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진실의 전부를 주지 마세요,
나의 갈증에 바다를 주지 마세요,
빛을 청할 때 하늘을 주지 마세요,
다만 빛 한 조각, 이슬 한 모금, 티끌 하나를,
목욕 마친 새에 매달린 물방울같이,
바람에 묻어가는 소금 한 알같이.
- 올라브 H. 헤우게, 〈내게 진실의 전부를 주지 마세요〉, 실천문학사
시집을 읽고 나면 모든 책이 다 시시하다. 어떤 시가 몇 줄에 걸쳐 해놓은 말을 어떤 지루한 책은 겨우 두께로 감당하고 있다. 시집을 읽고 나면 모든 책이 다 강압적이다. 어떤 시가 몇 줄에 걸쳐 사이사이 은닉해둔 말을 어떤 지루한 책은 기어이 까발려 낱낱이 발가벗겨 놓는다. 시인은 말을 신뢰하지 않는다. 단지 못다 한 말을 신뢰한다. 시인은 사람의 이해력을 신뢰하지 않는다. 단지 사람의 인내력을 우선적으로 신뢰한다. 인내 없는 이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내는 이해보다 더 오차 없는 이해의 방식임을, 시는 몇 천 년에 걸쳐서 끊임없이 우리에게 알려주려 하는 것만 같다.
노르웨이의 시인 헤우게는 ‘울빅’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그곳에서 평생을 살다 죽었다. 나는 ‘울빅’이라는 곳이 어떤 장소인지 전혀 알지 못하고, 헤우게가 그곳에서 한 평생을 어떻게 살아갔는지에 대해서도 조금밖에 알지 못한다. 특히나 내가 읽은 헤우게의 시는 영어로 번역된 것을 다시 우리말로 번역한 중역본이다. 게다가 헤우게의 대표작들을 추려낸 선집이다. 그래도 나는 제법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만 같다. 그의 시에서 그가 선택한 한 줄과 그 한 줄에 곶감처럼 엮여 있는 낱말들을 따라갔을 뿐이지만 말이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그가 은닉해둔 광활한 세계를 마구 느낀다. 곶감 하나에 한 마을을 평생 동안 굽어보던 감나무의 성정이, 감을 영글게 했던 한 해의 햇볕이, 감을 따던 감나무 주인의 손길이 은닉해 있는 걸 느끼듯.
이 시는 세계를 읽는 자세에 관한 시다. 그게 사람이든, 삶이든, 그 무엇이든. 모든 것을 알려 하지 않음. 전부를 다 받으려 하지 않음. 겸손해서가 아니라, 진실은 이런 방식으로만 소용에 닿는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정작 하려던 말을 시인이 기어이 은닉해 두는 것은 진실을 마주하는 가장 진실된 방식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말과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벽초 홍명희 소설 <임꺽정1,2> (0) | 2014.02.14 |
---|---|
문인이 말하는 한글, 아름다운 문장 22 문학평론가 김나영 편 - 오늘 아침 새소리 (0) | 2014.02.03 |
남 대하듯 부르지 말아요 재일동포, 재미동포, 조선족? (0) | 2014.01.08 |
한글 맞춤법 차례차례 알아보기 12 모음조화란 무엇일까요? (0) | 2014.01.08 |
소설 속 새말 9 가상공간 속 그 말, 달옥에 성공하다! 고삐리와 고딩 (0) | 2014.01.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