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어김없이 10월 9일 한글날이 찾아왔지만, 올해의 한글날은 조금 특별했다. 공휴일, 그것도 22년 만에 다시 찾아온 문화 국경일. 역사에 기록될 만한 2013년의 한글날을 위해 국립국어원에서 두 팔을 걷고 꽤 많은 행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중 ‘꼭 가 보고 싶은데, 내가 가도 되는 자리인가’ 하고 고민했던 행사가 있었으니, 바로 <국어 문화 시민 강좌-한국어, 시대를 열다>였다. 보통 한국어, 한글과 관련된 학술 대회는 주로 관련 연구와 배움을 해 나가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일반인 입장의 나는 참가의 의지조차 갖지 않았으나 이번에는 달랐다. ‘시민 강좌’인데다 6시 30분에 시작하겠다는 그 안내가 마치 나의 참가를 기다리는 것 같아서.
업무를 마치고 도착한 문화역서울 284에는 이미 꽤 많은 사람들이 들어차 있었다. 회사에서 퇴근하고 들른 직장인들과 책가방 메고 온 학생들, 강의를 듣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오신 어르신들, 그리고 근처를 지나던 사람들까지 정말 말 그대로 ‘시민’들이 모여들었다. 우리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에 문화역서울 284는 정말 최적의 장소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로 향하는 전국 곳곳의 사람들과 전국 곳곳으로 향하는 서울의 사람들이 모여들고 마주쳤던 서울역. 사실 이곳이야말로 온갖 지역의 언어들이 생생하게 살아 숨쉬던 ‘언어의 집합소’였을 테니. 객석은 금세 꽉 찼고, 관객들의 눈높이에 잘 맞춰진 무대에 해금을 든 한 연주자가 올라왔다.
<한국어, 시대를 열다>는 ‘국어와 문화의 만남’이라는 표제답게 강연과 공연을 함께 즐길 수 있었다. 22일 첫날은 비파 연주팀 비화랑과 가야금 연주 팀 가야토리, 둘째 날은 가수 김도향 씨, 셋째 날에는 해금연주가 강은일 씨, 그리고 마지막 날에는 아카펠라팀 연세 쏠리스티의 무대가 준비되어 있었는데 내가 찾아간 날은 세계 무대에서 활약하고 있는 해금 연주가 강은일 씨의 귀한 공연이 준비되어 있었다. 선한 눈매와 다정다감한 말투를 가진 그녀는 호흡이 길고 서글픈 선율의 해금산조와 리베르탱고, 백학 등의 서양 고전 음악을 해금으로 연주한 색다른 음악을 들려주며 해금이 가진 매력을 십분 선보였다.
감미로운 해금 공연이 끝나고, <한국어, 시대를 열다>의 세 번째 강연이자 한국어의 과거, 현재에 이어 미래에 관한 고은 시인의 ‘한국어 융성의 길을 열다’ 강연이 시작됐다. 고은 시인을 반기는 시민들의 박수가 끝없이 이어졌다. 모든 강연자가 마찬가지였지만 특히 국외 무대에서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고은 시인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만나고 그의 철학을 듣는다는 것에 시민들은 흥분과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인자한 미소로 시민들의 호응에 답한 고은 시인은 차분한 음성으로 강연을 시작했다.
“나는 내 모국어와 그것을 기록하는 한글에 대한 자존심을 한 번도 굴절시킨 적이 없습니다. 세계와 만나는 광장에, 나는 한국어라는 원소를 가지고 가고 있는 것입니다. 한글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 존재의 이유는 한글입니다. 한글 이상의 종교도 없고, 또 필요치 않습니다.”
평소 세종대왕에 대한 존경심과 애정이 각별한 것으로 유명한 고은 시인은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의 열정과 고귀한 창제 정신을 바탕으로 탄생한 한글이 지금 이 시대에도 세계와 미래로 뻗어나가는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산속의 고요한 암자 추녀에 풍경이 달려 있지요. 그 풍경은 물고기의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절에서 수행하는 이들은 밤에도 잠에 취하면 안됩니다. 물고기는 잘 때도, 죽을 때도 눈을 감지 않습니다. 그만큼 치열하게, 눈을 뜨고 세상을 투시하는 그들의 수행 목표를 표방한 것이 바로 풍경입니다. 그럼 그 물고기는 어떤 물고기일까요. 산속 맑은 상류에 사는 민물고기일까요? 아닙니다. 넓은 바다의 물고기입니다. 멀리 있는 것을 끌어다 자기화하는 겁니다.”
고은 시인은 우리가 엄마의 몸에서 태어났듯 우리의 생활상과 정신이 반영되어 한글이 탄생하였고, 그 한글이 우리를 세계의 중심으로 향하게 하는 바탕이 되고 있음을 ‘존재 증명의 원천’이라는 말로 설명했다.
