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懲 毖 錄 ]
[혼날징, 삼갈비, 기록할록]
극중 류성룡 선생
KBS 대하 역사극 징비록을 2월 14일부터 방영한다고 하니 사뭇 기대가 크다. 징비록은 그제목 자체가 뜻하는바와 같이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는 역사적 교훈을 삼어 다시는 이런 과오를 되풀이 하지 않도록 혹독하게 겪었든 임진왜란 전후의 사정을 서애 유성룡이 눈물과 회한으로 기록해 놓은 것이다. 우리의 뼈아픈 치욕의 역사기록이지만 오늘날에도 고질적인 당파 싸움은 그때나 지금이나 어찌 그리도 비슷하니 참담했든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관심을 갖고 시청하려한다.
눈물과 회한으로 쓴 전란의 기록
『징비록(懲毖錄)』은 조선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이 집필한 임진왜란 전란사로서, 1592년(선조 25)부터 1598년까지 7년에 걸친 전란의 원인, 전황 등을 기록한 책이다.
이 책은 저자인 유성룡이 벼슬에서 물러나 낙향해 있을 때 집필한 것으로, 제목인 '징비'는 『시경(詩經)』 소비편(小毖篇)의 "예기징이비역환(豫其懲而毖役患)", 즉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징비록』의 첫 장에서유성룡은 수많은 인명을 앗아가고 비옥한 강토를 피폐하게 만든 참혹했던 전화를 회고하면서, 다시는 같은 전란을 겪지 않도록 지난날 있었던 조정의 여러 실책들을 반성하고 앞날을 대비하기 위해 『징비록』을 저술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이처럼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저술되었다는 점에서, 『징비록』은 우리나라에서 씌어진 여러 기록문학 중에서도 특히 두드러진다고 하겠다.
물론 『징비록』이 임진왜란을 다룬 유일한 기록문은 아니다. 하지만 유성룡이 전란 당시 전황이 돌아가는 급박한 사정을 누구보다 가까운 곳에서 살필 수 있는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었으며, 기록문학의 일차적 자료가 되는 조정의 여러 공문서들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임진왜란에 대한 총체적인 기록으로서의 『징비록』이 갖는 가치와 매력은 학자들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특히 『징비록』은 전쟁의 경위와 전황에 대한 충실한 묘사에 그치지 않는다. 조선과 일본, 명나라 사이에서 급박하게 펼쳐지는 외교전을 비롯하여, 전란으로 인해서 극도로 피폐해진 일반 백성들의 생활상, 전란 당시에 활약한 주요 인물들에 대한 묘사와 인물평까지 포괄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실로 임진왜란에 대한 입체적인 기록이라는 평가를 받을 만하다.
기록문학의 생명력이라고 할 수 있는 기록자의 객관성이라는 측면에서도, 『징비록』은 신뢰를 받고 있다. 애초에 상대에 대한 건전한 비판과 공론정치의 활성화라는 목적에서 시작된 붕당정치는, 선조 때부터 소모적인 당쟁으로 변질되고 있었다.
집권층은 동인과 서인으로 분당되었으며 전란을 불과 1년 앞둔 1591년에는 집권 동인이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어 조정의 공론을 분열시켰고 그에 따라 국력은 날로 쇠약해져 가고 있었다.
유성룡 역시도 동인의 일원인 남인에들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무능이나 전술의 부재로 인해 전투를 그르친 일부 장수들에 대한 냉정한 평가를 제외하면 비교적 객관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음을 『징비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때 상대 정파에 의해 탄핵의 위기에까지 몰렸던 그였지만, 전란을 회고하는 이 노정객의 안타까움과 반성의 심정은 당파적 증오를 넘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기록문학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징비록』의 저술 연대를 보여주는 명확한 기록은 현존하지 않는다. 다만 유성룡이 『징비록』의 저술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용한 사료나 공문서들에 대한검토 시간을 고려할 때, 벼슬에서 물러나 낙향한 지 3~4년째가 되는 1601년 혹은 1602년 무렵이 본격적으로 집필에 들어간 시기일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그의 사망 이후 책장에 묻혀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할 수도 있었던 『징비록』은 1633년 그의 아들 진에 의해서, 생전에 쓴 글들을 엮은 『서애집(西厓集)』과 함께 간행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안동의 하회종가(下回宗家)에 보관되어 있는 유성룡의 친필 초본과 더불어, 초판을 기초로 하여 간행된 16권본과 2권본 등 두 가지판본 또한 전해지고 있어, 엄밀히 말하면 『징비록』에는 세 가지 판본이 존재한다고 하겠다.
