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태주 시인 어머니가 남긴 마지막 편지 >
아들아, 보아라...
나는 원체 배우지 못했다.
호미 잡는 것보다 글 쓰는 것이 천만 배 고되다.
그리 알고, 서툴게 썼더라도 너는 새겨서 읽으면 된다.
내 유품을 뒤적여 네가 이 편지를 수습할 때면
나는 이미 다른 세상에 가 있을 것이다.
서러워할 일도 가슴 칠 일도 아니다.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왔을 뿐이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니고,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닌 것도 있다.
살려서 간직하는 건 산 사람의 몫이다.
그러니 무엇을 슬퍼한단 말이냐.
나는 옛날 사람이라서 주어진 대로 살았다.
마음대로 라는게 애당초 없는 줄 알고 살았다.
너희를 낳을 때는 힘들었지만,
들에 나가 돌밭을 고를 때는 고단 했지만
밭이랑에서 당근이며 무며 감자알이 통통하게 몰려나올 때
내가 조물주인 것처럼 좋았다.
깨꽃은 얼마나 예쁘더냐.
양파꽃은 얼마나 환하더냐.
나는 도라지 씨를 일부러 넘치게 뿌렸다.
그 자태 고운 도라지꽃들이 무리지어 넘실거릴 때 내게는 그것이 극락이었다.
나는 뿌리고 기르고 거두었으니 이것으로 족하다.
나는 뜻이 없다.
그런 걸 내세울 지혜가 있을 리 없다.
너 어렸을 적, 네가 나에게 맺힌 듯이 물었었다.
이장 집 잔치마당에서 일 돕던 다른 여편네들은 제 새끼들 불러
전 나브랭이며 유밀과 부스러기를 주섬주섬 챙겨 먹일 때
엄마는 왜 못 본척 나를 외면했느냐고 내게 따져 물었다.
나는 여태 대답하지 않았다.
높은 사람들이 만든 세상의 지엄한 윤리와 법도를 나는 모른다.
그저 사람 사는 데는 인정과 도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만 겨우 알뿐이다.
남의 예식이지만 나는 그에 맞는 예의를 보이려고 했다.
그것은 가난과 상관없는 나의 인정이었고 도리였다.
그런데 네가 그 일을 서러워하며 물을 때마다 나도 가만히 아팠다.
생각할수록 두고두고 잘못한 일이 되었다.
내 도리의 값어치보다 네 입에 들어가는 떡 한점이 더 지엄하고 존귀하다는 걸
어미로서 너무 늦게 알았다.
내가슴에 박힌 멍울이다.
이미 용서했더라도 애미를 용서하거라.
나는 네가 남보란 듯이 잘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억척떨며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괴롭지 않게, 마음가는대로 순순하고 수월하게 살기를 바란다.
혼곤하고 희미하구나.
자주 눈비가 다녀갔지만 맑게 갠 날,
사이사이 살구꽃이 피고 수수가 여물고 단풍물이 들어서 좋았다.
그런대로 괜찮았다.
그러니 내 삶을 가여워하지도 애달파하지도 마라.
부질없이 길게 말했다.
살아서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말을 여기에 남긴다.
나는 너를 사랑으로 낳아서 사랑으로 키웠다.
" 내 자식으로 와주어서 고맙고 염치없었다. "
너는 정성껏 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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