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운 자화상
나이 들어서 삼가야 될 것들 중에 과거를 회고하는 일이라고 한다. 회고형의 시니어가 되지 말라는 경고이다.
「마흔 다섯은/ 귀신이 와 서는 것이/ 보이는 나이」
「겨울 마늘 낼/ 풍기며/ 처녀 귀신들이/ 돌아 와 서는 것이/ 보이는 나이」(서정주)
그만큼 삶의 이력이 쌓이고 희노애락의 더께가 굳어질 양이면 귀신을 볼 정도로 노회(老獪)하고 영악해진다는 의미일 것이다.
삶의 여정으로 보면 그럴 만한 나이겠다. 고난과 역경을 돌파하고 어느 정도 삶의 가옥을 갖출 무렵이기도 하니 정신적으로 영적으로도 성숙미를 풍기며 한 깨달음쯤 있지 않겠나 싶기도 하다.
그렇건만 나는 그 무렵에도 때늦은 성장통을 앓듯 극심한 정신적 몸살을 앓고 있었다. 우선은 사는 것이 뜻만 같지 않아 깡그리 삶의 의욕을 잃고 있었고, 누군가가 옆에서 나를 잡아 주지 않으면 내가 어찌될지 모르겠다는 절박한 위기감에 몰려 있었더랬다. 사람이 그리웠고 한없이 사랑이 고팠다. 일을 해도 일의 핵심을 놓치고 있었고, 길을 걸어도 시선은 먼 허공을 바라본 채 넋을 빠뜨리고 흐느적거리며 걷는 시늉만 하는 꼴이었었다. 자고 깨면 회사에 출근해야 했고, 하루 일과가 끝나면 꼬박꼬박 집으로 들어오는 다람쥐 쳇바퀴 도는 일상이 지겨워 죽을 지경이었다.
집에 돌아와도 가족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밥을 먹어도 입맛이 없어 식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했다. 아내가 옆에 누워 있어도 욕망이 일어나지 않았으며, 성년이 된 아이를 봐도 어떤 기대나 미래희망이 생기지 않았다. 매사가 심드렁하고 재미없었으며 몸은 지쳤고 정신은 그럴 수 없이 공허하며 사는 것이 허망하다고 여기고 있을 따름이었다.
운전을 하고 가다가도 혼자 하염없이 눈물을 훔칠 때가 잦았으며, 문득문득 핸들을 꺾어 바다나 언덕배기로 쳐박고 싶은 충동도 일었었다. 죽음의 유혹에 시도 때도 없이 시달렸다. 그런 가운데서도 유일한 바람이 있었으니 죽기 전에 꼭 한 사람을 만나봤으면 하는 것이었다. 왜 그렇게 보고 싶은지 몰랐다. 실인즉 본심은 오히려 밉고 저주하고 증오하는 마음이 컸다. 이십 년이 지나도록 그런 마음이었다. 그런데 이제 나의 삶도 종언을 고할 때가 되어간다고 생각하니까 문득 미움이 그리움으로 바뀌고 증오하는 마음이 어느새 애절한 사랑으로 바뀌어 짐을 알았다. 그래서 떠올린 궁리가 무슨 수단방법을 강구하든지 그녀를 만나봐야겠다는 열망이었다. 나는 「뒷마당」에 있는 친구를 찾았다. 그 당시 B시청(市廳) 청사가 있는 뒷마당에는 B시(市) 경찰국(지금의 지방경찰청) 건물이 있었다. 때문에 시청직원들은 B시(市) 경찰국을 지칭할 때 통상 「뒷마당」으로 불렀다. 수사과에 친구가 근무하고 있었는데 나는 친구를 불러내서 「사람을 하나 찾아주라」고 간곡한 말투로 부탁했다. 찾고 싶은 사람(여인)의 이름과 나이와 생일(음력이어서 주민등록상 기록과는 다를 수 있음을 주지), 출생지와 성장지 등 참고될 만한 정보를 건네주고 하회를 기다리기로 했다. 열아홉에 헤어지고는 이후 통 소식이 두절되었으므로 나는 그녀가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를 통 알지 못하고 있었다. 결혼은 누구와 했으며 아이는 몇이고 어떻게 사는지 까마득히 알지 못했다. 그런 사람을 보고 싶어 친구더러 좀 찾아봐 달라고 부탁한 것이었다. 한 사흘쯤 지나서 친구로부터 소식이 왔다. 만나 보니 동명이인을 비롯 다섯 사람의 인적사항을 적어 건네주는 것이었다. 그 중 가장 신빙성이 있어 보이는 하나의 사례에 점찍고 나는 직접 그녀를 찾아 나서기로 했다.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같은 하늘 아래에 살고 있었다. 자료상에 나타난 그녀(?)의 가족 사항에는 남편이 없었고 아들 둘과 살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 사람이 바로 내가 찾는 과거의 그녀라 믿고 찾아 나서기로 한 것이다.
