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여행

조용한 걸음으로 우리말을 일구다 - 문학평론가 김병익

이산저산구름 2013. 3. 27. 12:47
"신문이나 인터넷을 보면 우리가 알 수 없는 말들이 막 튀어나와요. '멘붕' 같은 말이 그렇죠." 어느 때보다도 우리말이 급격하게 변하고 있음을 그는 우려했다. "어차피 언어라는 게 생활과 함께 움직이는 거긴 하지만, 너무 성급하게 너무 아름답지 않게 변해 가는 게 유감스럽죠." 산업화와 정보 통신 기술, 그로부터 파생한 기호와 약어들의 영향이 크지 않겠는가라는 추측을 했다. 그리고 제1 외국어인 영어가 '국어보다 더 중요한 과목'이 되면서 많은 이들이 한국어 문장마저도 영어식 어법으로 쓰고 있다고 지적했다. "우리말에는 수동태가 그렇게 빈번히 쓰이지 않거든요. '보인다'가 있는데 '보여진다'라고 쓴다든가 '된다' 대신 '되어진다'고 쓴다든가 하는. 이중 수동태를 쓰게 되는 거죠." '보인다'와 '보여진다'가 다른 뜻을 품을 수도 있지 않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계속 그렇게 쓰다 보니까 어떤 효용성이 생기는 것 같아요. 부가적인 효과도 태어나데요. 리듬이 산다든가 강조 효과가 생긴다든가." 그러면서, 언어라는 것은 입말을 따라가기 마련이지 규칙을 따라가는 것은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김병익은 글을 읽고, 글을 쓰고, 다시 글을 읽는 사람이다. 이 일을 50년 넘게 직업적으로 해 왔다. 동아일보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계간지 《문학과 지성》현재의 《문학과 사회》과 출판사 문학과지성사를 만든 사람이고, 번역가이기도 하고, 문학 교수였으며, 초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이었고, 문학평론가다. 책과 글에 대해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전문적인 일을 한 셈이다. 그는 무척 쉬운데도 가볍다는 느낌을 주지 않고, 글쓴이의 품위 있는 성정까지 느끼게 하는 맑고 단단한 문체를 가졌다. 《열림과 일굼》1991이라는 순우리말 제목의 평론집을 낸 사람처럼, 한국어의 몸피를 아름답게 가꿔 왔다. 문학과지성사의 사장직에서 물러날 때, 그러고 나서 한참 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을 그만둘 때 그는 은퇴를 선언했다. 두 번이나 은퇴를 밝힌 그는 여전히 은퇴하지 못하고 있다. '의무에서 벗어나는 삶'을 희망했다고 말하지만, 여전히 쉼 없이 책들을 읽고 틈틈이 글을 쓴다.
그는 초등학교 1학년 2학기 때 한글 교과서를 지급받는다. 그러니까 해방을 맞은 것이다. "우리 세대를 첫 한글 세대라고 하지만 한자를 많이 병용하던 시대였어요. 이어령 선생의 '선언 문체'와 장용학 선생의 '실존 문체'가 같이 있는 세대죠. 나도 그랬고, 김현 초기 문체가 이어령 문체예요." 김현은 그의 친구이자 그와 함께 문학과지성사를 일군, 이른바 '문지 4K김병익, 김현, 김치수, 김주연'의 일원인 문학평론가다. 김현은 1990년에 작고했다. 김병익은 자신이나 김현이나 1980년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자신만의 문체가 생긴 것 같다고 말한다. "요즘 젊은 친구들은 글을 참 잘 써요. 논리적이고 지적이고, 그런데 참 어려워요. 인간적인 체취가 덜 느껴진달까요. 멋 부리지 않은 글이 좋아요. <좋은 생각>에 실리는 아마추어의 글들처럼요. 나이 때문일까요? '맨살의 글' 같은 게 편하게 다가와요."
거의 40권에 가까운 저서 중에서 어떤 책이 특히 각별하게 느껴지는지 물었다. 《지성과 반지성》1970은 첫 책이어서, 《한국 문단사》1973는 '문인들의 역사'로 한국의 근대사를 보여 줄 수 있어서, 《상황과 상상력》1979은 치열한 문학 논쟁 시대의 산물이어서, 《페루에는 페루 사람들이 산다》1997는 '후진국적 여행'을 좋아하는 그의, 역사와 자연과 인간에 대한 인상이 담긴 산문집이서 그렇다는 답변을 받았다. '문학적 의무'에서 벗어났다고 스스로 말하는 그는 요즘 다시 고전을 읽기 시작했다.최근 도스토옙스키의 전작을 읽었다는 그는 《악령》과 《백치》에 대해 '미치게 좋다'라고 말했다 책을 읽으면서 책의 여백에 적는 글을 마지네일리아marginalia라 부른다는 것을 그의 글을 읽고 알았다. 이 마지네일리아의 결실인 새 책이 곧 나온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하자 그는 쑥스러워했다. 그 책의 제목은 《조용한 걸음으로》이다. 마종기 시인이 지어 줬다는 이 제목에서 '으로'라는 조사가 참 절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의 주인과 닮은 그 걸음이 독자들까지 어딘가로 계속 옮겨 놓게 할 테니.
김병익

1938년 상주 출생. 동아일보 문화부 기자, 한국기자협회장, 《문학과 지성》 창간, 문학과지성사 창사, 인하대 국문과 초빙 교수,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초대 위원장을 지냈고 현재 문학과지성사 상임고문으로 있다. 저서로는 《상황과 상상력》, 《열림과 일굼》,
《새로운 글쓰기와 문학의 진정성》, 《그래도 문학이 있어야 할 이유》, 《이해와 공감》등의 비평집과 《한국 문단사》, 《지식인
됨의 괴로움》, 《페루에는 페루 사람들이 산다》 등의 산문집, 그리고 《현대 프랑스 지성사》, 《마르크시즘과 모더니즘》,
《막다른 길》 등의 역서가 있다. 대한민국문학상, 대한민국문화상, 팔봉비평상, 대산문학상 등 수상. 

글_ 한사유
문학을 전공하고 문학 편집자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