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고 싶은 글

일제고사에 대한 몇 가지 생각

이산저산구름 2012. 6. 27. 10:29

*오늘부터 전국적으로 국가수준의 학업성취도평가, 즉 일제고사가 시행됩니다.

지난 주에 우리 학교 어느 젊은 교사가 일제고사를 왜 폐지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학내망으로 쪽지를 날렸기에 그에 대한 답으로 써본 글입니다.

 

 

일제고사에 대한 몇 가지 생각

 

박일환

 

 교과부가 일제고사를 시행하는 이유가 뭘까요? 여러 가지 이유를 대고 있지만, 결국 학력저하 문제가 심각하기 때문에 교육을 더 많이 시켜야 한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나아가 학교별, 지역별로 경쟁을 시켜 더 많이, 더 잘 가르치는 분위기를 만들겠다는 거겠지요.

 

저는 우선 우리나라 교육문제의 원인 진단부터 잘못됐다고 생각합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 우리나라 교육현실에서 가장 커다란 문제는 학력저하가 아니라 지나친 교육열이라고 봅니다. 우리나라 학생들의 학력이 떨어진다는 건 근거도 없을 뿐더러 오히려 세계적으로 상위권입니다. 국제적인 학력 평가인 피사(PISA)에서 우리나라가 핀란드에 이어 2위를 차지할 정도니까요. 그럼에도 피사의 책임관리자인 베르나르 위고니에가 “한국은 공부를 잘하는 나라지만 결코 부러운 나라는 아닙니다. 한국의 아이들은 우수한 아이들이지만 행복한 아이들은 아닙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어야 하는 이 불편한 진실!

 

저는 지금보다 공부를 덜 시켜야 한다고 봅니다. 서유럽처럼 대학 진학률이 50%가 안 돼야 정상이라는 거지요. 모든 학생들이 공부를 잘하기를, 혹은 열심히 하기를 바라는 건 애초부터 가능하지도 않고, 아이들에 대한 억압과 폭력으로 이어질 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예 공부를 시키지 말자는 얘기는 아닙니다. 당연히 시켜야죠. 하지만 방법론에서 있어서 어떤 시스템을 채택할 것인가 하는 것은 매우 신중하게 접근해야 합니다. 합리성과 효율성, 그리고 현실 적합성 같은 것들을 종합해서 결정해야 합니다.

 

현대사회에서 필요한 건 암기식 지식이 아니라 창의성이라는 건 굳이 빌 게이츠나 스티브 잡스 같은 인물을 들지 않더라도 이미 상식이 된 지 오래입니다. 교과부도 창의성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하긴 하지만, 실제 정책은 거꾸로 가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일제고사입니다. 일제고사는 창의적인 수업 대신 문제풀이식 수업만 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저는 일제고사를 시행해서 성과를 거둔 나라들의 사례를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시행해본 나라들이 문제점 때문에 폐지하고 있다는 얘기는 들어보았지요.

 

일제고사를 시행하는 이유에 대해 교육당국자들은 스스로 선한 의도에서 출발했다고 말하겠지요. 믿기지도 않지만, 설령 믿어준다 해도 그로부터 파생될 수 있는 문제점들을 고려하거나 개선하려는 의지가 없다는 것은 커다란 문제입니다.

지금처럼 학교별, 지역별로 순위를 매기고, 성과상여금까지 연결시키면 ‘묻지 마 경쟁’ 혹은 ‘묻지 마 파행’으로 흐르리라는 건 불을 보듯 뻔한 일입니다. 실제 그렇게 진행이 되고 있잖아요. 지금까지 드러난 파행 사례는 너무 많아 일일이 거론하기도 힘들 정도입니다. 이러한 파행 사례들이 교과부는 선한데, 지역교육청이나 개별학교 관리자들, 혹은 개별 교사들이 사악해서 생겨나는 걸까요? 모든 정책에는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고 항변할 건가요? 그렇다면 교과부야말로 정말로 사악한 집단입니다. 자신들이 관장하는 하부기구와 그 아래서 근무하는 사람들을 불법과 파행, 비양심의 길로 가도록 부추기고 있으니까요. 상급기관이라면 하급기관이 불법과 파행을 저지르지 않아도 되는 제도를 만들고 제시해야 하는 책무가 있습니다. 의도와 다르게 가고 있고, 그게 몇 년째 되풀이되고 있다면, 당연히 제도를 폐지하거나 대폭 수정하는 게 바른 자세일 겁니다. 그렇게 안하는 건 결국 자신들의 의도가 불법과 파행을 저질러서라도 학교와 학생이 서로 경쟁해서 이기라고 하는 것에 있다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이기는 게 선’이라는 이 참담하고도 무서운 현실!

 

일제고사에 대비하느라 저지르는 파행 사례는 그 자체로도 큰 문제이긴 하지만 그보다 저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수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모르쇠로 일관하며 밀어붙이는 교육당국의 속셈은 딱 한 가지입니다. 지역·학교 간 학력 격차를 파악하고, 평가 결과를 교수 및 학습법 개발에 활용한다는 둥 하면서 이러쿵저러쿵 둘러대는 그럴 듯한 말들은 모두 장식에 불과하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비판적 사고의 봉쇄!

무조건 성적을 올려야 한다는 절대명제 앞에서는 옳고 그름이 들어설 여지가 없습니다. 회의하고 의심하는 순간, 뒤처지기 때문입니다. 과학이나 철학 등 모든 학문은 기존의 학설과 사상에 대한 회의와 의심으로부터 출발합니다. 거기서부터 새로운 앎이 생기고, 의식의 확장이 일어납니다. 비판적 사고가 중요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권력을 쥔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비판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단순한 동물로 만들까 하는 생각에 골몰합니다. 우리가 흔히 아는 3S정책(스포츠, 섹스, 스크린)이 바로 그러한 우민화 정책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저는 지금 일제고사가 그런 역할을 하고 있다고 봅니다.

