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에 대한 낭만적 환상은 오늘의 역경을 딛고 일어서게 하는 용기를 주기도 하지만 오늘의 문제를 직시하지 못하게 만들어 더 큰 화를 초래하기도 합니다. 대학 생활에 낭만적 기대를 크게 품은 신입생일수록 대학에 적응하기 힘들고 결혼 생활에 기대가 높았던 부부일수록 갈등의 골이 깊은 법입니다.
사실 낭만적 기대나 환상이 없다면 사람들은 연애나 결혼을 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누군가를 새로 만나거나 새로운 일을 도모할 가능성도 줄어들겠지요. 또 사회가 변화하리라는 희망을 갖지 못한 채 무기력하게 주저앉을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현실의 문제가 무엇인지 제대로 직면하고 그 문제에 대처할 때 비로소 난관을 뚫고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올 가능성이 생깁니다. 낭만적 환상이 심어 준 거짓 희망에 사로잡혀 캄캄한 터널 속을 정신없이 헤매다 보면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빠져드는 좌절만이 지속됩니다. 충족되지 않는 기대와 반복되는 좌절은 다시 일어설 기력조차 없이 사람을 병들게 합니다. 애초에 희망을 품지 않았던 때보다도 더 무기력한 상태에 빠져들고 말지요.
우리가 품는 낭만적 환상의 대부분은 관계에 관한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은 나이가 들어 죽을 때까지 부모와 함께 살겠다고 말하고 어린 시절 친구들은 결혼을 해서도 서로 옆집에 붙어 같이 살자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연인들은 언제나 같은 곳만 바라보면서 죽을 때까지 변치 않을 것을 약속하고 이제 막 결혼한 신랑 신부는 인생이 끝나는 날까지 서로를 신뢰하고 지지하는 든든한 벗이 되겠다고 맹세합니다.
그러나 시간은 모든 것을 변화시킵니다. 세월이 흘러가는 동안 사람의 마음도, 관계의 양상도 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의지의 문제가 아닙니다. 유연한 마음을 품은 이라면 애초의 기대와 달라져도 그 달라진 현재에 적응하며 새로운 기대와 목표를 만들어 가겠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이라면 달라졌다는 사실에 대한 분노와 좌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거기에 얽매이고 맙니다. 애초의 기대가 좌절되었다는 사실이 자아내는 감정에 사로잡혀 내일을 향해 오늘을 살아갈 동력을 잃고 마는 겁니다.
속담은 오랜 시간 사람들이 경험에서 끌어올린 지혜를 모아 놓은 탓에 언제나 우리에게 현실을 직시하는 조언을 건넵니다. 속담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문제적 관계의 주인공은 ‘며느리’입니다. 자신이 낳아 기른 자식이 아닌데 직접 낳아 기른 아들보다도 더 가깝게 오랜 세월 지내야 하는 대상이니만큼 탈도 많고 말도 많을 수밖에 없겠지요.
속담은 우리에게 ‘며느리가 딸같이 편하고 정겹다’거나 ‘시부모님이 친부모님처럼 살갑다’는 환상을 심어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시부모님과 며느리 사이가 얼마나 어렵고 갈등 많은 사이인지 알려 주지요. “봄볕은 며느리 쬐이고 가을볕은 딸을 쬐인다”는 속담이나 “며느리 미우면 발뒤축이 달걀 같다고 나무란다”는 속담은 모두 며느리를 향한 ‘다른’ 마음의 자리를 보여 줍니다. 오죽하면 “시어머니 오래 살면 며느리 환갑날 국수 양푼에 빠져 죽는다”는 말이 다 있을까요?
똑같이 ‘남의 자식 데려다 내 자식 삼은 관계’지만 “사위는 백년손님이고, 며느리는 종신 식구다”라는 말처럼 며느리와 사위는 사뭇 다른 식구의 위치에 있습니다. 사위는 잘 대접해야 할 손님이고 며느리는 친근하고도 만만한 식구인 것입니다. 그래서 북한 속담에 “사위와 토리개목화씨를 빼내는 기구는 먹어도 안 먹는다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배불리 먹었는데도 자꾸 더 먹으라고 부추기는 손님이 바로 사위라는 뜻이지요. “사위가 무던하면 개구유를 씻는다”는데 사실 개구유를 씻는 일쯤이야 며느리들에게는 일상입니다. 그러나 사위에게는 개구유 한 번 씻는 일이 그의 무던한 성격을 증명하는 일이 됩니다. 그래서 “고양이 덕과 며느리 덕은 알지 못한다”는 옛말이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관계의 진실은 일면적이지 않습니다. 미운 정이 쌓이면 더 무섭다 했던가요? ‘종신 식구’로 지내는 시간만큼 관계 속에 무엇인가 무르익어 가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시아버지 죽으라고 축수했더니 동지섣달 맨발 벗고 물 길을 때 생각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비슷한 말로 “시어머니 죽으라고 축수했더니 보리방아 물 부어 놓고 생각난다”는 속담도 있지요. 살아 계실 때는 시집살이가 고달파 어서 돌아가셨으면 하는 마음도 품어 봤지만 막상 돌아가신 후에는 추운 날씨에 맨발로 물 긷다 말고 문득 짚신 삼아 주던 시아버지가 생각나는 것이 인정人情의 오묘한 이치가 아니겠습니까? 아웅다웅하고 티격태격하던 사이에 연민과 인정도 그만큼 쌓여 돌아가신 후에 함께 보리방아 찧던 추억을 떠올리는 것, 그것이 바로 며느리의 마음입니다.
사람들 사이에는 우리가 쉽사리 가늠할 수 없는 무수한 차이들이 있습니다. 또한 사람들이 선 자리마다 그 자리가 만들어 내는 서로 다른 입장들이 존재하지요. 서로 다른 입장과 서로 다른 차이를 가만히 보고 그대로 인정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누군가와 오래도록 함께 하길 원한다면, 사랑이나 우정의 관계가 오래 지속되길 원한다면 이 쉽지 않은 일을 실천하기 위해 무던히 노력하는 일 외에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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