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천년 이후 이 시대를 가장 뜨겁게 달군 화두 중의 하나가 ‘V라인’이다. ‘V라인’은 ‘꽃미남’과 ‘꽃미녀’의 필수 조건이다. 굳이 모자나 선글라스를 써서 작아 보이게 하지 않아도 되는, 머리칼을 이용해 얼굴의 윤곽선을 달라 보이게 하지 않아도 되는 유려한 얼굴. 그렇다. 조막만 하고 갸름한 얼굴, 그리고 야리야리한 몸매. ‘꽃미남’과 ‘꽃미녀’가 되기 위한 기본이다. 거기에다 조각처럼 새겨진 복근 정도를 숨겨 두면 ‘꽃미남’의 완성, ‘S라인’ 몸매 한 번 드러내어 주면 ‘꽃미녀’의 완성이다.
원래 여자 닮았다는 말보단 꽃미남 쪽이 더 듣기 좋은걸. 《전경린, 엄마의 집》
사춘기를 거치며 그는 얼굴이 곱게 피어나, 계집애처럼 가느다란 코와 꼬리 치는 눈초리, 그리고 발그레한 입술로 당장이라도 유명한 꽃미남 배우가 될 듯……. 《안정효, 솔섬》
세 명의 개성 있는 꽃미남들과 아름다운 홍일점 꽃미녀……. 《이민영, 꽃미남 라면 가게》
나는 누군가와 어깨를 스치는 바람에 꽃미녀의 말을 흘려들었다. 《김애현, 과테말라의 염소들》
‘꽃’이라고 다 같은 ‘꽃’이 아니다. ‘꽃미녀’는 ‘미녀 중의 미녀’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꽃미남’은 좀 다르다. ‘꽃미남’은 ‘미남 중의 미남’이 아니다. ‘꽃미남’은 ‘꽃처럼 아주 예쁜 남자’이다. ‘꽃미녀’는 단순히 ‘더 예쁜 여자’를 지칭하는 말이지만, ‘꽃미남’은 남성에 대한 인식의 변화이다. 동서를 막론하고 여성을 ‘꽃’에 비유하는 것이 전통적인 표현 방식이었지만, 여성들의 경제적 독립과 함께 여권 신장은 그러한 표현 방식에 변화를 가져왔다. 어쩌면 ‘꽃미남’은 여성들의 반란이다. 힘으로 상징되는 근육질의 남성상은 더 이상 여성들에게 매력의 요소로 작동하지 않는다. ‘꽃미남’은 그러한 변화의 정점을 보여 주는 하나의 상징이다. ‘꽃미남’이 쓰이기 시작한 것은 새 천년 이후의 일이지만, 그러한 조짐은 이미 그 이전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하이고오, 신랑 좀 보소. 똑 꽃잎맹이네.꽃잎 모양이네, 필자 주.《최명희, 혼불》
《혼불》에서 ‘신랑’은 ‘꽃잎’으로 비유된다. ‘꽃잎 같은 신랑’은 ‘몸가짐은 의젓하였지만 자그마한 체구였고, 얼굴빛은 발그레 분홍 물이 돌아, 귀밑에서 볼을 타고 턱을 돌아 목으로 흘러내리는 여린 선에 보송보송 복숭아털이 그대로 느껴지는’ 앳되고 보송보송한 솜털 같은 남자로 묘사된다. 남성도 ‘꽃’에 비유되기 시작한 것이다. 남성이 여성을 선택하는 시대가 아니다. 여성들로부터 간택받아야 하는 남성들에게 ‘꽃미남’은 우상이다. 이러한 현상은 중국 동포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남자의 터프미만 선호하던 녀자 세상에 요즘은 꽃미남이라는 화사하고 산뜻한 부름이 류행된다. 여지껏 우리는 녀자들만을 꽃에 비유하는 데 길들여 왔다. 《심명주, 장미 같은 남자 귤 같은 여자》
지금 생각해 보니 나의 이상형이 요즘 류행되는 꽃미남형이였다. 《김점순, 백》
‘꽃미남’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 ‘꽃미남’은 ‘꽃처럼 예쁜’, ‘꽃미모’를 뽐내며, ‘꽃처럼 아름다운’, ‘꽃미소’를 지을 줄도 알아야 한다.
