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진 바람[風]의 집에서 부는 오래된 바람[希望]
이종형 시 <바람의 집> <해후>
글 최규화 (기자)/ realdemo@hanmail.net
2월 14일. 설 연휴를 하루 앞둔 날이었다. 오전에는 외부에서 인터뷰 취재 일정이 있었고,
오후에는 반차를 내고 고향으로 바로 출발할 계획이었다. 벌써부터 마음은 들떴고,
여섯 시간이 걸릴까 일곱 시간이 걸릴까 한시가 급했다. 도로가 조금이라도 덜 막힐 때
출발하고 싶어서 점심도 거르고 시동을 걸었다. 노트북은 있었지만 이메일도 확인하지 않았고, 스마트폰으로 뉴스도 보지 않았다.
닷새 지나 다시 회사에 출근한 날. 얼마나 많은 이메일이 쌓여 있을까 걱정하며 메일함을 열었다. 2월 13일 퇴근길에 싹 비워둔 메일함의 맨 아래 페이지에서, 2월 14일자 보도자료 하나가 눈에 띄었다.
“여성가족부 장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사망에 애도.”
그날 새벽 또 한 분의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
2018년 들어 두 번째로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이다. 유가족의 요청으로 고인의 성함과 인적사항마저 공개하지 않기로 했단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는 고인이 “1945년에 강제 동원되어 고통스러운 생활을 하셔야 했고, 해방 후 고향으로 돌아와 2012년부터 나눔의 집에서 생활하셨습니다”라고 짧게 밝혔을 따름이다.
닷새 전에 이메일을 열어봤다 한들 내가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었다. 잘해야 기사 한 줄 쓰는 것뿐. 아마도 고향 생각에 벌써 마음이 팔려서 못 본 체 슬쩍 넘어갔을 거다. 그래도 자꾸 죄스러운 마음이 자라는 건 막을 수 없었다. 집에 두고 요즘은 잘 차고 다니지 않는 ‘위안부 피해자 돕기’ 주황색 팔찌도 생각났다. 고인은 정부에 등록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239명 중 209번째 사망자. 이제 생존자는 30명뿐이다.
바람의 집
당신은 물었다
봄이 주춤 뒷걸음치는 이 바람 어디서 오는 거냐고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4월의 섬 바람은
수의 없이 죽은 사내들과
관에 묻히지 못한 아내들과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잃은 아이의 울음 같은 것
밟고 선 땅 아래가 죽은 자의 무덤인 줄
봄맞이하러 온 당신은 몰랐겠으나
돌담 아래
제 몸의 피 다 쏟은 채
모가지 뚝뚝 부러진
동백꽃 주검을 당신은 보지 못했겠으나
섬은
오래전부터
통풍을 앓아온 환자처럼
살갗을 쓰다듬는 손길에도
화들짝 놀라 비명을 질러댔던 것
4월의 섬 바람은
뼛속으로 스며드는 게 아니라
뼛속에서 시작되는 것
그러므로
당신이 서 있는 자리가
바람의 집이었던 것
이종형 시집 <꽃보다 먼저 다녀간 이름들>(삶창, 2017년) 20~21쪽에 실린 시다.
제주에서 태어난 시인. 시집 뒤표지에 실린 추천사에서 ‘4·3항쟁’이라는 단어를 봤을 때,
좀 뒀다가 3월 말에나 다뤄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시집을 읽는 동안 생각이 바뀌었다. 나도 모르게 4·3을 그냥 ‘4월이면 돌아오는 어느 하루’라고 생각했나 보다. 하지만 4·3은 “오래전부터” “뼛속에서 시작되”어온 낯익은 바람이었다.
“4월의 섬 바람”을 이야기하는 시에서 나는 왜 이름도 모르는 209번째 ‘위안부’ 피해 사망자를 떠올렸을까. 왜 내게도 “봄이 주춤 뒷걸음치는 이 바람”이 불었던 것일까. 나 역시 물어보자. “이 바람 어디서 오는 거냐고”. 아마 시인은 또 말할 것이다. “당신이 서 있는 자리가/ 바람의 집”이라고. 아마도 ‘인간’을 파괴하며 이어져온 역사의 상처가 우리가 “서 있는 자리”마다 “바람의 집”을 지어뒀을 게다.
