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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다섯 번째 이야기 길 - 어둠 속에서 피어난 예술혼 - 일제강점기의 한국미술과 문학

이산저산구름 2015. 9. 15. 10:59

 

 

일제강점기의 삼엄한 감시속에서도 작가들은 시대의 아픔을 노래했고, 뜻있는 사람들은 위험을 감수하며전통문화를 지켰다. 우리 문화재의 아름다움을 지키고 전한 혜곡과 간송, 총독부 건물을 등지고 집을 지은 만해 한용운과 조국의 현실에 아파했던 윤동주, 그리고 염상섭과 황순원까지, 일제강점기에 피어난 예술에 대한 열정과 아픔을 만나본다.

 


- 전통문화의 수호자, 간송과 혜곡

 

 

사계절 그림 같은 풍경을 뽐내는 북한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성북동. 예부터 예술가들이 많이 모여 살았던 이 동네의 아담한 길을 걷다 보면 일제의 핍박 속에서도 우리 문화와 예술을 사랑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들려온다.
길의 초입에 들어서자 혜곡 최순우의 고택이 보인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어보니 사람들이 툇마루에 앉아 있는 모습이 사랑방처럼 따뜻하다. 조선 미술사학의 개척자인 최순우는 한국전쟁 당시 다른 이들이 피난 보따리를 꾸리는 동안, 밤을 새워 박물관의 중요한 문서를 포장해 피난시키고, 제2차 서울 수복 뒤에는 위험을 무릅쓰고 서울로 돌아와 유물들을 안전한 곳으로 숨겼다. 1950~1960년대, 해외에 우리 문화재를 알린 선구자도 바로 최순우였다.
아름다움에 대한 그의 안목을 고택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가장 비례가 아름다운 창살이라 생각한 ‘용(用)’자 창살과 밀화빛 장판이 있는 안채, 정갈한 목가구와 백자로 꾸며진 사랑방, 수석과 달항아리, 그리고 수련이 있는 마당까지, 어느 것 하나 화려하지 않지만 고유의 미를 간직하고 있었다. 마을해설사가 다가와 그가 좋아했다는 창문을 소개한다. 최순우는 창가에 앉아 달빛을 보는 걸 즐겼다고 한다. 이렇듯 소박하지만 의미 있는 것을 사랑한 최순우. 이 집은‘남의 것이 아닌 내 것’, ‘새것이 아닌 옛것’의 가치를 발굴하고 온전히 보존하는 데 일생을 바쳤던 그에게 참 잘 어울리는 공간이었다.

최순우의 집을 나와 그에게 스승과도 같았던 간송 전형필을 찾아간다. 문화재를 위한 길을 먼저 걸었던 전형필은 최순우가 힘든 순간마다 어깨를 두드려주던 훌륭한 조언자였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간송미술관에서 그의 흔적을 찾아본다. 이곳은 훈민정음 해례본, 신윤복의 그림, 국보급 고려청자 등 중요한 문화재를 많이 보유하고 있는 만큼 기대가 컸다.
그러나 막상 미술관 앞에서 맞닥뜨린 것은 ‘출입금지’ 팻말이었다. 간송미술관은 문화재 보존을 위해 1년에 두 번, 봄·가을로 개최하는 정기 전시를 제외하면 외부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다. 전형필이 평생을 바쳐 문화재를 모았던 것은 문화재에 깃든 민족의 얼을 후손들에게 전하고 그 아름다움을 나누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에 조금 서운한 기분도 든다. 하지만 빛이나 온도, 습도에 민감한 문화재의 손상을 막고, 옛 모습 그대로 보존하기 위해서라고 하니, 그 역시 우리 문화재를 사랑하는 올바른 방법일 것이다.

 


- 자신을 찾는 곳, 심우장에 서서

 

 

성북동 길을 따라 한참 올라가면 성북동 제일 끄트머리, 좁고 오래된 골목길에서 만해 한용운 선생의 자취를 찾아볼 수 있다. 산동네 비탈의 꽤 가파른 계단을 5분 정도 걸어 올라가야 하는데, 동네는 무척 조용하다.
심우장이 북향으로 지어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구조가 이상하게 보일 거라 생각했는데, 마당에 들어서니 공간과 건물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보였다. 한용운은 북향으로 지어진 이곳에서 평생 불도 때지 않고 지냈다. 조선이 온통 감옥인데 어떻게 따뜻한 곳에 몸을 누일 수 있겠느냐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심우장 구석구석을 돌아보며, 오래된 벗일지라도 변절한 사람은 절대 집에 들이지 않았다는 그의 일화를 떠올렸다. 한용운은 그토록 그리던 광복을 눈앞에 두고 1944년, 이곳 심우장에서 세상을 떠났다.

