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곧은 지조와 기상이 굽이굽이 흐른다
경북 영주는 ‘선비 고을’로 통한다. 영남 사림파의 원조 격이라 할 수 있는 소수서원이 있고
목숨과 바꿔 의리와 지조를 지킨 역사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선비의 올곧은 기상은 영주의
북쪽 소백산 자락에 기댄 순흥(順興)면 일대에서 만날 수 있다. 여말선초 한강 이남 제일의
도시였다는 순흥도호부가 있었고 조선시대 풍기라 불렸던 땅이다. 영주의 남쪽 문수면에는
자연의 정취가 아름다운 무섬 전통마을이 있다.
조선시대 명종이 직접 현판을 내리고 노비와 전답을 지원한 최초의 서원.
1871년 대원군이 전국 서원을 철폐하는 과정에서도 살아남은 27개 사액서원 가운데 하나.
1543년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이다. 풍기군수 주세붕이 고려 말 유학자
안향을 모시고 유생을 가르치기 위해 세운 백운동서원이 소수서원의 시초다.
서원에 들어서면 시간은 470년도 더 지난 조선 시대로 돌아간다. 거대한 은행나무들과 울창한 소나무숲, 깨끗한 물길 등이 강학당 등과 어우러져 기품 있고 수려한 경관을 담아낸다.
입구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강학당은 유생들이 모여 강의를 듣던 곳이다. 사방으로 툇마루가
둘러 놓여 있고 배흘림기둥 양식이 특이하다. 국보 제111호인 안향 초상과 보물 5점,
유형문화재 3점을 비롯한 유물·전적 등이 소장돼 있다. 서원의 역사와 기능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사료관도 자리하고 있다.
서원 옆을 흐르는 죽계천은 고려 시대 경기체가 ‘죽계별곡’의 배경이자 퇴계 이황 선생이
‘죽계구곡’을 이름 지은 곳이다. 한쪽에 퇴계 선생과 그의 제자들이 시를 짓고 풍류를 즐겼던
취한대가 자리한다. 취한대 옆으로는 백운동 ‘경(敬)’자 바위가 눈에 들어온다.
계곡을 건너면 선비촌에 닿는다. 전통가옥에서 숙박을 하며 전통생활을 체험하는 일종의
민속촌이다. 5만9400㎡(1만8000평)의 부지에 영주 지역 전통 가옥 12채를 비롯해 강학당,
대장간, 정자, 물레방앗간 등 40여 채의 옛 건물을 지어 조선시대 마을을 재현해 뒀다. 윷놀이, 새끼꼬기, 제기차기 등 전통문화 체험을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있어 색다르다.
소수서원 맞은편에 금성단, 압각수 등이 있다. 올곧은 선비 정신이 발현됐던 장소다.
금성단은 조선시대 단종 복위 운동을 벌이다 사약을 받은 금성대군을 추모한다.
압각수는 금성단 옆 1200년 묵었다는 은행나무다. 나이에 비하면 몸집이 초라하지만
순흥 땅 피의 역사를 온 몸에 새기고 있다.
순흥 땅 ‘핏빛 역사’는 이렇다. 조카 단종을 쫓아내고 영월에 유배시킨 뒤 왕위에 오른 세조는
사육신과 함께 왕위 찬탈에 반대하던 동생 금성대군을 순흥으로 유배보낸다.
순흥에서 금성대군은 순흥부사 이보흠 등과 뜻을 모아 단종 복위에 나선다.
그러나 거사 직전 계획이 탄로난다. 세조는 금성대군에게 사약을 내린다.
이에 가담한 선비와 65개 크고 작은 집안의 자손 300여명이 역모로 죽임을 당했다.
1456년의 정축지변(丁丑之變)이다. 당시 피는 죽계천을 따라 10여리 떨어진 마을까지 흐른 뒤 사라졌다고 한다. 그곳이 바로 ‘피끝마을’이다. 당시 오백 살 넘은 은행나무도 불에 타 죽었다고 한다. 정축지변으로 순흥도호부는 폐부됐고, 모반의 땅으로 버림받았다. 순흥도호부의 명예를 되찾은 건 200여년이 지난 1683년 숙종에 의해 단종이 복위되면서다. 30년 뒤 금성대군과
순흥의 선비들도 복권됐다. 죽었던 은행나무도 이때 다시 살아나 잎을 틔웠다고 한다.
도호부를 되찾은 순흥은 되살아났지만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며 또다시 비극이 찾아왔다.
치욕적인 을사늑약에 영주 선비들은 의병을 꾸려 일어섰다. 1907년 소백산 자락에 자리한
의병들은 신무기를 장착한 일본군의 섬멸작전에 거의 몰살됐다. 당시 순흥읍내 고택 180여 채가 의병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일본군에 의해 불태워졌다.
소수서원 건너편 소수박물관에서 내년 2월까지 ‘광복, 영주의 간절한 외침’ 특별기획전이
열리고 있다. 영주의 활발했던 독립운동에 대해 알리고, 독립운동 관련 유적지와 주요사건들을 조명하고 있다. 영주의 선비정신이 영주지역 독립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을 엿볼 수 있다.
