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안동 문화

낙동강과 함께 그 자리를 지켜낸 신세동 칠층전탑

이산저산구름 2008. 11. 18. 10:49

낙동강과 함께 그 자리를 지켜낸 신세동 칠층전탑

                                                                                                   안선우


 초봄이었지만 예년보다 훨씬 더웠던 주말, 나는 친구와 함께 안동의 전탑들을 보려고 버스에 올랐다. 학위논문에 필요한 전탑을 조사하고 사진을 찍기 위해 나선 길이었다. 마침 하늘이 파랗고 깨끗해서 내가 주문만 외우면 이대로 훌쩍 전탑 앞으로 날아가 버릴 것 같았다. 학교에서 출발해 약 15분 정도가 지났을 때 버스는 법흥교를 건너고 있었고, 나는 이번 답사의 첫 번째 코스인 신세동 칠층전탑을 찾아보려고 이리저리 고개를 돌렸다. 법흥교는 안동 법흥동과 용상동을 이어주는 다리로 낙동강을 가로질러 있기 때문에 법흥교 위에서 신세동 칠층전탑(현재 전탑이 위치한 곳은 법흥동이다)이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전탑은 멀리 철뚝 너머로 낙동강을 마주보며 우뚝 솟아 있었다.
국보 16호.
안동 신세동 칠층전탑을 북쪽에서 남쪽으로 바라보고 찍은 사진입니다.
전탑에는 철뚝과 민가가 인접해 있어 굉장히 답답해 보입니다.

