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바람과 시간이 빚어낸 신비로운 자연의 얼굴 - 천연기념물 제431호 태안 신두리 해안사구

이산저산구름 2017. 4. 25. 08:10


BR> 사막과 같은 이국적인 풍경 ‘모래 언덕’
천연기념물과 마주할 때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라고 할 수 없는 자연의 광활함과 야생 그대로의 모습에 감탄하며 경치만 즐기고 오는 일이 다반사다. 태안 신두리 해안사구 역시 모래 언덕이란 생각에 막연함이 앞섰지만, 현장에 도착하니 반전 아닌 반전이 준비돼 있었다. 표지판보다 먼저 여행객을 맞는 깔끔한 인상의 ‘신두리 사구센터’. 뭐든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다. 해안사구가 시작되는 지점에 자리하고 있는 센터에 들어서면 이곳의 생태환경과 역사, 서식하고 있는 동식물의 종류 등에대한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사막으로 떠나기 전, 예습하기에 적격인 공간이다. 신두리로의 나들이에 아이들이 함께라면 센터에서 마련한 소소한 프로그램을 놓치지 말자. 모래를 직접 만지며 그림을 그려보는 샌드아트와 이곳에 서식하는 동물의 발자국 모양을 찍어보는 탁본 체험은 해안사구에 대한 관심도를 높이는 역할을 해준다.
태안에 위치한 신두리 해안사구는 길이 약 3.4㎞, 폭 약 0.5~1.3㎞로 국내에서는 가장 크고 넓은 모래 언덕이다. 조수간만의 차가 생기면서 썰물 때 육지로 드러난 모래가 바람에 의해 해안 주변으로 쌓이면서 생긴 해안사구는 단순한 모래 둔덕이 아니다. 바람이 거셀 때는 사구의 모래가 해안이나 해변으로 이동하면서 끊임없이 움직이기 때문에 다양한 생태환경을 조성할 수 있다. 이로써 보호 단계에 있는 희귀 동식물들이 생존할 수 있는 서식처가 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한때 바닷속 모래였었던 커다란 모래 언덕 내부는 물을 머금고 있어서 해안사구에 살고 있는 동식물에게 수분을 제공한다. 이처럼 생태학적으로도 가치가 있는 태안 신두리 해안사구는 2001년 천연기념물 제431호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 여행객들로 인한 훼손을 최소화하기 위해 따로 나무 데크로 인도를 만들어 관람할 수 있는 범위에 제한을 뒀다. 광활한 사막 위를 걷는 듯한 즐거움을 맛보고 싶지만 이것이 자연과 인간이 함께 공존할 수 있는 최소한의 노력이 아닐까 하는 마음으로 전망대에 올라 눈으로만 모래 위를 걸어본다.
봄바람 불면 알록달록해질 모래 위 꽃밭
무수한 생명이 살고 있는 갯벌의 가치만큼, 해안사구의 생태계는 미지(未知)이자 곧 무지(無知)에서 오는 놀라움이 함께 했다. 사구가 생성되기 시작하면 맨땅에 가장 먼저 정착하는 선구식물(先驅植物)이 자리를 잡고, 사구 뒤편으로 덤불과 수목이 군락을 형성하다가 각각의 군락 역시 범위를 확장하여 하나의 큰 해안사구라는 생태계를 이루는 것이다.
태안 신두리 해안사구를 짧게는 30분, 전체를 다 돌면 2시간 정도 소요가 되는데 그 길목마다 친절하게 세워져 있는 표지판에는 이른 봄의 문턱에서 아직 싹을 틔우지 못한 식물들에 대한 설명이 적혀 있다. 척박한 모래 위에서 자라는 식물이라니 여간 생소한 것이 아니다. 햇볕이 잘 들고 건조한 모래에서 자라는 식물을 초종용이라 하는데, 사철쑥 뿌리에 기생해 자라는 습성 때문에 사철쑥더부살이라고도 부른다. 국내에서는 제주도와 울릉도에서 만나볼 수 있는 희귀한 식물이다. 약재로도 쓰이는 초종용은 5~6월이 되면 연한 자주색 꽃을 피운단다. 주변의 물체를 감고 올라가는 덩굴식물 갯메꽃 또한 초종용과 같은 시기에 분홍색 꽃을 선보인다. 많은 표지판 사이에서 그나마 익숙한 이름의 해당화. 모래는 물론 산기슭에서도 자라는 해당화는 5~7월 붉은색과 흰색, 두 가지 색으로 해안사구를 물들인다. 바닷가 근처에 위치한 해당화 동산에 이르면 바람이 실어 나르는 진한 꽃향기에 흠뻑 취할 수 있다.
아무것도 자라나지 않은 무(無)의 모래 위에서 이 많은 꽃이 필 생각을 하니 5월에도 반드시 태안 행에 올라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잘되어 있는 설명 덕분에 조금만 상상력을 발휘하면 소담스럽게 피어날 봄꽃의 자태를 눈앞에 그려볼 수 있다.

