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여행

농인의 모어, 수화 - 사단법인 한국농아인협회 변승일 회장

이산저산구름 2013. 4. 10. 12:53

수화는 어느 나라에서도 통할 수 있는 언어인가요?

수화는 나라마다 고유한 정서에 맞는 표현 방식이 따로 있습니다. 미국 수화는 표정이 발달한 반면 동작은 차분합니다. 중국 수화에는 딱딱한 표현이 많아요. 우리나라나 일본 수화는 감정을 잘 표현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고맙습니다'라는 표현을 예로 들겠습니다. 우리나라는 양 손바닥을 펼친 후 한 손은 바닥에 두고 다른 한 손은 세워서 손등을 두 번 두드립니다. 미국은 입맞춤을 공중에 보내듯, 손바닥을 입술에 대었다 떼어 냅니다. 중국은 볼펜을 누르듯, 세로로 주먹을 쥐고 엄지손가락을 누릅니다. 일본은 우리나라와 같은 기본 자세에서 세운 손을 손등에서 위로 들어올리지요. 우리나라와 일본이 비슷한 구석이 있긴 하지만, 이렇게 나라별로 다 다릅니다.

개인적인 경험담입니다만, 스페인 여행 중에 그 나라의 농인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서로 사용하는 수화가 달라 소통을 하는 데 애를 먹었습니다. 하지만 가벼운 의사소통은 일반적인 몸짓 언어보디랭귀지를 통해 가능했죠. 이처럼 수화가 만국 공통어로 쓰일 것이라는 생각은 대단한 오해입니다. 다만 우리는 청인보다 사물의 특징을 동작으로 표현하는 능력이 발달하여 유리한 것뿐입니다.

한국 수화와 일본 수화는 참 유사하네요. 일부 학자들은 일제 강점기 때 특수 교육이 유입되는 과정에서 수화의 체계가 잡혔다는 주장을 하는데요. 그에 대한 생각은 어떠십니까?

일부 학자들은 한국 수화가 일본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제 생각은 그렇지 않습니다. 수화는 농인의 탄생과 동시에 존재했다고 봅니다. 일제 강점기 이전에도 농인은 존재했고 가정에서는 홈사인home sign으로, 농인들끼리는 수화로 대화를 나누었겠지요. 일제 강점기에 지금의 특수 학교라고 할 수 있는 제생원에 일본 수화가 일부 유입되기는 하였으나 일본 수화가 한국 수화의 근간이라는 일부 주장은 사실과 다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 수화 표현을 예로 들어 볼까요? 현재는 검지를 이용해 코 옆 부분을 스치고 엄지를 펼치며 '아버지'를 표현하고, 같은 방식으로 새끼손가락을 펼치며 '어머니'를 표현합니다. 하지만 과거에는 아버지를 상투 모양으로, 어머니를 비녀 꽂은 모양으로 표현했지요. '상투'와 '비녀'는 우리나라만이 가지고 있는 문화입니다. 이를 수화로 표현했다는 것은 우리나라만의 수화가 분명히 존재했다는 것입니다.



서울말과 지역 방언이 구분되는 것처럼, 수화도 서울 수화와 지역별 수화가 서로 차이를 보인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저는 전북 익산 출신입니다. 서울에 상경해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다 갑자기 오줌이 마려워서 수화로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했어요. 그러자 친구들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그러지 말라고 창피해했어요.웃음 전북에서는 검지를 아랫도리에 대고 그대로 소변의 물줄기를 표현합니다. 하지만 서울에서는 엄지, 검지, 중지를 펴서 지문자 'ㅈ'을 만들어 흔들더라고요.

또, 한국어에 신조어가 있듯 한국 수화에도 신조어 개념의 표현이 있습니다. '스마트폰', '카카오톡'과 같은 신조어가 만들어져 농인들 사이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고, 젊은 친구들은 'ㅋㅋㅋ'의 웃음 짓는 모양을 손가락으로 표현하기도 해요. 제가 신세대가 아니라서 자세히 모르긴 합니다만.웃음

한국 수화는 귀가 들리지 않는 사람도 이해할 수 있게, 한국어 문법을 바탕으로 만들어 낸 표현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실제 한국 수화는 한국어와 차이가 많다고 들었습니다.

