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 그 찬란한 조경문화의 역사
궁의 조영은 1392년 왕위에 오른 태조 이성계가 국도國都를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기면서 시작되었으며, 유교를 국교로 정한 조선은 16, 17세기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의 국난을 겪음에도 불구하고 고유한 조경문화를 꽃피우게 되는데, 이때 조영된 궁궐 중에서 조경적인 대상이 되는 것은 정궁인 경복궁과 이궁인 창덕궁, 창경궁으로, 경복궁에는 경회루지원과 교태전 후원인 아미산원, 자경전 꽃담, 향원정 지원 등이, 창덕궁에는 부용지, 애련지, 반도지, 옥류천 등이, 창경궁에는 통명전 지원 등이 남아있다.
경회루 지원은 태종 12년(1412)에 외국사신의 영접이나 유생에 대한 친시와 관사, 군신의 연회장으로 조영되었으며, 약 128×113m 크기의 방지와 3개의 방도로 이루어져 있는데 제일 큰 섬에 누樓건물이 위치하며, 돌난간이 있는 세 개의 석교로 연결되어 있다. 정원으로서 경회루의 특징은 직선적인 선 처리와 기하학적 배치 등의 단조로운 조경기법으로 이루어졌지만, 시각적으로 밝고, 웅장한 느낌을 주는데 있다.
경회루의 동북쪽에 인접해 있는 계단상의 화계를 아미산원이라고 한다.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 후원으로 축조된 아미산원은 왕비의 산책과 관상을 목적으로 조영되었으며, 경회루 연못을 팔 때 나온 흙을 이용하여 평지상에 인공적으로 축조한 동서 약 55m, 남북 약 30m의 넓이에 높이 약 3m에 4단의 화계를 조성하고 각 단에 괴석과 석지, 물확, 해시계, 그리고 매화, 모란, 앵두, 배꽃, 반송, 철쭉 등의 화목을 재식하여 꾸밈으로써 선계로서의 아미산을 상징하였다.
한편 정상부의 널따란 장방형의 터는 정자가 세워질만한 장소로 이곳에서 경회루 지원이 근경으로 건너다보인다. 여인들의 이용 장소로서 바깥(경회루)에서 벌어지고 있는 행사에 궁금증을 풀어줄 수도 있으며, 여름철 시원한 바람으로 더위를 식혀줄 수 있는 장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짐작해 본다. 교태전 동쪽 대비전大妃殿인 자경전慈慶殿의 아름다운 꽃담 및 후원 굴뚝 담벼락에는 해, 산, 구름, 바다, 소나무, 거북, 사슴, 학, 불로초 등 십장생 무늬가 새겨져 있는데, 아미산에서와 같이 화원을 꾸밀 수 없는 공간에 이를 대신하여 담장을 아름답게 꾸며 감상하려는 데서 나온 발상으로 왕실의 번창과 왕대비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효의 상징이기도 하다. 경복궁 내전 뒤 원림 속, 건청궁 남쪽에 인접하여 향원지원香遠池苑이 조성되어 있다.
동서 약 76m, 남북 약 70m 크기의 방형지에 가까운 원지로, 고종이 조석으로 산책을 즐긴 곳으로 원도에 위치한 정육각형의 2층 누건물인 향원정에 올라 주변 수목 및 화목으로 위요된 물위의 연꽃을 감상하면 정사를 잠시 잊고 가족과 오붓한 휴식처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향원지의 입수기법은 샘에서 솟아나는 지하수를 수평으로 넣은 자일의 기법을 이용하고 있다.한편 경복궁과 더불어 조선시대의 궁궐정원문화를 대표하는 것이 창덕궁 후원이다. 조선조 3대 태종이 이궁으로 조성한 창덕궁은 그 동북쪽이 약 6만평에 이르는 후원을 자연구릉지에 왕가의 휴식과 유락을 위해 수경하였다. 원래는 후원後苑을 북원北苑, 또는 금원禁苑으로도 불렀으나, 조선말부터 비원秘苑으로 통용되고 있다.
음향오행사상에서 비롯된 원림 공간의 특징과 내재적 의미들
이 후원을 원림 공간의 특징에 따라 살펴보면, 창덕궁 내 대조전을 지나, 후원으로 진입한 이후 가정당 일원의 언덕을 넘어 내려오면서 제일 먼저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은 주합루 건물이 들어오고 이어서 눈아래 영화당이 내려다보이는 부용지공간은 18세기 영조와 정조년 간에 조영되었으며, 후원의 가장 중심적인 위치에 있는 부용정에는 앞에 방형의 못(가로 28.4m × 세로 34.5m)을 파고, 그 연지 가운데 소나무가 식재된 둥근 섬이 있다. 이와 같은 조영원리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졌다(천원지방天圓地方)”고 하는 음양오행사상陰陽五行思想에서 비롯된 것이라 볼 수 있다. 궁궐지의 기록을 보면, 정조는 이곳에서 낚시, 시작詩作, 음주향연飮酒饗宴, 뱃놀이 등의 유희생활을 향유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부용지 공간은 부용지를 중심으로 못의 남안南岸에 부용정이 두 개의 기둥을 물속에 담그고 서 있고 서쪽 못가에 사정기비각四井記碑閣이, 동쪽에는 춘당대春塘坮라고 명명한 단 위에 영화당映花堂이, 북쪽에는 5단의 화계 위에 주합루가 세워져 있는데 이들은 크기와 모양을 달리할 뿐만 아니라 고저의 차이도 뚜렷하여 장소를 옮겨 바라볼 때 부용지 건너로 보이는 각 건물들과 그 배경들이 매우 다양한 시각적 변화를 제공해 주고 있다.