우리 조에서뿐만 아니라, 우리 과를 통틀어 가장 꽃미모를 빛내는 녀석이 바로 지훈이었던 것이다. 《붉은새, 여전히 너를》
얼굴 가득 꽃미소를 지으며 하는 지훈의 말에 그가 얼마나 민영을 생각하는지 느껴졌기에. 《붉은새, 여전히 너를》
누나 마음 사로잡는 ‘꽃미소’ 《조선일보, 2013. 7. 30.》
드라마 촬영 중 여전한 꽃미소 ‘女心 흔들’ 《경기일보, 2013. 6. 14.》
‘꽃’이 사람과 관련된 말 앞에 결합되어 만들어진 단어는 ‘꽃미남, 꽃미녀, 꽃미모, 꽃미소’뿐만은 아니다. ‘꽃각시, 꽃서방, 꽃기생, 꽃처녀’ 등도 아직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없는 말들이다. ‘꽃각시’와 ‘꽃서방’은 1939년 현진건의 소설 《무영탑》에도 나타나는 말이다. ‘꽃미남’처럼 최근에 만들어진 말이 아니다. 그런데 《무영탑》의 ‘꽃각시’와 ‘꽃서방’의 ‘꽃’은 ‘꽃미남’의 ‘꽃’과는 전혀 다른 뜻이다.
당나라 풍속, 당나라 예법이 물밀듯 밀려들어오는 오늘날이지마는, 아직도 꽃각시花娘, 꽃서방花郞의 유풍을 버리지 않고 명절 때로나 풍월당에서나 젊은 남녀끼리의 같이 노는 기회는 얼마든지 있음에랴. 《현진건, 무영탑》
‘꽃각시’는 한자어 ‘花娘’, ‘꽃서방’은 한자어 ‘花郞’을 작가가 단순히 고유어로 바꾸어 놓은 말이다. ‘꽃각시’는 ‘노는계집술과 함께 몸을 파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기생,’이고, ‘꽃서방’은 ‘노는사내예전에, 여자들의 놀이 상대가 되는 남자를 이르던 말’이다. 그러나 다른 문학 작품 속에서 ‘꽃각시’는 《무영탑》의 ‘꽃각시’와는 다르다.
꽃각시 율촌댁이 아담하고 조신한 맵시를 드러냈을 때, 둘러선 사람들은 너나없이 탄성을 한숨처럼 발했다. 《최명희, 혼불》
안마당에 차일을 치고 초례청을 꾸며 부끄럼타는 꽃각시 얻는 꿈……. 《이화경, 꾼》
저 몸맵시에 인젠 행주치마를 두르고 물동이를 인다면 아마 무대에서도 보기 드문 꽃각시이리라! 《허해룡중국, 세 번째 비밀》
위의 작품들에서 보이는 ‘꽃각시’는 ‘갓 시집온 꽃처럼 어여쁜 각시’, 즉 ‘새색시’이다. ‘꽃기생’은 ‘꽃처럼 예쁜 얼굴 기생’이며, ‘꽃처녀’는 ‘꽃처럼 예쁜, 나이 어린 처녀’이다.
미스 민은 춤기생이지 꽃기생이 아니어서 굳이 손님을 받지 않아도 되었다. 《이현수, 신기생뎐》
그리고 옷보퉁이를 싸들고 옛 외가 쪽으로 해변 길을 나서실 때는 시집도 오시기 전의 아득한 꽃처녀 시절로, 머릿속 기억이 그런 식으로 자꾸만 먼 옛날 쪽으로 돌아가고 계신 것이다. 《이청준, 축제》
시찬은 그래서 꽃처녀들과 더불어 한꺼번에 싸잡혀 잠정적으로 유화자의 아들이 되고 말았다. 《안정효, 솔섬》
‘꽃미녀, 꽃각시, 꽃기생, 꽃처녀’ 등은 모두 여성을 ‘꽃’에 비유한 말들이지만, 이젠 남성도 꽃에 비유된다. ‘꽃미모’의 ‘꽃미남’이 짓는 ‘꽃미소’가 낯설게 느껴지지 않을 만큼 텔레비전 화면 속의 배우들의 모습이 이젠 우리의 일상이 되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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