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여행

기억이 소멸되는 곳 정동진-정녕

이산저산구름 2012. 10. 31. 14:10

해사한 꽃과 벤치는 온데간데없고, 두 칸 열차도 더 이상 지나지 않으며 혼자 차지할 모래사장도 사라졌다. 10년 사이에 정동진은 유원지가 되어 있었다. 김영남 시인의 시 <정동진역>에 있던 소나무만 초라한 상징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그곳에서 <헌화가> 속 수로 부인은 드라마 <모래시계>의 여배우 고현정으로 대치되어 가고 있는 중이다.
정동에는 등명락가사燈明洛伽寺라는 사찰이 있다. 십 대 초반의 한여름, 나는 그 사찰에서 한 달을 지냈다. 남의 살과 소금기가 빠진 절 밥은 절망적이었고, 설상가상 해변은 텅 비어 있었다. 가끔 오가는 해안선 초병들과 영악한 고양이 두 마리가 전부였다. 심지어는 '해안선을 잡아넣고 끓이는 라면집’ 하나 없었다. 그 시절, 신년 해맞이를 위해 정동진을 찾는 사람은 없었다.
무한한 공간과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고요만 존재했다. 파도 소리가 산 중턱 너머까지 들린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정동진에서 옥계로 이어지는 헌화로 절벽에 부딪혀 부서지는 파도 소리는 바람을 타고 멀리도 날아와 내 꿈자리를 장식했었다.
험한 길을 걷고 까마득한 절벽을 위태롭게 내려서야 비로소 해변에 다다르는 길. <헌화가> 속 이름 모를 노옹이 수로 부인에게 꽃을 꺾어 바치기 위해 올랐다고 전해지는 그 절벽에 올랐다. 글이란 참 끈질긴 기억이다. 신라 시대에 살았을 누군가와 내가 같은 장소에 서 있었다는 사실에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紫布岩乎邊希
執音乎手毋牛放敎遣
吾肹不喩慚肹伊賜等
花肹折叱可獻乎理音如
붉은 빛 바윗 가에
잡고 있는 손의 암소를 놓게 하시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실 것 같으면
꽃을 꺾어 바치겠습니다


작자 미상_ <헌화가>
강원도의 도지사 격인 강릉 태수 순정공 앞에서 그의 부인 수로에게 꽃을 바친 노옹의 기개가 대단하다 할까? 아니면 신분을 떠나 자유연애가 당당했던 신라의 풍속이 부럽다 해야 할까? <헌화가>를 두고 해석이 분분하지만 나는 그냥 사랑을 위해 모험을 감수한 그 노옹의 솔직함이 부럽다.
내가 잡고 있는 암소를 놓고 꽃을 바치겠다는 생각. 내 가진 것을 내려 놓고 사랑의 모험을 택하겠다는 정서가 이때도 통했던 모양이다. 결국 우린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모래시계>와 <헌화가>는 동등하다.
"정말 무슨 난린지. 그러니까 서울 오랑캐 보고 놀랐다는 얘기가 안 나올 수도 없는 거고. 여기 사람들 눈으로 보면 이렇게 와야 할 이유가 없거든. 말로는 바다가 어떻고 해돋이가 어떻고 하지만 전에 없던 바다와 해가 새로 생긴 것도 아니고 말이지. 가만히 보면 여행이라기보단 꼭 무슨 집단 신드롬에 빠져 있는 거 같아. 여기 안 왔다 가면 누가 죽인다고 한 것처럼 몰려드는 게. 막상 와서는 제대로 둘러보지도 않고 뭐 이래? 하고 실망하는 사람들도 많고."

이순원_《그대 정동진에 가면》중에서
정동진역이 전부인 줄 아는 객지 촌놈의 얄팍함을 비웃으며, 작가 이순원은 이건 내가 아는 곳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던가 보다. 혹은 너희들이 보고 있는 곳은 정동이 아니라고 소리라도 치고 싶었던 것일까? 소설 속에서 주인공 박석하는 마음속의 연인 김미연을 이곳에서 만난다. 그가 알고 있던 정동과 현실 속의 정동진만큼이나 김미연의 현재 역시 달랐다. 언제나처럼 사랑은 기억에 의해 왜곡되고, 공간도 마찬가지다. 우린 기억 속에 살 뿐이다.
"하긴 여기 오는 손님들 8, 90%는 현실 속의 정동진을 찾아오는 손님들이 아닐 거다. 자기 머릿속에 어떤 이미지로 그리고 있는 실제 여기와는 또 다른 비누 방울 속의 정동진을 찾아오는 손님들이지."

이순원_《그대 정동진에 가면》중에서
바다는 봄에 제일 아름답고 그다음이 가을이다. 선선한 가을바람을 맞으며 맨발로 정동진 해변을 걷는다. 파도가 내 발가락 사이의 모래를 파내 간다. 기분이 좋다. 주말 기차가 수많은 청춘을 쏟아 내고는 이내 사라진다. 이제 내가 알던 정동진, 아니 정동은 여기 없다. 그러나 서운하지는 않다.

오는 길에 잠시 들렀던 등명락가사 역시 이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내가 묵었던 암자는 헐렸고 대웅전은 개축되어 제법 규모가 있는 절이 되었다. 서운했지만 슬프진 않다. 우리는 다름을 기억한다. 이것도 정동의 모습이고 지금 이대로 기억해야만 하는 연인도 언제나 있기 마련이다.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 그들도 이곳으로 돌아와 과거의 그때와 다르다 말하고, 추억에 잠길 것이다. 사실 변치 않을 것은 바다와 하늘뿐, 그것만이 확고하다. 모든 기억은 소멸된다.
푸른 깃발로 열차를 세우는 역사驛舍,
같은 그녀를 만날 수 있다.


김영남_《정동진역》민음의 시 87_민음사
김영남 시인의 말처럼 소멸하기 전까지 나는 이곳에서 항상 그녀를 만날 수 있다. 정동은 그냥 있어 주기만 하면 그로써 족한 것이었다. 언젠가 나의 기억은 누군가의 기억으로 대체될 뿐이니까.



글·사진_ 정녕

인용 문헌

《정동진역》, 김영남 저, 민음사.
《그대 정동진에 가면》, 이순원 저, 민음사. 《향가신해독연구》, 강길운 저, 학문사.

정녕
글을 쓰고 사진을 찍는 문화 기획 일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