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까지 지켜내기 힘들기에 더욱 고귀한 마음
사람답게 사는 품격으로는 여러가지 덕목이 있다. 예를 들면 평상시에 남들과 어울려 살아갈 때는 친절과 화합, 예의바름과 너그러움 등이 중요한 덕목일 것이다. 그러나 곤궁하거나 위급한 처지에 놓였을 때는 평소 가슴 속 깊이 간직했던 지조를 굳게 지키는 절개가 소중한 덕목이 된다.
이익만 따라가며 거짓과 배신을 거리낌 없이 하는 사람이야 지조가 없으니, 애초에 절개를 논할 것도 없다. 우리 사회의 지도층 인물 가운데도 위급한 처지에 놓이면 책임을 외면한 채 변명을 늘어 놓으며 빠져나갈 궁리만 하며 추태를 드러내는 사람들을 자주 보게 된다. 이런 인물도 그 가슴 속에 간직한 지조가 없으니, 지켜야할 절개도 없는 사람임을 알 수 있다.
평상시에 지조가 높은 사람도 심한 고난으로 절망에 빠지면, 지켜오던 지조를 마지막에 가서 꺾이고 마는 경우가 있다. 그만큼 지조를 마지막까지 온전하게 지키기는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변사또가 죽이겠다고 위협해도 끝내 굴복하지 않고 지켜내는 춘향의 굳은 절개가 장하게 여겨진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두 왕조의 임금을 섬기는 것은 절개를 잃은 것이라 부끄러워하고, 여성들도 두 지아비를 섬기는 것은 절개를 잃은 것으로 부끄러워했다.
신라의 박제상(朴堤上, 363~419)은 왜국 왕의 혹독한 고문을 당하면서 왜국의 신하라 인정하면 높은 벼슬과 많은 녹봉을 주겠다고 유혹받았지만,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차라리 신라의 개나 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는 되고 싶지 않다”고 토로했으니, 그 강인한 절개가 고귀하게 여겨진다.
위기와 고난 속에서 꽃피운 절개
절개는 어려운 처지에 놓였을 때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신라 진평왕 때 변방을 지키던 장수인 눌최(訥催, ?∼624)는 백제 대군의 침공을 받아 위태로운 상황에서, “따스한봄날 온화한 기운에 초목은 모두 꽃이 피지만, 추운 겨울이 온 다음에는 소나무와 잣나무만 시들지 않는다. 이제 고립된 성이 위태로운 이때는 진실로 지조 있는 선비와 의로운 사내가 마음과 힘을 다해 절개를 지켜 이름을 드날릴 때이다.”라하며 군사들을 격동시키고, 성이 무너질 때까지 용감하게 싸우다 함께 장렬하게 죽었다. 이렇듯 온갖 고난 속에서도 지조를 굽히지 않고 강인하게 지켜낸 절개이기에 모든 사람들이 소중하게 여기고 높이 받드는 것이다.
신라 선덕여왕 때 변경을 지키던 장수가 백제군의 침략을 받아 위급하자 성문을 열고 나가 항복했지만, 하급 장교에 불과한 죽죽(竹竹,?∼642)은 성문을 다시 닫고 항전하였는데, 동료가 항복하여 뒷날을 도모하자고 권유하자, 그는 “나의 아버지가 내 이름을 죽죽竹竹이라 지어준 것은 겨울이 되어도 잎이 시들지 말고, 꺾어질지언정 굽히지 말라는 뜻이다. 어찌 죽기를 두려워하여 살아서 항복하겠는가.”라고 하여 의연한 태도를 지켰다. 이처럼 신라의 장수들은 나라를 위한 충성심으로 생명을 바쳐 절개를 지키는 자리에서, “겨울이 온 다음에라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 줄을 알겠다.”는 공자의 말을 절개의 선언으로 삼았다. 겨울의 추위에도 푸른 잎이 시들지 않는 소나무와 잣나무처럼, 혹독한 고난을 견디는 절개가더욱 빛나는 것임을 확인했다. 그래서 옛 지사志士들은 자신이 지키는 절개의 상징으로 흔히 소나무와 대나무를 들곤 했다.
정몽주가 고려왕조를 지키겠다는 ‘임 향한 일편단심’의 절개도 나라에 충성한다는 의리였다. 조선 사회에서는 조선왕조건국에 큰 공을 세운 정도전 등 공신들 보다 고려왕조를 지키기 위해 조선왕조 건국에 저항하다 목숨을 잃은 정몽주의 충성스런 절개를 더 소중하게 높였던 것이 사실이다
선비정신에서 발견하는 진정한 의리
어떤 위기에도 꺾이지 않고 지켜야 하는 도리는 한마디로 요약하면 ‘의리義理’이다. 유교문화 속에서 의리를 지키는 것이 바로 절의節義요 절개이며, 선비정신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상대방에 대한 신뢰를 맹목적으로 지키는 것을 의리라 일컫는 통속적 의리와는 달리, 진정한 의리는 무엇이 정의인지 불의인지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정의를 지키기 위해 불의에 대해 비판하고 저항하다가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것이 진정한 의리요 절개의 기준이다.
