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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천년의 古都... 경주(慶州) |
김신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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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에 수학여행으로 누구나 한 두번은 가보았을 경주 옛날에는 해외여행이나 심지어 제주도 여행도 쉽지 않아서 신혼여행을 경주, 온양등지로 많이 갔었던것 같다....ㅎ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지난날의 추억으로 버무려진 기억을 갖고 있는 경주 그러나 그 당시 무엇을 보았는지? 그것들이 어떤 의미와 가치가 있는지는 잘 알지 못하고 있는것이 또 현실이기도 하다.
신라 천년의 古都 경주(慶州) 고구려는 우리가 갈 수 없는 북쪽에 치우쳐 있고, 백제는 패망한 나라의 역사로 어두운 그늘속에 묻혀 있다면 삼국을 통일한 신라의 문화와 역사가 밝은 햇빛속에 고스란히 살아 있는 곳 경주 고려에게 짓밟히고 압살당하고 초토화되어 멸망한것이 아니라 국력이 다하여 신흥국가인 고려에 왕위와 나라를 바치고 조용히 숨을 거두었던 나라 신라의 수도 서울이다.
30년만에 수학여행을 다시 가보는 기분으로 떠난 경주行 경주는 지붕없는 박물관이다 라는 말을 경주 박물관에는 지붕이 없다는 얘기로 알고 있는 일행들과 다녀온 이야기. (우리 클럽 77회 정기여행... 1박 2일로 다녀온 여행입니다)
경주를 하루 이틀만에 둘러본다는건 불가능하다. 혹자는 경주를 제대로 보려면 한 달은 보아야 한다고 하지만 적어도 3, 4일은 보아야 어느정도 보았다고 할것이다. 그러나 바쁘고 힘든 현대인의 일상에서 그렇게 푸짐하게 시간을 내기란 여간 힘든게 아니어서 1박2일로 둘러보되 알차게 둘러보고자 경주지도를 놓고 며칠을 연구하고 또 고민한 결과 경주를 권역별로 나누어 돌아보기로 하였다.
경주자료들을 보면 경주관광을 시내권, 남산권, 불국사권 그리고 동해권으로 나누었으며 첨성대, 국립박물관등이 있는 시내권과 토함산등이 있는 불국사권은 보편적으로 많이 알려지고 대부분 가본곳이기에 이번에는 산자락 여기저기 볼거리가 숨어 있다는 남산권과 감포까지 이어지는 동해권을 중점적으로 보기로 하였다.
서울에서 경주까지는 4시간 정도면 도착할 수 있다. 경주에 도착하니 톨 게이트가 한옥 지붕을 이고 선 모습이 전주의 톨게이트와 함께 매우 친숙해 보인다. 주말이다보니 관광지 경주는 진입로부터 붐비고 있었다. 게다가 우리가 찾아간 날자 (4. 26~27일)에 갖가지 지역축제 행사등으로 경주는 매우 혼잡하고 복잡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해도 금강산도 식후경인바 우리는 남산지역 끝자락쯤에 있는 용장리 오리고기집에서 점심을 먹었으며 점심을 먹고 난 후에는 가까운 남산지역을 먼저 둘러보기로 하였는바 길옆에 있는 포석정에서부터 시작하게 되었다.
<경주 톨 게이트.... 한옥 지붕으로 정겹다.>
경주 남산 서쪽 35번 도로변에 위치한 포석정은 우리가 잘 아는대로 물이 흐르게 만들어놓고 물 위에 술잔을 띄워 시를 읊었다고 하는 유희적 요소가 있는 사적이다. 927년 경애왕이 왕비, 궁녀, 신하들과 포석정에서 놀다가 견훤의 습격을 받아 죽은곳이며, 그래서 결국은 패망할수 밖에 없었던 신라말기 왕조의 무능력과 부패를 당당하게(?) 설명하는 곳이기도 하다.
포석정에 대한 기록은 신라 제 49대 헌강왕이 신하들과 어울려 여흥을 즐길 때 남산의 신이 왕 앞에서 춤을 추자, 왕도 따라 추게되어 이로부터 어무산신무(御舞山神舞) 라는 신라춤이 만들어�다고 전해 준다. 경애왕 4년(927) 후백제 견훤 군대의 습격을 받아 최후를 마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은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있었으나, 오늘날까지 그 자취가 이처럼 잘 남아 있는것은 매우 드문 일로, 당시 사람들의 풍류와 기상을 엿 볼수 있는 장소이다. [현장 설명판]
포석정이 있는 자리는 경주 서쪽 후궁(後宮) 또는 이궁원(離宮苑)으로 면적이 3천평이 넘으며, 약 2~3킬로미터 상류의 안골 샘못으로부터 물을 끌어들인 것으로 여겨진다. 현재 수백년 고목의 뿌리가 자라면서 융기하여 지반이 들려진 탓에 전체적인 수평이나 높낮이가 틀려졌다고 하며 시작하는 곳에 큰 돌거북을 설치하여 그 거북의 입에서 물이 나오게 한 후, 그 물이 화강석으로 만든 수로를 따라 흐르게 하였는데 물이 그대로 흘러 간다면 2~3분안에 다 빠져나갈것이므로 그 시간 안에 詩作을 한다는것은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구부러지고 휘감아지게 만듦으로써 술잔이 曲水부분을 빠져 나갈때에 멈추기도 하고 맴돌기도 하면서 흘러가므로써 대략 십여분정도가 걸리도록 정밀하게 설계한 지혜가 깃든 작품이라고 한다.