(좌) 해안사구 전체는 도보할 수 있는 공간을 지정해 놓고 있어 피해를 최소화하고 있다. (우) 곰솔 생태숲
여기서부터는 그늘의 품, 곰솔 생태숲
문득 한여름 무더위 속이었다면 태안 신두리 해안사구에서 그늘 한 점이 그립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빠지는 순간, 보란 듯이 펼쳐진 숲에 시선이 자연스레 이어진다. 바닷가를 따라 자라기 때문에 해송(海松)이라 부르기도 하고 소나무보다 검다고 해서 흑송(黑松)이라고 하는 곰솔로 이뤄진 생태숲이다. 길을 따라 마주 보고 있는 30~50년생 곰솔은 하늘을 가릴 듯 서로 깍지를 끼웠다. 바람이 거세더라도 해안사구의 급격한 이동이 생기지 않는 것도 이 숲 덕분이다. 곰솔이 만든 적당한 그늘 속을 종횡무진하는 바람이 여행객들을 스치자 저마다의 입가에 기분 좋은 미소가 머문다.
곰솔 생태숲의 나무들은 피톤치드를 많이 발산하기 때문에 스트레스 해소와 심폐 기능 강화에도 효과가 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2시 사이가 피톤치드 분비가 가장 많은 시간대라는 점을 알고 가면 건강한 숲의 향기를 제대로 즐길 수 있을 것이다.


바람에 일렁이는 억새, 푸름으로 출렁이는 바다
오래전에 운석이 떨어졌다고 해서 작은 별똥재라 불리는 모래밭을 지나면 들판을 가득 메운 억새 군락이 펼쳐진다. 사구와 함께 어우러진 이국적인 풍경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전국의 산과 들에 흔히 자라는 억새인데 어딘지 모르게 눈에 익숙하다. 바로 봉준호 감독의 작품
<마더>의 첫 장면에서 배우 김혜자 씨가 춤을 췄던 그 장소였던 것. 봄의 억새는 조금 쓸쓸해 보일 수 있지만 가을에 왔다면 회갈색 억새꽃이 만드는 장관에 반하게 될 것이다.
여정의 대미를 장식하기 위해 마지막 길목에는 태안의 너른 바다가 기다리고 있다. 하늘빛을 고스란히 머금은 바다의 푸름은 순수하기까지 하다. 잠잠한 물결이 일으키는 하얀 물보라가 벗이 되어 태안 신두리 해안을 거닐다 보면 동글동글하게 빚어놓은 작은 모래 경단을 발견할 수 있다. 이곳에 사는 엽낭게와 달랑게가 모래를 잔뜩 삼키고 나서 먹이만 빼먹은 후 모래를 뱉어 둥글게 말아 놓았기 때문이다. 동그란 모래 덩어리가 보인다면 주변에 엽낭게와 달랑게가 있지는 않은지 찾아보는 것도 또 하나의 재미일 것이다.

글‧최은서 사진‧안지섭 일러스트‧장명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