조선시대의 선비는 나라가 추구해가야 할 정의로운 이념과 인간이 지켜야 할 정의로운 가치를 의리로 확인했다, 따라서 올바른 선비는 임금의 권위 앞에서도 목숨을 걸고 간언하여 과감하게 의리를 밝히고 불의를 비판하는 지조를 보여주었다. 중종(中宗, 1488∼1544)임금에게 권력을 잡은 공신들의 불의와 탐욕에 빠진 사회적 병폐를 강경하게 간언하던 조광조(趙光祖, 1482~1519)는 유배되어 사약을 받고 죽임을 당했으며, 당시에 지조 있는 선비들이 무수히 희생되는 사화士禍가 일어났다. 사화로 많은 선비들이 죽임을 당했지만, 조선사회는 이 선비들의 죽음을 ‘순도殉道’ 곧 도리를 지키다가 희생된 것으로 높이고, 선비를 희생시킨 권력집단을 탐욕스럽고 사악한 간신배奸臣輩로 경멸해왔다.
임진왜란 때나 조선 말기에 일본의 침략을 당해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빠졌을 때, 선비들은 불의한 침략자에 항거하여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가 많은 희생을 당했다. 이들에 대해서도 의리를 지키다 죽음을 당한 ‘순의殉義’의 절개를 높이 기렸다. 조선을 식민지로 지배하려는 일본의 침탈에 항거하여 자결하였던 많은 지사志士들이나 무력으로 저항하였던 많은 의사義士들도 불의한 침략자에 맞서 절개를 지켰던 인물로 높여졌다.
선비들은 일상생활 속에서도 절개를 소중한 가치로 간직하였다. 초야에 묻혀 극심한 빈곤을 견디면서도 의롭지 못한 조정에 벼슬하기를 거부하고, 죽임을 당하더라도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지조있는 선비들의 절개는 평소의 기개에서도 잘 드러난다. 퇴계는 만년에 도산서당 동쪽에 단을 쌓아서 모진 서리에도 잘 견뎌내는 솔·대·매화·국화를 심고, 절개를 함께하는 벗으로 삼아 절우사節友社라 하였다. 이때 읊은 시에서도 “나는 이제 솔·대·매화·국화와 함께 풍상계風霜契를 맺었으니 / 곧은 절개 맑은 향기 가장 잘 알았다오.”라 읊었다. 윤선도(尹善道, 1587~1671)도 물·바위·솔·국화·달을 다섯 벗으로 삼아 [오우가五友歌]를 지었는데, 그 가운데서 솔에 대해, “더우면 꽃피고 추우면 잎 지거니 / 솔아 너는 어찌 눈·서리를 모르는가 / 구천九泉에 뿌리 곧은 줄을 그로 하여 아노라.”라 읊어, 그 곧고 변함없는 절개를 사랑하여 벗으로 삼아 마음에 깊이 간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의리를 높이 내걸고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절개를 지키는 것은 강한 신념과 용기를 지녀야 하니, 누구에게나 쉬운 일은 아니다. 그만큼 절개를 지키는 선비의 강인한 모습은 비굴한 사람도 스스로 부끄러운 줄 알게 하고, 나약한 사람도 분발하여 일어서게 하는 힘의 원천으로 중시되어 왔다. 그러나 절개를 지키는 선비의 정신적 근거인 의리는 관점에 따라 정당성에 대한 해석이 달라질 수 있고, 시대의 변화에 따라 가치기준이 달라질 수 있다. 너무 편협하고 독선적인 의리는 한국가나 인간의 가치를 실현하는데 역기능을 할 위험도 있다.
조선후기에 이미 멸망한 명나라를 높이 받들고 중국을 지배하는 청나라를 오랑캐로 배척하는 숭명배청崇明排淸을 의리로 내세운 절개나, 조선 말기에 서양의 근대문물을 배척하고 쇄국정책을 고수하는 것으로 절개를 삼았던 당시 선비들의 의리는 시대변화에 역행하면서 국가에 심각한 위기를 불러오기도 했다. 조선시대에 여성들의 절개를 강조하여 개가改嫁를 못하게 강압했던 것은 의리에 대한 편협한 해석이라는 비판을 면할 수 없다. 따라서 절개를 지킨다는 것은 독선적 관념에 빠지지 않고, 깊은 성찰과 현실적인 인식을 바탕으로 해야만 건강하고 실용적인 사회질서를 이루고 인간다움의 조화로운 실현이 가능한 것임을 주의 깊게 돌아볼 필요가 있다.
글. 금장태(서울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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