형태나 크기를 살펴보면 모양이 다른 63개의 화강암을 이용하여 수로를 구성하였으며, 석재의 높이는 20cm, 폭은 15cm 정도로 안정되어 있고 전체 모양이 전복을 닮아서 鮑石亭이라 하였다고 한다. 포석정 동서의 긴 축이 10m, 폭은 약 7m로 수로의 길이는 약 22m에 이르는데 수로의 폭은 20~40cm로 일정치 않으나 대체로 평균 30cm 정도이며 깊이는 약 20cm, 수로의 입구와 출구의 낙차는 40cm 정도이다. (설명판에 길이가 6m라고 한것은 시정하고 이렇게 자세히 기술해야 할 듯 하다)
여기서 포석정과 신라 말기의 썩어빠진 왕조(?)에 대한 재평가, 재조명이 거론되고 있다. 경애왕이 살해당했다는 그 즈음은 이미 신라의 국운은 다하였고 왕건의 고려가 융성한 시기였으며, 곳곳에서 신라의 장수와 귀족들이 고려에 항복하고 투항해가며 이미 민심의 이반이 극에 달한 시기이다. 역사는 항상 승리한 자가 기록하는 것이니 삼국사기나 삼국유사가 신라 패망후 고려시대에 쓰여진 이긴 자들의 기록이라고 본다면 결국은 이긴자가 기록을 통하여 패배한자를 한번 더 욕보이고 있는것은 아닐까 싶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경애왕의 마지막 모습을 보면 ‘경애왕 4년 (927) 11월, 견훤의 궁대가 왕경 (王京, 경주)에 쳐들어왔다. 왕은 왕비, 궁녀와 포석정에서 잔치를 벌이느라 적이 오는 줄도 몰랐다.’ 고 되어 있고, 기록에 의하면 경애왕은 갑자기 후백제 견훤의 군사들이 쳐들어오는 것도 모를 정도로 소위 노천 파티를 벌이다가 습격을 당한다. 경애왕은 호위병도 없이 병풍을 손수 가리고 광대들에게 군사를 막게 한 후 이궁(離宮)으로 달아났지만 곧바로 견훤에게 사로잡혀 왕비와 부하들 앞에서 자결한다.
이 기록만 보면 이미 저물어가는 왕조의 국왕이 적이 쳐들어온것도 모르고 여흥이나 즐기다가 사로잡혀 죽은것으로 되어 있고, 그리하여 신라는 망할수 밖에 없었다는 무언의 당위성을 강조하는듯 하다.
그러나 경애왕이 살해된 날자가 음력 11월이면 양력으로는 12월인데 이렇게 추운 겨울에 포석정에서 술을 마시기 위해 왕비 등 문무백관을 대동하고 포석정에서 잔치를 벌였겠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또한 아무리 무능한 왕이라해도 적군이 경주 가까이까지 쳐들어와 있는데 술자리를 펴고 잔치를 벌이고 있겠는가 말이다?
경애왕이 일 년 중 가장 추운 날임에도 불구하고 포석정을 방문한 것은 쓰러져 가는 신라의 부흥을 위한 제사 혹은 기도를 드리기 위해서였을 거라는 주장인바, 삼국사기中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연회를 벌이며 놀았다 (遊鮑石亭宴娛)’ 의 ‘유(遊)’를 ‘놀았다’가 아니라 ‘갔다’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포석정에서 가까운 남산 오릉에는 박혁거세, 유리왕, 남해왕 등 4명의 박씨 임금과 박혁거세의 부인 알령 왕비의 무덤이 있고, 신라 박씨 왕조의 발상지였던 남산은 불교가 수용되면서 많은 불교 유적이 자리 잡은 신라의 대표적인 신성지역이라서 박씨로 왕에 오른 경애왕은 하늘과 조상신들에게 간절히 기도하기 위해 이곳을 찾아 제를 올린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왕들이 잔치를 하거나 연회를 베푸는 장소는 안압지(雁鴨池)와 임해전(臨海殿)이 있는데 이런 곳을 두고 규모도 크지 않은 포석정에서 한겨울에 노천 파티를 연다는 것은 이해가 안 된다는 뜻이다.
포석정 주변에서 건물 흔적도 발견되었고, 1999년에는 ‘포석(鮑石)’이란 글자가 새겨진 기와조각도 발견되는등 포석정은 단순히 풍류를 즐기기 위한 오락시설이라기보다는 신탁이 행해지는 종교적인 장소였을 것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는것이다.
포석정 옆에 있는 우물터... 입구를 화강암으로 둥글게 조각하여 마감처리 한것으로 보아서는 여염집 우물같지가 않다. 다만 관광객들이 빠질까 우려되어서인지 입구보다 조금 더 큰 무거운 돌멩이를 얹어 놓았다. 정확하게 어떤 우물인지는 설명도 없고, 문화해설사도 자신있게 말해주지 못한다.
