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글

권영민 교수 한국어 문화의 시대를 열다

이산저산구름 2013. 11. 13. 12:32

 

권영민 교수
 

‘엄마’라는 단어로 첫 말을 시작한 우리에게 한국어는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표현 수단이다. 그렇다 보니 한국어가 세계 유일의 언어인 것은 모두 알고 있지만 한국어가 가진 가치나 위기 등에 대해서는 잘 인식하지 못한다. 우리의 삶과 단단히 밀착된 한국어의 의미를 되짚어 보는 것이 새삼스러운 탓이다. 그런 우리에게 도움이 될 만한 반가운 강좌가 지난 10월 22일부터 25일까지 4일간 문화역서울 284구 서울역에서 열렸다. 누구나 들러 우리말과 글에 대한 명사들의 강연을 듣고, 우리 문화를 즐길 수 있도록 국립국어원에서 마련한 국어 문화 시민 강좌 <한국어, 시대를 열다>가 그것이다. 그 첫 번째 시간인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권영민 명예 교수의 <한국어 문화의 시대를 열다> 강연을 정리해 보았다.


권영민 교수


죽거나 살거나
언어의 전쟁

 

2000년을 맞이하면서 유네스코 본부에서 큰 발표가 있었어요. 지금 지구상에 살아있는 언어는 모두 몇 종인가. 언어가 ‘살아 있기’ 위해서는 최소 2천만 명 이상의 인구가 일상어로서 그 언어를 사용하고 있어야 하는데, 그 조건에 부합하는 언어는 몇 개인가에 대한 발표였습니다. 지금 지구상에는 총 6,500여 종의 언어가 존재하는데 이것은 19세기 말의 9,300여 종에 비해 2,800여 종이 줄어든 수치입니다. 1년에 30개씩의 언어가 사라진 백 년의 세월을 지낸 셈이죠.

 

그렇다면 앞으로 백 년 동안은 몇 개의 언어가 사라지게 될까요. 그리고 한국어는 잘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유네스코는 한국어를 사용하는 ‘한국어의 언어 인구’를 7,300만 명으로 발표했습니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언어는 무엇일까요? 약 10억 인구가 사용하는 ‘중국어’입니다. 그리고 힌디어, 스페인어, 영어, 아랍어, 포르투갈어, 벵골어, 러시아어, 일본어, 독일어가 그 뒤를 잇는데요. 이 언어들은 모두 1억 명 이상이 사용하고 있는 세계 10대 언어입니다. 우리나라는 13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6,500여종의 언어 중 13위에 속하는 한국어는 결코 작은 언어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 소멸 단계를 통해 보자면 한국어는 ‘위험’ 수준입니다. 한반도는 중국어와 일본어라는 두 개의 큰 언어에 둘러 싸여 있고 영어의 영향력도 만만치 않죠. 게다가 남북 분단으로 한국어를 사용하는 인구 중 1/3~2/3가 원활히 소통하지 못한다고 유네스코에서는 경고하고 있습니다. 만약 2099년에 유네스코에서 지구상에 언어가 3,000여 종만 존재하고 있다는 결과를 발표한다면 얼마나 큰 충격을 받게 될까요? 인간이 인간다움을 실현할 도구는 ‘말’입니다. 반드시 인간이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에 북쪽의 홋카이도부터 남쪽의 오키나와에 이르기까지 영토를 확장하면서 홋카이도 아이누족의 독자적 언어인 ‘아이누어’와 오키나와의 ‘류큐어’를 말살하는 정책을 폅니다. 언어의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 말입니다. 결국 류큐어와 아이누어는 지구상에서 사라졌다고 공식 발표하기에 이릅니다. 그제서야 일본에서는 그 전통 언어를 되살리기 위해 애를 쓰기 시작하고, 2,000명 이상이 아이누어를 일상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면서 1980년대 초에 아이누어가 다시 살아났다고 인정받게 됩니다. 이렇게 지구상에는 숱한 언어가 죽고 사는 ‘언어의 전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1) 유네스코의 소멸 위기 언어 5단계
  -1단계: 취약한 언어Vulnerable language
  -2단계: 분명히 위기에 처한 언어definitely endangered language
  -3단계: 심하게 위기에 처한 언어severely endangered language
  -4단계: 아주 심각하게 위기에 처한 언어critically endangered language
  -5단계: 소멸한 언어extinct language


 소멸의 위기를 이겨낸 한국어
 

한국어는 세종대왕이 창제한 한글과 운명적으로 만났습니다. 하지만 모든 한국어를 한글로 표시하고 기록하는 것이 가능해진 것은 불과 백 년 전의 일입니다. 그 전에는 모든 기록을 한문으로 남겼지요. 조선왕조실록이나 선비들의 문집 등은 모두 한문입니다. 한문은 계층적으로 제한적이고 폐쇄적인 문자라서 한국인들의 문화적인 역량과 정신을 온전히 발현할 수 있는 도구가 되어 주지 못했지요.

