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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의 품격이 스며있는 ‘철화백자’ - 추상을 빚다 - 선비의 품격이 스며있는 '철화백자'

이산저산구름 2016. 7. 6. 20:19



선비의 품격이 스며있는 ‘철화백자’

    
    

전란(戰亂)으로 청화의 자리를 대신한 철화백자

철화백자는 초벌구이한 그릇 표면에 철분이 포함된 철화 안료로 그림을 그리고 백자 유약을 바른 후 굽는 백자다. 이러한 철화백자는 조선 초기부터 제작되었지만, 당시 성리학을 국시(國是)로 한 조선은 지배계층인 왕실과 사대부들의 이념을 표출한 순백자가 주를 이루었고, 중국에서 수입한 코발트를 안료로 사용했던 청화백자가 대세를 형성한 탓에 크게 각광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17세기에 들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같은 전란(戰亂)과 악화된 경제 사정은 백자의 판도를 바꿔놓았다. 연이은 전란으로 조선의 경제 상황은 피폐, 그 자체였다. 전란 후에 불어닥친 경제적 궁핍은 백자, 특히 청화백자 제작에 영향을 미쳤다. 비싼 가격으로 북경에서 사와야 하는 청화 안료는 청화백자 제작에 커다란 부담이 된 것. 이에 청화 안료의 구입이 용이치 않게 되자 그 자리를 철화백자가 대신하게 되었고, 효종 이후에는 반청 감정까지 더해지면서 청화백자 생산은 상당 기간 중단되었다.

비정형의 철화백자, 선비의 그릇

제작 기술적으로 보면 철화백자의 안료를 문헌에서는 석간주(石間朱)로 표현하였는데 석간주란 산화철이 주원료인 광물성 안료로 국내에서는 여러 곳에서 출토되어 구하기 용이하였다. 초벌구이한 백자에 석간주로 문양을 그리고 재벌구이를 하면 주로 갈색이나 적갈색이 되어, 푸른 청화에 비해서는 하얀 바탕을 고려할 때 산뜻한 느낌은 줄어든다. 게다가 안료의 휘발성이 강해서 농담 조절과 붓질이 어렵다.

또한, 가마에서 소성 시 안료의 화학적 상태가 불안정하여 청화와 같은 선명한 문양을 얻기는 매우 어렵다. 더구나 백자 초벌구이 표면은 수분 흡수율이 높아 신속하게 붓질을 해야 하고 덧칠을 하면 구운 후에 그대로 드러나 보기에 좋지 않다. 그럼에도 석간주를 안료로 사용한 철화백자는 거칠지만 독특한 문양 표현과 대담한 구도로 이 시대 백자를 주도하였다.

18세기 영조 임금이 전 시기 철화백자에 대해 ‘당시 물력(物力)이 부족하여 비록 색이 일정치 않고 형태가 불분명하지만 사대부의 검소함을 드러낸 것’으로 평가한 내용을 보면 철화백자는 선비의 그릇으로 그 시대 나름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백자임을 알 수 있다. 정교함과 섬세함에서 떨어졌던 철화백자를 ‘꾸밈을 최소화한 선비의 심성’에 비유한 것은 철화백자에 나타난 단순과 생략, 비정형의 형태를 자연 그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동 시기 등장한 달항아리의 삐뚤삐뚤한 구연부와 몸체에서 느낄 수 있는 자연미도 이와 같은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한다.