 


-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가혹한 시대를 건너다

 

성북동 길을 내려와 종로로 발걸음을 옮긴다. 요즘 들어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는 종로구 부암동에는 한용운 선생의 「님의침묵」과 함께 한국인의 애송시로 손꼽히는 「서시」의 윤동주 선생이 기다리고 있다. 친필 원고와 시집 초판본 등이 전시된 문학관에서는 풋풋한 소년 윤동주의 동시도 만나볼 수 있다.

 


넣을 거 없어 / 걱정이던 / 호주머니는
겨울이 되면 / 주먹 두 개 갑북갑북

                                                         - 윤동주, 「호주머니」


그의 시 대부분이 탄생한 곳은 문학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누상동 하숙집이다. 그는 친구들이 일본어로 말을 걸어도 꼭 조선말로 답할 만큼 우리말에 강한 애착이 있었다. 이런 그가 일본 유학을 위해 창씨개명을 했으니, 그 죄책감이 오죽했을까. 「쉽게 씌어진 시」를 보면 부끄러움으로 잠들지 못하는 젊은 시인이 눈앞에 그려진다.
윤동주 선생은 유학을 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조선인을 선동했다는 죄목으로 형무소에 수감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29세의 짧은 생을 마친다. 예민한 감수성에 담백한 성품을 지닌 청년 윤동주. 바람 잘 날 없는 시대에 태어나 괴로움 속에 살았던 그를 떠올리면 가슴 한편이 아려오는 듯하다.

 


- 식민지 조선의 작가로 산다는 것

 

일제 말기, 일제에 협력하지 않고는 활동을 할 수 없었기에 변절하는 문화계 인사도 많았다. 그러나 의식 있는 작가들은 맨몸으로 탄압에 항거하거나 세상과 인연을 끊고 자신만의 세계로 들어갔다. 염상섭과 황순원 선생이 바로 그런 인물이었다.
염상섭을 찾아 간 곳은 그의 생가가 있었던 ‘체부동 106의 1번지’, 작년에야 비로소 정확한 위치를 알게 되었다는 이곳에는 팻말 하나 제대로 서 있지 않았다. 결국 서울시 문화관광해설사의 도움을 받아 찾아갔지만 빌라가 들어서 있어 염상섭 선생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터덜터덜 걸어 나가니 광화문 교보문고 앞에 염상섭 동상이 보인다. 동상 옆 벤치에 앉아 안타까운 마음을 달래본다.
염상섭 선생의 호 ‘횡보(橫步)’는 술을 마시고 옆으로 걷는 그의 모습을 보고 친구들이 지어준 것이다. 동시에 그의 삶을 보여주는 이름이기도 하다. 일본 정치인에게 ‘조선 독립론’을 써보낼 정도로 거침없었던 그의 삶이 당시에는 꽤 삐딱하게 보였을 테니 말이다. 어느 쪽이건 염상섭 선생에게 퍽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횡보와는 달리 황순원 선생은 일제의 압박이 심해지자 모든 활동을 접고 고향집 골방에 틀어박혔다. 세상에 나서는 순간, 자신이 지켜야 할 것들을 놓치게 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일까.
고향이 이북이었던 황순원 선생의 묘와 문학관은 그의 대표작인 「소나기」의 배경이 됐던 양평군에 자리 잡고 있다. 평생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글도 시와 소설 외에는 거의 손대지 않았던 결벽증적인 모습을 보면 황순원 선생에게 소설가란 오로지 글을 통해 말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이런 그에게 우리글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일제강점기는 완전한 암흑이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쓰는 것, 홀로 고독하게 써나가는 것밖에 없던 시간을 그는 무슨 생각을 하며 견뎌냈을까. 세상과 인연을 끊고 글쓰기에만 매달렸던 그의 단호함에, 식민지 조선의 작가가 느낀 비통함이 묻어난다.
끝이 보이지 않던 일제강점기, 마음 깊은 곳으로 독립된 조국을 그리워하며 예술에 열정을 바친 사람들의 이야기는 아프고도 아름답다. 시대의 상처를 품고 빛나는 작품들이 더욱 귀하게 느껴지는 여행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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