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움직이는 시

낙화 / 이형기

이산저산구름 2008. 9. 26. 08:23

 

명시 산책

 

 낙화 / 이형기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 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이 시는 `무성한 녹음`과 `열매`를 위하여 떨어지는 꽃송이,
즉 낙화를 통해 죽음과 이별을 바라보는 시인의 깊은 통찰을
보여 주는 작품으로, 25세의 젊은 나이인 1957년에 썼다고 한다.
17세에 등단하여 일찍이 그 조숙성을 세상에 드러낸 바 있는
시인이지만, 이 작품을 통해 그는 다시 한번 자신의 문학적 천재성을
과시하는 계기가 되었다. 20대 중반의 청년이 썼다고는 하기 어려울
정도로, 이 시는 차분한 어조로써 삶의 보편적 측면에 대한
깨달음과 채념, 생의 예지 같은 것을 펼쳐내고 있다.

이 시의 첫 연은 낙화의 아름다움을 서술하는 부분으로
작품 전체의 주제와 인상을 집약하고 있는 경구이자 압권이다.
시인은 떨어지는 꽃을 보며 그 꽃의 사라짐을 사람 사이의
만남과 헤어짐으로 환치해 놓는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분명히 알고 가는` 낙화의 아름다운
모습은, 사랑하면서도 떠나야 할 것을 알고 떠나가는
연인일 수도 있고, 부와 명예를 보장해 주는 탐나는 자리라 하더라도
그에 연연하지 않고 떠나가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꽃이 떨어진다는 것은 곧 자연의 원리에
순응하는 것을 의미함으로 이별이나 죽음도 그 참된 의미를 알고
이루어질 때는 아름다울 수 있다는 고귀한 깨달음을
형상화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2,3연은 1연의 내용을 구체화하여 사랑의 사라짐과 나의 떠남을
꽃이 떨어져 분분히 흩날리는 모습으로 보여 준다.

4,5연은 사랑과 이별의 아픈 체험을 거쳐 나의 청춘도 사라짐을
노래한다. 4연의 결구행이나 다름없는 시행을 5연으로 굳이 독립시킨
시인의 의도는, 이 시가 사랑의 별리나 젊음의 아픔을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라, 성숙하는 영혼에의 축복을 말하기 위함이다.


우리네 삶도 무성한 녹음과 풍성한 결실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청춘기의 고통을 슬기롭게 감내해야 하는 것임을 알려 준다.

6,7연은 이러한 깨달음이 심미적 의장(衣裝)을 통해 표현된 부분이다.
내면의 추상적 사고를 가시적 정경으로 나태낸 것으로, 고통의 인내가
내면적 아름다움과 관련된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한 의도적 장면이다.


또한 지금 겪는 아픔이 성숙을 위해서는 감수해야 하는 것임을 알면서도
그 슬픔 자체는 부정할 수 없기에 마지막 시행에서 물의 이미지를 이용,
눈물의 형상을 암시하고 비애의 정서를 형상화하였다.


                                                      http://cafe.daum.net/timeside 좋은글 음악방송중

'마음을 움직이는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프고 슬픈 그래서 아름다운  (0) 2012.01.17
사평역은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다  (0) 2011.10.18
견딜 수 없네 - 정현종  (0) 2008.08.19
수선화에게  (0) 2008.04.10
초혼(招魂)  (0) 2008.0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