부용정 일원의 경우 이처럼 눈에 보이는 즐거움 뿐만이 이 공간의 빼어남을 칭찬하는데 그치지 않고 이 공간에 내재되어 있는 의미를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즉 이 공간은 단순히 풍류 공간일 뿐만 아니라, 유교적인 사상이 흐르는 공간으로, 영화당에서는 왕이 참석한 가운데 과시科試를 치렀고, 주합루는 왕실의 도서관이었고, 부용정은 땅에 뿌리를 박고 하늘을 쳐다보며 서있는 인간의 모습으로 해석된다. 비록 왕의 휴식처라 하지만 국사를 올바로 수행하기 위해 책을 가까이 하며, 나라의 인재를 친히 선발하여 등용케 하며 뒤를 이을 대군의 지혜를 기리며, 이 모든 일을 추호의 잘못 없이 수행할 수 있도록 스스로의 인격수양에 몰입하고자했던 제왕의 무거운 책임감에 숙연한 분위기가 감도는 엄숙한 장소라고 생각된다. 영화당을 지나 후원 안쪽으로 들어서면 좌측으로 후원의 두 번째 건물군이 나타나는데, 이곳은 주합루에서 고개 하나를 경계로 하고 있는 기오헌寄傲軒 일대와 그 북쪽의 연경당이 중심이 되어 그 사이에 방형의 연지가 둘 남아있다. 애련지로 통하는 불로문을 들어서면 큰 연지(동서 30m×남북 26m)가 있으며, 연지 북안에 단칸짜리 애련정이 지안池岸에 걸쳐있다.
이러한 애련정은 위치적으로 왕족들이 궁원을 산책할 때 대군의 독서방인 기오헌과 두각에서 담장너머로 내려다보이는 경관으로 절호의 휴식처가 됐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숙종의 애련정기와 정조의 ‘비 맞은 연잎 위에 진주알 흩어지고 활짝 핀 연꽃은 단장한 봄인데’ 라는 애련정시는 사시사철 언제나 즐길 수 있는 곳임을 말해 주고 있다. 애련지를 나와 북쪽으로 구릉밑을 돌아가면 좌측에 자연곡선형의 반월지가 나타나고, 못가에 부채모양의 정자인 관람정과 연못 반대편 높은 언덕에 승재정이 있다. 다시 연못 높은 물줄기 쪽으로 석교를 지나면 육각형의 정자인 존덕정이 위치한 이곳은 수림으로 둘러싸여 있어 깊숙하고 아늑한 분위기가 감도는 곳으로 물고기의 유영을 감상하거나 호젓한 낚시를 즐기기에 적합하여 사색과 명상의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왕의 정원, 사색과 명상을 통한 치유의 공간
반월지를 떠나 북쪽의 언덕길을 넘어 숲사이로 오솔길을 걸어 내려가면 후원 중 가장 깊은 골짜기에 구비진 물길을 내고 그 주변에 정자를 조영한 옥류천 계정에 이르는데, 제일 위쪽에 청의정, 그 아래에 태극정, 소요정, 농산정, 취한정을 조영하였는 바, 특이한 것은 소요정 앞에 만든 곡수거와 인공폭포, 그리고 초정인 청의정이다. 소요정 바로 위에는 어정御井이라는 샘물이 있고, 그 아래에 바위를 C자형으로 다듬어 샘물이 돌아 흐르도록 하였다. 암벽에는 인조가 쓴 “옥류천”이란 각자와 1690년 숙종이 “비류삼백척 요락구천래 간시백홍기 번성만학뢰飛流三百尺 遙落九天來 看是白虹起 蕃盛萬壑雷”라는 ‘오언시’가 새겨져 있으며, 풀이해 보면 “흐르는 물은 삼백척을 날아 흘러, 아득히 구천에서 내려 오누나, 보고 있노라니 문득 흰 무지개 일어나고, 일만 골짜기에 우레소리 가득하다”는 뜻이다. 이는 비록 소규모의 풍경이지만 한 봉우리의 모습이 훌륭하면 천수千壽의 산악을 상기시키며 한 되의 물로 능히 만리의 강호江湖를 상상할 수 있는 여유와 현학衒學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초정인 청의정은 극히 공예적이며, 단청을 하여 화사하기 그지없어 묘한 대비를 이룬다. 방지에는 낚시를 즐길 수 있도록 물고기가 길러진 때도 있었으나, 논에 모를 내어 벼를 심고 또 그 수확으로 얻은 볏짚으로 이 정자의 지붕을 잇게하여 유희 중에도 농사의 막중함을 잃지 않는 장소로 삼았던 것이다.
즉 옥류천 계정 일원은 궁원 내에서 가장 멀리 있으면서 주변이 깊숙하고 조용한 공간이 자연의 계류에 약간의 인공만을 가하여 조성한 별서정원의 맛을 느끼게 한다. 이와 같이 궁의 정원은 자연과 조화되려고 하는 선조들의 마음가짐을 엿볼 수 있으며, 또한 단순히 휴식과 유락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사색과 명상을 통한 수신과 독서와 친시를 통하여 정사에 몰두할 수 있는 지혜를 축적하고 기력을 회복시켜주는 치유공간이었다.
글·사진 | 최종희 배재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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