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웅진(고마나루)을 찾아간 시간여행

이산저산구름 2010. 5. 12. 12:24

 

 

          웅진(고마나루)을 찾아간 시간여행

                                               
                   최 선 자


 2009년 11월 14일. 겨울 문턱에 이르러 잠깐의 추위가 엄습한 11월의 토요일. 혼자만이 즐길 수 있는 꿀맛 같은 휴식을 찾아 곰나루의 전설이 내려져오고 있는 충남 공주시, 웅진(熊津)으로 향했다. 인천에서는 무려 2시간 30분의 거리, 도착하고 보니 벌써 점심을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버스에서 간단하게 점심을 해결한 나는 곰나루에 가기 전에 대표적인 공주의 유적지 두 곳을 먼저 둘러보기로 했다. 버스터미널을 빠져나오니 저 멀리 공산성의 위치가 확인되었다. 금강을 가로지르는 금강교를 건너 공산성에 도착하니 높은 언덕 위에 쌓아올린 산성의 모습을 비로소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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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진 백제의 토성으로 축조되어 조선시대에 석성으로 고쳐진

이후 공주의 대표적인 유적지로 자리잡고 있는 공산성(公山城)>
 

사적 제12호인 공산성은 백제가 웅진, 곧 공주에 수도를 두고 있던 때에 토성(土城)으로 지어져 조선시대에 석성으로 고쳐진 이후 줄곧 같은 자리에서 공주의 역사와 함께 한 유서 깊은 곳이다. 백제 멸망 직전 의자왕이 잠시 머물기도 했고, 통일신라 때에는 김헌창의 난(822)의 거점이 되었으며, 조선시대에 이르러 이괄의 난(1623)으로 인해 인조가 피난했던 곳이기도 하다. 커다란 역사적 풍파들을 이겨내고 공주시내 한 가운데에서 위엄을 갖추고 서 있는 공산성을 한참 동안이나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찬란한 문화를 영유했던 옛 백제 사람들의 흔적은 거의 사라졌지만, 나는 무한한 상상력을 발휘하여 1400~1500년 전으로 기억을 되돌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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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성에서 바라본 금강 전경,

낮게 드리운 구름과 단풍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한쪽은 금강을 또 한쪽은 공주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공산성은 성곽밟기를 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금강 쪽을 향해서 성을 돌기 시작했는데 무지막지한 초겨울 한파의 칼바람이 내 몸을 사정없이 쳤다. 휘청거리는 몸을 간신히 추스르고 머리 모양새도 제대로 갖춘 후 다시 출발했다. 간간히 사람들이 오고가는 모습과 사진 찍는 모습이 보였다. 4분의 1정도를 돌았을까? 강한 칼바람에 내 몸 하나 지탱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날을 잘못 택했나 싶었지만 문득 이보다 더 심한 추위에도 같은 길을 걸었을 옛 병졸들의 모습이 보였다. 얼마 오지도 못했는데 이렇게 지쳐서는 안 된다는 각오로 다시 한 번 힘을 내서 걸었다. 그렇게 1시간을 걸었을 무렵 입구인 금서루(錦西樓)가 보였다. 끝이 보이는 것이었다. 환호성이 나오려 할 즈음 공주 시내 한 복판에 큰 문이 세워져 있는 것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무령왕릉 입구를 표시하는 대형 문이었다. 나의 두 번째 답사지의 경로가 공산성 위에서 단번에 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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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산리고분군 올라가는 길에서 본 무령왕릉 전경.

따사로운 햇살이 비추는 곳에서 평온한 휴식을 취하고 있던

무령왕이 1400년만에 모습을 드러낸 역사적인 장소이다>
 

방금 전에 본 큰 문을 따라 약 1km를 걸어 올라가니 대규모의 고분군이 나타났다. 명칭은 송산리고분군. 이들 고분군 중에 무령왕릉이 있다. 산 능선을 따라 늘어진 소규모의 고분군은 거대한 신라의 고분군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송산리고분군은 대체로 백제가 웅진으로 수도를 옮긴 문주왕부터 다시 부여로 수도를 옮긴 성왕 이전 무령왕까지의 왕족들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주인공이 밝혀진 무덤은 오로지 무령왕릉뿐이다. 우리나라에서 무덤의 주인공이 분명하게 확인되는 예는 거의 없다고 하지만 무령왕릉은 지석을 통해 그 피장자가 무령왕과 왕비라고 확인되었다. 게다가 왕릉의 구조와 형식이 중국 남조와 거의 같아 당시 중국과의 교류를 확인할 수 있으며, 출토된 유물에서 무령왕대의 찬란했던 백제 문화를 엿볼 수 있다. 1971년 6호분의 배수로 공사 중 발견된 이 왕릉에서 쏟아져 나온 역사적 정보는 1400년의 세월을 거슬러 백제 무령왕을 현대로 초대하게 된 것이다.

송산리고분군의 내부와 출토된 유물을 확인할 수 있는 모형관을 둘러본 후 안내표지판을 따라 무령왕릉을 향해 올라갔다. 나지막한 고분들이 줄지어 나열된 중간 정도에 이르니 무령왕릉이라고 표시된 안내판과 입구가 나왔다. 하지만 아쉽게도 직접 안으로 들어가 실물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훼손이나 붕괴의 위험이 있어서였을까? 입구에서부터 무령왕과의 만남이 무심하게 좌절되자 괜히 절대로 들어가지 말라는 입구의 안내문이 야속하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아쉽게 빗겨간 만남 후에 다가올 황홀한 만남을 기대하며 발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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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녀의 전설이 깃들어 있는 곰나루의 전경.

