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초록 여행지 제주

이산저산구름 2015. 9. 21. 11:49

 

 

초록 여행지 제주

 

 

사시사철이 푸른 제주지만 늦여름의 제주는 숲은 물론 하늘과 바다마저 초록으로 물드는 일 년 중의 클라이맥스다. 울창한 숲과 옅고 짙은 녹색의 나무들을 따라가다 보면 그들의 한결같음과 강인한 생명력에 감탄하게 된다.

 

 

숲에서 삶의 질서를 만나다

하도리 가는 길. 어촌계 식당들과 작은 바다들이 들쑥날쑥 끝없이 이어진다. 파도가 얕아 바닷물이 검은 돌담을 넘지 못하고, 정박해 있는 배 한 척 없는 고요한 날이면 제주는 유난히 싱그럽다. 세화 앞바다를 출발점 삼아 동에서 서로 제주의 중산간을 가로지르다 보면 만나는 것은 온통 초록 물결이다.

 

그 길에서 만난 교래리의 삼다수 숲은 아직 길이 들지 않은 원시림. 잊고 지내던 모험심을 불러일으킨다. 어느 곳으로든 발을 내디디면 밟는 대로 길이 된다. 사각사각, 사악사악 나지 않은 길을 따라 걷다 보면 느껴지는 것은 나뭇잎 사이로 스며들어오는 하늘의 햇살과 걸음걸음 리듬이 되어주는 새소리뿐. 이름 없는 새들까지도 제 자리에서 제 목소리를 지저귄다.

숲에서 나고 자란 산수국은 도로가에 즐비하던 것들과 비교하면 소박하고 얌전하다. 숲이 그렇게나 넓지만 많은 자리를 차지하지도 않는다. 그 색도 튀지 않아 어느 자리에 돋아나 있어도 주변과 잘 어우러진다. 이에 비하면 수입산 수국을 가져다 관상용으로 심어놓은 도로가의 꽃들은 너무 비대한 것이었다. 숲을 빠져나와 뒤를 돌아보면 걷는 동안에는 보지 못한 숲 전체가 한눈에 들어온다.

 

더 이상 농사를 짓지 않는 듯 보이는 넓은 밭이 숲을 둘러싸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사람 허리만큼이나 키가 자란 잡초들은 이쯤 되면 밭주인 행세를 해도 될 정도다. 숲과 나무와 풀을 가만히 바라보는 동안 그 생명력으로부터 위안을 얻는다.

 

 

제주의 중산간을 횡단하다 보면 종종 지나치게 되는 말 방목지. 수십 마리가 떼 지어 있어도 어쩐지 호젓하다. 흰말, 얼룩말, 검정말이 모두 어우러져 있지만 특히 꼭 붙어 다니는 것들은 어미와 새끼 사이. 껑충 뛰어보려는 몇 마리 새끼들의 움직임만이 그림 같은 풍경에 변화가 되어준다.

 

마음의 시계가 느려지는 순간

한라산 중턱께, 오르락내리락 경사진 도로 한쪽의 좁은 길을 따라 들어가면 길 끝에서 서귀다원이 모습을 드러낸다. 한 마을 전체가 차밭인 듯 시야가 닿는 곳 가득 차밭이 펼쳐진다. 지난봄 맏물 녹차용 어린잎을 떼어낸 지가 벌써 몇 달인데 차밭에서는 여전히 찻잎 향기가 진동한다. 잎에서 나는 향기가 여느 꽃에서 나는 것보다도 향긋하고 은은하다.

 

50년째 이곳에서 밭농사를 짓고 있는 여든의 노부부가 40년 감귤 농사를 정리하고 차밭을 일구기 시작한 것은 10년 전의 일이다. 그때 노부부의 나이는 일흔 즈음. 다시 밭을 갈고 돌을 고르고 차를 공부했을 모습을 떠올리며 노인도 젊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때 골라낸 커다란 돌들은 따로 치우지 않고 밭 둘레를 따라 쌓아놓았다. 이렇게 쌓아놓은 돌들은 차밭의 온도 유지를 도울 뿐만 아니라 자연스레 울타리 노릇도 한다. 행여 지나가는 사람이 들어왔다가 길을 잃을 것을 염려해 세워놓았다는 이정표를 따라 차밭을 돌아보는 동안 마음의 시계는 저만치 느려져서 하늘색이 변하는지도 모르고 하염없이 머물고만 싶어진다.

