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글

아버지의 밀가루 떡

이산저산구름 2012. 6. 27. 09:37

아버지의 밀가루 떡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고자 하는 분들에게


아버지가 다른 세상으로 가신 후 어린 시절 아버지가 내게 만들어주던 밀가루 떡에 대해 생각하는 날이 많아진다. 이스트만 넣고 부풀린 밀가루 떡에서는 술냄새 비슷한 것만 나고 아무 맛도 없었다. 점심 무렵 동구의 밭에서 일하다 돌아온 아버지는 부엌에서 달그락대다 숭숭 구멍이 뚫린 밀가루 떡을 쟁반에 얹어놓고 방바닥에 엎드려 공부를 하는 내 옆에 슬쩍 밀어놓곤 나가셨다. 어쩔 때는 그 맛없는 떡을 머리맡에 놓아두고 잠이 들곤 하였다.


아버지는 참 말씀이 없으셨다. 마당에 낙엽이 내리면 낙엽을 쓸고, 새벽에 일어나시면 서둘러 밥을 먹고 밭에 나가 그런 낙엽 같은 채소를 길렀다. 아버지가 기른 채소는 식구들이 배불리 먹을 수도 돈이 될 수도 자식들을 가르칠 수도 없는, 그저 아버지의 삶이 충실했음을 보여주는 당신만의 증거였을 뿐이었다. 그것은 낙엽처럼 아름답고 헛된 삶이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저 세상으로 가신 뒤, 나는 한시도 아버지 생각을 머릿속에서 잊은 적이 없다. 내게는 평범에 대한 증오 같은 것이 있었다. 나는 시를 천재성이 없으면 쓸 수 없는 것이라고 믿었고, 젊은 날을 그렇게 살아왔고, 그 말을 듣기 위해 남모르게 셀 수 없는 밤을 파지로 흩날렸다.


그런데 아버지는 내게 그 맛없는 떡 한 조각을 남겨주시고 세상을 뜨셨다. 어린 시절 머리맡에 놓여져 있는 그 밀가루 떡. 그때 맛이 없다고 먹지 않았던 무미(無味)한 떡 한 조각이 이제 내게는 평생 써야할 시가 되었다. 낙엽 같지만 헛되고 아름다웠던 아버지의 노동. 그 빈궁은 너무나 절실해서 말이 되지 못하고, 그 침묵의 안쪽에 들끓는 가족애는 어린 막내의 옆에 가만히 놓아둔 밀가루 떡이 되었다. 앞으로 나는 그런 맛없는 시를 세상의 한켠에 부끄럽게 놓아두고 싶다.


박형준 올림

박형준
1966년 전북 정읍에서 태어나, 199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 「家具의 힘」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 『빵냄새를 풍기는 거울』 『물속까지 잎사귀가 피어 있다』 『춤』이 있다. 동서문학상, 현대시학작품상, 소월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