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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누워서, 번역은 앉아서 - 6 번역가 정영문

이산저산구름 2013. 8. 28. 12:14

소설은 누워서, 번역은 앉아서 번역가 정영문
 
 

소설가 정영문을 번역가 정영문으로 만났다. 그는 소설가로 등단하기 전부터 번역을 시작해 지금까지 50권 넘게 번역한, 중견 번역가이기도 하다. 미술 공부를 하러 프랑스로 돌연 떠났다 별 소득 없이 돌아와 번역을 시작한다. 1993년이다. 그가 번역한 첫 책은 ‘굉장히 쉬운 프랑스어로 쓰인’ 모로코 출신 작가 타하르 벤 젤룬의 《도둑과 공무원》. 그 한 권을 제외하고는 계속 영어로 된 책을 번역했다. 카투사로 복무한 게 영어를 잘하는 데 도움이 됐느냐고 묻자 “카투사에서는 실력을 버렸지요.”라며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는 말을 한다. 그렇다면 원래부터 영어를 잘했냐고 묻자 그는 고개를 끄덕인다.

 

‘원래’란 중학교 시절을 말한다. 정영문은 수업 시간에 영어로 된 소설책을 교과서 사이에 끼워 넣고 읽곤 했다. 그때 좋아했던 소설은 찰스 디킨스의 《데이비드 코퍼필드》. 동네 아이들을 모아 놓고 영어를 가르쳐 주던 선교사의 도움도 있었다. 무엇보다 형과의 일화가 인상적이다. 전국구 수재이던 그의 형은 다섯 살 터울의 동생에게 토플 책을 건네주면서 이렇게 말한다. 세 번만 보면 외울 수 있을 것이고, 그러면 영어는 더 이상 문제가 아닐 거라고. “세 번은커녕 일곱 번을 봐야 했어요.” 억울하다는 듯 말하는 그에게 “의외로 노력파시네요?”라고 묻자 “어떤 것들에 대해서는 노력을 많이 하지요.”라는 수줍은 대답이 돌아온다.

 

정영문은 대학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고, 심리학이라는 전공은 그의 예상과는 달리 정신 분석학이 아닌 실험 심리학에 가까웠다. 그래서 택한 것이 미술. 창작에 재능이 없는 것 같아 포기하고 미술사를 공부하러 프랑스로 갔던 것. “차선이었어요. 완벽하게 포기할 수 없었으니까.” 다시 한국에 돌아와 예전처럼 막연히 시간을 보내다 번역을 시작하게 된다. 그는 번역을 하고서부터 문학을 읽기 시작했고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의 소설에는 번역으로 얻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잡학 다식하고 다종 다기한 이야기들이 녹아 있다. 마다가스카르의 진기한 동식물들, 뉴질랜드 고원 지대에 사는 키아라는 앵무새,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전말, 하루에 아홉 번 목욕을 하고 아홉 번 황소 고환에서 추출한 호르몬제를 맞은 히틀러, 케네디 가의 비사悲事, 호보 윤리 강령 같은.

 

1)호보hobo: 그의 책 《어떤 작위의 세계》에 따르면, 떠돌이drifter의 일종으로 방랑을 하며 일을 하는 사람을 호보라고 부른다. 《어떤 작위의 세계》의 배경이 된 샌프란시스코는 호보들에게 성지 같은 곳이라고 정영문은 말한다.


 
소설은 누워서, 번역은 앉아서 번역가 정영문
 
 


 
 
 
 
 
소설은 누워서, 번역은 앉아서 번역가 정영문


존 파울스, 아이작 바셰비스 싱어, 돈 덜릴로, 어윈 쇼, 레이먼드 카버, 헨리 밀러, 니컬슨 베이커, 이창래. 모두 그가 번역했던 작가들이다. 그는 그중에 헨리 밀러의 《북회귀선》, 니컬슨 베이커의 《페르마타》, 존 파울스의 《에보니 타워》를 인상적인 작품으로 꼽았다. 《북회귀선》은 포르노그래피에 가까운 파격적인 성적 내용을 시적인 언어로 묘사한 작품이고, 니컬슨 베이커는 미국 문단에서 가장 괴짜로 알려진 상상력이 기발한 작가라고 평했다. 《에보니 타워》는 섬세한 표현력으로 ‘포착하기 힘든 것을 포착하려 한 놀라운 작품’이라고 말했다.

 

그는 한때 번역을 중단하다시피 했었다. 건강이 좋지 않았고, 삶의 의욕이 거의 없던 시기였다. 소설은 종종 썼지만 번역을 하기는 힘들었다. 왜? ‘번역은 거의 노동’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완전히 다른 것 같아요. 번역은 꼼짝없이 자리를 지키고 앉아서 해야 하는 일이거든요.” 그렇다면 소설은? “소설은 누워서 써요. 거의 누워서 생각을 하고 메모를 하죠. 앉아서 작업하는 것은 정말 얼마 안되는 시간이라.” 정영문은 이제 자신이 즐길 수 있는 작품을 번역하고 싶다고 했다.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시로 알려진 《재버워키Jabberwocky》나 미국 소설가 리처드 브라우티건 시집들 같은. 기묘한 동화나 독특한 예술가의 전기 같은 것도 찾고 있다. 누워서 소설을 쓰고, 앉아서 번역을 하는 정영문의 다음 작품은 어떤 것이 될까.



정영문
1965년 함양 출생.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했다. 1993년부터 번역을 하기 시작했고 1996년 장편소설 《겨우 존재하는 인간》으로 등단했다. 번역서로 레이먼드 카버의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헨리 밀러의 《북회귀선》, 니컬슨 베이커의 《페르마타》, 존 파울스의 《에보니 타워》, 메이르 샬레브의 《내 러시아 할머니의 미제 진공 청소기》 등이 있다. 소설집 《검은 이야기 사슬》, 《목신의 어떤 오후》 등과 장편 소설 《달에 홀린 광대》, 《바셀린 붓다》, 《어떤 작위의 세계》 등이 있다. 동서문학상, 한무숙문학상, 동인문학상, 대산문학상 수상. 2013년 현재 프랑스 엑상프로방스에서 체류 중.
 
글_ 한사유 / 사진_ 김병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