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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비명墓碑銘; epitaph

이산저산구름 2011. 8. 25. 16:41

 

 

묘비명墓碑銘; epitaph 

R.I.P는 REST IN PEACE '편히 잠들다'의 약자다.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Memento mori)

모든 사람은 죽는다. 최근에는 많은 사람들이 화장을 하는 추세지만 사람이 죽어서 무덤에 묻힐때 묘비를 세운다. 그 묘비에는 그 사람의 인생을 함축하는 유언을 담는 경우가 많다. 몇년전에 선종하신 김수환 추기경은 유언으로그동안 사랑 많이 받아 감사하다. 사랑해라! 그리고 용서해라.’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묘비명(墓碑銘; epitaph)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pro vobis et pro multis)’라는 사목모토와 함께 <시편> 23 1절 중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이 없어라.’라고 적을 것이라고 한다.

‘잘 먹고 잘 사는웰빙이 문제 되는 시기에 김수환 추기경으로 인해 <잘 죽는다는 것>(the well-dying)의 진정한 의미를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이 늘었다고 한다.


아직도 살 만한 세상이라는 것에 대해서

『오뒷세이아』(11 487-8)에 하데스로 찾아간 오뒷세우스가 아킬레우스에게 아카이안인들이 생전에 그대를 신처럼 존경했고, 지금은 죽은 자들 가운데 가장 강력한 통치자라고 위로하면서그러니 아킬레우스여, 죽었다고 슬퍼하지 마시오.’라고 위로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자 이 말을 받아 아킬레우스는나에게 죽음을 설득하려 하지 말라라고 말하면서, 차라리 죽은 자들을 통치하느니 농토도 없고 재산도 없는 사람 밑에서 종살이나 하고 싶다고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얘기다. 그러나 인간의 운명이란 이미 죽기로 정해진 것이니 어찌하리.

에우리피데스는삶이 죽음이고, 죽음이 삶인지 그 누가 알랴라고 했다. 종교 개혁가 쯔빙글리는 창에 찔려 죽어가면서이제부터 난 자유다.’라고 말했다.

괴테는 나에게더 많은 빛을’, 칸트는좋다(Es ist Gut)’라고 했다. 20세기 최고의 철학자였던 비트겐슈타인은 최후까지 자신을 돌봐주던 의사 베반 박사에게멋진 삶을 살았다고 그들에게 전해주시오(Tell them I've had a wonderful life)”라고 했다.

아이폰1의 몰락을 희화한 묘비명

문필가들의 묘비명(墓碑銘; epitaph)

셰익스피어 묘비에는누구든 이 돌을 건드리지 않는 자는 축복받으리오. 내 뼈를 옮기는 자는 저주받으리다라고 적혀 있다고 한다. 천의무봉(天衣無縫)을 자랑하는 셰익스피어의 글치고는 어울리지 않는다. 실제로 그가 썼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고 한다.

작가 스스로가 쓴 묘비문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보물섬>의 작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시라고 한다.

"드넓은 별이 총총한 하늘 아래/ 무덤 하나 파고 나를 눕게 하소서/ 바다에서 고향 찾은 선원처럼, 산에서 고향 찾은 사냥꾼처럼."

우리나라에는 <괴상한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던 <와인즈버그, 오하이호>의 작가 셔우드 앤더슨도 "죽음이 아니라 삶이야말로 위대한 모험이다"라는 말을 자신의 묘비문으로 남겼다고 한다.

예이츠의 묘비에는삶에, 그리고 죽음에 차가운 눈을 던지라/ 마부여 지나가라! (Cast a cold eye, on life, on death. Horseman, pass by! - "Under Ben Bulben" by W. B. Yeats)"고 씌어 있고, 에밀리 디킨슨의 묘비에는 아주 짧게 "돌아오라는 부름을 받다."라고 적혀 있다고 한다.


다른 몇 분들의 유언과 묘비명

여성 패션의 창시자인 코코 샤넬은 87세에 생을 마치기 전 "결국 사람은 죽는구나"라고 말했다고 하고, 맑스는 유언에 관한 유언을 남겼다. “유언이란 살아서 할 말이 별로 없었던 좀 바보 같은 사람들을 위한 것 같네.”라고.

부처는태어나는 모든 사물은 덧없으며 결국 죽는다.”라고 말했고, ‘삶이 무엇인지도 모르는데 항차 죽음을 어찌 알리요라고 했던 공자는 “지는 꽃잎처럼 현자는 그렇게 가는 구나라고 끝맺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폭군의 대명사인 네로는 어처구니없게도한 예술가가 가고 세계는 혼란스러워지는구나라 했고, 칭기즈칸은 "죽음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충분히 잠을 잤구나!"라고 말한 뒤 저세상으로 갔고, 대영제국의 초석을 마련한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내가 가진 모든 것은 아주 짧은 한순간을 위한 것이었어"라고 했다고 한다.