『징비록』은 우리나라에서뿐만 아니라 바다 건너 일본에까지 전해져 간행되기도 했다. 『징비록』은 1695년(숙종 21) 일본 교토(京都)의 야마토야에서 중간(重刊)되었는데, 당시 숙종 임금은 이 책의 해외 유출을 우려하여 일본 수출을 엄금했다는 기록도 전해지고 있다.
전란을 대비한 선견지명
『징비록』에서 유성룡은 전황에 대한 경과뿐만 아니라 전란 발생의 원인과 조정의 대응에서 드러난 문제점 등을 기록하고 있다. 사실 전란의 조짐은 이미 감지되고 있었다. 조선으로 파견된 일본 사신이 보인 오만한 태도나, "군사를 이끌고 명나라를 치러 가겠다"는 일본의 국서는 일찌감치 전란을 예고하는 징조들이었다. 하지만 조선의 대응은, 한편으로는 일본과의 교류가 명나라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지도 모른다며 어떻게 하면 그 파장을 축소할 수 있을 것인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점차 현실화 되어가는 전란의 가능성을 애써 외면하려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여기에 부합하는 대표적인 사례가 있다. 즉, 1591년 일본에 파견되었다가 귀국한 통신사 일행에게 선조 임금이 전쟁 가능성을 묻자, 통신사 대표 김성일과 황윤길은 상반된 태도를 보였던 것이다. 이 자리에 함께 있었던 유성룡이 김성일에게 황윤길과 상반된 답변을 한 이유를 따져 묻는 장면이 『징비록』에 나온다.
황윤길은 부산으로 돌아오자 급히 장계를 올려 왜국의 정세를 보고하면서 "반드시 병화(兵禍)가 있을 것입니다"고 말했다. 사신이 서울에 와서 복명(復命)을 할 때 임금께서는 그들을 불러 보시고 일본의 사정을 물으셨다. 황윤길은 먼저 보고한 대로 대답하였는데 김성일은 말하기를,"신은 그곳에서 그러한 징조가 있는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고 또, "황윤길이 사람의 마음을 동요시키는 행동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고 말하였다.
이에 의논하는 사람들은 더러는 황윤길의 의견을 주장하고 또 더러는 김성일의 의견을 주장하였다. 이 때 나는 김성일에게 묻기를 "그대의 말은 황사(黃使) - 황윤길 - 의 말과 같지 않은데 만일 병화가 있으면 장차 어떻게 하려는가?"하니, 그가 말하기를, "나도 역시 어찌 일본이 끝내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하겠습니까? 다만 황사의 말이 너무 중대하여 중앙이나 지방이 놀라고 당황할 것 같으므로 이를 해명하였을 따름입니다"고 하였다.
국란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는 와중에도 지배층 내부의 당파적 증오로 인해서 조정의 국론이 분열되고 민심이 동요하는 상황을 목도한 유성룡은 전란을 대비하는 그 나름의 계책들을 선조에게 건의한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실제로 조정의 인사정책 등에 반영되어 훗날 전란 극복에 커다란 보탬이 되기에 이른다. 유성룡은 정읍현감이었던 이순신을 전라 좌수사에 그리고 형조정랑 권율을 의주목사로 천거했던 것이다. 결과론적인 평가이기는 하지만, 이는 전란을 대비한 유성룡의 용인술(用人術)이 돋보이는 대목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능력 있는 인재를 등용하는 것과 더불어 유성룡이 지속적으로 추진하려 했던 정책은 바로 '진관(鎭管)체제'로의 복귀였다. 조선 건국 당시에 수립된 일종의 지역적인 방어체제인 진관체제는 각도의 관찰사가 병마절도사의 직책을 겸임한 채 주진(主鎭)에 있으면서, 도내 각진의 육군과 수군에 대한 군사 지휘권을 행사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고 주진 밑에는 거진, 제진 등이 있어서 지역의 수령이 휘하 군사를 거느리고 그 지방의 진지를 지키도록 한 것이었다. 그러나 건국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병역 기피자들이 증가했고 그 때문에 병력수급에 어려움을 겪자 1555년 을묘왜변을 기점으로 '제승방략(制勝方略)'체제를 채택하게 되었다.