그런데 사실 전탑은 우뚝 솟아 있지 못했다. 처음 대학에 가기위해 안동으로 왔을 때에도 법흥교를 지났지만 나는 전탑을 찾지 못했다. 이후 학과 선배들로부터 안동에는 특이하게도 전탑이 많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고, 그 중에 국보로 지정된 신세동 칠층전탑은 법흥교에서도 바로 보인다는 설명을 듣고서야 겨우 찾아냈다. 전탑의 입지는 서북쪽으로 영남산이 있고 동쪽으로 낙동강이 흐르고 있어 전면이 탁 트였지만, 지금은 전탑 앞에 남북방향으로 가로지르는 높은 철뚝이 건설되어 있어 전탑의 일부가 가려져 있다. 아무튼 전탑을 찾아낸 후로부터 나는 법흥교를 지날 때 마다 전탑을 확인했다. 나는 불교도가 아니었으나 전탑을 내 눈으로 확인 해야만 마음이 놓이곤 했다.
법흥동 정거장에서 내려 일렬로 늘어선 민가들을 지나 전탑으로 향했다. 회흑색의 전탑이 햇빛을 반사하며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지만, 가까이 가보니 주위를 둘러싼 민가와 철뚝 때문에 굉장히 답답해 보였다. 그래도 이 자리에서 천년 이상을 견뎌낸 전탑의 모습은 위풍당당했다.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금동의 상륜부도 잃고 기단의 본 모습도 잃어버렸으며, 사방이 막혀 시야를 잃어버렸지만 탑은 처음 위치 그 자리에서 본연의 마음씨를 잃지 않았다. 나는 이 전탑이 비록 완전하진 못하지만 모두 무너져 흔적조차 사라진 다른 전탑들과 비교했을 때 이만큼이라도 남아 있는 것이 고맙고 자랑스러웠다.
조선시대에 편찬된 안동의 읍지인 《영가지》에는 법흥사 전탑(法興寺塼塔)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즉 “부성(府成)의 동쪽 5리 지점에 있다. 7층이며 본부(本府)의 대비보(大裨補)이다. 성화(成化) 정미년(丁未年, 1487)에 개축하였다. 위에 금동의 장식이 있었는데 이고(李股)가 철거해서 관(官)에 납품하여 객사(客舍)에 필요한 집기를 만들었다.”라는 내용이다. 나는 신세동 칠층전탑 앞에 서서 이 기록의 내용을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먼저 사찰과 전탑의 명칭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전탑 연구자들은《영가지》에 기록된 법흥사 전탑을 신세동 칠층전탑이라고 보는데 이견이 없다. 《영가지》에 기록된 법흥사에 대한 설명과 여러 자료들을 볼 때 법흥사는 전탑의 서북쪽과 동북쪽 사이의 작은 평지에 세워졌을 것이라고 한다. 현재 이곳은 고성이씨의 종택이 있는 곳으로 옛 사찰의 자리라고 볼 수 있다. 언제 사찰이 없어지고 가옥이 들어섰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법흥사는 이 종택보다는 작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이 전탑이 속했던 사찰의 위치와 명칭이 밝혀졌으므로 전탑의 명칭은 법흥사지 전탑이 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명칭이 붙여질 당시에는 신세동에 속했었는지, 아니면 잘못 알았던 것인지 문화재 등록 명칭은 ‘신세동 칠층전탑’이라서 사실과 다르다.
다음으로 나는 조선시대에 없어진 금동 상륜부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현재 우리나라의 불탑 가운데 상륜부가 남아있는 불탑은 몇 기가 없다고 한다. 물론 상륜부가 탑의 다른 부분보다는 구조적으로 약하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석탑에 비해 전탑의 상륜부 훼손은 자연적 요인이라기보다 인위적이었다는 느낌을 받게 한다. 이는 전탑 상륜부의 재료상의 가치와 전탑 구조의 취약점 때문으로 판단된다. 전탑의 상륜부는 재료가 청동이나 금동이었기 때문에 주된 약탈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고, 또한 전탑은 전돌을 하나씩 쌓아 올린 탑이기 때문에 탑의 윗부분만 걷어내면 상륜부를 비교적 쉽게 가져갈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언젠가 칠곡 송림사 전탑에 대한 논문을 읽다가 선조 때 왜군이 송림사에 침입하여 방화하고 금동 상륜부를 훔치려고 하다가 결국엔 성공하지 못했다는 내용을 읽은 적이 있다. 현재 칠곡 송림사 전탑의 상륜부는 완전하게 남아 있어서 그나마 신세동 칠층전탑의 상륜부 모습을 예측할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이 전탑의 건립목적과 비례에 걸 맞는 화려하고 장엄한 금동 상륜부의 모습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 전탑은 상륜부 외에 기단부도 크게 훼손되어 있었다. 이 전탑의 기단은 낮고 넓은 단층 기단이지만, 기단의 면석에는 사천왕이나 팔부신중으로 보이는 조각이 새겨져 있어 건립 당시에는 굉장히 화려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기단 면석의 일부와, 1층 탑신의 아래쪽과 기단의 윗부분에는 전체적으로 시멘트가 발려져 있어 원래의 모습에서 크게 변해 있었다. 이 시멘트 때문에 기단의 모양이 확실하지 않아 일부 학자들은 이 전탑의 기단을 단층이 아닌 2층 기단으로 보기도 한다. 나는 아무 느낌도 주지 않는 시커먼 시멘트 기단을 보면서 하루 속히 시멘트를 떼어내고 제대로 보수해서 전탑의 본 모습을 찾기를 기원했다.
서남쪽에서 내려다 보고 찍었습니다.
바로 앞에는 고성이씨 종택이 살짝 보이고 전탑 너머로 낙동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신세동 칠층전탑은 주위 환경의 복원이 시급해 보인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전탑은 민가와 철뚝 사이에 난 좁은 길 한복판에 겨우 몸을 지탱하고 있다. 또한 불상이 안치되었을 감실은 동쪽면에 개설되어 있는데, 철뚝에 막혀 더 이상 낙동강을 바라볼 수 없게 되었다. 전탑을 세울 당시에는 강 언덕 위쪽에 위치하고 있어 전탑은 아래로 낙동강을 내려다보며 지나는 이들의 몸과 마음을 달래고 지켜주었을 것이고, 사람들은 멀리 낙동강 너머에서도 전탑을 향해 절을 하고 안전을 기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멀리서 전탑을 알아보고 예불하기가 힘들어져 버렸다. 일차적으로 사찰이 없어지면서 그에 딸린 전탑도 불운을 맞았겠지만, 근대화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진 철길이 하필이면 왜 전탑 옆으로 지나갔는지 아쉬운 점이 한 두개가 아니라 가만히 넋 놓고 지켜보기도 민망했다. 현재 횡력에 약한 전탑이 기차가 지나다닐 때 마다 흔들려 약간 옆으로 기울었다고 하니 더 이상의 훼손이 없도록 하루 빨리 보존방안이 강구되었으면 좋겠다.
‘국보 16호, 전체 높이 14.6m의 한국 최대 전탑’이라는 수식어는 신세동 칠층전탑을 설명할 때 항상 따라붙는 수식어이다. 8세기 중반에 무려 12,000장이 넘는 전돌을 하나씩 쌓아올려 10m가 넘는 대탑을 세웠으니 이런 찬사가 절로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국보 전탑은 전혀 국보의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 낙동강가의 진흙으로 빚어졌을 전탑은 낙동강과 안동을 지키기 위해 오랜 세월을 견뎌 냈지만 철길에 가로막혀 제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만약 예산과 기술의 문제로 당장 전탑의 훼손 부위를 모두 고칠 수 없다 하더라도 주위 환경만큼은 꼭 복원되어야 한다. 그래야 이 자리에 세워진 전탑의 가치가 빛날 테니까 말이다. 나는 전탑과 철뚝, 그리고 그 너머 낙동강을 한참동안 바라보다가 안동 조탑동 전탑을 찾아 가기위해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