토요일 오후 일찍 퇴근한 나는 쪽지를 들고 ○○동으로 향했다. 주소지는 ○○동 중에서도 가장 열악한 동네로 소문난 곳이었다. 머리 속에는 온갖 확인되지 못한 사실들이 그럴 듯한 명분을 달고 믿음으로 가슴 속에 파고들었다.
(이혼했나봐, 그러니 주민등록부에 남편이 없는 거로 나타났겠지. 왜 이혼했을까? 나를 배신하고 갔으면 더 좋은 남자를 만나 잘 살고 있어야 하는 게 아냐? 남편이 죽었을까? 왜 죽었지? 암이라도 걸렸었나? 아니면 교통사고로? 얼마나 쫄딱 망했으면 ○○동 중에서도 후진 동네에 셋방살이로 살고 있을까? ○○동에서 산지 오래 되었다면 왜 한 번도 마주치지 못했을까? 같은 도시의 하늘 아래에 살면서도 그렇게 인연이 닿지 않았을까. 우리는 본래부터 인연이 아니었던 거야?)
가지가지 의문과 상상력으로 그녀의 집을 찾아 나선 나의 심금은 거의 울먹일 지경이 되었고, 안타까움과 초조함이 발걸음을 허둥대게도 했다. 통반장의 집을 찾고 드디어 그녀의 집을 찾았을 무렵에는 해가 어느 듯 서산을 넘어가고 있었다. 다세대 주택, 그 중에서도 제일 구석진 자리에 있는 방이 그녀가 살고 있는 집이라고 했다. 방문 앞에 선 나는 하염없이 가슴과 다리가 떨렸다. 긴장되었고 목이 말랐다. 간신히 마음을 추스르고 나서 조심스럽게 오른 손으로 문을 똑똑 두드렸다.
「계십니까?」
반응은 금세 왔다.
「누군교?」
굵은 남자 애의 목소리가 들리면서 방문이 휙 열렸다. 20대로 보이는 청년이 문짝을 잡고 서서 밖을 내다보며 나의 신원을 확인하는 듯 했다. 입성과 얼굴을 보니 학생은 아닌 것 같고 공장이나 어떤 작은 제조업체에 기술을 배우러 다니는 신분의 인상으로 느껴졌다.
「말씀 좀 묻겠습니다. 여기가 ○○○씨 집 맞습니까?」
이렇게 묻는 데도 행여 내가 찾는 그녀의 집이 아니면 어떻게 할까. 동명이인일지도 모르고, 전혀 엉뚱한 사람이면 어떡하지? 라는 걱정과 근심이 심장을 마구 두드려댔다.
「네, 그런데요?」
보아하니 그녀는 현재 부재중인 것 같고, 남자애는 그녀의 아들로 여겨졌다.
(네, 그렇다니? 그렇담 맞는 게 아닌가.) 나의 가슴은 더욱 요동치며 방망이질 해댔다.
「○○○씨가 어머니 되십니까?」
「예, 저희 엄맙니다. 왜 그러는데요?」
어찌 들으니 꽤 불만스럽게 들리는 음성이었다. 그리고 조금 무례하게도 여겨졌다.
「혹시 어머니께서 예전에 경주에 사신 적이 없으세요? ○○초등학교 나오시지 않았습니까? 」
언짢은 생각도 들었지만 나는 질문의 내용이 보다 구체적으로 진행돼 가자 최대한 침착하고 진중하게 성의를 다해 목소리를 내려했다.
「아닌데요, 우린 경남의 ○○에 살았고 엄마는 거기서 학교 졸업했는데요.」
(아뿔싸! 아니로구나. 이 일을 어쩐다?)
허탈했다. 기운이 쭉 빠졌다. 순식간에 공든 탑이 무너지는 듯한 좌절감이 전신을 휘감았다.