<우물의 모습.... 입구가 매우 세련되어 보통 우물은 아닐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포석정은 경주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서울 창덕궁의 후원의 깊숙한 곳에도 있는데 조선시대에 임금들이 신하들과 둘러 앉아 술잔을 띄워보내면서 시를 지어 읊어야하는 시회(詩會)를 열었다고 한다. 인조 친필로 옥류천(玉流川)이라 씌여진 바위 아래의 널찍한 바위위에 물길을 파서 물이 휘감아 흘러 나가도록 함으로써 경주의 포석정과 비슷한 기능을 하도록 하였으나 전체적으로는 작아 보인다.
<창덕궁 후원의 작은 포석정(?)......>
천년신라의 古都... 경주(慶州)를 찾은 첫 발길이 신라의 패망을 지켜본 포석정이었다는것이 조금은 아이러니일테지만 그 시작을 끝난 곳부터 보는것도 역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막연히 신라 후기의 임금들은 이곳에서 주연이나 벌이다가 쳐들어온 적군에게 잡혀 죽었고, 그래서 신라는 망했다는 매우 위험한 생각들을 많이 정리 할 수 있는 장소였다.
여러가지 복잡한 생각으로 포석정을 떠난 우리는 본격적으로 남산지역 답사를 위한 등산로를 찾아 나섰다.
■ 삼릉골을 중심으로 남산 답사하기
포석정을 나와 조금 내려오면 삼릉(三陵)이 나오는데 삼릉 못미처에 삼불사(三佛寺)가 있다. 주차비나 입장료가 없어서 차를 대놓고 산행길에 나서기 좋은 곳이다.
우리는 이곳에 차를 대놓고 가벼운 복장으로 삼불사를 거쳐 정상(전망대)에 이르는 코스로 산을 올라 꼭대기 근처의 상선암까지 파죽지세(?)로 올라간 후 상선암에서 잠시 목을 축이고 휴식을 취한후 상선암 바로 위에 있는 마애불을 시작으로 삼릉까지 하산하는 계곡을 따라 계속 이어지는 부처님들을 만나면서 내려왔다.
남산만 둘러보자해도 몇날 며칠을 지새워야하겠지만 그중 가장 화려한(?) 삼불사 => 상선암 => 삼릉 코스를 택한 것이다. 나머지 용장골이나 남산 부석등의 볼거리는 다음을 기약하며 남겨놓을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삼릉골 (또는 냉골)을 둘러보는데만도 약 3시간 남짓 소요되며 하루 산행에 적당한 피로감을 부담해야 한다. 아쉽기는 남산의 각 골짜기와 계곡, 능선길을 상세히 그려놓은 안내지도가 없어 답답한 산행을 해야 했던 점이다.
ㅇ 배리(拜里) 삼존석불입상과 삼불사(三佛寺)
삼불사는 도로변에 가까이 있고, 그 바로 옆에 보물 제 63호 배리(拜里) 삼존석불입상이 있다. 이 세 분의 돌부처는 부근에 흩어져 누워 있던것을 1923년에 모아 세운것이라고 하는데 벽없이 지붕만 있는 보호각을 세웠다.
<삼존 석불입상... 가운데 본존불과 왼쪽에 관세음보살, 왼쪽에 대세지보살이다>
삼불사는 규모가 암자 정도 되는 본당과 산신당, 마당에 서있는 석탑이 전부인 작은 절이다. 이 절집 아래 화장실이 일본 승려 기부금 3천만원과 市費 3천만원으로 1991년에 지었다는 표석이 눈길을 끈다.
<삼불사 산신당과 석탑..... 탑의 아랫층과 윗층의 석재 재질이 다른것으로 보아 꿰어 맞춘듯한 4층탑이다>
삼불사를 지나 이제 가파른 오르막길을 등산하듯 올라가야하는데 송림사이로 난 숲길은 제법 아늑하고 포근하다.
8부 능선까지는 아무런 석불하나 만날수 없어 우리가 길을 잘못 든게 아닌가 걱정하며 올라가야 했는데 마침내 나타난 부처님은 '선방곡 마애여래입상'이라는 입간판만 놓여져 있을뿐 별다른 설명조차 없는것이 아마도 문화재적 가치는 없는듯 싶었다. 계속 삼릉계곡(삼릉골), 냉골로 불리우며 올라왔는데 갑자기 선방곡은 또 무언지? 선방사(禪房寺)라는 절이 있었다고 하더니 그 이름을 따서 그리 부르는듯 하였으나 이쪽 골짜기 석불들의 이름이 제각각인것이 조금은 못마땅했다.
마애여래입상은 선바위(立石)에 음각으로 새겨놓은것이 뚜렷이 식별되지는 않아 보였지만 1시간여만에 처음 만난 석불상인지라 어찌나 반가웠는지 한참을 머물며 들여다 보았다.
조금 더 올라가면 산아래 발밑이 시원하게 내려다보이는 암봉이 있고 정상 전망대로 올라가는 길과 오른쪽으로 상선암 내려가는 갈림길이 나타나는데 우리는 정상정복을 위한 산행길이 아니었으므로 오른쪽 상선암으로 방향을 꺾었다. 상선암은 작은 암자였는데 시원한 샘물로 목을 축이고 잠시 다리를 쉬어가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상선암에서 휴식을 마친 우리는 서둘러 하산을 할 참이었는데 누군가가 바로 위에 부처님이 한분 계시다고 한다. 귀가 솔깃하여 5분정도 위로 올라가보니 그냥 내려갔으면 너무나 서운했을뻔 할만큼 크고 멋진 석불이 거기 있었다.
