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안동 문화

문자문화의 상징, 한국의 벼루

이산저산구름 2011. 11. 22. 11:55

 


서사문화와의 절대적인 인연
문자생활은 매우 광범위한데 기관이 담당한 행정기록과, 불교의 종교적인 사경寫經, 개인적인 문한의 기록 등으로 대별된다. 그리고 이들은 좁게는 사랑방문화와 규방문화로 나뉜다. 사랑방의 문방구로는 서안(책을 얹는 재래식 책상), 경상(불경을 얹어 두는 상), 고비, 책장, 사방탁자, 문갑 등과 함께 붓, 벼루, 먹, 종이, 문진, 연적(벼루에 먹을 갈 때 쓰는, 물을 담아 두는 그릇), 연갑(硯匣, 벼룻집), 연상(硯箱, 벼루, 먹, 붓, 연적, 종이 따위를 넣어두는 조그마한 책상), 필가(붓을 걸어 놓는 기구), 필세(붓을 빠는 그릇), 필상筆床, 묵상(먹을 올려놓는 받침), 필통, 서견대書見臺, 시전지판詩箋紙板, 지통, 향꽂이, 다구(차茶에 관한 여러 가지 기물) 등을 들 수 있다.

그 중에서도 붓, 벼루, 먹, 종이 등을 흔히 문방사우 혹은, 문방사보라고 한다. 그리고 벼루는 연갑에 넣거나 종이, 붓, 먹, 연적 등과 함께 서랍을 가진 연상에 넣어 보관하였다. 그래서 이들을 통 틀어 연구硯具라고 한다. 벼루는 문방사우 중에서도 가장 중요시되어온 문방구의 하나이다. 그래서 벼루는 선물로 많이 주고받았으며, 사제 간에도 벼루를 전수할 정도로 서사문화와 절대적인 인연을 갖고 있다. 『승정원일기』에 “우리 문단文壇에는 내 벼루를 전할 만한 사람이 없다.”고 한 기사도 여기서 연유한다.

벼루의 명칭은 『고려도경高麗圖經』(1123)에 ‘연왈피로硯曰皮盧’, 『훈민 정음(해례본)』(1446)에 ‘벼로爲硯’, 『두공부시경언해杜工部詩經諺解』(초간본, 1481)에 ‘삼협三峽 중中에 봉사奉使야 긴 됫람 부러셔 돌 벼로 얻도다’라고 하여 벼루를 ‘벼로’라고 기록한 예가 있다. 『임하필기林下筆記』 에도 ‘벼루硯는 피로皮盧’라고 하였다. 벼루의 별칭으로 ‘석우石友’라고 의인화하여 말하기도 하였다. 그만큼 문자생활에 필수적으로 늘 함께하였던 것이다.