「감사합니다. 제가 찾는 분이 아니시군요. 실례 많았습니다.」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허급지급 나는 그 자리를 떠나왔다. 마지막 한 가닥 궁리마져도 허사가 되어버렸다니 더 이상 참담할 수가 없었다. 실의와 절망감을 안은 채 기운없이 나는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왔다. 아내 얼굴 보기가 부끄럽고 내심 미안했다. 왠지 모르게 죄짓는 기분이 들어 애써 아내의 얼굴과 정면으로 마주치지 않으려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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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보고 싶은 그녀는 「나의 은교」였다.
내가 찾는 그녀는 내가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가슴 설레며 사모의 정을 키운 여인이었다. 최초로 사람이 간절히 보고 싶은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계기가 됐으며 그 마음은 뜨거운 바람이 되어 가슴을 쿵쾅거리게 하는 사연을 잉태케 하는 동기로 작용했다. 미칠 듯이 보고 싶다는 마음이 어떤 현상을 말하는 지를 몸소 깨닫게 되었고, 그녀가 내 곁에 있으면 그 어떤 불행과 환란도 거뜬히 이겨낼 수 있다는 용기를 가질 수가 있었다. 왜냐면 그때 우리 집은 폭삭 망해 있었고 그때부터 나의 삶의 시련은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열세 살 때 우리 집은 그야말로 폭삭 망해 알거지가 되어 버렸다. 아버지가 그랬다. 무슨 빚을 얼마만큼 왜 졌는지를 나는 속속들이 알지를 못한다. 집안을 송두리째 거들내고서도 아버지는 무엇이 모자랐던지 어머니와 이혼까지 했다. 일방적인 결별이었다. 어머니는 이혼 당한 사실도 모른 채 있다가 시댁에서 쫓겨나다시피 따뜻한 남쪽 부산으로 삶의 도피처를 구해 떠나왔었다. 간신히 아들 하나만 데리고.
시골이었지만 제법 동네에서는 유지 행세를 하던 집안이었는데 집안이 풍비박산이 되었으니 더 눌러 살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처지였었다.
내가 중학교에 입학할 일만 아니었어도 어머니는 이혼 당한 사실을 오래 동안은 까마득히 모르고 지냈었을 수 있었다. 나의 중학 입학서류에 호적등본을 첨부해야 했어서 본적지에 호적 등본을 떼러 갔다가 비로소 어머니는 호적부에 이혼 사실이 기재된 것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중학교 1학년 1학기를 보내고 난데없이 부산에 정착한 나는 뜻밖의 환경변화에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심리적 위축과 정서적 혼란을 겪어야 했다. 느닷없는 도시생활, 친구도 없고 마땅히 즐길꺼리도 없는 생활을 하노라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고독의 늪으로 빠져들어 감을 어쩌지 못했다. 외로움을 견디다 견디다 못해 고향에 있는 친구에게 난생 처음으로 편지를 썼다. 무슨 용기가 있어 그랬었는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그냥 마음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었다. 주소를 모르는 처지여서 편지를 보낼 곳은 친구가 다니는 학교 밖에 없었다. 학교로 보내면 친구에게 편지가 제대로 전달될지도 의문이었지만 그래도 그 방법밖에는 없었다. 시골중학교는 남녀공학이었다. 그렇지만 중학생의 신분으로 공개적으로 친구인 양 여학생에게 편지를 보낸다는 것은 당시로선 센세이션 한 사건에 속하는 일이었다. 무슨 꿍꿍이가 있어서 그 같은 모험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도 필(feel)이 오면 무모하다 할 정도로 대시하고 보는 나의 근본적 성격에 기인한 행동이었을 것으로 보는 게 맞지 싶다. 그리고 그녀의 담임선생님을 내가 잘 알고 선생님도 나를 잘 알고 있기에 어느 만큼은 그런 배경을 은밀히 계산하고 저지른 행동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영어를 가르치던 그 선생님은 대구에서 전근해 오신 분이었는데 괜찮은 집을 마련할 때까지 우리집에서 하숙한 전력이 있는 것이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에 들은 얘긴데 그때 내가 보낸 편지를 그 선생님이 받아서 보관하고 있다가 수업 시간에 편지 내용을 공개하면서 그녀에게 전해줬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물론 편지 내용은 단순히 갑작스럽게 고향을 떠나게 돼서 아쉬웠으며 친구가 없는 이곳 생활을 언급하며 앞으로도 자주 소식을 주고받는 좋은 친구가 되고 싶다는 희망을 피력한 정도였을 것이다. 그런 사건을 계기로 나와 그녀 사이는 만인이 아는 특별한(?) 친구로 인정받는 관계가 되어버렸다. 초등학교 때부터 은밀히 좋아하는 감정을 숨기고 지내다가 중학교에 들어가서 정식으로 좋아한다는 감정을 표현하게 되었고 이러한 우정을 변치 말자고 약속까지 하는 사이로 발전된 것이었다. 뜻밖의 이별의 아쉬움은 뜻밖의 행운과 행복으로도 이어질 수 있음을 그때 처음 알았다. 덕분에 벼락같이 엄습한 불행과 시련을 잘 참으며 꿋꿋이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는지 몰랐다. 고등학생이 되니 우리 사이는 급속히 발전하여 친구 사이를 넘어 사랑이라는 언어와 감정을 자주 토로하는 관계로 발전했다. 누가 보아도 부정할 수 없는 아름다운 첫사랑이었다. 진흙 속에서도 아름다운 연꽃은 피어나듯이.