크기 7m로 삼릉계곡에서는 가장 큰 석불이라는데 머리와 어깨부분까지는 입체적으로 조각하였으며 그 아래로는 음각으로 선을 파내어 몸체를 표현 하였고 머리 뒷쪽 광배(光背)부분은 뒷바위를 파내다가 그만둔듯해보였다. 그래도 이제야 비로소 제대로 된 석불을 뵙고보니 감개가 무량하여 신발을 벗고 기도자리까지 올라 이리저리 둘러 보았다.
<삼릉계곡 마애석가여래좌상.... 상선암 바로 위에 있다.> 가슴이 후련해지도록 커다란 석불을 보고 내려가는 발걸음이 가볍다.
상선암에서 삼릉까지 내려가는 계곡길에는 서너개의 석불이 더 있다고 하여 기대감으로 하산을 재촉하는데 계곡 건너편에 높이 솟은 바위 위에 음각된 부처님을 발견하였다. 아무런 표시도 없고 이름도 없는것을 보니 역시 문화재적 가치는 없는듯한데 그래도 이름은 지어주어야 하는것 아닌지? 아니면 그동안 아무도 못본것을 내가 발견한겐지?.....ㅎㅎ
<건너편 바위위에 음각으로 새겨진 부처님... 바위엔 균열까지 있어 눈에 잘 띄지는 않았지만 분명하다.>
그 다음에 만난 석불은 보물 제 666호 '삼릉계 석불좌상'인데 마침 완전 해체후 복구수리중인지라 직접 볼 수는 없었다. 보물로 지정된것을 보니 가장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불상인듯한데 공사장에 걸린 사진으로만 보아야 했다.
<삼릉계 석불좌상... 공사현장>
다음에 한번 더 오라는 부처님의 뜻이려니 하고 발길을 돌리려는데 하산길로 바로 내려 가지 말고 약간 우회하면 부처님이 한분 더 계시다고 공사장 관계자가 일러주어 일행과 떨어져 혼자 돌아가니 과연 그곳에도 커다란 석불이 하나 있었다. 보수중인 석불좌상에서 바로 하산하면 볼 수 없고 오른쪽으로 우회해야 볼 수 있는 또다른 대형 석불 삼릉계곡 선각여래좌상이다. (선방골 삼릉계 삼릉계곡등으로 현지 지명을 섞어 쓰니 다소 혼란스럽다.)
높이 10m정도의 바위에 역시 음각으로 새겨진 것처럼 보이나 자세히보면 얼굴부분은 양각(돋을새김)으로 조각하였고 몸체 일부도 양각의 느낌을 일부 주었으되 전체적으로는 선으로 음각한 조금은 특이한 형식이다. 바위가 위, 아래로 나누어져 아쉬웠으며 지나는 길에서는 너무 가까워 치켜올려보아야 하거나 카메라 앵글에 잡기 어려웠다.
<삼릉계곡 선각여래좌상...>
우회를 해도 내려가는 길은 서로 다시 합쳐지게 되는데 우회로를 따라가야만 볼수 있는 또 하나의 석불이 선각육존불이다. 병풍처럼 펼쳐진 2개의 큰 바위 위에 음각으로 선을 새겨 여섯 부처님을 그려서 선각육존불이다.
왼쪽 바위가 약간 앞으로 나온 형태인데 가운데 본존은 서고 좌우 보살은 꿇어 앉은 모습이며 이를 아미타삼존이라 하고 오른쪽 약간 안으로 들어간 바위에는 가운데 본존이 서고 좌우 보살이 서 있어 석가삼존이라고 한다.
암벽위에는 이 불상을 보호하기 위한 법당을 세웠던 흔적이 남아 있다. 전체적으로 산화된 붉은 색이 물들어 있는등 뚜렷이 식별되기는 어려운 조각들이다.
<삼릉계곡 선각육존불... 전체 모습>
<왼쪽... 앞으로 나온 바위는 아미타삼존이 새겨져 있다.>
<오른쪽... 안으로 들어간 바위는 석가삼존이 새겨져 있다.> 선각육존불을 지나 하산로가 다시 합쳐지고 조금 더 내려가니 이번에는 머리(佛頭)가 없는 석불이 있었다. 1964년 동국대학교 학생들에 의해 발견된 이 석불은 왼쪽 어깨에서 흘러내려 매듭진 가사끈등이 특징이다.
<삼릉계 석조여래좌상>
석조여래좌상의 바로 왼쪽 윗편에는 돌기둥처럼 생긴 작은바위에 왼손에 작은 병을 든 모습의 관음보살을 양각(돋을새김)으로 표현 하였는데 상선암에서 삼릉까지 내려오면서 마지막 순서로 만난 돌부처님이다.
