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민 신부(마산교구 명례성지)가 대화문화아카데미에서 지난 2월 10일 ‘내가 믿는 부활은?’이라는 주제로 자신의 부활관을 발표했다. 이 자리에서 이제민 신부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하느님은 고맙게도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칼 라너의 말을 빌어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부활은 없다고 믿는다” 고 말했다.
이제민 신부는 “올해로 88세가 된 제 어머니는 부활을 믿는다. 하지만 어머니가 그리는 부활에 대한 그림은 신학적으로 틀렸다” 고 전했다. 예수는 그분이 믿는 방식으로 부활하지 않았다는 뜻인데, 그럼에도 어머니의 모습에서 부활의 삶을 보는 이제민 신부는 “지구가 아니라 태양이 돌고 있다고 믿는 어머니에게도 태양은 여전히 따스한 빛을 내려 보낸다”고 전했다.
어머니는 다만 교회에서 가르치는 부활을 믿을 뿐인데, “지금 우리 교회에는 신학이 없다”는 게 이제민 신부의 진단이다. “내 어머니의 신학 수준이 그대로 우리 한국교회의 신학 수준이라면 서글픈 일”이라며 “교회는 발전해 가는 현대인에게 늘 과거의 사고방식만을 전통이라는 포장지에 싸서 주입시키려 한다”고 비판했다.
시체는 되살아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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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민 신부는 '죽어서 가는' 천국이나 저승과 부활신앙은 다른 개념이라고 설명했다. 부활은 죽어서 얻는 게 아니라, 살아서 제 몸으로 구현해야 할 새로운 삶이다. |
이제민 신부는 “부활메시지가 단순히 예수님을 믿다가 죽은 사람이 이 다음에 부활해 천당에 가서 영원한 복락을 누리며 슬픔도 고통도 없는 삶을 살게 된다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을 전하는 것은 아니다”라며, 부활신앙이 허무를 달래는 것도 아니고, 부활을 믿는 그리스도인만 부활하고 나머지는 부활하지 않는다고 믿는 것도 넌센스라고 일갈한다. 더군다나 예수의 이름과 ‘부활’이라는 단어를 안다고 수천년 이 땅에서 살아온 조상들을 지옥에 버리는 것 역시 오만이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부활을 ‘죽음 다음에 오는 삶’으로 고정시키고, 예수의 부활마저 ‘그분의 시체가 되살아난’ 것으로 여기고 이를 증명하려 든다고 비판한다. 예수는 사후의 삶을 증명하려 들지 않았으며, 오히려 사후의 삶을 지금 당신의 인생을 통하여 보여주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언제 우리도 그분처럼 남을 위하여 내 목숨을 내놓을 수 있을까? 이런 물음이 없이는 부활의 삶을 살 수 없다”고 전한다. 즉,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지금 죽기 전에 부활의 삶을 산다는 뜻이다. 즉, “부활은 미래가 아니라 지금 일어나야 하는 사건이다.”
이를 두고 이제민 신부는 “죽음으로 내 인생은 모두 끝난다. 다시 살아나는 삶은 없다”고 단언하며, 부활이란 죽은 자의 문제가 아니라 산자의 문제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어 “죽은 자들이 가게 된다는 저승(천국이라 부르든 극락이라 부르든)을 나는 믿지 않는다” 며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사후(死後)’는 ‘인생 다음’이 아니라 ‘인생 중’에 일어나는 사건이라고 믿는다.
부활은 우리 생애에서 수없이 발생한다
이제민 신부는 “우리보다 앞서 죽은 이들이 지하세계에서 부활을 기다리며 누워 있다는 것은 오로지 인간의 상상일 뿐이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살아생전에 ‘나는 부활이다’라고 하신 말씀을 유념해야 한다”면서, 우리는 이미 우리 가운데 와 있는 하느님 나라에 맞갖는 삶을 ‘지금여기’에서 살아야 하며, 그 안에서 부활의 기쁨을 맛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처럼 죽음과 부활이 우리 생애 안에서 수없이 발생하는 사건임을 ‘깨닫는’ 것이 필요하다고 전하며, 요한 크리소스토무스가 “우리 머리가 물속에 잠기듯, 낡은 인간은 무덤에 묻히고 완전히 잠겨 영영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우리 머리를 물에서 다시 건져낼 때 거기서 새 인간이 태어난다”고 한 말을 상기시키며, 영생은 자신을 영원히 사라지게 하는 삶에 주어진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예수의 십자가 죽음마저도 그분 생애의 마지막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그분 생애 안에서 늘 일어난 일을 최종적으로 보여준 사건이라고 해석한다.
