남녀노소, 그리고 약간의 인내만 있으면 누구나 가능한 코스로 바뀐 지 오래다. 그래서 그렇게 특별하거나 특이해 보이질 않는데 그래도 명색이 백두대간인지라 대간 종주를 끝낸 사람들의 대개의 공통점이 있다. 바로 과대 허풍과 옹진 고집이다. 이를테면 몇 번의 사지를 헤맸다던가 또는 몇 날 몇 일을 굶었다든가 하는 식의 경이로운 이야기가 그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크게 귀를 세울 일은 아니라고 본다. 그런데 김정석 님은 다소 의외다. 그것도 홀로 야간산행을 즐겨 하면서 대간 종주를 마쳤다는데 그 입의 무거움이 흡사 바위 같다. 작정하고 이리저리 말꼬리를 물어서야 겨우 얻어내는 말이 이렇다. “대간 ? 해 보면 알지 뭐!”


 그런 분이 최근 다소 아리송한 말을 한다. “처음엔 좀 챙겨준다고 뒤를 맡았는데 이젠 오히려 뒤가 더 편안해 . 선생님들껜 이야기 하지 마라.” 힘이 부친다는 엄살로 웃어 보이지만 진실이진 참말인지 문득 헛갈린다.
 
 사실, 김정석 님의 삶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가지게 한다. 첫째는 잃어버린 옛 고향의 아련한 향수 같은 것이라 본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이웃 간의 작은 잔정이 사라졌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나눔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알량한 계산이 들어앉은 지 오래다. 인간이 땅을 버리고 회색을 선택한 댓가라지만 우리가 포기하기엔 너무나 고귀한 가치다. 이 가치의 재발견이 김정님을 통해 문득 문득 깨닫는다면 나만의 과신일까? 두 번째는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다. 이 땅의 많은 지식인과 지도자들이 이런저런 달변으로 미래에 대해 이 사회를 한껏 달궈놓지만 오히려 그리하여 많은 뭇 삶들이 피폐해졌다. 내가 보기엔 전혀 이 사회의 지식인도, 그렇다고 진지한 삶의 철학자도 아닌 작은 한 인간 존재인 김정석 님 같은 분들이 이 사회의 풍파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전쟁, 평화, 그리고 국가와 민족, 그 어느 것 하나 마음 깊숙이 고민과 갈등으로 간직하지 않아도 우리네 진솔 된 삶에 큰 균열이 가지 않는 시대를 살 수만 있다면 그것이 생명기운으로 가득 찬 진정한 평화로운 삶이 아닐까? 행여, 김정석 님이 우리 생명평화의 길 , 안동경계를 걷는다 마지막 즈음에 띄우는 생명평화에 대한 어떤 희망의 메시지는 아닐는지 ……
 
지금까지 많은 관심을 가져 주신 모든 분께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가을하늘 07.04.10. 21:41
한 가지, 한 가지씩 마지막이라고 올라오고 있어 문득 마음이 짠해집니다. 1년여의 산행 동안 대장님께서 준비와 진행, 또 이 거짓말시리즈까지 너무나 애를 쓰셨습니다. 함께 한 모든 분들에게 말할 수 없이 고맙지만 김정석님께는 제가 가장 신세를 많이 졌습니다. 고맙습니다.
병산 07.04.10. 23:35
안동경계걷기=김정석^^
얀숙 07.04.11. 08:39
윗글은 참말입니다. 사모님도 몇 번 뵀는데 같은 분이었습니다. 모두 성불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소리없이 빛내는 분으로, 성불하십시요!
불생불멸 07.04.11. 08:50
"성불하십시오" 자꾸하면 성불한다. 제일 많이 들은 사모님은 성불했더구만.
시돌 07.04.11. 10:46
모두 성불하십시오.
이산 07.04.11. 11:55
경계걷기하는 동안 대장님과 대원들 눈치봐가며 술친구하느라 정이 듬뿍 들었는데 계속 뵐 수 있기를 앙망하나이다. 부디 성불하소서!
박무식 07.04.11. 15:52
이북이 장인어른 고향이라고 했지요. 장인 고향을 절절히 가슴에 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평양을 꼭 가보고 싶다고 했던 말씀이 기억납니다. 내말을 진진하게 받아들여준 그 성의에 늘 감사의 마음이 남아 있습니다. 언제 좋은 책 한권 권해 달라 했는데, 이제서야 구했습니다. 좀 실례지만 하대치가 생각나곤 했습니다. 나도 카톨릭식으로 한마디. 민중 안에서, 민중과 함께, 민중을 위하여.(선무당이 맞게 들은지 모르겠네)
┗시돌 07.04.12. 08:42
부친 고향이 평양이라 켓는데
┗어치 07.04.17. 22:22
고향은 강동군 승호읍 승호리입니다
snowblue 07.04.11. 20:26
역시! 마지막에 김정석님을 한 까닭을 알겠습니다. 성불하십시오.
박무식 07.04.12. 09:16
김정석 선생님께 선물할 책 제목을 공개합니다. 1. 장석정 선생님의 시집 " 겨울화단" 2. 비전향 장기수 허영철 선생님의 수기 "역사는 한번도 나를 비켜가지 않았다"입니다.
불생불멸 07.04.12. 12:15
처음 만나면 말이 많고 분답한데, 시간이 지나면서 보면 남에 대한 배려심이 몸에 배여있는 사람. 산은 넘어봐야 알고, 물은 건너 봐야 알고, 사람은 사귀여 보아야 안다 했던가.
┗사람과山 07.04.12. 09:24
새삼 듣고 보니 명언입니다.
박무식 07.04.12. 09:38
그런데 김정석 선생님은 이 글을 읽어 봤는가. 되게 궁금.
┗시돌 07.04.12. 10:44
그 말 들으니 나도 그게 궁금하기는 하다.
┗사람과山 07.04.12. 12:43
제가 가장 확신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얀숙 07.04.12. 13:28
들어 와 보시라고 문자를 보내볼까요! ㅋㅋㅋ
┗어치 07.04.17. 22:19
지금 읽었습니다.
병산 07.04.16. 16:58
아직도 본인은 못 본 것 같네요^^
┗불생불멸 07.04.17. 09:44
출력을 해서 전달하는 것이 빠를 듯
이산 07.04.17. 14:30
마지막 산행을 하면서 꼭 보라고 했는데......
어치 07.04.17. 22:17
회원님들 그동안 정도 많이 들었었는데...모두들 성불하십시요 ^^
숲사람 07.05.14. 10:36
세사에 휘둘리지 않는 의연함과 자상함, 이웃을 배려하시는 따뜻함으로 늘 친근하게 다가오는 분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