제승방략체제란, 전투가 벌어질 경우 수령들이 휘하의 군사들을 전장으로 인솔해가서, 중앙으로부터 파견된 군 지휘관의 명령을 받는 체제였다. 따라서 이 체제는 대규모의 적군과 정면 대결할 때의 병력운용 개념으로, 군사력을 집중시킬 수 있고 기동전에 대응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중앙에서 파견된 군 지휘관이 전장에 도달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므로 급변하는 전세에 기민하게 대처하기 어렵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는 체제이기도 했다.
유 성룡은 일찍이 제승방략체제의 단점을 지적하면서 진관체제로의 복귀를 강력히 건의했는데, 그 내용이 『징비록』에 들어 있다.
"우리나라 건국 초기에는 각도의 군사들을 다 진관(鎭管)에 나누어 붙여서, 사변이 생기면 진관에서는 그 소속된 고을을 통솔하여 물고기 비늘처럼 차례로 정돈하고 주장(主將)의 호령을 기다렸다. 경상도를 말하자면 김해, 대구, 상주, 경주, 안동, 진주가 곧 여섯 진관이 되어서 설사 적병이 쳐들어와 한 진의 군사가 패한다 할지라도 다른 진이 차례로 군사를 엄중히 단속하여 굳건히 지켰기 때문에, 한꺼번에 다 허물어져 버리지는 않았다."
"[오늘날에는 군제가 제승방략 체제로 편성되어 있기에] 비록 진관이라는 명칭은 남아 있사오나 그 실상은 서로 연결이 잘 되지 않으므로, 한번 경급을 알리는 일이 있으면 반드시 멀고 가까운 곳이 함께 움직이게 되어, 장수가 없는 군사들로 하여금 먼저 들판 가운데 모여 장수 오기를 천리 밖에서 기다리게 하다가, 장수가 제때에 오지 않고 적의 선봉이 가까워지면 군사들이 마음속으로 놀라고 두려워하게 되니, 이는 반드시 무너지기 마련입니다. 대중이 한 번 무너지면 다시 수습하기가 어려운 것인데, 이때는 비록 장수가 온다 하더라도 누구와 더불어 싸움을 하겠습니까? 그러하오니 다시 조종 때 마련한 진관 제도로 돌아가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유성룡의 거듭된 호소에도 불구하고, 조정은 '제승방략' 체제가 오랜 기간 문제없이 사용되어온 전술임을 들어 그의 건의를 끝내 묵살해 버리고 만다. 훗날 개전 초기, 관군의 잇단 패배의 원인이 도성에서 파견된 장수를 기다리다가 지친 지방의 군인들이 왜군의 접근에 겁을 먹고 달아나 버린 데 있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제승방략'의 문제점을 정확히 지적하고 진관체제로의 복귀를 주장했던 유성룡의 선견지명은 정확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임금의 수레를 호위하며 피난길에서
결국 우려는 현실이 되고 말았다. 1592년 (선조 25) 4월 13일, 대마도를 거쳐 바다를 넘어온 왜군의 공격에 부산포를 비롯한 영남의 여러 성들이 차례로 무너졌다. 전쟁 발발 후 나흘이나 지나서야 왜군의 상륙과 잇단 패전을 알리는 급보가 조정에 전해지고 조정은 수습책을 찾지 못한 상태로 혼란에 빠져든다. 조정에서는 대표적인 무장 신립(申砬)과 이일(李鎰)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었으나, 이 일은 상주에서 적을 피해서 도망치고, 신립은 충주에서 배수진을 친 채 왜적과 맞섰으나 대패하고 말았다.
