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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갚지 못한 인생의 빚(길어온 글)

이산저산구름 2009. 9. 11. 11:53

아직 갚지 못한 인생의 빚
[내인생의 첫수업]
김성훈
고1 때였다. 중간고사 독일어 답안지를 한참 써내려 가는데 불쑥 교무주임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험상궂은 얼굴로 내 이름을 부르더니 의무금을 석 달째 내지 않았으니 시험 볼 자격이 없다고 내 시험지를 북북 찢어 버린 후 밖으로 내쫓았다.

100점이 예상되던 시험을 망치게 된 나는 망연자실하여 한참 교실 밖에 서 있었다. 그 때 시험 감독을 맡으셨던 오종근(吳宗根) 한문 선생님이 다가 오시더니 편지 쪽지를 학교 근처에 사시는 선생님 댁 사모님께 전해 달라고 하였다. 우리 반 친구 오형철 군의 아버님이기도 하고, 평소 나를 무척 예뻐해 주신 분의 심부름이라 눈물을 훔치며 곧장 달려갔다. 쪽지를 읽어 본 사모님께서 누런 봉투에 돈을 담아 나에게 주시며 빨리 서무과에 가서 의무금을 내라고 하셨다. 내 인생은 이렇게 선한 분들에게 빚을 지는 것으로 시작했다.

밀린 의무금 내주신 선생님

그 후 독일어를 제외한 나머지 과목의 시험을 마저 볼 수 있었던 나는 혼자 속으로 꼭 성공하여 이 은혜를 나 같은 어려운 사람들에게 갚겠노라 다짐하였다. 훗날 내가 대학교수 초년병이 되었을 때 선생님께서 암으로 투병 중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병상에 달려가 고1 시절의 감사 말씀과 함께 얼마간의 돈을 약값에 보태 쓰시라고 간곡히 올렸다. 선생님의 눈망울에 이슬이 맺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선생님은 귀천(歸天)하셨다. 그 때 그 눈망울에 맺힌 이슬의 뜻은 ‘너도 어려운 사람을 만나면 주저 말고 조용히 베푸는 인생이 되라’는 가르침이었다. 아직도 그 약속을 잘 지키지 못하고 있어 선생님께 노상 송구스럽다.

그 사건을 계기로 나는 고교시절 내내 독일어 공부를 열심히 하여 마침내 니체의 철학서까지 독파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다가 시성(詩聖) 괴테의 문집에서 ‘눈물의 빵을 먹어보지 못한 사람과는 더불어 인생을 논하지 말라’는 구절을 읽었다. 물질적 빈곤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 정신적 가난이다. 배고픔이야 일정기간이 지나면 잊혀 지겠지만 영혼과 정신이 찌들면 그 인생은 어쩔 수 없이 나락(奈落)에 떨어질 것이 아닌가.

남의 가난, 남의 배고픔, 남의 슬픔에 동참할 여유가 없는 인생은 참으로 불쌍하다. 도둑도, 깡패도, 심지어 탐관오리 사기꾼들도 자기 가족들만은 소중히 감쌀 줄 안다. 그렇다고 자기들만의 행복이 세상의 다른 사람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그래서 고등학교 2학년이 되자 나는 사람 된 자라면 마땅히 내적으로 고매한 인격과 이타(利他)정신을 충실히 연마하고, 외적으로는 어렵고 약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선행에 빛나는 훌륭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굳게 믿게 되었다. 처음엔 같은 또래(학년)의 고2 아홉 명으로 ‘한얼’ 모임을 결성했다. 큰 뜻의 한국인이 되자는 모임이었다.

3학년에 오르면서 한 학년을 건너뛰어 신입생 10명을 더 뽑아 숫자를 늘려 나가기 시작했다. 방과 후엔 늦게까지 남아 학교와 주변 청소를 자원했고, 아침엔 일찍 나와 공부와 책읽기를 열심히 했다. 주말이면 다시 모여 교양과 인격수련 그리고 새 지식을 쌓는데 전념 하였다. 당시 우리 한얼 모임이 자주 암송하던 경구(警句)는 “사람이 사람이면 다 사람이냐, 사람이 사람다워야 사람이 사람이지”이었다.(이 한얼 모임은 서울대 농대까지 이어졌다)

당시 우리들끼리 만의 인격수양과 선행 수련에 한계를 느껴 목포 예총회장이셨던 차재석(극작가 차범석 선생님의 아우) 선생을 찾아가 지도해 주시기를 간청하였다. 차 선생은 맨 먼저 우리들에게 내적 충실의 법어(法語)를 일러 주었다.

