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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무슨 난린지. 그러니까 서울 오랑캐 보고 놀랐다는 얘기가 안 나올 수도 없는 거고. 여기 사람들 눈으로 보면 이렇게 와야 할 이유가 없거든. 말로는 바다가 어떻고 해돋이가 어떻고 하지만 전에 없던 바다와 해가 새로 생긴 것도 아니고 말이지. 가만히 보면 여행이라기보단 꼭 무슨 집단 신드롬에 빠져 있는 거 같아. 여기 안 왔다 가면 누가 죽인다고 한 것처럼 몰려드는 게. 막상 와서는 제대로 둘러보지도 않고 뭐 이래? 하고 실망하는 사람들도 많고."
이순원_《그대 정동진에 가면》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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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진역이 전부인 줄 아는 객지 촌놈의 얄팍함을 비웃으며, 작가 이순원은 이건 내가 아는 곳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던가 보다. 혹은 너희들이 보고 있는 곳은 정동이 아니라고 소리라도 치고 싶었던 것일까? 소설 속에서 주인공 박석하는 마음속의 연인 김미연을 이곳에서 만난다. 그가 알고 있던 정동과 현실 속의 정동진만큼이나 김미연의 현재 역시 달랐다. 언제나처럼 사랑은 기억에 의해 왜곡되고, 공간도 마찬가지다. 우린 기억 속에 살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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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여기 오는 손님들 8, 90%는 현실 속의 정동진을 찾아오는 손님들이 아닐 거다. 자기 머릿속에 어떤 이미지로 그리고 있는 실제 여기와는 또 다른 비누 방울 속의 정동진을 찾아오는 손님들이지."
이순원_《그대 정동진에 가면》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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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는 봄에 제일 아름답고 그다음이 가을이다. 선선한 가을바람을 맞으며 맨발로 정동진 해변을 걷는다. 파도가 내 발가락 사이의 모래를 파내 간다. 기분이 좋다. 주말 기차가 수많은 청춘을 쏟아 내고는 이내 사라진다. 이제 내가 알던 정동진, 아니 정동은 여기 없다. 그러나 서운하지는 않다.
오는 길에 잠시 들렀던 등명락가사 역시 이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내가 묵었던 암자는 헐렸고 대웅전은 개축되어 제법 규모가 있는 절이 되었다. 서운했지만 슬프진 않다. 우리는 다름을 기억한다. 이것도 정동의 모습이고 지금 이대로 기억해야만 하는 연인도 언제나 있기 마련이다.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 그들도 이곳으로 돌아와 과거의 그때와 다르다 말하고, 추억에 잠길 것이다. 사실 변치 않을 것은 바다와 하늘뿐, 그것만이 확고하다. 모든 기억은 소멸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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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깃발로 열차를 세우는 역사驛舍, 같은 그녀를 만날 수 있다.
김영남_《정동진역》민음의 시 87_민음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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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남 시인의 말처럼 소멸하기 전까지 나는 이곳에서 항상 그녀를 만날 수 있다. 정동은 그냥 있어 주기만 하면 그로써 족한 것이었다. 언젠가 나의 기억은 누군가의 기억으로 대체될 뿐이니까. |
글·사진_ 정녕
인용 문헌 《정동진역》, 김영남 저, 민음사. 《그대 정동진에 가면》, 이순원 저, 민음사. 《향가신해독연구》, 강길운 저, 학문사.
정녕 글을 쓰고 사진을 찍는 문화 기획 일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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