<삼릉계곡 마애관음보살상>
아랫쪽에 삼릉이 있어 삼릉계곡이라 불리우는 이곳은 계곡이 깊고 여름에도 찬기운이 돌아 냉골(冷谷)이라고도 부르는데 남산권에서 가장 많은 문화유적들이 있고 금오봉 정상으로 향하기에 찾는 이가 가장 많은 코스라고 하니, 자세한 준비 지식없이 덤벼든 답사코스가 제대로 찾아온 결과가 된 것이어서 매우 만족스러웠다.
다만 아쉽기는 애초 자세한 등산코스 설명을 겸한 안내지도가 없어 애를 먹었으며, 실제 등산/하산길에 문화재 설명만을 써붙일게 아니라 다음 유적을 보려면 어디로 가라는 방향과 코스설명이 없는것이 처음 찾아오는 외지인들에게는 너무 힘들었다.
우여곡절끝에 삼릉계곡 답사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평지로 내려오니 삼릉이 있다. 8대 아달라왕,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의 릉이 한줄로 있어 삼릉(三陵)인데 3개의 陵이 그것도 한줄로 조성되어 있고 제단은 가각의 능앞에 있지않고 맨 앞의 능에 3개가 나란히 세워져 있는 모습이 참으로 특이해 보였다. 경명왕은 신덕왕의 아들로 부자간에 앞뒤로 묻혔다고 하나 아달라왕은 왜 함께 모셔졌는지?.... 박씨 왕조의 윗분인지? 3개의 陵이 한곳에 모셔진것에 대한 배경설명이 없어 아쉬웠다.
<배리(拜里) 삼릉(三凌)>
대략 3~4시간쯤 소요된 짧지만 만족스러운 산행이었다. 남산권에 대한 자세한 안내지도 없이 다소 무모(?)하게 나선 길이 정확하게 최고의 답사코스로 맞아 떨어진건 행운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삼릉에서 산행을 시작하여 올라가고 있었는데 우리는 삼불사에서 시작하여 정상으로 올라가는 코스로 가다가 상선암에서 하산하여 삼릉으로 내려온것이니 산행을 마치고 현지지형 그림과 비교해보니 아래와 같았다.
[그림 설명] 삼불사 앞에 주차를 하고 배리석불(9)을 보면서 산행을 시작 1시간 남짓 올라가니 선방곡 마애여래 입상(A)이 있었고, 상선암(17)과 바로 위에 있는 7m 높이의 삼릉계곡 마애석가여래좌상(18)을 본 후 하산을 시작, 이름없는 마애불(B)을 지나 보수중인 삼릉계 석불좌상(16)을 보았으며, 여기서 하산길을 버리고 우회로로 접어드니 삼릉계곡 선각여래좌상(15)이 있었고 그 아래편으로 삼릉계곡 선각육존불(14)을 볼 수 있었다. (우회로로 가지 않고 바로 하산하면 15, 14번을 볼 수 없다.)
그후 하산로는 다시 합쳐져서 머리가 없는 석조여래좌상(13)과 마애관음보살상(12)이 가까이 있어 둘러보고 내려와 삼릉(10)을 보고나니 어느새 도로까지 내려왔는데 전체적으로 약3~4시간이 걸렸다는 설명이 윗 그림이다. (참고로 19번은 정상 전망대... 11번은 경애왕릉이다.)
아무튼 성공적인 남산 답사를 마친 우리는 용장골이나 다른 지역은 다음기회로 남겨둔채 흐뭇하고 뿌듯한 마음으로 감동적인 답사결과에 대하여 논하면서 다리도 아프고 배도 고프니 새참을 먹자하고 가까이 있는 유명 칼국수집에 들렸다. 점심으로 오리고기를 먹은 곳에서 멀지 않은 우리 밀 손칼국수집은 정말 맛있는집이었다.
Tip 맛집 소개 ㅇ 오리고기집 (약천한방 생오리 전문점) - 남산권을 답사하기 전에 남산 서쪽 아래쯤 되는 용장리에 있는 한방 생오리 불고기 전문점에서 점심을 먹었다. 오리 불고기를 양념해서 구워 먹고.... 밥을 비벼먹는데 정말 맛있다. - 늘 많은 사람들로 붐비는 곳... 예약하고 가는것이 편하다. (☎ 054-745-8592)
ㅇ 손칼국수집 (삼릉 고향 손칼국수) - 남산권 답사를 위한 등산을 마치고 내려오니 힘들고 피곤하지만 배도 고프다 삼릉지나 교도소 못미처에 유명한 우리밀 손칼국수집이 있다. - 손님들 앞에서 밀가루 반죽해서 밀판으로 밀고.... 칼로 썰어 국수를 끓여 내오는데 국물 맛이 정말 진하고 맛있다. - 식사때에는 넘치는 손님들로 자리잡기도 어렵다. (☎ 054-745-1038)
쓴소리 단소리 ㅇ 경주시, 남산을 사랑하는 각종 모임/단체... 남산권 답사를 원하는 외지인들이 답사에 필요한 상세한 안내지도가 절실히 필요함. 서울 북한산, 도봉산, 관악산 등산로 안내지도 개념에 문화재 위치와 설명...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답사할수 있는 권장 탐방경로등을 표시하여 줄것을 건의 합니다. ■ 경주 시내권
1박 2일의 경주여햇 첫 순서를 남산에 올라 매우 만족하게 내려온 우리는 경주시내로 향하였다. 시내권은 경주박물관과 분황사, 황룡사, 계림, 첨성대, 대릉원등이 시내에 모여 있는곳인데 그중에 국립경주박물관을 먼저 들리기로 하였으니 바로 에밀레종때문이다.