추상적이고 대범한 표현 _ 용, 호랑이, 매화·대나무

철화백자 문양의 가장 큰 특징은 추상적인 문양 표현과 파격적인 구도, 대범한 붓질이다. 예를 들어 용은 말 그대로 왕실을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교하고 섬세하게 표현되는 것이 상례이지만 17세기 철화백자에 그려진 용은 엄격한 모습부터 윤곽선만으로 간략하게 그려져 그 형태를 파악하기 어려운 것까지 다양하다. 예를 들어 이화여대박물관 소장 철화백자운룡문 항아리의용(그림 1)은 신속하게 그린 몸체 윤곽선, 마치 안경을 쓴 듯한 눈과 눈동자, 진행 방향과 같이 앞으로 휘날리는 멋을 한껏 부린 머리카락, 몸체 각 부분의 비례와 상관없이 과장되게 표현한 발톱, S자 곡선을 연상시키는 일부 과장된 몸짓과 해학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17세기 중후반인 숙종 이후에 등장하는 철화백자운룡문 항아리(그림 2)에는 종속문이 생략되어 있고 오직 용과 신속하게 윤곽선만으로 그려진 구름만이 항아리 가득 그려져 있다. 커다란 타원을 그리며 꺾어진 목과 만화의 한 장면처럼 허공에 떠있는 한쪽 눈, 정교함은 찾아볼 수 없는 비늘 채색, 천진난만하게 이빨을 드러낸 표현은 이 시기 왕릉의 석물에서도 찾아볼 수 있어 시대 양식의 한 부분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용문 항아리는 왕실 뿐 아니라 민간에도 유통되면서 보다 양식화된 것으로 보인다. 최근 경기도 일대 지방가마에서도 익살맞은 운룡문이 커다란 철화백자 항아리에 그려진 것이 출토되어 지방에서도 사번(私燔)으로 유통되었던 것 같다.

한편, 용뿐이 아니라 호환으로 불리며 공포의 대상이던 호랑이에서도 용에서 보이는 해학적인 풍모가 발견된다. 일본 오사카동양 도자미술관에 소장된 철화백자호로문 항아리(그림 3)에는 조선시대 무시무시했던 호랑이가 천진난만하게 묘사되었다. 대략의 윤곽선으로 그린 호랑이의 놀라는 큰 눈동자와 얼굴 표현은 대범함과 해학이 그대로 묻어 있다. 호랑이는 이전부터 벽사의 의미로 궁궐뿐 아니라 민간에서도 세화(歲畵)와 문배(門排) 그림으로 크게 유행하였지만 도자기에는 이 시기 들어 처음으로 등장하였다.

정교함과 섬세함에서 떨어졌던 철화백자를 ‘꾸밈을 최소화한 선비의 심성’에 비유한 것은 철화백자에 나타난 단순과 생략, 비정형의 형태를 자연 그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 초기부터 애용되었던 매화와 대나무의 표현에서는 바람에 날리는 댓잎을 표현한 추상적인 것도 있지만 당대 화풍의 면모를 꼼꼼히 재현한 명품도 남아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철화백자매죽문 항아리(그림 4)는 대나무와 매화를 전후 화면에 주제 문양으로 배치했다. 매화가 그려진 면은 중앙을 비워 입체감을 강조하였고 반원을 그리듯 굽어 올라간 가지, 부러진 굵은 줄기와 과장된 옹이가 표현되어 17세기 전반의 화풍과 유사하다. 반대편 대나무의 죽절과 죽엽 등에 나타난 구도와 강렬한 명암대비, 묘법 등은 선조 연간 묵죽화의 대가였던 탄은(灘隱) 이정(李霆: 1554-1626)의 묵죽도와 유사하다.

반면 17세기 후반에는 매화 잎을 윤곽선으로 형식적으로 처리하고 가지는 굵게 채색하였다. 뒷면의 대나무는 산만하게 세 갈래로 갈라진 잎을 거칠게 표현하여 화풍 상으로는 17세기 후반 허목, 김세록, 이징 등의 대나무 화풍과 가깝다.

철화백자는 18세기 이후 청화백자 생산이 재개되면서 생산이 주춤하다가 18세기 후반부터는 청화와 동화 등과 어울려 사용되면서 청색, 갈색, 적색 등의 다양하고 화사한 채색 효과를 내게 되었다. 결국 조선 철화백자는 질박하고 대범하면서 편안한 추상미를 보여준 점에서 조선 선비 그 자체요, 조선의 자연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글‧방병선(고려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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