소승불교(小乘佛敎)의 수련 지침인 ‘수(守) 파(破) 리(離)’이다. 먼저 기존의 진리와 지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지키고守,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하면 옳고 그름을 깨쳐 나가며(破), 더욱 정진하여 독자적인 사상과 주의·주장을 이루어 독립(離)해 떠나(成佛)라는 가르침이다.

우리들은 수守의 단계에 있는 학생들이었기 때문에 섣부른 주의, 주장을 펴지 않고 되도록이면 모든 기존 이론을 더 넓고 깊이 받아들이자는 입장을 취하였다. 우선은 끊임없이 독서하고 토론하며 인격 수련을 거듭하였다. 아무리 고단하고 길이 없는 미개지라 할지라도 ‘걷고 또 걸으면 언젠가 사람들은 그것을 길이라고 부르며 걸어 갈 것’이라는 신념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김성훈
대학 1학년 때인 1958년 겨울방학을 맞아 전남 진도 임회면 용산마을에서 농촌봉사활동을 하던 모습.
판사 지망에서 농촌운동가로

보다 큰 내 인생의 전기(轉期)는 고교 졸업 3개월을 앞두고 일어났다. 당시 학도호국단 부대표이었는데, 학교장의 부정부패 행위와 반 교육자적 행동이 너무 잦아 전 학생들이 스트라이크를 일으켰다.

그 대표자로서 나는 무기정학 처분을 당했다. 재차 동조 파업하려는 동료 학생들을 진정시키고 나는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 왔다. 소식을 먼저 들으셨던지, 아버지께서는 꾸짖는 말씀 대신 친구들과 함께 산수 좋은 곳으로 여행을 다녀오라고 권하셨다. 그래서 찾아 간 곳이 오늘날 무등산 뒤쪽의 광주 충장동과 담양 별뫼(星山) 일대이었다.

이곳에서 조선조의 가사문학권과 인근 화순 동복의 적벽강(赤壁江) 일대를 도보로 여행했다. 고전문학에서 배웠던 면암, 송강, 양산보, 정암 조광조 선생 등의 유적과 유물 등이 그 때까지만 해도 때 묻지 않고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어 문자 그대로 선인(先人)들의 호연지기(浩然之氣)와 이상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여행 중에 정암 선생의 천재의식이 도리어 죽음을 불러들였음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민초들 속에서 민초들과 함께 세상을 조금씩 고쳐 나가려는 낮은 자세가 아니고는 세상을 변혁시킬 수 없다는 교훈을 깨친 것이다.

그런 이유로 그 때까지 준비해 온 법대 진학 계획을 바꿔 농대를 가기로 결심하였다. 모두들 삶의 빚을 농업, 농촌, 농민들에게 지고 살면서도 그들의 고충과 고민은 모른 채 하고 있었다. 그 무렵 출판된 성천 류달영 선생님의 <새 역사를 위하여>라는 책은 덴마크의 그룬드비히와 달가스라는 훌륭한 지도자들이 농민사랑의 실천으로 나라와 겨레를 폐허에서 구해 낸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었다.

이 책이 나의 농대 행 결심을 부추겼다. 새로이 자연계 입시공부를 독학하고 있던 중 입시 3주를 앞두고 무기정학이 풀렸고, 나는 마침내 농학 연구의 중심인 수원행 완행열차에 몸을 실었다. 그 길이 농업경제학도로서 내 인생의 시작이었고, 지금까지의 나의 숙명이 될 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지나 놓고 보니 내 인생에 있어 ‘농’(農)자와 ‘임’(林)자를 빼면 별로 남는 것이 없다 할 만큼 일생을 농업·농촌문제와 환경생태계·농민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며 살아왔다. 내 심중에는 ‘언제나 이 세상에 좋은 일을 하면서도 홀대 받는 무수한 민초들과 농민들을 위하며 살아야 겠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그 초심은 지금도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 같다. 

김성훈 환경정의 이사장·전 농림부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