도성으로 향하는 관문인 충주에서의 패배가 서울로 전해지자, 조정과 백성은 공황상태로 빠져들었다. 그리하여 선조는 서울을 버리고 서쪽으로 피난을 가기로 결정했다. 당시 좌의정이었던 유 성룡 역시 임금의 수레를 호위하며 피난길에 나섰다. 왜적의 서울 입성이 임박했다는 긴박한 보고가 속속 전해지는 가운데, 임금과 조정 대신들은 힘 한 번 제대로 써보지 못한 채 도성을 버리고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고개를 돌려 도성 안을 바라보니 남대문 안 큰 창고에서 불이 일어나 연기가 이미 하늘에 치솟았다. 사현을 넘어 석교(石橋)에 이르렀을 때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이때 경기감사 권징(權徵)이 쫓아와서 호종하였다. 벽제관에 이르니 비가 더 심하게 내려 일행이 다 비에 젖었다. 임금께서는 역으로 들어가셨다가 조금 뒤에 나와 떠나셨는데, 여러 관원들이 여기에서 도성으로 돌아가는 사람이 많았으며 시종(侍從), 대간(大諫)들이 가끔 뒤떨어져 오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혜음령(惠陰嶺)을 지날 때 비가 물 붓듯 쏟아졌다. 궁인들은 말을 타고서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소리 내어 울면서 따라갔다. 마산역을 지나가는데 한 사람이 밭에서 바라보고 통곡하며 말하기를, "나랏님이 우리를 버리고 가시면 우리들은 누구를 믿고 삽니까?" 하였다. 임진강에 이르러서도 비는 그치지 않았다. 임금께서 배에 오르신 뒤에 수상(首相)과 나를 부르시기에 들어가서 뵈었다. 강을 건너고 나니 날은 벌써 저물어 물체의 빛깔도 분별할 수 없었다.
그 후 왜적은 삽시간에 평양성 부근까지 육박했다. 이처럼 왜적이 급속하게 북상해오자 피난길의 조정은 다시금 경악에 휩싸였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피난길에서 목격한 백성들의 동요와 민심 이반의 심각성이었다. 도성과 백성을 버리고 피난을 떠난 임금과 조정에 대한 백성들의 배신감이 극에 달해 있어서 무엇보다도 민심을 가라앉히는 일이 시급했던 것이다. 전란 이전부터 백성들은 지배계층의 수탈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제 불에 기름을 부은 꼴이었다. 임시 행궁을 정한 평양성의 백성들 사이에서 임금이 평양성마저 버리고 피난을 떠나려 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민심은 조정으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되었고, 이들 가운데 일부는 무기를 들고 왕의 행차를 가로막는 곤혹스러운 상황이 벌어졌다.
성 안의 아전과 백성들이 난을 일으켜 칼을 빼어들고, 그 길을 막고는 함부로 쳐서 묘사(廟社)의 신주를 땅에 떨어뜨렸다. 또한 따라가던 재신(宰臣)들을 지목하여 크게 꾸짖으며 말하기를, "너희는 나라의 녹만 훔쳐 먹다가 이제 와서는 나랏일을 그르치고 백성을 속이느냐?" 하였다. 나는 연광정(練光亭)에서 임금이 계시는 행궁으로 달려가면서 길 위에 있는 부녀자와 어린이들을 보았는데, 그들은 성난 얼굴로 머리털을 곤두세워 소리를 지르기를, "성을 버리고 가시려면 무슨 까닭으로 우리들을 속여서 성안으로 들어오게 하여, 우리들만 적의 손에 넣어 어육(魚肉)으로 만듭니까?" 하였다. 궁문에 이르니 난민들이 거리를 꽉 막았는데, 모두들 팔소매를 걷어 올린 채 무기와 몽둥이를 가지고 사람들을 막 치며 시끄럽게 어지럽혔으나 어찌할 수가 없었다. 여러 재신들과 성문 안 조당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얼굴이 하얗게 변해서 뜰 안에 서 있었다.
이와 같은 민심의 심각한 이반 현상을 기술하는 대목은 『징비록』 이곳저곳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조정 대신들은 평양성을 버리고 북쪽으로 피난을 떠날 것을 재촉하였으며, 선조는 아예 국경을 넘어 명나라로 피신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성룡은 임금과 대신들을 설득하여 평양성에서 왜적을 맞아 항전하기로 결정을 이끌어냈다. 대신들도 더 이상 민심의 이반을 방치해서는 위험하다는 정세판단에 동의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평양성에서의 소요는 진정되었다. 조정이 항전할 것을 결정함으로써 민심을 다독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징비록』에는 실제로 유성룡이 선조 앞에서 백성들의 의지를 믿고 험한 지형에 의지하여 항전을 벌인다면 명나라의 지원을 기대해 볼 수 있지만, 평양성을 버리고 의주로 떠난다면 결국 나라가 망할 것이라는 논리를 펼치는 대목이 있다.