ㅇ 에밀레 종 봉덕사 종, 또는 에밀레종이라 불리우지만 정식명칭은 성덕대왕(聖德大王) 신종(神鐘)이다. 국립경주박물관 본관 앞에 따로이 세워진 이 神鐘은 예전에는 매일 주기적으로 타종을 하였지만 현재는 실제 종을 치지는 않고 녹음된 타종소리를 틀어준다고 한다.
장기보존을 위한 조치겠지만 못내 아쉬웠고, '치지 않는 鐘은 더이상 鐘이 아니다'라는 말처럼 이제 더이상 타종은 하지 않고 그저 박제된 동물처럼 종루 대들보에 매달려만 있다면 그게 무슨 鐘이랴? 싶었다. 뿐만아니라 鐘에 대하여 나름대로 식견이 있는 사람들조차 鐘은 쳐야 하는것이지 치지않고 보관만 하는 鐘은 실제로는 오래 보존하는데 전혀 보탬이 되지 않는다고 반박하기도 하니.... 그 말에 귀가 솔깃해지는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국립경주박물관 본관 앞 종루... 성덕대왕 신종이 매달려 있다>
그후 1915년 옛 경주박물관 자리로 옮겨진 후, 새로이 경주박물관을 지어 1975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오게 된 것이다.
성덕대왕 신종을 에밀레 종이라 부르게 된것은 타종의 여운이 내는 소리가 '에밀레'라고 하는것 같고, 그 뜻이 에미를 탓한다는 해석이니 이는 종을 만들때 어린아이를 집어 넣어서 종을 칠때마다 그 어미를 부르는 소리라고 하는 전설에 기인한다. 전설을 현재에 와서 재삼 거론하거나 분석하는것은 무의미하다고 보며 아무튼 그래서 더욱 神鐘의 신비함이 높아지는듯 하다.
옛날이야기로 전해지는 전설보다 성덕대왕 신종은 자신의 몸체에 분명한 내력과 이야기를 새겨 놓았는데 동쪽에는 종을 만들게 된 기록을 적어 놓았고, 서쪽에는 네글자씩 50줄로 된 운문과 글을 짓고 쓴 사람, 종을 만든사람등이 새겨져 있다. 기록문을 보면 '성덕대왕 신종지명 (聖德大王 神鐘之銘)' 이라고 함으로써 이 종의 이름이 성덕대왕 신종이라는것을 확실하게 하였으며 신라 경덕왕이 선왕인 성덕왕의 명복을 기리기 위하여 구리 12만근으로 큰 종을 만들고자 하였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승하하고 그 아들인 혜공왕이 즉위 7년만에 완성하였다고 한다.
에밀레종을 주조하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나 이곳으로 옮기는 과정에서의 크고 작은 실화들은 여러가지 책들에 잘 나와있으므로 재삼 거론하지 않으려 하나 모처럼 찾아가 만난 에밀레종은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적 이야기처럼 신비스럽지도 않았고, 과학적이라거나 자랑스럽지도 않았으니 이는 경주박물관측의 무감각하고도 무책임한 관리실태에 따른 실망과 한심한 현실에 대한 분노가 앞서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아무나 마구잡이로 종을 타종할까 염려되어 나무 봉(棒)을 제거한듯 싶은데 그 무감각한 처사에 대하여는 실로 하품이 나오고 놀랍지 않을수가 없었으니 나무 봉은 떼어내 보이지 않고 그 봉을 매달았던 철제 고리줄은 갑자기 역할이 없어진채 늘어진 모습이 보기 싫어서인지 두 세번 접어올려 아주 불편하고도 흉한 모습으로 비비꼬여 매달려 있었다. 내 생각에는 나무봉을 온전하게 매달아 놓고 봉을 鐘의 몸체로 밀어내지 못하도록 보기좋게 끈으로 묶거나 고정시키는 방법도 있을터이고... 부득이하여 제거했다면 그 매달기 위한 철제 고리줄도 제거하는것이 마땅할듯 싶었다.
<에밀레 종...... 神鐘의 神話로 탄생한 우리 민족의 위대한 예술품이다>
<그러나 박물관측의 관리실태는 부끄럽고 화가 날 지경이다...> ㅇ 고선사지 3층 석탑
경주 박물관에서 또 하나 벼르고 벼른것은 뒷마당에 세워진 고선사지 3층석탑이다. 고선사(高仙寺)는 신문왕때 원효대사가 머무르던 절이라고 하는데 그 절이 위치한 암곡동지역은 댐 건설로 수몰되었으며 그리하여 3층 석탑을 이곳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 왔다고 한다.
그러나 경주 박물관 뒷마당에 세워진 이 3층석탑은 아무도 관심을 기울여주지 않은채 중간마당에 있는 불국사 다보탑과 석가탑의 모작에서는 연신 사진을 찍는 세태를 나무랐던 유홍준 교수의 글을 보고나서 나역시 고선사지 3층석탑에 관심을 갖게 되었던 것인데 그래서 에밀레종을 둘러보고 난 뒤 중간의 이런저런 것들에게는 곁눈도 주지 않은채 뒷마당으로 달려온 것이다.