문방사우의 꽃, 벼루의 종류
벼루는 문방사우 중에서도 제일 중요하다. 벼루의 종류와 명칭은 산지와 재질, 형태와 용도, 모양과 문양, 용도 등에 따라서 분류하고 호칭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이 세 가지를 혼합해서 부르기 때문에 그 명칭은 나열할 수 없을 만큼 많다. 벼루의 종류와 명칭은 크게 여섯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벼루의 원석 산지에 따라서 남포연, 위원연, 안동연, 해주연, 장수연, 정선연, 단양연, 충주연 등으로 분류한다.
둘째, 벼루의 재질에 따라서 흙으로 구워 만든 토연土硯, 유약을 발라 구운 도연陶硯, 돌로 만든 석연石硯, 주물로 만든 동연銅硯, 옥으로 만든 옥연玉硯, 나무로 만든 목연木硯, 벽돌로 만든 전연塼硯, 기와로 만든 와연瓦硯, 진흙으로 구워 만든 니연泥硯, 옻칠한 칠연漆硯 등으로 분류한다.
셋째, 벼루의 형태에 따라 분류한다. 형태는 원형, 타원형, 사각형, 육각형, 팔각형, 십이각형 등과 여러 가지 사물의 모양을 본뜬 용연龍硯, 구연龜硯, 두꺼비연, 일월연, 초엽연, 팔궤연 등과, 풍風자의 모양을 본뜬 풍자연風字硯이 있다. 조선 말기에는 문구를 같이 담아 사용할 수 있게 만든 문방연이 출현하였다.
넷째, 문양의 조각에 따라 분류한다. 문양은 여러 가지로 다양한데 동물문은 봉황, 용, 거북, 학, 잉어, 게, 오리, 개구리, 새, 다람쥐, 호랑이 등이 있고, 식물문은 매화, 난초, 머루, 감, 복숭아, 오이, 파초, 하엽, 국화, 대나무 등이 있다. 그 외에 도가적인 십장생, 산수 등을 조각한 벼루가 있다. 그리고 성리학을 표현한 태극, 팔괘, 불교문화를 새긴 안상眼象, 아지亞池, 아자亞字, 상족象足, 사자족, 태양을 상징하는 회문回文, 일월연 등 다양한 벼루가 있다. 또한, 문양을 새기지 않고 고사리화석처럼 화석에 벼루를 만들어 사용한 화석연도 있다.
다섯째, 연지硯池의 모양에 따라 분류한다. 연지의 형태에 따라 유교의 철학이 담긴 심자연心字硯, 일자연一字硯, 태극연太極硯, 불교적인 만자연卍字硯, 안상연眼象硯, 아자연亞字硯, 아지연亞池硯 등이 있다. 그밖에도 횡월연橫月硯, 문자연門字硯, 쌍아연雙芽硯, 운지연雲池硯, 우각지연牛角池硯 등으로 구분한다.
여섯째, 벼루의 용도에 따라서 분류가 가능하다. 벼루의 크기가 큰 대형의 서원연書院硯, 서당연書堂硯과 소형의 휴대용 벼루인 행연行硯, 화장에 사용한 화장연, 화가들이 사용한 팔레트 모양의 회화연繪畵硯 등 다양한 용도에 따라 벼루를 제작하여 사용하였다.


다양한 형태로 발전한 벼루
한국의 벼루는 삼국시대부터 시작된다. 삼국시대에는 흙으로 구워 만든 토연土硯과 유약을 발라 구운 도연陶硯이 사용되었다. 유약을 바르지 않고 흙으로 구운 토연과 유약을 발라 구운 도연 형태는 유사하나 질적으로 다르다. 토연은 석연에 비하여 연당硯堂이 거칠어 먹의 갈림도 당연히 거칠다. 그리고 흡수력이 강하여 먹을 갈아 다른 그릇에 따라서 사용하는 모습이 고구려의 <집안사신총수신도集安四神塚燧神圖>의 고구려 필신筆神에 잘 표현되어있다. 그 후 도자의 발달과 함께 도연이 사용되었다. 도연은 유약의 종류와 태토에 따라 녹유(구리에 납을 매용제로 하여 녹색을 띠게 만든 저화유低火釉. 또는 그것을 칠하여 만든 도자기 제품.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유약으로, 중국 당송唐宋 시대에 화북 지방에서 널리 사용하였다.)가 있고, 청자와 백자가 있다. 석연石硯은 삼국시대부터 사용되었지만 고려시대에 와서야 유행되었다.

벼루 모양은 주로 원형과 사각형이다. 토제연의 다리는 대개 짐승의 다리로 표현된 원형수족연圓形獸足硯으로 코끼리의 발인 상족象足과 사자의 발인 사자족獅子足이 있다. 서사문화는 불교의 수용과 밀접하고 사경문화를 동반한다. 원형수족토연은 불교의 사경문화와 함께하는 것으로 코끼리의 발이나 사자의 발로 벼루를 받들고 있는 모습은 사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자가 석등을 받치고 있는 모습의 사자석등과 같은 형태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같이 우리나라에서는 일찍이 불교문화와 함께 삼국시대부터 토제원형수족연이 사용되었다. 연족은 삼족과 사족, 오족, 다족형태 등이 있다.