“부활한 자는 자기를 죽임으로써 사랑의 삶을 산다. 타락한 종교에는 이 사랑이 없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천국 가기 위해 선을 행하고 남을 사랑한다. 그 사랑은 그 사람 때문이 아니라 자기를 위해서다. 천국은 자기만 잘 살려고 남을 사랑하는 이기적인 자들이 모인 곳이 아니다. 이런 사랑을 죽일 때 부활의 삶을 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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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의 신학 콜로키움에서 이제민 신부는 부활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부활이 아닌 것'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수 있겠다고 전하며, 주변에서 듣는 '부활체험 이야기'가 정작 복음서가 전한 '부활'과 상관없는 것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시중에 떠도는 '연옥체험'이나 '천국체험'들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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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을 믿는다”는 고백으로 부활이 발생하지 않는다
“먼저 세상의 빵이 되어야 한다”
덧붙여 이제민 신부는 우리가 “부활을 믿습니다”라는 고백만으로는 부활의 삶을 살 수 없다고 강조한다. 천국은 부활을 입으로 믿는다고 고백하는 자들이 모인 곳이 아니라는 것이다. 부활신앙을 고백하는 교회 역시 자기만 다시 살아나 영원히 행복하게 살게 되리라는 꿈을 꾸는 무리들이 모여 기도하는 집단이 아니라고 말한다. 교회가 ‘믿음’의 이름으로 저희들만의 영복을 위해 모일 때 종교의 타락이 시작된다고 믿는 이제민 신부는 “이런 맹신과 광신의 집단이 인간을 오류로 안내한다”고 비판했다.
그러므로 부활이 삶을 살고 싶은 이들은 먼저 ‘빵이 되라’고 요청받는다. 배고픈 사람에게 자신을 먹이로 내어주고, 목마른 이의 물이 되고, 헐벗은 이의 옷이 되라고 주문한다. 감옥에 갇힌 이에게 위로가 되고, 타인의 고통을 제 고통으로 삼으라고 말한다. 가진 것을 다 팔아 나누어 주고, 우리 몸에서 하느님의 생명과 자비가 풍겨나오게 사는 게 부활의 삶을 ‘지금여기’에서 사는 것이다. 그리하면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마태 25, 34)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요청을 거절하면서, 주님을 믿는다고 고백하고, 그 고백을 믿음이라고 착각하는 이들이 듣게 될 말은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는 소리다.
결국 부활의 삶이란 ‘나’는 사라지고 ‘세상’을 살리는 것이다. 또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오해하고 있는 부활은 ‘세상’은 사라지고 ‘나’만 살리는 부활이다. 이처럼 우리는 죽어서 영복을 누리는 부활이 아니라, 지금 사는 동안에 겪는 죽음과 부활을 반복하면서 그리스도와 영원하신 하느님을 닮아간다. 그러니 “우리는 땅에서 하늘을,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이웃에서 하느님을 보지 못하고 땅과 재물과 명예의 노예가 되어 사는 길”을 접어야 한다.
죽은 다음에 올 육신의 부활을 기대하며 살아가는 것은 사는 동안에 무덤을 파는 일일 뿐이다. 이제민 신부는 마지막으로 “설혹 고통을 주는 십자가가 나에게 온다 해도, 사랑하며 살 수 있는 것, 이렇게 제 몸으로 부활한 몸을 느낄 수 있는” 부활의 삶을 미루지 말고 당장 여기서부터 살기 시작하자고 권한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 로마 바티칸의 가부장적 권위에 대해 비판의 글을 올려 광주가톨릭대학 교수직을 박탈당한 이제민
(에드워드)신부님.
노무현 참여정부때 일제때부터 있었던 해군사령부가 부산으로 옮겨진 항만이 있는 인구 16만 경남 진해가 고
향. 인문계 진해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를 갈수 있었는데도 가지않고 마산교구 교구사제 지망자는 당시 광
주가대로 가야 하기 때문에 광주가대에 입학. 오스트리아 그랏쯔 대학에서 석사, 독일뷔르츠부르크 대학에서
Ph.D , 경남 진해시가 원래 단일지역으로는 가톨릭 사제가 많이 배출되는 고장이다.
현재 천주교 마산교구 은퇴사제로 교구 명례성지에 살고 계심.
** 이제민 당시 광주가대 교수신부님이 당시 로마 바티칸 가부장적인 권위에 대해 비판의 글을 올린것은 어디까
지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을 가지고 한것인데 다분희 이제민 신부님으로 봐서는 분명 억울한 것이다.