권력을 쥔 사람들은 항상 언론과 교육을 장악하려고 합니다. 비판적인 의식을 싹틔울 수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당당하지 못한 권력자들일수록 그러한 싹을 잘라내지 않으면 자신들이 위험하다고 생각을 하지요. 회의나 의심, 그런 건 권력자들에게 가장 참을 수 없는, 그러면서도 가장 치명적인 독화살입니다.

 

비판의식을 봉쇄하는 가장 쉬운 길은 ‘길들이기’와 ‘줄 세우기’입니다. ‘길들이기’의 방식은 아주 단순합니다. 자신의 뜻대로 따라오지 않으면 불이익을 주고, 잘 따라오면 상을 주면 됩니다. 일제고사에 반대한 교사들을 초기에 왕창 때려잡은 것은 그러한 의도에서 비롯된 겁니다. 누가 봐도 해직을 시킬 만한 건이 아닌데, 막무가내로 학교에서 쫓아내고 말았습니다. 지금은 재판을 통해 모두 복직을 했지요. 워낙 말이 안 되는 징계였으니까요. 하지만 교과부의 전략은 상당 부분 성공했습니다. 일제고사 반대 움직임이 해마다 약해지고 있으니까요. 시간이 지나면서 이제는 정착이 됐으니 어쩔 수 없다는 체념을 확산시킨 것이지요. 괜히 다칠까봐 나서기도 두렵게 만들고요.

‘줄 세우기’ 마법에 걸려들면 서로 앞줄에 서기 위해 눈에 불을 켭니다. 페어 플레이 같은 건 엿이나 바꿔 먹으라고 합니다. 위로 향해야 할 화살을 다른 학교나 동료, 친구들에게 돌리게 하는 탁월한 효력을 자랑합니다. 오로지 나만 잘나면 그만입니다. 내가 앞줄에 서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적입니다.

저는 일제고사의 마각이 학생을 겨냥한 것 같지만 실은 교사를 겨냥한 정책이라는 의심을 지울 수 없습니다.(정확히 말하자면 둘 다 겨냥했겠지요). 우리 교사들이 요 몇 년 사이에 잘 훈련된 원숭이들이 돼 가고 있다고 하면 지나친 비하일까요? 제 눈에는 일제고사와 성과상여금이라는 목줄이 우리 교사들의 목을 감아 걸고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게 보입니다. 제 눈에만 보이는 걸까요?

 

너무 어렵게 흘러왔나 봅니다. 조금 쉽게 접근을 해보지요.

가장 순진한 생각이, 어쨌거나 시험을 대비해서 학생들이 조금이라도 더 공부를 하게 되면 좋은 거 아니냐는 발상입니다. 학부모와 교사 중에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극히 소수의 학생이 시험에 대비해서 공부를 하고, 그로 인해 성적이 다소 올라갈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대다수의 학생에게는 스트레스와 정신적인 압박으로 다가올 겁니다. 이러한 측면은 결국 학교 교육에 대한 부정적인 의식을 강화시키는 것으로 귀결되겠지요. 그렇잖아도 학교란 곳이 학생들에게 가하는 억압으로 인해 만족도가 높지 못한 편인데, 이러한 부정성이 강화되면 학교와 학생은 점점 어떤 관계가 될까요?

 

소수를 위해 다수가 희생하라!

학생의 본분이 공부인데, 공부를 열심히 하면 될 거 아니냐!

가만 놔두면 누가 공부를 하느냐, 그러니 억지로라도 시켜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 학교가 삼류학교로 전락해도 된다는 말이냐?

 

이런 말들이 얼마나 폭력적인 말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말들에 대한 답이 일제고사여야 한다는 것은 교육학 원론 어디에도 없습니다.

학교교육은 온전한 인간을 만들어내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그중에 지식전달이 얼마만한 비중을 차지할까요? 계량적으로 나눌 수는 없지만, 지식 전달 외에 건강한 신체발달, 올바른 인성과 공동체의식 같은 걸 기르는 일 또한 무척이나 중요한 몫을 차지한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과 같은 경쟁사회에서는 학교도 경쟁을 피해갈 수 없는 거 아니냐는 생각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게 바로 체념의 학습효과라고 생각합니다. 수준별 수업보다 협력학습이, 즉 경쟁보다는 협력이 훨씬 효율적이라는 연구 결과 같은 건 거들떠보려고도 하지 않는 이들이 만들어온 허구입니다. 학생들은 지금도 충분히 경쟁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 절망한 학생들이 수시로 목숨을 던집니다. 내 자녀가 혹은 우리 학교 아이가 목숨을 버리지 않았다고 해서, 지그시 눈을 감으시렵니까? 지금은 경쟁을 강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완화시키려는 노력이 절실한 때입니다.

 

눈에 보이는 쉬운 길로만 가려는 것은 교육이 취할 도리가 아닙니다. 시험을 볼 때도 먼저 눈에 띄는 답에 무심코 손이 갑니다. 깊은 고민 없이 우선 쉽게 고를 수 있는 선택지를 택하고자 하는 유혹은 매우 강렬합니다. 하지만 어렵더라도 모두를 끌어안고 가는 길이 무얼까에 대해, 온전한 인간의 완성을 위해 교육이 기여할 바가 무엇일까에 대해 고심하며, 가장 힘들고 어려운 길을 찾아가는 것이 교육의 본질에 가까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