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안동 문화

퇴계 이황 필적, 사백 년 만에 입궐하다

이산저산구름 2012. 12. 17. 12:05

 

퇴계 이황 필적, 사백 년 만에 입궐하다
권벌의 종손가에 소장된 이황서첩
"다른 사람을 통해 네가 산속 절에 있다는 것을 들었다. 세월은 흐르는 물과 같은 것이니 천번 만번 노력하여라. 내가 보기에 너는 요즘 너무 느긋하게 지내고 있으니 학업이 진보하지 못함이 이전보다는 갑절이나 될 것이다. 걱정스러운 마음을 놓을 수가 없구나." 퇴계 이황이 손자인 안도(安道)에게 보낸 편지글이다. 자식을 걱정하는 마음은 사백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것 같다. 국립민속박물관이 한국국학진흥원과 협력해 박물관 상설전시실 제3관 '가족' 코너를 퇴계 이황 소장 자료를 중심으로 꾸미고 재개관했다. 한국인의 가족 문화를 주제로 한 전시에 명망 있는 유학자면서 한 집안의 가장이기도 했던 이황의 가족사를 통해 그 안에 담긴 인간적인 삶을 엿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전시실에서는 퇴계의 친필을 확인할 수 있는 보물 제548-2호 '진성이씨세계 선조유묵11'(眞城李氏世系 先祖遺墨十一)과 퇴계의 강학 장소인 도산서당 현판, 퇴계가 아들 이준과 손자 이안도에게 보낸 편지들을 엮은 '선조유묵가서'(先祖遺墨家書) 등을 만나볼 수 있다. 이황은 학자로서 글을 남겼을 뿐 아니라 아버지로서, 또 할아버지로서 후손들에게 편지를 썼고 이것이 후손들에게 대대로 전해졌다. '진성 이씨'는 퇴계의 가계이며, '가서`는 퇴계가 자제들에게 인간의 도리를 지킬 것을 당부하면서 훈계한 편지들을 모은 것이다. 자식 건강부터 됨됨이, 교육에 이르기까지 세심하게 조언을 남긴 편지에는 삶을 대하는 그의 태도가 고스란히 담겨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그는 증손자에게 줄 젖이 모자라니 젖 먹일 노비를 유모로 보내 달라는 손자 요청에 "지금 들으니 젖 먹일 종이 서너 달밖에 되지 않은 제 자식을 버리고 서울로 올라가야 한다고 하는구나" 라며 '근사록'에서는 이러한 일에 대해 이르기를 '남의 아들을 죽이고서 자기 아들을 살리는 것은 매우 불가하다'고 하였는데, 지금 이 일이 꼭 이와 같을 것이니 어찌하리오? 라며 두세 달 후에 종을 보내겠다고 답한다. 그는 학문에 정진하라는 훈계뿐 아니라 이와 같이 선비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쳤고 자신이 학문에서 익힌 내용을 실생활에서 스스로 실천하는 자세를 보인 것이다.
이황필적-퇴도선생필법(退陶先生筆法) 및 퇴도선생유첩(退陶先生遺帖), 보물 제548호
전시에서는 퇴계 본인 이야기를 통해 당시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글도 있다. 추위를 많이 타던 퇴계는 "양털 가죽옷 한 벌을 가지고 20년 동안 입었더니 낡아서 모두 해졌다"며 "틀림없이 무명 몇 필 값은 할 것이라 부담이 되는데, 그래도 추위를 생각하면 샀으면 하는구나"라고 편지를 썼다. 요즘 같은 기습한파에 밍크코트가 있었으면 하는 내 마음을 대신해주는 것 같기도 하고, 자식에게 부담이 될 새라 에둘러 말하는 퇴계의 모습에서 우리네 부모님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하는 대목이다.