부활은 '입'으로 고백되지 않는다 |
[이제민 신부의 '내가 믿는 부활은?'-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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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03월 11일 (일) 15:28:39 |
이제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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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삶은 “부활을 믿습니다” 라는 고백만으로는 살아지지 않는다. 천국은 입으로 부활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자들이 모인 곳이 아니다. 부활신앙을 고백하는 교회가 자기만 다시 살아나 영원히 행복하게 살게 되리라고 꿈꾸는 이들이 모여 기도하는 집단이거나 죽음을 허무로 생각하는 이들이 ‘믿음’의 이름으로 죽음에서 일어나 영원히 살게 되리라는 믿음을 강조하는 집단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종교의 타락은 여기서 비롯한다. 맹신과 광신의 집단은 인간을 오류의 길로 안내하기 때문이다.
부활의 삶을 살고 싶은가? 빵이 되어라. 배고픈 사람에게 자신을 먹이로 내어주어라. 목마른 사람에게 물이 되고, 헐벗은 사람에게 옷이 되고, 병든 이와 감옥에 갇힌 이에게 위로가 되며, 그들의 고통을 자기 자신의 고통으로 삼도록 하여라. 가진 것을 다 팔아 나누어 주고, 그대의 몸에서 하느님의 생명과 자비가 풍겨나게 하여라. 그리하면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마태 25,34)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들을 외면하면서 주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며, 그러한 고백을 믿음이라 착각하는 이들이 듣게 될 소리는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마태 25,41)일 것이다.
성토요일로부터 달아나는 자는 결코 부활을 체험할 수 없다
부활의 삶을 살려면 나눔과 희생이 필요하다. 나눔과 희생은 부활의 삶을 사는 데에 가장 근본적인 것이다. 우리가 부활의 삶을 살기를 바라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마르 10,21)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젊은이는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돌아갔다. 자신을 팔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누는 삶을 미루지 마라. 지금이 부활의 삶을 살 때다.
우리는 처음부터 일상에서 만나는 가난하고 배고프고 목마르고 헐벗은 이들에게 내 모든 것을 줄 수 있는 존재로 지어졌다. 아는 사람이건 모르는 사람이건, 좋은 사람이건 나쁜 사람이건, 가까운 사이건 먼 사이건 간에 모든 사람들은 우리에게 부활의 삶을 깨우쳐 주는 하느님의 메신저들이다. 그들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을 느끼게 하는 존재들이며, 우리 또한 세상에 하느님의 생명을 느끼게 해주는 존재이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존재로 세상이 부활의 삶을 살도록 해주어야 한다. 세상을 일으키고 세상에 생기를 주어야 한다. 하느님은 우리가 그렇게 살 수 있도록 우리를 당신의 계약으로 삼으셨다. “은혜의 때에 내가 너에게 응답하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와주었다. 내가 너를 빚어내어 백성을 위한 계약으로 삼았으니, 땅을 다시 일으키고, 황폐해진 재산을 다시 나누어 주기 위함이며, 갇힌 이들에게는 ‘나와라.’ 하고, 어둠 속에 있는 이들에게는 ‘모습을 드러내어라’ 하고 말하기 위함이다.”(이사 49,8-9)
부활의 삶을 살고 싶은가? 그 때를 먼 미래로 미루지 마라. 지금 당신의 몸을 쪼개도록 하라. 그분처럼 우리의 몸을 쪼개어 남에게 나누어 줄 때 우리는 그분처럼 남에게 부활의 몸이 될 것이다. 부활의 삶을 살고 싶은가? 그리스도처럼 성체가 되어라. 자기의 몸을 남을 위하여 쪼개라. 그리고 남의 몸 안으로 들어가 소화가 되어 사라져라. 부활의 삶을 살고 싶은가? 자기 살 생각을 포기하고 남을 살리기 위해 자기 몸을 십자가에 내어 놓아 사라지게 하라. 부활의 삶은 ‘나’를 사라지게 하여 ‘세상’을 살리는데 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이 범하는 부활에 대한 오해는 ‘세상’을 살리는 일보다 자기 사는 것에 온 마음을 쏟는 데에 있다.
희생과 나눔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때이다. 부활의 삶을 살기 위하여 우리는 땅과 세상과 인간과 죽음과 십자가를 우주적으로 찬양하는 법을 익혀야 한다. 그때 우리는 온 세상이 설혹 고통을 주는 십자가로 다가온다 하더라도 사랑하며 살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몸에서 부활한 몸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분은 우리가 부활의 삶을 살게 하시려고 성삼일로 초대하신다. 엠마오의 제자들처럼 성목요일로부터, 토마스처럼 성금요일로부터, 열 한 제자처럼 성토요일로부터 달아나는 자는 결코 부활을 체험할 수 없다. 부활의 삶을 살 수 없다.