 

그러던 중에 고종 황제가 ‘모든 문서는 국문으로 기록하라’고 칙령을 내립니다. 혁명적인 선언이었지요. 어마어마한 시간과 공력이 필요한 실로 엄청난 명령이었습니다. 이것이 지식인층, 지배층, 귀족층이 모두 한글을 사용하게 된 계기가 됩니다. 그야말로 언문일치言文一致, 말하는 그대로를 글로 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1907년, 학부 안에 국문연구소를 설치하게 되지요. 말의 뜻을 연구하고 어법을 정비하는 국문연구소는 주시경 선생 등이 중심이 되어 작업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설치 3년 만에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고, 결국 우리말 연구의 모든 작업이 중단됩니다. 국문연구소는 채 3년도 되지 않아 단명한 비극적인 연구소로 남게 됩니다.

 

한국어와 일본어의 싸움은 이때부터 시작됩니다. 일본은 일본어를 ‘국어’, 우리말은 ‘조선어’라고 구분 지어 부르게 합니다. 처음에는 일본어를 중심으로 하되 일본어를 이해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조선어를 혼용할 수 있게 했으나 1939년부터 창씨개명을 강제하는 등 모든 언어생활을 일본어로 하도록 하는 한국어 말살 정책을 펼침으로써 우리말은 소멸의 위기를 겪게 되죠.

 

그러나 우리나라가 어떤 나랍니까. 우리나라는 일본에 비해 월등한 문화를 가졌고, 문화의 뿌리가 그들보다 더 깊은 나라입니다. 한국어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삼일 운동 이후에는 한국어로 잡지와 신문을 냈습니다. 한국 문화와 역사 서적을 모두 한글로 기록해 두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은 이미 한국어를 한글로 자유롭게 써 내는 글쓰기가 훈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지요. 지난 100년 동안 유럽은 식민 지배를 통해 3천여 개의 언어를 죽였지만, 우리는 일제 강점기에서도 우리의 말을 지켜 냈습니다. 우리는 그런 민족입니다.

  

오늘을 있게 한 한국어의 힘

 

한국어와 한글은 배우기 쉽습니다. 사용하기 쉽습니다. 지난 백 년 동안의 근대화 과정을 보면 지식인들은 한국어와 한글로 문화를 연구하고, 교육하고, 전파하고, 새로운 문화를 창조했습니다. 한 해에 수십만 명이 대학에 진학하여 한국어로 고등 교육을 받는 것은 한국어로 지식과 정보를 새롭게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전체 인구의 98.3%가 한국어를 말할 수 있고 한글을 쓸 수 있습니다. 문해율 세계 1위. 우리말과 글은 언어 경제성이 뛰어난 언어 문자입니다.

 

미국은 영어를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인구가 전체의 70% 미만입니다. 이민자가 많은 특성 때문인데요. 한때 이민자들이 모두 영어를 배울 수 있도록 해 언어와 문화를 단일화하려는 정책을 펼쳤었지만 결국 생각을 바꾸죠. 여러 문화가 공평하게 인정받는 ‘다문화 사회’로 말입니다. 필리핀은 170여 종의 언어를 갖고 있지만 스페인과 미국의 지배를 받는 과거를 겪으면서 공용어로 영어를 채택해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구의 절반 가량만 영어를 쓸 수 있습니다.

 

지식과 정보를 모든 국민이 나누어 가질 수 없는 나라는 경제와 문화가 균형있게 성장할 수 없습니다. 한국이 잘살게 된 이유는 누구나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글로 쓸 수 있고, 정보를 나눌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글 덕분에 누구나 지식과 정보를 만들어 내고, 공유하고, 저장하고, 유포할 수 있습니다. 한국은 문화적 민주주의가 확립된 사회입니다.


 
권영민 교수

  

한국어가 융성해야 문화가 융성한다
 

말을 문자로 기록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규범이 있습니다. 한글 맞춤법이 그것인데요. 이것을 잘 지켜야 우리 한글과 한국어의 깊이를 존중하는 것입니다. 세계에는 획 하나만 달라도 완전 다르게 읽히는 문자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우리말과 글을 쓰면서 바르고 품위 있게 써야 한다는 점을 가끔 잊고 있어요. 대충 알아듣고 알아볼 수 있으면 된다고 그냥 넘어가 버립니다. 하지만 한국어와 한글을 배우는 외국인 입장에서는 이런 것들이 무척 혼란스럽습니다.

 

저는 32년 동안 연구실에서 살다가 교수직을 퇴임하면서 반성을 많이 했습니다. 내가 그동안 펴낸 책들은 그 독자가 대부분 같은 분야의 연구자나 학생들이었습니다. 일반 대중 독자가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을 거의 쓰지 못했습니다. 어떤 학문도 대중과 더불어 살지 않고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문학 콘서트 등을 통해 대중과 많이 만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제가 연구해 온 우리 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대중들과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21세기 지식, 정보, 문화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우리 문화가 세계로 벋어 나가고 있고 우리 사회 전체가 문화적으로 크게 성장하고 있습니다. 요즘 우리 대중음악, 드라마, 영화 등이 세계 곳곳에서 널리 환영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정도에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한국어와 한글이 널리 세계 각국에 보급되어 한국의 우수한 문화와 그 전통을 알려야 합니다. 그러자면 한글과 한국어가 융성해야 합니다. 한국어와 한글을 기반으로 우리 문화가 융성할 수 있습니다. 여전히 문제는 한글과 한국어입니다.