4·3이라는 거대한 파괴 위에 살아남은 제주 사람들. 그들에게는 4·3의 기억이 그랬을 것이다.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239명(물론 이것은 정부에 등록된 숫자에 불과하지만)이 겪었고 우리가 대를 이어가며 가슴에 새긴 ‘위안부’의 기억이 그랬을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한국전쟁의 기억이, 광주항쟁의 기억이 그랬을 것이다. 가까이는 세월호 참사의 기억도 누군가에게 “바람의 집”을 지었을지 모른다.
국가를 앞세워 개인의 생명과 자유를 짓밟으며 “모가지 뚝뚝 부러진/ 동백꽃 주검”
스러져간 기억들마다 “바람의 집”이 지어졌다. 이 땅 어디에나, 우리의 마음 어디에나 지어진 “바람의 집”. 바람은 한 시대에서 또 다른 시대로, 한 사람에서 또 다른 사람으로 이어 흐른다. 시인의 “뼛속에서 시작되는” “4월의 섬 바람”은 제주에만, 4월에만 부는 것이 아니다.
2월의 내 가슴에도 마찬가지로 불고 있었다.
해후
한 아버지를 가졌으나 어머니가 다른 두 사내가
백 미터 전부터 한눈에 서로를 알아봤다
경주군 강동면 단구리 버스정류장
고작 서른 몇 살에 세상 뜬 아버지를 둔, 가여운 사내 둘이 손을 맞잡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서로의 얼굴만을 뚫어지게 바라다보는데
너무나 닮아, 차라리 무서우리만큼 빼다 박아
다른 어머니의 몸을 빌려 태어난 내력도
서로 못 보고 살아온 수십 년 세월도 단숨에 비껴가는 것이었다
안부랄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저 이리 몸성히 잘 지내고 있었으면 된 거지
이렇게 만날 수 있어서 고마운 거지
중년 사내 줄이 움켜쥔 손을 놓지 않은 책
어색하게 걸어가는 동안
하이고야 우예 이리 닮았노
피가 무섭긴 무서운기라
이웃들, 일가붙이들 하나둘 달려 나와
종택(宗宅)으로 가는 골목길이 소란스러워지는데
두 몸에 스며든
연민의 뿌리까지 빼다 박은 형제가
자꾸만 걸음을 멈추고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시집의 72~73쪽에 실린 시. 안상학 시인이 시집의 발문에서 밝히듯이, “뭍에 처자식이 있는
나이 든 사내와 스물넷 제주 처녀의 결합, 축복받지 못한 출생, 그런 아버지의 요절과 부재”라는 시인의 개인적 경험과 연결 지어 읽어야 할 시 같다.
“한 아버지를 가졌으나 어머니가 다른 두 사내”의 해후. 나는 이 장면에서 또 하나의 바람[風]을 느꼈다. 전쟁이라는 폭력의 역사가 파괴한 가족들의 바람[希望] 말이다.
1월 9일 남북 고위급회담 대표단은 북한이 평창동계올림픽에 고위급 대표단과 선수단, 예술단 등을 파견하기로 했다는 공동 보도문을 발표했다. 하지만 아쉽고도 의아한 것이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가장 급하고, 그렇기 때문에 가장 손쉬울 것이라고 여겨진 이산가족 상봉행사는 합의 내용에 없었던 것이다.
한국전쟁 이후 7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통일부와 대한적십자사 자료에 따르면,
1988년 이후 상봉을 신청한 13만 1000여 명 가운데 지금은 5만 8000여 명만이 살아 있다.
지난해에만 4000여 명이 사망. 2016년 이후로는, 상봉을 기다리며 살아 있는 사람보다 한을
풀지 못하고 죽은 사람의 숫자가 더 많아졌다. 그리고 현재 남측 상봉 신청자 가운데 80~90대가 60% 이상. 이제 정말 시간이 없다.
이산가족 상봉을 단순한 인도주의적 이벤트 정도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이산가족의 뿌리에는 무엇이 있나. 바로 전쟁이다.
그것도 형제와 가족과 이웃과 동무들이 서로 다른 색깔의 깃발 아래에서 죽이고 죽은 참담한
전쟁. 그러한 폭력으로 파괴된 가족들을 분단의 틈새에서 다시 만나게 하는 것은 개인에게
가해진 잔혹한 국가폭력에 대한 최소한의 반성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남북으로 갈라진 수많은 사람들의 “바람[風]의 집”에서 오래되고 절박한 바람[希望]이
불어 흐른다, 역사에 의해 파괴된 인간의 마음을, 그 “연민의 뿌리”를 이어달라는 바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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