영주에서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가 문수면 수도리 전통마을 ‘무섬마을’이다. 무섬은 ‘물 위의 섬’을 줄여 부른 말이다. 태백산 줄기에서 시작한 내성천이 휘돌아 가며 만든 반도 형상의 모래톱 위에 반듯하게 터를 잡은 옛 마을은 예천 회룡포, 안동 하회마을과 더불어 우리나라 대표적인 물돌이동이다.
반남 박씨와 선성 김씨 집성촌으로 한때 100가구가 넘는 마을이었는데, 지금은 100여년 안팎의 전통가옥이 40여채 남아 있다. 이 가운데 경북도 중요민속자료 제92호인 해우당을 비롯한
9개의 문화재가 있다. 상당수 고택엔 주민이 실제로 산다. 일부는 고택 체험을 위한 숙소로
쓰이기도 한다.
마을과 내성천이 만나는 곳엔 S자 모양의 외나무다리가 놓였다. 1979년 마을 옆으로 수도교가 놓이기 전까지 외부와의 연결 통로 노릇을 했다. 새색시가 탄 가마가 오가기도 하고, 상여가
실려 나가기도 했다. 요즘은 주로 관광객들이 재미 삼아 오간다.
외나무다리는 통나무를 반으로 쪼개 듯 잘라 폭 30㎝, 높이 60㎝로 만들었다.
총길이는 150m가량. 건널 때면 마치 평균대 위를 걷듯 아슬아슬한 느낌이다. 생각보다 물살이 세서 어질어질하기도 하다. 외나무다리는 곳곳에 마주치는 이들에게 길을 내어줄 수 있는 다리 한 칸을 더 놓아 배려의 의미도 담고 있다.
대부분 외나무다리를 건너자마자 되돌아온다. 건너편에서 5분 정도 더 걸어 산정에 있는
전망대에 오르면 무섬마을을 제대로 볼 수 있다. 은백색 백사장과 휘감아 도는 내성천 물줄기가 고색창연한 마을을 고즈넉하게 품고 있다. 왁자지껄한 먹거리 장터는 없지만, 민박집 등에서
국수를 비롯한 간단한 음식과 커피와 차 등을 맛볼 수 있다.
영주시 가흥동 구학공원에는 정도전의 생가로 알려진 삼판서고택이 있다.
고려 말에서 조선 초까지 세 사람의 판서가 살았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가운데 가장 먼저 살았던 사람은 공민왕 때 형부상서(형조판서)를 지낸
정운경(1305∼66)이었다. 그는 공조전서(공조판서)를 역임한 사위 황유정(1343∼?)에게 집을 물려줬다. 황유정은 다시 사위인 김소량(1384∼1449)에게 넘겼다. 김소량의 아들
김담(1416∼64)이 이조판서에 올랐다. 정도전도 몇 차례의 유배에서 풀려나 이곳에서
심신을 달랬다고 전해진다.
삼판서고택은 원래 구성공원 남쪽에 있었지만 1961년 대홍수 때 침수되면서 기울어져
철거됐다가 2008년 10월 현재의 위치에 복원됐다. 본채가 정면 여섯 칸, 측면 일곱 칸으로
팔작지붕과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커다란 양반 가옥이다. 문간채는 상대적으로 작다.
고택 옆에는 정도전과 대립 관계에 있던 하륜이 군수 시절 세웠다는 제민루가 우뚝 솟아 있다. 조선 시대 백성을 위해 의료 사업을 펼친 흔적이다.
여행메모
사포닌 많아 항암효과 좋은 풍기인삼
묵밥·기지떡·양념갈비… 먹거리 다양
경북 영주 북쪽의 선비촌과 소수서원 등을 둘러보려면 중앙고속도로 풍기나들목으로 나가는 게 빠르다. 북영주 방면 931번 지방도로를 타고 곧장 가면 닿는다. 무섬마을은 중앙고속도로 영주나들목이 편하다. 28번 국도에 이어 5번국도 영주시청 방면으로 갈아탄 뒤 적서교차로에서 우회전해 수도리전통마을 표지판을 보고 따라가면 된다. 영주시내에서는 약 10㎞ 떨어져 있다. 남부지역에서는 예천나들목에서 928번 지방도를 이용하는 것이 빠르다.
순흥쪽 먹을거리로는 묵밥이 유명하다. 인근 봉화, 춘양 등에서 생산된 메밀로 묵을 만들어
낸다. 읍내리의 순흥전통묵집은 멸치를 우려낸 따뜻한 국물에 채 썬 묵을 넣고 송송 썰어낸
김치와 김가루를 얹어 내놓는다. 주전부리로는 기지떡이 알맞다. 술로 반죽한 멥쌀가루를 찐 뒤 대추 등 고명을 얹었다. 인절미도 별미다.
영주시 풍기읍의 특산물로 인삼이 유명하다. 풍기인삼은 향이 강하고 사포닌 함량이 높아
항암효과 등이 뛰어난 것으로 알려졌다. 풍기역 앞에 인삼시장이 형성돼 있다.
영주는 인삼뿐 아니라 생강의 주요 생산지이기도 하다. 영주 생강 등이 들어간 양념갈비가
맛나기로 소문났다.
영주=글·사진 남호철 여행선임기자 hcna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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