 

한국어와 한글로 이루어진 우리 문화, 융성하는 문화의 시대에 당신은 지금 살고 있습니다.


강연 후 짧은 인터뷰
 
일반인으로서 이번 강연회는 ‘퇴근길’에 들러 우리말에 대한 다양한 배움을 얻을 수 있는 반가운 프로그램입니다. 교수님이 강연자로서 참여하시게 된 ‘한국어, 시대를 열다’는 어떤 프로그램이었나요?

오늘 강연은 가벼운 마음으로 준비했습니다. 우리는 평소에 문화니 인문 정신이니 이런 얘기를 많이 하면서도 사실 한국 인문 정신의 바탕이 한국어와 한글이라는 것을 너무 모르고 있어요. 그 소중함이나 가치들을요. 그런 얘기를 알기 쉽게 설명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가벼운 사례들과 함께 이야기해 보았습니다.
평소 대중은 문화나 인문학 등 차원 높은 정보나 지식들을 원하지만 접할 기회가 많지 않아요. 그래서 대중과 더 많이 만나려고 해요. 그리고 대중을 가까이 만나면서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소홀히 대했던 문제들을 발견하곤 하기도 해요. 오히려 저에게 큰 자극이 되기도 하죠. 
 
권영민 교수


미국과 일본의 대학에서 한국 문학을 가르치셨는데, 세계가 바라보는 한글과 한국어, 그리고 우리 문학에 대한 시선은 어떤가요?

아직은 규모가 작은 편이에요. 한국에 대한 관심사도 많이 늘었고, 한국어 역시 많이 보급되었지만 실제로 대학에서 학문으로서의 한국 문학은 초보적인 단계입니다. 한국 문화에 대한 고급 독자와 고급 정보 전달자를 많이 만드는 것이 우리 문화를 세계로 향하게 하는 지름길인데, 전공자나 한국 문학을 배우고자 하는 의식 있는 대학생이 많지 않은 실정입니다.

한국어와 한글이 세계로 발돋움하는 데에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전 세계에 한국어를 보급하고 가르치는 교육 기관이겠지요. 현지의 실정에 맞는 다양한 교재가 필요합니다. 교재와 도구들이 지역의 실정, 전통문화와 잘 부합되어야 실제 교육에서 성공을 거둘 수 있습니다. 또 정부가 끊임없이 한국어 교육이나 기관 등에 전문적인 인력을 보강하고 정책적인 지원을 확대해서 체계화된 연구와 교육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일반인이 할 수 있는 노력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한국어나 한글의 소중함과 가치에 대해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생활 속에서 가치를 발견하고 의식하고 실천해 나가야겠죠.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방법은 한국어로 이루어진 수준 높은 작품, 글 등을 많이 읽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문학 작품 속에 담긴 한국어의 묘미, 표현법, 한국어의 새로운 어휘들을 배우고, 정신적 가치를 음미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한국어에 대한 인식이 높아집니다. 그러다 보면 문화적 역량이나 교양도 높아지고 더불어 저자들도 더 좋은 책을 더 많이 보급하기 위해 애쓰게 되겠죠. 그런 연쇄적인 반응들은 ‘한국어를 사랑합시다!’라고 외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효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라 믿습니다.

 

지금 세계는 한국어 공부 중이다. 전 세계 117개의 세종학당에 수많은 외국인들이 한국어를 배우려 모여들고 있고, 850여 개의 대학에는 한국어학과가 설치되어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한국어와 한글의 힘이 그만큼 커지고 있는 것이다. 선조들은 알고 있었을까? 당신들이 온 마음을 다해서 지켜 낸 한국어와 한글이 수백 년이 지난 후 낯선 세계인들의 가슴을 흔들게 될 줄을. 그리고 민족 문화의 꽃을 피우는 든든한 밑거름으로 자리를 잡게 되리라는 것을.

 

권영민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교수로 재직1981~2012하면서 인문대학장을 역임하였고, 미국의 하버드대학과 버클리대학, 일본의 동경대학 등에서 한국 문학을 강의하였다. 한국 현대 문학의 역사적 체계화에 주력하여 <한국현대문학사 1.2>, <한국민족문학론연구>, <한국계급문학운동사>, <이상문학의 비밀 13>, <문학사와 문학비평> 등을 간행하였다. 현재 서울대학교 명예 교수, 단국대학교 석좌 교수이며 월간 문예지 <문학사상> 편집 주간으로 일하고 있다.
 
글_ 최민영 / 사진_ 김병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