원병의 도착과 전세의 역전
유성룡은 『징비록』의 지면 상당량을 명나라 구원병에 관한 기술에 할애하고 있다. 지면의 분량이 증언하듯이, 개전 초기 관군의 잇단 패배로 공황상태에 빠져있던 선조와 조정의 대신들에게 명나라의 구원병은 실로 조선을 구원하기 위해 하늘에서 보내준 '천병(天兵)'에 다름 아니었다. 명나라의 원병이 도착했다는 소식과 더불어, 남해에서 거둔 이순신의 승전과 각지의 의병 봉기 소식이 전해지면서 정주와 선천을 거쳐 국경에 인접한 마지막 피난지인 의주까지 내몰렸던 임금과 조정 대신들은 잠시 숨을 돌릴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명군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수는 없었다. 조정은 명나라 군사들이 먹을 양식을 차질 없이 조달하는 일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갑자기 닥친 전란 앞에서 조정의 권위가 무너져 인력과 물자의 동원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흩어진 관군을 다시 규합하여 명군과 함께 연합작전을 펼치는 것 역시 수월한 일이 아니었다. 특히 평양성을 공략하는 과정에서 왜군의 전력에 적잖이 놀란 명군 장수들은 전투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특히 명군의 총사령관 이여송(李如松) 역시도 왜군의 습격 소문에 두려워하여 평양성 이남을 수복하려는 의지가 없었다. 당시 유성룡은 체찰사의 직분으로 명군에 대한 보급과 협의를 관장하고 있었는데, 그는 종사관을 통해 명군이 군사를 물려서는 안 되는 다섯 가지 이유를 이여송에게 전달했다. 거기에는 도성 수복에 대한 간절한 염원과 결사 항전에의 의지가 담겨 있었다.
"첫째로 선왕의 분묘가 모두 경기도 안에 있는데, 지금 왜적들이 있는 곳에 빠졌으므로 귀신이나 사람이나 수복을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니 차마 버리고 가서는 안 될 것이고, 둘째로는 경기도 이남에 있는 백성들은 날마다 구원병이 오는 것을 바라고 있는데, 갑자기 물러갔다는 말을 듣게 되면 다시 굳게 지킬 뜻이 없어져 왜적에게 의지할 것이고, 셋째로는 우리나라의 강토는 한 자 한 치라도 쉽게 버릴 수 없는 것이고, 넷째로는 우리 장병들이 비록 힘이 약하다 하더라고 명나라 구원병의 힘에 의지하여 함께 진격하려고 도모하는데 후퇴하자는 명령을 듣게 되면 필시 원망하고 분개하여 사방으로 흩어져 버릴 것이고, 다섯째로 구원병이 물러간 뒤에 왜적들이 그 뒤를 타서 덤벼들면 비록 임진강 이북이라 하더라도 역시 보전할 수 없을 것입니다"고 하였으나, 제독 이여송은 이를 보고도 아무 말 없이 떠나갔다.
『징비록』에는 전쟁 수행에 소극적인 이여송과 유성룡 사이의 껄끄러운 관계를 보여주는 일화들이 많이 기술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부관의 어이없는 모함 때문에 이여송이 유성룡을 잡아들여 곤장을 치려했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왜적과의 강화를 반대하는 유성룡이 명군과 왜군 사이에서 화친을 의논하는 사자들의 왕래를 방해하기 위해 임진강의 배를 모두 없앴다는 것이다. 나중에 사실관계를 확인하여 그것이 모함임을 알게 된 이여송이 한동안 겸연쩍어 했다는 이 이야기는, 지원군의 입장이면서도 실은 점령군이나 다름없는 위세를 가지고 있던 명나라 군사 앞에서 국토를 회복하기 위해 표현 그대로 울며 애원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 조정의 뼈아픈 현실을 우회적으로 드러내는 부분이라 하겠다.
군세를 수습한 관군과 의병들의 활약도 눈부셨다. 행주산성에서 권율이 거둔 승리와 남해 바다 이순신의 거듭된 승전 그리고 각지에서 떨쳐 일어난 의병들의 유격전은 전쟁의 양상을 조금씩 바꿔 놓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전란 발발 이듬해인 1593년 4월 30일, 왜군이 떠나버린 도성에 명나라 군사가 진입하면서 서울이 수복되었다. 『징비록』의 기록에 따르면 유성룡 역시 명나라 군사를 따라 도성으로 들어왔다. 전란 발발 초기에 아무런 경황도 없이 떠났다가 1년 만에 돌아온 도성이었으니 그 감격이야 말로 표현하기 힘든 것이겠으나, 유성룡의 눈에 비친 200년 도읍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남은 것은 오직 거대한 폐허와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백성들의 모습뿐이었다.