탑(塔)의 종류에는 석탑, 목탑, 전탑과 모전탑이 있는데 천지에 화강암이 깔려있는 우리나라는 1,340여기의 탑이 조사 될 정도로 석탑이 많은 나라라고 하며 일본은 나무가 많아 목탑, 중국은 전탑(벽돌탑)이 많은것도 모두 이러한 배경인바 익산 미륵사지의 구층석탑이 우리나라의 최초 석탑으로 보여지나 이는 돌로 지었을뿐 거의 목조건축을 모방한 것이라고 한다.
이것을 발전시켜 석탑으로서의 양식, 기단부와 각층의 몸돌과 지붕 그리고 상륜부라는 구조의 틀을 보여준것은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인데 이때는 무왕의 시대로서 백제문화의 전성기였지만 이내 백제의 쇠락함으로 그 맥은 통일신라로 넘어가면서 의성 탑리 오층석탑, 월성 나원리 오층석탑, 장항리 오층석탑등 많은 오층석탑을 탄생시켰는데 그것이 이제 고선사지 삼층석탑과 감은사지 삼층석탑으로 변형, 발전되다가 불국사 석가탑에서 3층석탑에서 완벽한 형식의 완성을 이루었다고 한다. (유홍준 著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권에서....)
이것이 이곳 경주 박물관에 있는 고선사지 삼층석탑 앞에 내가 서게 된 연유이며,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부여에 있으니 다음에 가보기로 하고 나머지 감은사지 삼층석탑과 불국사 석가탑은 내일 가볼 예정으로 유홍준 교수가 말하고 싶어했던 우리나라 돌탑의 족보(?)를 나름대로 깨달아보고자 벌써 저녁으로 접어드는 어스름 시간에 경주박물관 뒤뜰에서 고선사지 삼층석탑을 어루만져보고 몇바퀴나 맴 돌아보면서 석탑을 느껴보는 경지에 오르고자 애를 쓰고 있었다.
ㅇ 첨성대
3층 석탑에 대한 깨달음(?)과 느껴봄(?)을 내일의 과제로 남기고 우리는 가까운 첨성대(瞻星臺)로 향하였다. 첨성대는 누구나 알다시피 별을 쳐다보고 관측하는 시설, 즉 동양최고의 천문대이다. 그런데 막상 현장에서 마주 선 첨성대는 동양최고라는 수식어가 무색(?)하게 작고 볼품없다. 더구나 최근 느낌은 많이 주저 앉은듯.... 노쇠하고 쇠락해지는 모습이 보이는듯 하다.
역시 유홍준 교수의 책자를 보면 관련 학자들의 주장들을 인용해놓았는데 옛날 사람들은 천원지방(天圓地方), 즉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라는 생각을 갖고 있어서 첨성대의 기단은 정사각형이고 몸체는 원형으로 되어 있으며 몸체는 모두 27단으로 되어 있는데, 맨위에 마감한 정자석(井字石)을 합치면 28. 기본 별자리 28수(宿)를 상징한다. 여기에 기단석을 합치면 29. 한달의 길이를 상징한다. 몸체 남쪽 중앙에는 네모난 창이 있는데 그 위로 12단, 아래로 12단이니 이는 1년 12달과 24절기를 상징하며, 전체 사용된 돌의 숫자 362개는 1년의 날수가 된다.
기단석은 동서남북 4방위에 맞추고 맨 위 정자석은 그 중앙을 갈라 8방위에 맞추었으며 창문은 정남이다. 정남으로 향한 창은 춘분과 추분, 태양이 남중(南中)할때 광선이 첨성대 밑바닥까지 완전히 비치게 되어 있고, 하지와 동지에는 아랫부분에서 완전히 광선이 사라지므로 춘하추동의 분점(分点)과 지점(至点) 측정의 역할을 한다. 고 씌여 있다.
아무튼 첨성대가 생각보다는 작고 쇠락해보이지만 우리 조상들의 지혜와 천문과학이 깃든 역사적 산물이며 자랑스러운 유물임에는 틀림이 없고 전체적인 외형이 아담하고 이쁘장해보이는 우리네 여인네 자태와도 비슷하다.
ㅇ 황룡사지
낮에 남산을 올라 이 계곡 저 골짜기를 돌아본 후 시내로 들어와 경주 박물관을 돌아보고 첨성대까지 찾으니 날이 벌써 어둑어둑해지는데 우리는 욕심을 내어 한곳을 더 가보기로 했으니 바로 황룡사 절터가 그곳이다. 비록 몽고의 침략때 몽땅 타버려 실체는 볼 수 없는 아쉬움이 크지만 그 흔적과 자취만으로도 놀랍고 경이로운 것은 물론 9층목탑이나 대종(大鐘)이야기를 듣노라면 궁금증과 함께 꼭 돌아보고자 하는 욕심이 앞서서 특별히 관리하는 주체도 없고 출입시설도 되어 있지 않은채 논바닥 한가운데 자리한 황룡사 절터를 찾아 들어갔다.
