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애달픈 사연은 절경이 되어 파도친다 - 명승 제69호 안면도 꽃지 할미 할아비 바위

이산저산구름 2016. 10. 25. 10:03




언제 가도 좋을 태안의 꽃지
우리나라에서 여섯 번째로 큰 섬인 안면도의 중앙에는 탁 트인 백사장과 소나무 숲, 그리고 기묘한 모양의 쌍바위가 위치한 꽃지해수욕장이 있다. 봄에는 그윽한 매화의 향기에 취하고, 여름에는 붉은 해당화에 마음이 뜨거워지기에 이곳을 ‘꽃지’ 또는 ‘화지(花地)’라고 부른다. 그 덕에 2002년에는 안면도 국제꽃박람회를 열었고 꽃지해안공원도 조성하게 됐다. 바다를 만나러 온 객지 사람들은 해안공원 안에서 생각지도 못한 야생화와 꽃동산, 장미원 등을 만나며 또 하나의 신세계를 선물 받는다.
가을에 이곳을 찾았다면 달큼하게 살이 오른 꽃게를 맛봐야 한다. 물론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지만, 꽃지해수욕장에 온 만큼은 주린 배를 차치하고서라도 일몰만큼은 놓쳐서는 안 된다. 군침이 돌더라도 잠시 해변에 머물며 작지만 아늑한 방포항과 그 위를 가로지르는 꽃다리를 건너며 해가 지기를 기다린다. 변산의 채석강, 강화의 석모도와 함께 ‘서해의 3대 낙조’로 이름을 올린 꽃지 할미 할아비 바위가 붉게 물드는 것을 봐야하기 때문이다.
방포항은 ‘젓개항’이라고도 불리는 한적하고 조용한 곳이다. 그런데도 강태공들이 알아보는 바다낚시의 명소라 그런지 여기저기 낚싯대를 드리운 사람들이 눈에 띈다. 70여 척의 어선들은 이른 아침부터 우럭, 실치, 노래미 등을 잡고서 저녁이 다 돼서야 피곤했던 몸을 항구에 기대어 쉰다. 2001년에 꽃지해변과 방포항을 연결하는 인도교 꽃다리가 세워져 관광객들은 멀리 돌아가야 했던 불편함을 줄일 수 있게 됐다. 또한, 이곳에서 바라보는 낙조의 풍경이 특히나 아름다워 해가 떨어지기 무섭게 사람들은 붉은 꽃다리로 모여든다.


여기 변치 않는 사랑이 있네
태안군 안면읍 승언리 꽃지해수욕장에 있는 할미 할아비 바위는 바닷물이 빠지는 시간에 맞추면 직접 걸어 들어가 그 속내를 들여다볼 수 있다. 바닷물이 빠진 울퉁불퉁한 길을 걷다 보면 돌에 붙어 서식하는 굴과 따개비가 바닷물이 들어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이때를 틈타 열심히 굴과 조개를 따는 가족들도 보인다.
소나무로 수북하게 덮여있는 할아비 바위와 꽃꽂이를 해 놓은 듯 바위 곳곳에 소나무가 삐죽삐죽 올라와 있는 할미 바위를 향해 걸음을 옮기자, 오래전 이야기가 조용히 파도에 실려 온다.
신라 제42대 흥덕왕(興德王, 826~836)때, 해상교통로를 설치했던 해상왕 장보고는 서해안의 중심지인 안면도 건승포에 전략 기지를 세웠다. 그리고 그곳의 책임자로 승언(承彦) 장군을 파견했고, 슬픈 전설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승언 장군에게는 아리따운 부인 미도가 있었다. 두 사람의 사랑이 무척이나 깊어 좋은 금슬이 밖으로도 소문이 자자할 정도였다. 하지만 장보고의 명령을 받고 출정하게 된 승언 장군은 곧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부인과 헤어지게 됐다. 부인 미도는 매일 바위에 올라 남편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렇게 지낸 세월이 수년이 흘러 부인은 결국 명을 달리하게 됐고, 그녀가 매일 서 있던 바위는 애타게 남편을 기다렸던 모습을 닮게 됐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옆에 커다란 바위 하나가 솟아올랐는데, 사람들은 이를 승언 장군이라 믿었다. 그렇게 할미 할아비 바위란 이름이 생겨난 것이다.
작고 여릿해 보이는 할미 바위가 안쓰러워 가만히 쓰다듬다가 바위를 비집고 자란 강인한 소나무를 보며 정인(情人)에 대한 단단한 사랑이 아닐까 잠시 더 바라보게 된다. 반대로 그 할미 바위를 지켜내겠다는 듯 늠름한 할아비 바위에는 간조와 만조가 만들어 낸 예술작품이 눈에 띈다. 바위를 뒤덮고 있는 소나무의 가지와 뿌리마다 하얀 소라와 조개껍데기가 줄줄이 걸려 있는 것이다. 먼발치에서 보면 가지 위에 하얀 꽃이라도 핀 것 같은 착각이 들정도다. 설화에 이끌려 걸어 들어온 탓인지 어딘지 모를 신비스러움이 두 바위 사이에 자리하고 있다. 어둑해지자 서둘러 걸음을 옮기는 사람들. 낙조에 빠져들기 위해서다.
빨갛게 하늘이 물들자 커다란 실루엣이 되어 나란히 서 있는 할미 할아비 바위. 붉은 기운이 바다까지 번져오면서 승언과 미도의 오롯한 사랑만 남았다. 만조에는 섬이 되었다가, 간조에는 육지와 연결돼 바위로 변신하는 변화무쌍한 경관을 자랑하는 할미 할아비 바위는 그 아름다움과 오랫동안 전해져온 전설이 가치를 인정받아 2009년 명승 제69호로 지정됐다.
누군가를 마음 다해 기다릴 수 있는 그 자체가 낙조의 아름다움을 배가시켰다. 바쁘고 정신없이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기다림’만큼 어려운 주제가 또 있을까. 가을날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누군가를 그리워할 수 있는 마음에 젖어보기 위해 꽃지를 찾아도 좋겠다.


글‧최은서 사진‧안지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