성 안에 남아있는 백성을 보니 백 명에 한 명 꼴로도 살아남아 있지 않았고, 살아있는 사람도 모두 굶주리고, 야위고, 병들고 피곤하여 얼굴색이 귀신과 같았다. 이때는 날씨가 몹시 무더웠는데, 죽은 사람과 죽은 말이 곳곳에 드러난 채 있어서 썩는 냄새가 성안에 가득 차서 길에 다니는 사람들이 코를 막고서야 지나갈 형편이었다. 관청과 여염집 할 것 없이 다 없어져 버리고, 오직 숭례문(崇禮門)에서부터 동쪽으로 남산 밑 일대에 왜적들이 거처하던 것들만 조금 남아 있었다. 종묘(宗廟)와 세 대궐 및 종루(鐘樓), 각사(各司), 관학(館學) 등 큰 거리 이북에 있는 것들은 모두 다 타서 없어지고 오직 재만 남아 있을 따름이었다. ··· 나는 먼저 종묘를 찾아가서 통곡하였다. 다음으로 제독이 거처하는 곳에 이르러 문안하려고 온 여러 사람을 보고 한참 동안이나 소리치며 통곡하였다.
도성 수복의 여세를 몰아 한강 이남의 왜군을 추격하고자 했던 조정과 유성룡의 의지는 명나라 군사의 소극적인 태도로 인하여 끝내 관철되지 못했다. 같은 해 10월 선조가 평양성에서 서울로 돌아올 무렵, 명군과 왜군 사이에는 종전협상의 움직임이 본격화되고 있었다. 전쟁의 최대 피해자인 조선의 강화 반대 목소리는 배제시킨 상태였다. 더구나 협상안에는 왜군이 조선 영토를 분할 점령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선조는 물론 조정의 대신들은 명나라와 왜국 사이의 이와 같은 움직임에 격렬한 반대 입장을 표시했다. 하지만 명나라 지원병의 힘을 빌리지 않고 독자적으로 왜군을 몰아내기엔 군사적 역량이 너무도 부족했다. 더구나 그동안 명나라 군대의 군수품를 조달하려는 목적에서 백성들에게 부과한 징발과 부역은 한계점에 거의 근접해 있었다. 『징비록』에 기록된 유성룡의 민생 현장에 대한 묘사는 참혹하기 그지없다. 중앙과 지방을 막론하고 굶주림이 만연했으며, 명군이 먹을 군량 운반에 동원된 노인과 아이들이 골짜기에 쓰러졌고, 장정들은 도적이 되어 산으로 들어갔다. 그나마 대다수는 전염병으로 죽었으며 살아남은 사람들조차 아비와 아들, 남편과 자식이 서로를 잡아먹을 지경에 이르러 죽은 사람의 뼈가 잡초처럼 드러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은, 조선이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하는 데 적신호가 켜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하겠다.
종전의 뒤안길에서
도성을 수복한 관군과 명군 그리고 남해안 일대에 성을 쌓고 지구전 태세로 본격적으로 돌입한 왜군 사이에서 일진일퇴의 공방전과 숨 막히는 첩보전이 벌어지는 가운데,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 이순신이 하옥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징비록』에 기록되어 있는 이순신의 하옥 관련 부분은, 그 후반부에 소개된 이순신의 인물됨과 능력에 관한 유성룡의 극진한 평가와 비교할 때 자신의 감정 표현을 절제하고 일어난 사건의 경과 위주로 담담하게 기술되어 있다. 물론 이순신에 대한 원균의 비판이 모함이었다거나 조정이 이중간첩 요시라의 꼬임에 속아 넘어갔다는 내용은 들어 있다. 하지만, 그동안 이순신의 가장 강력한 후견인이 다름 아닌 유성룡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그의 적극적인 구명활동이 『징비록』에 기록되지 않았다는 점은 독자들에게 의아스러운 것으로 비춰질 수도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이순신에 대한 옹호가 선조의 화를 돋우어 이순신에게 더 큰 화로 돌아갈 것을 염려하였거나, 유성룡과 이순신 둘 사이의 사적인 친분 관계를 못마땅하게 여긴 조정 대신들의 반발을 예견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유성룡은 『징비록』의 후반부에서 이례적이라 할 만큼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이순신의 인물됨과 능력 그리고 그와 관련한 일화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이순신의 전사와 관련하여 유성룡이 밝힌 다음의 소회는, 이순신이 유성룡에게 단순히 훌륭한 수군사령관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인물이었음을 증명해 주는 부분이라 하겠다.