종교개혁을 일으킨 마틴 루터는 "우리가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빈털터리라는 것은 사실입니다."라는 유언으로 깨달음을 전했다.

철강왕 카네기는 "여기, 자신보다 현명한 사람을 주위에 모으는 기술을 알고 있었던 한 인간이 잠들다."란 비문을 썼고,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거장 미켈란젤로의 묘비에는 그가 쓴 시가 새겨져 있다고 한다. "아무것도 보지 않고 아무것도 듣지 않는 것만이 진실로 내가 원하는 것이라오. 그러니 제발 깨우지 말아다오, 목소리를 낮춰다오."

영국의 작가 버나드 쇼는 자신의 묘비명을 이렇게 적었다.

"나 우물쭈물하다가 이렇게 될 줄 알았다."

(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

아르키메데스의 묘비에 새겨진 그림

 

고대 그리스의 과학자 아르키메데스의 묘비엔 원기둥에 내접하는 구의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연애론적과 흑을 쓴 프랑스 소설가 스탕달의 묘비명은살았다, 썼다, 사랑했다.”란 세 마디라고 한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썼던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은나는 바라는 것이 없다. 나는 두려운 것이 없다. 나는 자유롭다.”이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묘비명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장미여, 아 순수한 모순이여, 기쁨이여 그 많은 눈꺼풀 아래에서 누구의 잠도 아닌." (Rose, oh reiner Widersprluch, Lust niemandes Schlaf zu sein unter soviel Lidern.)

프리드리히 니체의 묘비명엔이제 나는 명령한다. 차라투스트라를 버리고 그대들 자신을 발견할 것을을 이라고 적혀 있다고 한다.


우리의 묘비명에는 무엇이라고 적을 것인가

정작 인간에게 남겨진 것은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웰빙이 문제가 아니라, <잘 죽음>이 문제인 것이다. 운명을 피할 수 없다면 주어진 운명에 복종하면서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즐겁게 살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리라. 세네카는운명은 순순히 따르는 자를 이끌고, 순순히 따르지 않는 자를 억지로 끌고 간다.”라고 했다.

고대 헬라스인들은 헤브라이인들과 달리 이런 점에서 매우 현실적이다. 그들은 이승에서보다 더 아름다운 삶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차 안의 세계에서 자신들의 이상을 꿈꿨고, 그 아름다움을 실현하고 만들려고 노력했던 사람들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어떻게 가꿔가고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 만일 살면서 자신의 묘비명에 무엇이라 적을 것인가를 생각한다면 민족을 배반하고, 나라를 팔아먹고, 민중을 억압하고, 부정을 저지르고, 당장의 자신의 정치적 안위만을 걱정하는 정치인들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죽은 뒤에 부끄러움을 기록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거짓은 언젠가 밝혀지는 법이고, 진리와 정의는 늘 승리하기 마련이다. 죽음 앞에 승리하는 자는 없다. 죽음보다 더 공평한 하나님의 정의는 없다. 죽음 앞에서 자신의 위선과 거짓이 벗겨질 때 오는 부끄러움을 이겨내기 위해서라도 자신의 묘비명에 무어라 적을 것인지를 생각하며 살아가는 정치인들이 많이 생겨나기를 바란다.

나 자신을 비롯한 우리 각자도 이런 마음으로 살아가야 할 것이라 믿는다. 이런 진지한 삶의 열망이 고 김수환 추기경을 추모하기 위해 명동 성당에 모여든 추모 물결 속에 어울린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소크라테스는철학은 죽음의 연습이라고 했다. 그나저나 난 무어라고 내 묘비명을 적을 것인가? 버나드 쇼처럼이렇게 어영부영 살다가 이럴 줄 알았다.’라고 적을까?

위대한 신학자 어거스틴(Augustine 354-430)이 자신의 저서 <신국>(The City of God)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생의 종말은 가장 긴 인생도 가장 짧은 인생과 동등하게 만든다....

죽음은 그 이후 징벌이 있을 때에만 불행이 된다.

그렇다면 죽음을 앞둔 사람들은 죽음이 무엇인가를 묻지 말고,

죽음이 그들을 어디로 데리고 갈 것인지를 물어야만 한다."


이 얼마나 놀라운 통찰인가?

죽음의 순간에도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죽음의 '정체'가 아니라 죽음의 '방향'(사랑하는 이들이 갔고 또 내가 가야 할) 이 아닐까?

이렇듯 죽음 건너편을 생각하고 사는 이들에게 있어 죽음은 마침표가 아니라 단지 쉼표'(Death is not a period - it's only a comma.)일 뿐이다.

 

인생이란 평생을 걸려 ""라는 집을 짓는 과정과도 같다.

그 집이 완성되면 우리는 무덤으로 들어가고 그 집은 나의 묘비명이 된다.

김혜남[묘비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