 

그러는 사이에도 밭 저쪽에서 풀을 베고 있는 주인 할아버지의 모습을 한참 바라보다, 차실에 들어가니 빨래를 정리하던 할머니가 무심히 차를 권한다. 작고 상처 난 귤들을 모아 직접 만들었다는 귤정과도 꺼내 놓는다. 할머니는 찻물을 우리고 따르는 일을 반복하며 자신의 80년 인생도 함께 우려낸다. 그날 그곳에서 마신 것은 찻물이 아니라 어쩌면 할머니가 들려준 이야기일지도.

 

유유자적하게, 시간 여행자의 루트

 

1 제주다움이란, 제주돌문화공원

언젠가 제주 토박이 가이드의 말이 생각난다. 제주도의 상징 중 가장 중요한 것을 단 하나만 꼽자면 돌이라고. 돌, 바람, 여자가 많아 ‘삼다도’라고 불리는 제주도에서 검고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현무암은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다. 너무 흔해서 지나쳤던 이 돌은 사실 제주도의 탄생부터 제주민의 삶을 설명해줄 수 있는 좋은 단서다. 그런 의미에서 테마파크이지만 그리 인위적이지 않은 ‘제주스러움’을 느낄 수 있는 건 돌문화공원이 아닐까 싶다. 이곳에서는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설화를 주제로 해 제주가 어떻게 만들어졌고, 제주민의 삶 속에 녹아든 돌 문화를 볼 수 있다. 비단 박물관 관람이나 조성된 설치물들을 보는 학구적인 투어가 아니더라도 정원이나 돌 조각상을 보며 천천히 걷는 시간을 가져봄직하다.주소제주시 조천읍 남조로 2023

 

2 세화 바다 앞 그곳, 카페 공작소

여행의 진정한 행복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망중한을 즐기는 순간이지 않을까. 초록 바다를 바라보며 갖는 여유로운 티타임은 제주에서 할 수 있는 즐거움 중 하나다. 제주에서 티타임을 가지기 좋은 곳을 꼽자면 팬시한 카페 천국인 동쪽 바다를 빼놓을 수 없다. 그중에서도 세화 바다 앞에 있는 카페 공작소는 이 일대 카페들 중에 가장 먼저 생긴 곳으로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다. 카페 공작소 앞에 왔더니 2개월 된 강아지 공작이가 테이블 위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제주를 다녀온 후 인스타그램에서 ‘공작이’라는 해시태그를 넣고 검색해보니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주소제주시 구좌읍 세화리 해맞이해안로 1446

 

3, 4 시골 학교의 운치, 조천초등학교 교래 분교장

조천읍 교래리에 있는 삼다수 숲을 걷기 전, 근처에는 어떤 볼거리가 있을까 이리저리 둘러보다 초등학교를 하나 발견했다. 전교생이 21명밖에 되지 않는 작은 규모로 멀리 떨어진 학생들이 편히 다닐 수 있도록 만든 조천초등학교의 분교다. 풀밭이 펼쳐진 운동장과 작지만 알찬 급식소, 아이들의 이름을 넣은 아기자기한 벽화를 보니 규모의 경제로 이야기하는 도심의 그것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마침 오후 수업이 시작됐는지 아이들이 재잘대는 소리가 멀리서 아련하게 들려온다. 키 높이별 철봉과 시소가 있는 풍경, 그리고 뒤로 들려오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니 시간이 멈춘 듯, 옛 추억에 잠기게 된다.주소제주시 조천읍 비자림로 672

 

5, 6 산책로를 따라가다 보면, 선덕사

자고로 계획하지 않은 일을 벌일 때 더 재미가 있는 법이다. 녹차다원을 향해 차로 달리던 중 지루해지려는 길목에서 ‘선덕사’라고 적힌 작은 간판을 발견했다. 제주에서 사찰이라,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달리던 도로에서 바로 들어갈 수 있어 망설임 없이 들어갔다. 이곳은 제주도에서는 꽤 큰 규모로 꼽히는 사찰이라고 한다. 법당 앞까지는 500m 정도의 숲길이 펼쳐져 있다. 새소리, 발자국 소리만 자박자박 들리던 길 끝에서 법당을 지키는 두 마리 흰 진돗개가 반겨준다. 초록의 기운이 물씬 느껴지는 이곳은 해마다 봄이면 하얀 왕벚꽃이 만개해 하얀 아름다움이 펼쳐진다고. 법당을 향하면서 또 다른 계절에 다시 한 번 찾아보리라 마음먹는다.주소제주시 서귀포시 상효동 산86-15