부활의 기쁨은 재회가 아닌 '깨달음'에서 오는 희열
마르코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세 번 전한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마리아 막달레나(16,9-11), 두 제자(16,12-13), 열한 제자(16,14)에게 나타나셨다. 하지만 그들은 믿지 않았다. 그 이유를 마르코는 “불신과 완고한 마음” 때문(마르 16,14)이라고 전한다. 불신은 복음을 믿지 않는 것이다. 부활은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만이 살 수 있는 것이다. 자기 고집에 사로잡혀 사는 완고한 사람은 믿지 못한다. 자기 고집에서 돌아선 자만이 믿을 수 있고 부활의 삶을 살 수 있다.
이는 예수님의 부활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은 것은 그들의 눈과 귀가 열리지 않아서이다. 뿐만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을 보면서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한 것은 그들의 눈이 가리어 있었기 때문이다.(루카 24,16) 부활은 인생은 필연적으로 죽어야 하는 시공에 제한된 존재이지만 영원의 가치를 지닌 존귀한 존재임을 알려주는 메시지이다. 부활은 보아도 보지 못하는 눈을 열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귀를 열어 인생의 신비를 들여다보며 인생의 의미를 깨우쳐주는 경지이다. 눈을 열고 귀를 열도록 하라. 생사의 굴레를 벗어 인생을 새롭게 살게 될 것이다. 그게 부활의 삶이다.
복음사가는 여러 군데에서 보아도 보지 못하는 눈과 들어도 듣지 못하는 귀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렇게 마리아 막달레나는 무덤가에서 그분과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분을 몰라 뵈었다. 불과 사흘 전에 뵈었던 그분을 동산지기로 여겼다. 그렇게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도 반나절을 그분과 함께 걸어가며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그분을 몰라 뵈었고, 베드로도 주님을 보면서도 몰라 뵈었다. 그분이 낯선 얼굴을 하고 나타났거나 부활하신 그분의 얼굴이 다른 모습을 하고 있어서가 아니다. 그들의 눈과 귀가 열리지 않아서이다.
마르코는 보고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제자들을 불신과 완고한 마음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라고 단정한다. 토마스의 불신에 대해 예수님께서 “보지 않고 믿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도 이런 맥락에서 알아들을 수 있다. 보아도 보지 못하는 눈과 들어도 듣지 못하는 귀는 깨달음으로만 열릴 것이다. 이 깨달음은 머리가 아니라 온 몸과 마음이 일치할 때 일어나는 일이다. 부활은 이성 없는 믿음이 아니라 깨달음으로 도달하게 되는 인생의 경지이다.
부활은 단순히 한 개인의 육체에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인생에 빛을 밝혀 어둠을 사라지게 하는 사건이다. 죽은 자를 어둠 속에서 빛으로 다시 살리는 사건이다. 부활은 그렇게 살았어도 죽은 인생을 사는 우리에게 삶을 깨우쳐 준다. 부활은 살아 있으면서도 죽은 인생을 사는 사람을 살리는 복음이다. 부활은 우리로 하여금 '살아 있는 자로 살게 하는' 복음이다.
복음서를 보면서 놀라운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에게서 기쁨의 표정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분을 본 사람들의 기쁨만 있을 뿐이다. 부활의 기쁨은 재회의 기쁨이 아니다. 깨달음에서 오는 희열이다. 제자들은 십자가가 겁이 나서 달아났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십자가에서 남을 위한 죽음, 남을 살리는 죽음을 보았다. 나의 기쁨은 오로지 죽음의 깨달음을 통해 전달된다.
*이 글은 이제민 신부가 대화문화아카데미에서 주관하는 <삶의 신학 콜로키움>에서 발제한 내용을 필자가 다시 보완정리한 글입니다.
이제민 신부/ 마산교구 소속으로 1980년 사제품, 1986년 독일 뷔르츠부르크 대학교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광주 가톨릭대학교 교수를 거쳐 구암천구교회와 반송천주교회에서 본당 사목을 하고, 지금은 마산교구 명례성지에서 일하고 있다. 저서로 '교회-순결한 창녀', '하느님의 얼굴', '우리 아버지', '녹지 않는 소금', '교회는 누구인가?', '우리가 예수를 사는 이유는?', '사랑이 보일 때까지', '우리가 예수를 찾는 이유는', '그분처럼 말하고 싶다', '예수는 정말 부활했을까?', '내 안에 그리스도가', '제3의인생-수동의 영성', '말은 시들지 않는다', '만남 속으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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