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귀 가까이에 입을 대고 소곤거리는 말’은 ‘귓속말’이라고 하죠. 이와 비슷하게 ‘저희끼리만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의 낮은 목소리로 은밀하게 이야기하는 짓’을 이르는 고유어는 무엇일까요? ”
“속삭임.”
“아닙니다.”
“귀엣말.”
“아, 아쉽습니다.”
“속닥질.”
“아, 정답입니다!”
―방청객 일동, 박수와 환호를 보낸다.―
방송 500회를 맞는 “우리말 겨루기”
출연자뿐만 아니라 시청자들의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우리말 겨루기”한국방송 제1텔레비전, 월요일 저녁 7시 30분~8시 25분. 2003년 11월 5일에 시작한 이 퀴즈 프로그램이 2014년 1월에 500회를 맞는다.
국립국어원은 이 프로그램을 지원해 달라는 제작사의 요청을 받았을 때, 내용이 국어 실력 겨루기인 데다가 진행 방식도 역동적이고 참신하여 반가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뿐만 아니라 이 프로그램이 국어원을 널리 알릴 기회가 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 부풀었다. 여러 차례에 걸친 논의 끝에 당시 국어진흥부장이던 필자에게 이 프로그램의 내용 감수를 맡기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국어사전이나 어문 규정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질문들
필자는 감수하는 과정에서 동료 연구원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아낌없이 도와준 전수태, 김옥순, 최용기, 조남호, 정희창, 박용찬, 이준석, 최혜원, 김문오 님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이후 업무가 조정되면서 2005년 9월부터 지금까지 필자가 감수를 도맡게 되었다. 2007년 6월에 필자가 국어원을 퇴임한 후에도 국어원장의 요청에 따라 감수를 계속하였다. 감수자는 정규 방송용 질문지 외에도 지역 예심 문제, 진행자의 발언 내용도 검토한다. 금요일 오후에 문제지를 받으면 월요일 아침까지 작가들에게 제1차 감수본을 보내고, 이후 변경하거나 추가한 문제에 대한 제2차 감수본을 보낸다. 녹화일인 화요일 오후에는 녹화 현장에 가거나, 갈 수 없으면 사무실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예기치 못한 물음에 즉시 답해 주어야 한다. 지난 수년간, 최대 65면에 이르는 질문지에 답하느라고 주말에 정신없이 바빴다. 이 ‘질문지’라는 것이 국어사전이나 어문 규정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을 모은 것이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유지해 온 연상 낱말 찾기, 가로세로 낱말 잇기 등에 필요한 복수 정답을 준비해 놓는 일, 고유어인지 아닌지를 판정하는 일, 왜 정답이 되는지 알기 쉽게 설명하는 일도 만만치 않다. 그러기에 사전 종류뿐만 아니라 전문 서적, 각종 연구 보고서 등도 늘 갖춰 놓고 익혀야 한다. 또 국내외에서 일어나는 여러 문화 현상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바르고 품위 있는
국어 사용에의 관심
지난 10년간 “우리말 겨루기”는 무엇을 해냈을까. 우선 많은 국민이 바르고 품위 있는 국어 사용에 관심을 기울이도록 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고 본다. 출연자의 직업이 각계각층을 망라하고 연령층도 10대에서부터 70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군인, 청소년, 다문화 가족,북한 이탈 주민을 각각 특집으로 하여 출연시킨 보람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나아가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전 국민의 가슴에 심어 주었다. 우리말 달인이나 우승자가 되는 일이 고졸이냐 대졸이냐를 따지는 학력과는 별문제라는 사실이 입증되면서 열심히만 공부하면 된다고 믿게 하고, ‘인간 승리’의 현장이라는 감동적인 무대를 선사하기도 했다. 고입 검정고시를 거쳐 61세에 대학에 입학한 65세의 홍성옥 님2008년, 최종 학력이 고졸인 48세의 이발사 장래형 님2010년의 우리말 달인 등극이 그 예이다.
국립국어원의 위상 강화도 빠뜨릴 수 없다. 달인이나 우승자의 소감을 듣는, 시청자의 주목도가 최상인 순간에 ‘조언: 국립국어원’이라는 일곱 글자가 화면에 또렷이 뜨면서 국어원의 지명도와 위상이 높아지고 존재감이 커지는 데에 적잖게 이바지하였다고 생각한다.
높은 프로그램의 완성도는
우리말을 가꾼다는 자부심을 바탕으로 한다
“우리말 겨루기”가 공익성 높은 프로그램이라는 정평이 나면서 그동안 여러 상을 받았다. 방송 3년이 되는 2006년에는 한국방송 우수 프로그램 연출상, 독립제작사협회 우수 프로그램상, 대한여성민우회 푸른 미디어 가족상을 탔고, 2009년에는 한국 아나운서 대상 장기범 기자상을 탔다.
현재 시청률은 11%, 점유율은 16% 정도를 유지하고 있다. 다채널 시대에, 더구나 동시간대에 경쟁사들이 흥미진진한 드라마 등으로 에워싸는 상황에서 이 성적은 꽤 괜찮은 편이다. 이는 그동안 제작진이 시청률에 휘둘리지 않고 우리말을 가꾼다는 남다른 자부심으로 프로그램의 완성도를 높이려고 애쓴 결과라고 생각한다. 제작진의 우리말 사랑은 각별하여 문제 하나하나에 얼마나 정성을 쏟는지 모른다. 그러기에 자칫 딱딱하다고 여기기 쉬운 ‘국어 실력 겨루기’도 장수 프로로 자리 잡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 준 것이다. 이에 힘입어서일까. 최근 다른 방송사에서도 ‘국어왕’을 가리는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도 들린다.
방송 500회를 맞이하니, 그 누구보다도 이 프로그램을 열심히 보아 준 시청자들이 고맙다. 이걸 보려고 월요일 저녁에는 웬만하면 다른 약속을 잡지 않는다는 분도 여럿 보았다. 바로 이분들이 밀어 준 덕택에 “우리말 겨루기”가 이만큼 큰 것이다. 10년 전의 시청률이 3%였음을 생각하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앞으로 이 제작진은 지금까지 해 왔듯이 ‘내용’과 ‘재미’로 무장하여 더욱 많은 분에게서 사랑받는 프로그램이 되도록 힘쓸 것이다. 방송 1,000회, 2,000회, 아니 끝없이 지속되어 오래도록 시청자들과 즐거운 시간을 함께하였으면 한다.
글_김희진
사단법인 국어생활연구원 이사장.
서울교육대학교, 서울대학교 대학원석사, 숙명여자대학교 대학원박사에서 국어 교육, 의미론 등 전공. 국립국어원에서 21년간 근무하면서 ‘한글 맞춤법’, ‘표준어 규정’ 개정, ‘국어문화학교 국어 전문 교육 과정’ 개설, ‘한국 어문 규정집’ 발간 및 보급 등의 사업을 주도하였다. 정년퇴직 후에는 국립국어원의 전문용어 구축 사업에 참여하였고, 현재 서울시청역 근처에서 ‘생활 국어반’을 열어 올바른 국어 보급을 위해 힘쓰고 있다. 그동안의 공로를 인정받아 ‘한글 발전 유공자 대통령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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