 

 

1 한량의 기운, 오렌지 다이어리

숙소를 정할 때 편하면서도 여유롭고 즐거움까지 있기를 바라는 건 어쩐지 욕심 같지만 이곳에서는 가능했다. 각기 서울에서 출판계와 영화계에서 몸담고 있던 40대 부부가 여유로운 제주의 삶을 꿈꾸며 내려와 농가 주택을 개조해 게스트하우스로 만들고, 그렇게 꿈꿨던 주황색 지붕을 덮었다. 소박하기 그지없는 이곳에 다시 오고 싶게 되는 건, 곳곳에 쌓인 소설과 만화책들, 그리고 주인 부부의 입담 덕이다. 함께 쓰는 카페 공간의 한쪽 벽에는 겹겹이 쌓인 만화방을 방불케 하는 책이 꽂혀 있고, LP판과 카세트테이프까지 있어 취향 있는 컬렉터의 수집품을 같이 즐길 수 있다. 느지막이 일어나 직접 내린 커피 한 잔에 한가로이 만화책을 보고 있자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을 수 있는 행복감에 깊이 사무친다.주소제주시 한경면 고산남8길 11

 

2, 3 인더스트리얼이 가진 매력, 앤트러사이트

앤트러사이트는 최근 제주를 찾는 이들의 단골 위시리스트 중 하나다. 서울 합정동의 신발 공장을 카페로 개조했던 대표가 그다음 공간으로 제주의 전분 공장을 선택, 문화가 있는 카페로 만든 곳이다. 거친 흙이 밟히는 바닥과 오래된 기계, 철골 구조가 있는 내부임에도 어쩐지 스타일리시하게 느껴지는 건 독특한 감성 때문이 아닐까. 오래된 공간에 현대식 활용도를 찾아 낡지만 새로운 느낌의 재생 공간으로 탄생시키는 건 늘 새로운 것을 찾는 요즘 사람들의 취향에 잘 맞아떨어진다. 흔한 간판 하나 없고, 내부에는 각종 낡은 공구가 흐트러져 있는데 그런 것 쯤은 신경 쓰지 않겠다는 듯한 도도한 태도조차도 어쩐지 멋스럽다.주소제주시 한림읍 한림로 564

 

4 제주 속 헤이리, 저지문화예술인마을

약 5년 전, 많은 이들이 제주로 향하게 된 데에는 각 분야 예술인들의 움직임이 컸다. 보다 한가롭고 자연에 가까운 곳에서 영감을 받고자 하는 이들에게 제주만큼이나 멋진 곳은 없기에. 소문으로만 듣던 저지예술인마을은 한눈에도 잘 꾸며진 예쁜 동네의 느낌이다. 예술인들의 집이 모여 문화 예술 마을이 된 이곳을 걷다 보면 정원을 품은 예쁜 미술관이 연이어 나온다. 제주현대미술관도 이곳에 있기에 미술 감상은 원 없이 할 수 있을 듯. 비단 예술뿐 아니라 산책로도 잘 꾸며져 있어서 초록의 기운을 물씬 느낄 수 있다. 마음껏 걷고 싶은데 그냥 숲길은 심심하다면 볼거리가 많은 이 마을을 찾는 건 어떨까.주소제주시 한경면 중산간서로 3675

 

5 발길을 멈추게 만들다, 갤러리 노리

저지예술인마을을 향해 열심히 달리다가 차를 멈추게 한 곳. 마침 해가 살짝 저물어갈 무렵에 역광을 받은 모습이 아름다워 카메라를 들게 만든다. 갤러리이자 카페인 이곳은 이명복 작가가 아내와 함께 꾸린 공간이다. ‘놀다’라는 의미로 신선한 자극도 받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곳으로 꾸미고자 하는 마음을 담았다. 제주 작가 외에도 다른 지역의 작가와 외국 작가의 작품까지 전시한다. 에디터가 도착했을 때는 갤러리 문은 이미 닫힌 시간이었지만, 낮은 담장과 열린 틈이 마치 누구나 환영하는 느낌을 줬다. 자연의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조용한 무드 속에서 잔디 정원에 있는 벤치에 조용히 앉아봤다.주소제주시 한림읍 용금로 891

 

기획_조영재, 박주선 | 사진_민희기(나무 스튜디오), 김원영(프리랜서)

여성중앙 2015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