고려시대에는 석연이 유행하였으며 초기에는 주로 풍자연을 사용하였으나, 중기부터는 목탁자석연이 유행하였다. 현재 전하는 일반적인 벼루의 형태는 모두 목탁연에서 비롯된 것이다. 특히 고려시대에는 자석산지가 개발되어 자석연이 유행하였고 청자의 발달로 청자연이 사용되었다. <고려청자철화백퇴화두꺼비행연高麗靑磁鐵化白堆華두꺼비行硯>은 고려시대 청자의 발달로 제작된 결과물이다.

조선시대에는 유교중심의 사상적 변화로 벼루의 문양과 형태가 매우 다양하게 발전하였다. 또한, 조선 초기부터 지방교육기관인 향교의 설립으로 교육이 대중화되었고, 교육의 대중화는 많은 문구의 발달을 가져왔으며 그래서 벼루도 조선 초기에 가장 아름다운 벼루가 제작되었다. 각종 물고기는 잉어를 나타낸 것으로 용과 함께 등용문과 관련이 있는 문양이다. 각종의 길상문으로는 부귀와 수복을 나타내는 문양이 사용되었다. 특히 사람의 다섯 가지 행실을 나타내는 오상五常 즉 인, 의, 예, 지, 신 그리고 다섯 종류의 절개 있는 식물로 선비가 본받을 만한 식물인 오우五友로는 매화, 난, 국화, 대나무, 연꽃 등이 있고, 다섯 가지의 깨끗한 사물로 선비들이 즐겨 그리는 것으로 오청五淸인 소나무, 대나무, 매화 ,난초 ,돌 등이 있으며, 우주 간에 쉬지 않고 운행하는 다섯 가지 원리로 오행五行인 쇠, 나무, 물, 불, 흙 등이 있어서 이들을 대상으로 여러 가지 문양이 조각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자석행연紫石行硯과 위원의 화초석연渭源華草石硯이 유행하였다. 그래서 외국 사신들이나 신하들에게 선물하는 벼루에는 자석연이 많다. 그러나 가장 아름답기로는 위원의 화초석이요, 가장 좋은 재질은 보령의 남포오석이다. 위원 화초석은 위원 압록강에서 출토되는 석재로 자석과 녹석이 층을 이루고 있으며 이를 이용한 아름다운 문양의 조각으로 최고의 명품들을 만들었다. 남포오석은 <백제남포오석목탁행연百濟藍浦烏石木鐸行硯(부여쌍북리 출토)>이나 <백제남포오석풍자연百濟藍浦烏石風字硯 (부여능안골고분군 출토)>에서 그 연원이 매우 오래됨을 알 수 있다. 남포오석연의 명품으로는 명재 윤증선생이 사용하던 벼루로 전하는 <조선남포오석일월산수문양면연藍浦烏石日月山水紋兩面硯>을 꼽을 수 있다.

특히 조선시대의 벼루는 문양과 모양에 사상과 문화가 있다. 즉 당시의 생각과 생활상이 담겨있다. 때문에 현재의 우리에게 조상들의 미래에 대한 희망과 생활상과 문화를 말해 준다. 시대에 따라 생각하였던 그 내용들을 벼루의 형식과 문양에 표현하였다. 이런 벼루의 예술은 당시 민중예술의 한 단면이다.


문예 부흥기에 기여하다
한국 벼루는 조선 세종부터 성종 시기의 문예 부흥기에 많은 발전이 있었다. 숙종부터 영조, 정조에 이르는 풍요로운 안정기에 매우 다양한 문양과 형식의 고급벼루가 많이 만들어졌다. 벼루의 변천과 발전과정을 통하여 보아도 정치가 안정되고 경제가 풍요로워야 문한이 발전하였고, 문한이 발전해야 문예가 부흥하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불교의 유행과 문예부흥은 벼루의 발달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오석목탁민연이 주로 사용되었다. 이는 시대별로 제도적, 경제적인 상황이나, 사상적인 유행에 따라 변모되는 양상을 띤다.

1) 후세에 전하기 위함이나 공양, 축복을 받기 위해서 경전을 실은 문장을 베끼는 일.

글┃사진ㆍ손환일 서화문화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