그러던 어느 날, 고향을 자주 오르내리던 친구에게서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해 들어야 했다. 우리 둘의 관계를 너무나 잘 알고, 내가 그녀를 얼마나 마음에 두고 있는지를 누구보다도 확실히 믿고 있는 친구로부터 들은 소식이라는 것은 그녀가 다른 남자 친구를 사귀고 있다는 것이었다. 쉽사리 믿을 수 없는 말이어 기어코 나는 그녀로부터 사실 확인을 했어야 했다. 전화를 걸었다. 당시의 시외전화란 고향의 우체국에 전화를 걸어 우체국 앞의 아무개집 누구를 바꾸어달라고 하면 사람을 불러와서 연결시켜주는 수준이었다. 30여 분을 통화했다. 사실 여부만 다그쳐 물었지 왜 그랬느냐 따위는 묻지 않았다. 그녀는 직접 내려와서 해명하겠다고 울먹였지만 그럴 필요까지 없다고 했는데도 그녀는 토요일을 택해 나를 만나러 부산까지 왔었다. 그렇다고 하여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자신도 모르게 새로운 친구가 생겼다고 했는데 그렇다고 나를 향한 마음에는 변함이 없다고 고백하는데 나는 더 이상 그녀의 변명을 듣고 싶은 마음도, 이해하고 용서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렇게 됐으면 나보다 더 좋은 사람을 따라 가라」는 말로 나는 그녀와의 관계를 깨끗이 단념했다.
배신감을 느꼈으니 분노하는 건 당연했다. 나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니 충분히 그럴 수 있으리라고 이해는 했다. 그것이 나로 하여금 더욱 분노를 일으키게 하고 견딜 수 없는 모멸감으로 스스로를 비참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자신이 불쌍했다. 그리고 슬펐다. 몇 날 며칠 밤을 숨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몰랐다. 이를 악물고 참으니 결국은 참아졌다. 어쩌면 실연의 슬픔보다 더 화급하고 내가 좀 더 신경 써야 할 부분은 나의 삶을 어떻게 꾸리고 살아가느냐 였다고 해야 옳겠다. 그만큼 나의 삶은 절박한 형편이었다. 생존의 위험은 시시때때로 나를 위협하는 절체절명의 과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흘렀다. 그동안 그녀는 나의 기억 속에서 깨끗이 잊혀져 있었다. 생각하기도 싫을뿐더러 생각해본들 무슨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가끔 얼굴이라도 볼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은 일었지만 내 현실이 그런 바람을 지워버리게 했다. 인생에 실패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부끄럽게 내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사는 일이 무슨 희망이라도 있어야지 버티어온 세월이 그렇듯이 앞날도 뻔할 것이고, 이처럼 재미없고 짜증나고 무미건조하게 사느니 차라리 죽어버리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고 갈등 중인데 마침 어쩐 노릇인지 그녀가 한번 보고 싶었던 것이다. 마지막이다, 마지막으로 그녀가 보고 싶다. 이별을 선언할 때 내가 그렇게 냉정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 뒤에 다시 화해를 신청하고 잘 되기를 빌었어야 했는데, 그때는 왜 그렇게 그녀가 불결하게 여겨지고, 생각할 때마다 미움과 증오심이 솟구쳤는지 모를 일이었다. 오해를 풀고 마지막으로 보고 싶은 열망을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그녀를 찾아 나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랬건만 이 모든 것이 허사가 되어버렸다. 심한 무력감과 허탈한 심경이 되어 한동안 생활리듬을 잃고 허수아비처럼 살아가고 있을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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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은교」는 그 때의 「은교」가 아니었다. 은교는
변해 있었다.