퇴계의 유물이 서울로 올라온 것은 200년 만이라고 한다. 자료들은 대부분 처음으로 안동을 떠나 서울에서 전시되는 것들인 것이다. 민속박물관은 "퇴계가 1569년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인 예안으로 낙향한 후 조선 정조대 퇴계의 종손 이지순이 영유현령으로 부임하면서 퇴계의 위패를 모시고 상경해 성균관에서 제사를 지낸 이래 퇴계 관련 유물이 서울에 올라온 것은 200년 만이다" 라고 설명했다. "퇴계는 경복궁의 각종 현판 글씨를 쓰기도 했으므로, 경복궁 경내에 있는 민속박물관에서 퇴계 이황의 유물이 전시된다는 것은 퇴계 자신으로 봐서도 443년 만의 입궐"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다.
조선시대의 대 철학자 퇴계 이황은 조선시대 중기 16세기의 뛰어난 서예가이기도 했다. 그는 원나라 조맹부 글씨체인 ′송설체(松雪體)′의 영향으로 굳어진 조선의 글씨 풍으로부터 새로운 변화를 위해 노력했다. 물론 이 시기의 서예가답게 중국의 서성 왕희지의 글씨에 대해 깊이 연구하기도 했다. 그는 송설체의 필치와 조형성을 완전히 버리지 않고 여기에 왕희지 해서(楷書)의 형태적 특징을 넣어 자신의 글씨 스타일을 이룬 것이다. '경간당시첩'의 글씨에서 보듯, 이황의 글씨는 해서, 행초서 모두 대체로 좌우로 조금 넓은 편이며, 왕희지 해서체의 특징을 이어받아 짜임새가 성글어 매우 단아한 느낌을 준다. 이 시첩은 해서, 행서, 초서 등 그가 즐겨 쓰던 글씨가 모두 담겨있어, 글씨 면들이 부분적으로 없어진 상태이긴 하나 그의 글씨에 대한 면모를 골고루 볼 수 있다.
퇴계 이황 필 '경간당시첩(敬簡堂詩帖)'/안성의 수령으로 부임한 고향 친구에게 보낸 안부편지
보물 제 548호인 퇴도선생필법 및 퇴도선생유첩은 조선 명종 11년(1556)에 퇴계 이황이 그의 제자인 송암 권호문에게 글씨체본으로 써준 것이다. 대, 중, 소자의 크고 작은 체와 해서, 행서, 초서의 각 체를 따로 구분하여 썼다. 이것은 표지를 제외하고 21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해서체가 13첩, 행서체가 14첩, 작은 해서가 6면, 작은 초서가 4면, 중간 초서가 2면, 또 행서가 3행이고 그 다음에 2장이 떨어져 나가고 끝에 또 작은 해서 1첩이 있다. 맨 뒷장에 '낙인구서첩'이란 제목 아래에 당시(唐詩) 9행이 있으나 퇴계의 글씨가 아닌 듯하다. 『퇴계선생유첩』은 2책으로 장첩되어 있는데, 이것은 모두 퇴계선생이 권호문에게 보낸 편지를 모아 놓은 것이다.
선조유묵첩은 퇴계가 자손에게 보낸 서한을 비롯하여 자신의 시문 원고, 타인의 저작을 베낀 것, 당송의 시를 서예적으로 쓴 것 등 젊어서부터 노년에 이르는 여러 필적을 모은 것으로 표지에 '선조유묵(先祖遺墨)'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표지 숫자가 "卄三"까지 되어 있어 원래 23첩 이상이었을 것이나, 현재는 18첩만 전한다. 각 면 왼쪽 상단에 장수(張數)가 표시되어 있다. 제13첩 말미에 1565년에 손자 안도에게 여러 잠명(箴銘)을 써주었다는 이황의 글이 실려 있듯이 곳곳에 '이안도장(李安道章)'이란 인영(印影)이 있으며, 제12첩과 제18첩 말미에 9대손 이지순(李志淳)의 발문이 있다. '유묵'은 필적이 가장 다양하고 내용이 교훈적이며 서예적으로도 뛰어난 글씨가 많다.
퇴계의 제자 중 학봉 김성일은 '선생께서 산과 계곡을 거닐 때면 마치 신선 같았다'는 말은 했다. 그러나 유홍준은 '퇴계는 평생에 처사가 되기를 원하여 죽을 때 영정에 벼슬이름을 적지 말고 처사라고 써주기를 희망했다지만, 그는 처사 지망생이었지 처사는 아니었다' 라는 평을 했다. 당대에 이미 그의 제자들은 경상좌도와 영남학파를 형성해 큰 영향력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세운 도산 서원에서는 많은 학생들이 배출되었고, 동인과 남인, 북인 학자와 정치인들을 양성한 요람으로 성역화 되기도 했다. 그를 따르는 제자로는 유성룡, 김성일, 이산해 등 260여 명이나 된다.

 

글 장진영 jyj3347@hanmail. net
2012. 12.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