농인에게 수화는 청인들의 음성어 못지않은 언어입니다. 한국어와 한국 수화는 별개죠. 가장 큰 차이는 음성 언어인 한국어는 의미 전달 요소들이 음성을 통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배열되지만, 시각 언어인 수화는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를 시각화해 공간에 표현한다는 것입니다.

부사어 표현을 예로 들겠습니다. '비행기가 날다'를 '높게 날다', '낮게 날다', '흔들리며 날다'로 표현하기 위해선 '비행기가 날다'라는 수화 동작의 높낮이에 차이를 두거나 위아래로 흔들며 공간적으로 표현합니다. 때론 표정이 부사어 기능을 하기도 합니다. '예쁘다'는 표현을 할 때 어떤 표정을 짓느냐에 따라 '몹시 예쁘다', '그저 그렇다' 등의 느낌을 나타냅니다.

또 수화에는 한국어에서 발견되지 않는 '동시성'이 존재합니다. 한국어에서 '산에 오른다'는 '산'이라는 명사 다음에 '오른다'라는 동사를 붙여 주면 뜻이 통하죠? 그러나 수화에서는 '산'과 '오르다'라는 표현이 동시에 이루어집니다. 어느 것이 먼저랄 것이 없죠. '버스를 타다'라는 문장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한국농아인협회에서는 어떤 일을 하나요?

한국농아인협회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우리나라 수화의 언어적 지위를 확보하고 계승하는 일입니다. 이를 위해 ‘한국수화기본법가칭' 제정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한국농아방송을 통해 한국 수화를 근간으로 하는 영상물을 제작하고 있으며, 각종 수화 관련 서적을 편찬하고 음성 언어에서 쓰이는 특정 분야의 전문 용어를 수화로 만들어 소통에 불편함이 없도록 노력하고 있지요. 수화에 대한 청인들의 인식 개선도 우리가 해결해야 할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4월 20일 '장애인의 날'을 맞아 서울 종로에서 번개모임플래시몹 행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농인의 언어인 수화를 보여드리고, 시민들에게 직접 가르쳐주며 전파할 예정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청인도 알고 있으면 도움이 될만한 수화를 가르쳐주세요.

아무래도 인사법 정도는 알아 두면 좋을 것 같습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라는 표현은 주먹 쥔 상태로 검지를 편 양 손을 어깨너비만큼 벌렸다가 양 검지가 만나도록 모읍니다. 여기까지 만났다는 표현이 되겠죠. 다음으로는 살짝 구부린 손바닥이 가슴에 닿게 펼친 후, 위아래로 엇갈리게 두 번 정도 움직이면 반갑다는 뜻이 됩니다. '사랑합니다'는 한 손은 세로로 주먹을 쥐고 다른 손은 그 위에 펼친 후, 맷돌을 돌리듯 원을 그려 주면 됩니다. 어렵지 않지요?


그를 만나기 전까지 '수화가 언어'라는 명제가 무슨 뜻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입으로 소리 내는 한국어 그대로를 단지 손으로 표현하는 것뿐이라 여긴 탓이다. '수화'는 독립적인 체계를 가진 하나의 언어이다. 국어의 보조 수단도, 극복해야 할 장애도 아니다. '우리를 소수 민족으로 봐 달라'는 그의 말이 뇌리에 남는다. 이번 장애인의 날 행사를 계기로 우리가 몰랐던, 우리 안의 소수 민족을 이해하는 이가 많아지기를 기대한다.

변승일 사단 법인 한국농아인협회장
전북농아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장애인개발원 이사, 한국장애인고용촉진공단 이사, 장애인차별금지법제정 추진연대 상임공동대표 등을
역임했으며 한국청각장애인예술협회장, 한국장애인단체 총연맹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1997년 수화 잡지 <아름다운 손짓>을 창간하고
수화의 홍보에 힘썼고 한국표준수화추진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한국수화기본법 제정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국민훈장 모란상, 문화관광부 장관상, 보건사회부 장관상 등을 수상하였다.                          
글_황인선/수화 통역 및 감수_김현철/사진_김병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