회사로 출근하기 위해 버스 정류소로 가는 길에 내가 자주 들리는 약국이 있다.
일찍 집을 나서다 보면 시간의 여유가 좀 있어 일과처럼 약국에 들려 드링크를 한병 마시고 조간신문을 훑어보다 나오는 것이 일과의 한부분이 되어 있었다.
동네 약국이고 자주 들리다 보니 단골이기도 하고 약사님은 비록 연세는 높으시지만 재미있는 애기를 서로 주고받는 친구처럼 관계가 친밀했다.
「국장님, 요즘 영 사는 게 재미가 없고, 몸도 시들시들하고, 밤일도 잘 안 되고, 매사가 짜증만 나니 이를 어찌하면 좋죠?」
「밥은 잘 먹고?」
「밥맛이 있을 턱이 있나요? 두어 숟갈만 들다가 말지. 쭉쭉빵빵한 아가씨를 봐도 예전처럼 별 생각이 안 나요. 이미 맛이 간 건가…, 마 이것저것 따질 것 없이 탁 죽어버리면 이 고생 안 하고 살아도 될 낀데…」
자신도 모르게 넋두리를 나는 하고 있었다.
「보니께 얼굴도 꺼칠꺼칠한 게 갱년기네.」
「뭐라꼬요? 남자가 무슨 갱년기가 있습니까?」
「남자한테도 갱년기가 오지. 개인 차이가 있어 빨리 오는 사람 늦게 오는 사람이 있고, 사람에 따라 더하고 덜한 경우도 있고. 김형의 경우는 좀 빠르네」
「그러면 어째야 돼요?(나는 뭐든지 남보다 조금 빠른 경우가 있다)」
「약 좀 먹어. 그러면 괜찮아 져.」
그래서 약사님이 지어주는 대로 약을 복용했다. 한 열흘 쯤 지나니 기분이 거짓말처럼 달라졌다. 기분이 달라지니 삶의 활력도 솟아나는 것 같았다. 더불어 지금까지 겪었던 여러 심란한 사건들에서 헤어날 수 있었다. 당연히 첫사랑이 보고 싶다던 마음도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실제로 나의 첫사랑을 정면으로 마주친 것은 수 년 뒤 친구의 아들 결혼식장에서였다. 많은 동창들 가운데 그녀도 있었고, 우리의 과거를 아는 짓궂은 친구들이 일부러 좌석을 마련해 함께 앉으라고 난리법석을 떨었다. 거의 30여 년 만이던가. 감회가 없을 수 없겠는데 오히려 나는 담담한 심경이 되었었다. 기억에 남아있는 어릴 때의 모습은 온데 간 데 없고 거기에 전형적인 중년 여성의 뚱뚱한 모습이 클로즈업 되었다. 첫눈에도 그다지 화려한 삶을 살거나 유여한 복을 누리고 있는 모습으로 여겨지지는 않았다. 이런 그녀를 보고 싶어 내가 그다지도 안달복달 했던가를 생각하니 남모르게 쓴웃음이 지어졌다.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죽고 못 사는 사랑도 세월 앞에는 다 허망한 소꿉장난이 아닌가.)
그 이후로 그녀의 소식은 동창들 사이에서도 종적을 감췄다. 형편이 기울어 살기가 많이 힘들다는 얘기를 바람결에 들었다. 아이들 소식도 깜깜무소식인 걸 보면 마흔이 된 큰 딸도 혼례를 치르지 않고 있지 하는 추측을 해볼 따름이다. 인생만사 새옹지마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누구라 할 것 없이 모두의 삶이 그러한 변화와 무상에 실려 있음을 깨달아야 할 듯.
수십 년 수행한 큰 스님들이 도박을 하고, 룸살롱 가서 여자와 시시덕거리는 것을 보면 삶의 진리를 굳이 따로 구할 필요가 없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생활이 곧 수행이고 구원일 수 있는 것이다.
더 좋은 사랑을 찾아 떠난 사람도 인생이 종언을 고할 무렵에 보면 별 수 없더라는 얘기에 다름 아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니…」
끝을 알면 시작이 편안하다는 사실만 알면 족하겠다. 그래서 그런지 나도 참 인생을 많이 부끄럽게 살았다는 자괴감 앞에서 붉어지는 얼굴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