곰의 원한이 아직도 서려있는 듯 조용히 흘러가는 강물이 애처롭다>

 

오후 4시, 무령왕릉을 나와 택시를 타고 간 곳은 곰나루(고마나루)다. 택시기사님에게 곰나루의 곰사당으로 가달라고 부탁했지만 이상하게도 곰나루에는 곰사당이 없다는 대답을 들었다. 지난 여름 한국의 신화를 주제로 쓴 책(우리 신화의 수수께끼, 조현설)을 읽었다. 첫 장을 넘기자마자 눈이 띈 것은 공주 곰나루의 곰사당이었다. 곰나루 전설이 깃든, 그리고 공주의 옛 이름인 웅진(熊津)의 기원이 된 이곳에 세워진 곰사당을 모르신다니… 어쩔 수 없이 웅비탑으로 향했다. 약 5분 뒤 도착한 웅비탑, 그리고 곰나루. 그러나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금강 줄기를 확인할 수 없었다. 무작정 큰 도로를 따라 걸었다. 그러다보니 오른편으로 강이 보이기 시작했다. 곰나루의 전설의 곰이 자신을 찾아온 손님을 안내하듯이 한 번에 찾아낸 곰나루. 곰나루에는 다음과 같은 슬픈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한 어부가 강에 물고기를 잡으러 갔다가 암곰에게 사로잡혀 굴에서 살게 되었다. 몇 해 동안 어부와 곰 사이에서는 새끼 두 마리가 태어났다. 곰이 잠시 굴을 비운사이 어부는 자신의 고향과 가족이 생각나 도망가고 말았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곰은 새끼를 데리고 와 떠나는 어부를 붙잡으려 했지만 어부는 무정히 가버렸다. 곰은 화가나 새끼를 모두 강에 던지고 자신도 강물에 몸을 던졌다. 그 후 그곳에는 풍랑이 일어 어부들의 배가 자주 뒤집혔다. 사람들은 곰의 원한이 서려서 그러니 사당을 지어 그 혼을 위로해야 한다고 했고, 사당을 지은 후에는 그러한 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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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나루 옆에 위치한 곰사당.

안에는 돌곰이 홀로 외로이 사당을 지키고 있다>
 

곰나루 안으로 들어가자 인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곰사당 근처에 식당이 있었지만 아마도 그 손님들은 곰나루를 찾아온 것이 아니었으리라. 곰나루에 내려갈 길을 찾다가 우연히 발견한 것은 ‘熊津水神之壇’이었다. 아마도 곰나루 전설의 주인공인 곰을 위해 세운 단(壇)인 듯 했다. 흥미로웠던 것은 여러 나라, 종족들에게서는 곰이 달을 상징한다(겨울에 동면을 취하기 위해 사라지는 곰이 매월 3일 동안 모습을 감추는 달과 같음에서 착안). 달은 물을 관장하는 천체로 곰나루 전설의 곰은 아마도 이 금강의 수신(水神)이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연결 짓고 보니 우리의 옛 사람들의 사고가 보편적인 것에 귀결됨에 놀라웠다.

내가 찾아간 곰나루는 평온하고 조용함 그 자체였다. 강변의 모래사장 위에 흩어진 사람들과 개의 발자국이 이전에 누군가 찾아왔다는 것을 알렸지만 지금 이 순간 이곳에는 나 혼자였다. 귓전을 때리는 겨울의 날렵한 바람이 그 옛날 이 강물에 몸을 던진 곰의 혼이 와서 닿는 듯 시리고 아팠다. 강 건너편 바위들이 다들 의미가 있는 듯 서있고, 물결은 바람에 휩쓸려 힘차게 흘러가고 있었다. 갑자기 힘센 바람을 못 이기고 저 강물에 빠지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불길함까지 몰려왔다. 그런 생각을 하니 곰나루 전경, 바람 소리 조차 스산하게 느껴졌다. 원한을 품고 죽은 곰의 혼이 나를 부르듯이….

곰나루를 걷다보니 아직 곰사당에 안 갔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천천히 강바람을 느끼며 걷고 있던 나는 조금 발길을 재촉하여 곰사당으로 향했다. 식당 한 쪽 끝에 자리한 조금마한 사당. 사당 안에는 곰 석상 하나가 모셔져 있었다. 진품은 국립공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했다. 곰의 원한이 다시금 생길지도 모를 정도로 초라한 사당, 웅진(熊津)이라는 명칭이 기원했다는 얘기가 궁색할 정도로 단촐한 사당을 보고 가슴 한 편이 뭉클해졌다. 앞으로 곰나루가 관광단지로 개발된다고 하니 조금은 더 발전된 곰나루를 기대해 본다.

 

혼자 훌쩍 떠나게 된 이번 답사는 지난 여름부터 계획된 것이었다. 곰나루에 얽힌 전설을 알고부터 공주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을 갖고 있던 터에 마침 기회가 생긴 것이다. 이 기회는 비록 몸은 추웠지만 마음은 넉넉하고 따뜻해진 소중한 시간이 되었다. 이야기가 함께한 나의 초겨울의 마지막 답사가 끝나갈 무렵, 돌아오는 차 안에서 미처 읽지 못한 유적지 리플릿을 꺼내들었다. 그 안에는 오늘 내가 풀어내지 못한 더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어, 또 한 번의 답사를 기약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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