이순신은 사람됨이 말과 웃음이 적고 단아한 용모에다 마음을 닦고 몸가짐을 삼가는 선비와 같았으며 속에 담력과 용기가 있어서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아니하고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쳤으니, 이는 곧 그가 평소에 이러한 바탕을 쌓아온 때문이었다.
그의 형님 이희신(李羲臣)과 이요신(李堯臣)은 둘 다 먼저 죽었으므로, 이순신은 그들이 남겨놓은 자녀들을 자신의 아들딸처럼 어루만져 길렀으며, 무릇 시집 보내고 장가들이는 일은 반드시 조카들을 먼저 한 뒤에야 자기 아들딸을 보냈다. 이순신은 재주는 있었으나 운수가 없어서 백 가지의 경륜 가운데서 한 가지도 뜻대로 베풀지 못하고 죽었다. 아아. 애석한 일이로다.
1598년 7월, 왜군의 우두머리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사망함에 따라 남해 주변에 진을 치고 있던 왜적은 전의를 상실한 채 본국으로의 귀환을 서둘렀다. 어느 누구도 예상치 못한 갑작스런 종전이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본국으로 귀환하려는 왜군의 대규모 함대를 맞아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 함대가 벌인 최후의 결전에서 이순신은 전사했으며, 이 싸움을 기점으로 순천을 점령하고 있던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를 비롯하여 부산, 울산, 하동 등에 주둔하고 있던 왜군 전체가 일본으로 철수했다.
전쟁의 종결과 함께 조선 조정은 7년 전란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공허한 영광을 내세우기는 했지만, 그 이면에는 커다란 상처를 봉합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징비록』 서문에서 유성룡이 토로한 바와 같이, 임진왜란의 전화가 몰고 온 참혹한 피해를 복구하고 재건하는 일이 그것이었다. 전쟁 발발 수십 일 만에 서울, 개성, 평양 이른바 삼도(三都)가 모두 무너졌고, 임금은 피난길에 올라 고초를 겪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보다 극심한 고통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전란을 극복할 수 있는 동력을 제공해준 이들은 무명의 백성들이었다.
"어지러운 난리를 겪을 때 중요한 책임을 맡아서, 그 위태로운 판국을 바로잡지도 못하고 넘어지는 형세를 붙들지도 못하였다"며 스스로를 책망하는 유성룡의 모습은 당대의 백성들에겐 어쩌면 때늦은 후회로밖에 들리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난 일을 징계하여 뒷날의 근심거리를 그치게 한다"는 『시경』의 구절로 자신의 책 제목을 대신한 유성룡의 마음가짐만큼은 수백 년의 시간이 흐른 오늘날까지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닐까 한다.
더 생각해볼 문제들
1. 기록자의 주관을 완전히 배제한 객관적 역사 서술은 가능한가?
역사 서술에서 기록자의 주관을 완전하게 배제한 객관성을 구현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기록자 본인의 의지와는 별도로 사료의 선택과 재구성, 서술 시점의 선택 등에서 기록자의 주관이 개입되는 것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다만 『징비록』에서 유성룡이 보여준 것과 같이 자신의 선입견과 편견, 당파심의 영향을 줄여나가려는 노력이 요구된다 하겠다.
2. 임진왜란 발발 초기 민심의 동요와 이반이 심각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전란 이전부터 조세와 부역을 비롯하여 백성에 대한 지배층의 가혹한 수탈로 인한 불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여기에 전란이 발발하자 백성들은 안중에도 없이 자신들의 안위만을 도모하는 조정의 실망스런 모습에 대한 배신감이 더해지면서 개전 초기 민심의 동요와 이반 현상은 극에 달했다.
3. 『징비록』이외에 조선시대의 기록문학 작품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임진왜란에 대한 기록을 담고 있는 이순신의 『난중일기(亂中日記)』를 비롯하여, 병자호란의 참상을 그린 기록으로 궁녀가 집필한 『산성일기(山城日記)』,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惠慶宮 洪氏)가 궁중생활을 기록한 『한중록(閑中錄)』 등이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기록문학 작품들이다. 제공: 설봉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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