“언어는 연약합니다. 언어는 변화합니다. 언어는 수많은 언어와 많이 만나고, 설움을 받고, 업신여김을 받으며 강해집니다. 한글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한글이 가진 작은 결함까지 품고 사랑해야 할 사명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몇 번이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주먹을 꼭 쥐기도 하고, 사소하게 일어나는 언어 파괴 현상을 ‘언어 학살’이라고 지적하며 뜨거운 강연을 선보인 고은 시인. 한국어의 ‘미래’를 주제로 한, 세계에 아름다운 우리말을 전파하는 멘토에게 듣는 강연이니만큼 ‘세계’를 배경으로 한 한글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전하는 한국어의 ‘미래’는 가장 한국적이고 가장 기본적인 ‘한글 창제’에 관한, 적어도 나에게는 충격적인 강연이었다.
관객들의 끝나지 않는 박수를 받으며 두 시간의 강연은 끝이 났다. 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는 조아라 교사는 “업무가 예정보다 늦어져서 참석을 포기하려고 했는데 안 왔으면 정말 후회 했을 것”이라고 말하며 “고은 시인의 호흡이 이렇게 가까이 들리는 곳에서 선생님이 갖고 있는 한국인으로서의 자긍심을 엿볼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저에게는 큰 공부가 되었습니다.”라고 감동을 전했다.
기능적이고 과학적인, 지구상에 둘도 없는 문자로서의 한글이 미래의 전부는 아니다. 우리가 살아온 모든 시대에서 우리의 감정과 설움과 희망을 노래했던 그 한글이 미래를 만드는 것이다. 선한 인상과 다르게 힘이 실려 있던 고은 시인의 음성, 비장한 표정과 날카로운 눈에 담긴 것은 아마도 한국어와 한글에 대한 자신감이었을 것이다.
<국어 문화 시민 강좌-한국어, 시대를 열다>는 10월 25일 민현식 국립국어원장의 강연을 끝으로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우리말과 우리글에 대해 더 알고 싶은 욕구와 알아야 하는 의무를 조금이나마 해소해 준 소중한 시간이었다. 국어는 학자나 전문가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우리가 평생 함께 해야 할 생활이자 가보家寶다. 국민들의 견문을 위해 국립국어원에서는 더 좋은 프로그램을 지속적으로 개발해 주기를, 국민들은 적극적인 참여로 우리의 말글살이를 바람직하게 이어가기를 감히 바라 본다.
강연장의 한 켠에서 만난 고은 시인
선생님을 이렇게 가까이 뵙고 말씀을 듣는다는 것에 많은 사람들이 반가워하고 있습니다. 이런 자리에서 강연을 하시는 선생님의 소감은 어떠세요?
나는 집에서 살지요. 거리에서 살지 않습니다. 거리에만 이야기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밖에서 만나는 김 씨, 조지, 제인 등과 할 이야기가 있듯 집 안에서도 무궁무진한 서사가 있지요. 조카, 삼촌, 막내 동생과 나누는 가족 간의 이야기. 두 곳의 이야기는 삶의 크기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집은 내 조국이고 거리는 세계입니다.
선생님, 국외에서 다양한 활동을 벌이고 계신데, 어떤 마음으로 활동하시나요?
나는 세상 사람들과 만날 때 아무런 경계가 없어요. 그들은 내가 말하는 한국어, 목소리, 한국의 문학 세계 등에 완전한 호응을 하지요. 내 모국어를 어깨에 지고 나가서 주눅이 들거나 다른 언어에 고개를 숙여 본 적이 없습니다. 내 언어가, 우리의 언어가 그들에게는 산이 되고 파도 소리가 되는 모습을 만나고 옵니다. 참 좋습니다.
그들이 우리의 정서를 이해하고 공감하나요?
내가 가진 보편성을 그들에게 던지는 겁니다. 이를테면 서구문학의 고전이 이룩한 보편성에 의존하지 않고, 나와 내 조상들이 살아왔던 세상과 새롭게 만난 유럽이 뒤섞여 만들어진 나의 보편성을 말입니다. 보편성뿐만 아니라 나의 특수성도 열렬히 표현하지요. 그들은 그것을 특별한 경험으로서 적극적으로 받아들입니다.
한국어와 한글의 미래, 세계화를 위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점은 무엇일까요?
한글은 말이죠. 어쩌면 한국에서 없어지고 다른 곳에서 살아날지도 모릅니다. 한글의 위기는 계속되고 있어요. 공문서에 한글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습니까? 신문 사설, 방송 언어가 한글을 잘 간수하고 있나요? 꽃피우고 있습니까? 학살하고 있습니다. 이런 위기를 두고 어떻게 세계화와 미래를 말할 수 있겠습니까. 부디 앞으로 한글의 미래를 위해 함께 고민하고 운동해 나갔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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