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여행

춘천은 안개다

이산저산구름 2012. 7. 25. 14:58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처음 찾은 춘천. 사람 사는 곳이 물과 이렇게 가까울 수 있다니 신선한 충격이었다. 짝사랑하던 여자 친구와 생전 처음 불꽃놀이를 본 곳이 춘천이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춘천은 나에게 잊지 못할 추억의 장소로 남아 있다. 그때 그 길을 따라 걷는 일, 지금은 부질없는 일일런지도······.
그 후 30년, 춘천에 사통팔달의 고속도로가 놓이고 북한강변을 따라 근사한 드라이브 코스가 생겼다. 그리고 가는 길에 강촌의 출렁다리도 견고한 새 다리로 교체되었다. 그러나 과정이 생략된 여행은 지루하다. 시공간의 개념을 무너뜨린 속도의 쾌감은 흔쾌하지만 여행은 그 여정이 더 찬란한 법 아니겠는가? 효율적이고 편리해졌지만 그 만큼 정취는 사라졌다. '가서' 재미라기보다 '가는' 재미가 더 좋은 춘천은 이제 더 이상 없다.
공지천은 그때나 지금이나 유원지였다. 오리배는 없어졌지만 보트는 있었고, 할 일 없는 한량들 흉내를 내는 뱃놀이가 나쁘지만은 않았다. 지금은 물레길이라고 북한강 중도를 중심으로 카누를 타고 한 바퀴 돌아보는 유흥이 인기가 있다. 물 많은 곳에 딱 어울리는 일이다.
춘천에서 북한강을 바라보기 좋은 곳을 꼽으라면 춘천 문화방송MBC에 있는 카페가 적격이다. 화려하지 않지만 적적하고 높은 곳에 자리해 시야가 넓고 시원하다. 테라스에 가만히 앉아 건너편 선착장의 조정 선수들이 연습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내 지나간 청춘의 흔적이 더 깊게 새겨진다.
사랑아
그대가 떠나고
세상의 모든 길들이 지워진다
나는
아직도 안개 중독자로
공지천을 떠돌고 있다
흐리게 지워지는
풍경 너머 어디쯤
지난날
그대에게 엽서를 보내던
우체국은 매몰되어 있을까
길 없는 허공에서 일어나
길 없는 허공에서 스러지는
안개처럼
그토록 아파하던 나날들도
손금 속에 각인되지 않은 채로
소멸한다
결국 춘천에서는
방황만이 진실한 사랑의 고백이다


이외수 <그리움도 화석이 된다> '안개 중독자' 중
무진의 안개가 감옥이라면 춘천의 안개는 그리움이다.
기성세대들에게는 젊은 시절의 그리움을 잘 묻어 둔 곳, 한때는 있었지만 이제는 없는 그 시간과 장소의 묘비다. 그래서 봄내, 춘천은 애틋한 과거의 기억 속에 있다. 이외수 작가의 이 시는 그래서 감성을 두드린다. 안개 중독자는 도대체 어떤 심성을 가지고 있을까? 춘천에 남겨진 수많은 소멸의 흔적은 안개로 집약된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닌가 보다. 이렇게 춘천과 안개의 조합은 참 절묘하기까지 하다.

채 밝지 않은 새벽, 아침 신문을 가지러 나올 때마다 만나는 것은 안개와 마당 가득 깔린 낙엽이다. 물에 둘러싸인 이 도시의 안개는 유난한 바 있다. 오정희 <살아있음에 대한 노래를> '낙엽을 태우며' 중
안마당에서 당연히 마주치는 안개의 존재는 물을 끼고 살지 않는 이들에게는 매우 유난하다. 어느 날 눈떠 보니 바다가 안마당으로 들어온 것 마냥 신기한 일일 수도 있는데, 그것을 또 아무렇지 않은 듯 담담하게 말하는 것도 춘천에 사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대사다.

춘천을 춘천 명동이 있는 닭갈비 골목 정도로 본다면 섭섭하다. 북쪽 소양호에서 발원한 소양강과 화천에서 시작된 북한강이 춘천에서 만난다. 주변의 파로호와 가평의 청평호까지 넓게 이어져 있는 소양강 수계 전체가 춘천에 속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물이 많고 계곡이 깊으니 안개가 잦을 수밖에 없는 지형이다. 물길을 따라 놀 거리 볼거리가 지천이다.

춘천과 문학을 연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김유정이다. 그의 작품 배경은 대부분 자기가 살던 곳, 춘천이다. <봄봄>의 김봉필은 실제 인물로 노총각 욕필이었고, 배경 역시 실제 실레 마을이었다. 지금 이곳에는 김유정 문학관이 건립되어 사람들이 자주 찾는 명소가 되었다.

"장인님, 이젠 저······" 내가 이렇게 뒷통수를 긁고 나힛가 찻으니 성예를 시켜줘야 하지 않겠느냐 하면 대답이 늘 "이 자식아, 성예구 뭐구 미처 자라야지!"하고 만다. 김유정 <봄봄> 중

구어적인 그의 문체 속에는 생활과 고난이 그대로 묻어 있어 거칠고 거침없다. 가리고 자시고 할 것 없이 있는 그대로 서로에게 침처럼 내뱉는 말들이 한결같이 뻔뻔하고 상스럽지만 공격적이지 않다. 딱 '강원도스럽지' 아니한가?
춘천은 이름 자체가 '바로 그곳'이다. 아직도 가 보고 싶고 가서 살고 싶어 지고 사랑해 마지않을 꿈속의 여인이 살고 있을 것만 같은 바로 그곳······ 고향 이상이고 외가 마을 이상이고 그립고 안타까운 가슴 조용히 설레곤 하는 그곳이다. 유안진 <춘천은 가을도 봄이지> 중

'고향 이상이고 외가 마을 이상'일 정도로 춘천 구석구석을 소담히 기억에 담을 사람이 아니더라도 유안진이 앓고 있는 춘천 사랑에 공감하고도 남음이 있다. 가 있어도 또 가고 싶을 만큼, 만나고 있어도 또 만나고 싶을 만큼 춘천은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추억의 장소다.

늦가을 안개로 촉촉한 소양강변을 따라 걷고 싶다. 안개에 젖은 낙엽에서 신선한 부패의 냄새가 나고 겨울을 예보하는 차가운 물살을 따라 흐르다 보면 뉘라도 상념에 빠지게 될 터이다. 지나간 젊은 사랑과 얼마 남지 않은 미래에 대한 안타까움이 교차하는 지점, 그곳이 안개 낀 춘천이니까.
글_ 정녕 / 사진_ 이성순, 이명규

인용 문헌
<그리움도 화석이 된다> 이외수 저, 2003년 발행
<살아있음에 대한 노래를> 오정희 저, 1999년 발행
<봄봄> 김유정 저
<춘천은 가을도 봄이지> 유안진 작

정녕

글을 쓰고 사진을 찍는 문화 기획 일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