논둑길로 들어가 약간의 평지에 차를 주차해놓고 잠겨진 공사장 출입문 같은 곳 옆의 개구멍을 통해서 안으로 들어갔다. 이미 사방에는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고 을씨년 스러울 정도의 넓은 절터에는 스산한 기운이 감돌았다.
신라의 서라벌 당시에도 이곳은 시내 한가운데였을터... 궁궐을 짓겠다고 공사를 하다가 龍이 나와서 절을 지었다는 전설을 지닌 황룡사는 신라 진흥왕 14년 (553)에 왕명으로 공사를 시작하여 진흥왕 35년 (574)에 신라최대의 불상인 '장육존상(丈六尊像)'을 모셨다. 선덕여왕 14년 (645)에는 높이가 약 80m인 동양최대의 구층목탑이 백제인 아비지에 의하여 완공된다. 그러나 고려 고종 25년 (1238)에 몽고의 침입으로 모두 불타버리고 말았다.
즉, 불상을 만드는데 21년이 걸린것이며 9층목탑은 92년후에 완공된것이니 지금의 시각으로 보아도 얼마나 큰 규모의 공사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에밀레종보다 훨씬 더 큰 황룡사 大鐘이 완성된것은 754년이라고하니 공사시작 200년만에 황룡사 완성의 마무리가 되어진 세기를 넘어가는 공사였음을 알 수 있다.
황룡사내의 발굴 현장 초석(礎石)들만을 보아도 그 건물의 규모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는바 벌판이라고 밖에 부를 길 없는 황룡사 절터에는 수십 수백의 주춧돌들이 열지어 늘어서 있어 그 위에 올라서 있었을 절집들을 미루어 짐작케 해준다.
<황룡사 9층 목탑 터......>
목탑 규모는 한 변의 길이가 22m인 정방형 형태로 그 바닥 면적은 약 150평에 이른다. 계단은 남쪽에 3개, 동서북쪽에 각각 1개씩이며 기단에는 1개의 심초석과 64개의 초석이 정면 7칸, 측면 7칸을 구성하고 있는데 가운데 심초석의 규모만 해도 435 X 300cm이며 무게는 약 30톤의 화강암이다. (위 사진) 아래사진은 황룡사 金堂 터의 중앙뒷쪽으로 세분의 부처님을 모신 흔적(臺座石)이다. 장육존장과 두 개의 협시불이 그 위에 모셔졌을 것이다.
이 부분은 내일 동해안권 답사때 살펴보리라 다짐하면서 경주 답사 첫날을 마감하였다.
쓴소리 단소리
ㅇ 국립경주박물관... 성덕대왕 신종 관리실태 개선을 촉구합니다. 종치는 나무봉.... 쇠줄 처리상태..... 참 할 말이 없습니다~~
■ 불국사권 돌아보기
경주여행 첫날에 남산과 경주시내 박물관, 첨성대, 황룡사 절터를 둘러본 우리는 다음날 아침 일찍 토함산에 올라 일출을 보려고 가까운 토함산 자연휴양림에서 하룻밤 머무르며 시간 맞춰 새벽에 산에 올랐다. 일출을 맞이하고 나서 내쳐 석굴암을 돌아보고 난후 내려와서 아침식사를 하기로 했다.
ㅇ 토함산 일출과 석굴암
4월 중/하순이면 대략 해뜨는 시간이 5시 40분 내외... 충분히 일찍 서둘러 산에 올랐는데 이맘때쯤이면 어느 주차장이나 절집이나 입장료를 받지 않고 (지키는 사람도 없다) 드나들기 마련인데 토함산 주차장에는 어림없이 이미 관리인이 차고 앉아 주차비를 받고 있었는데 그 근면성실(?)함에 매우 놀라웠다. 차량을 주차하고 약간은 춥기도 한 날씨지만 제법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는데 사방이 조금씩 밝아오더니 드디어 둥근 해가 불쑥 솟아오르는게 보여 모두가 감탄을 하고 저마다의 소원을 빌거나 사진촬영에 열심인 모습들이었다. 외국인도 몇명이 보이는걸 보니 토함산 일출은 제법 알려진듯 하다.
<토함산 일출....>
일출을 마치고 나니 6시쯤인지라 다시 숙소로 내려갔다 올라오기도 거북하니 내쳐 석굴암을 돌아보기로 하였다. 그런데 석굴암 일주문겸은 알루미늄 재질의 접철식 경계시설로 굳게 닫혀 있었고 그 옆의 경비실에 있는 2사람은 아무런 설명이 없고 또 아무런 안내표식도 없어서 다른 절집 새벽예불도 들어간 경험도 있고 해서 그중 약간 열린 틈새로 들어섰더니 갑자기 '아저씨~ 이리 나와여~'라고 크게 고함을 지른다.
나쁜짓 틀킨 사람처럼 뻘쭘하게 밖으로 나와 들어가면 안되냐고 했더니 매표소로 가서 써붙인걸 읽어보라고 한다. 매표소는 굳게 닫힌채 창구에 걸린 표지판에는 입장시간 06:30~18:00 시라고 씌여져 있어 누구하고 말 할 상대도 없고 썰렁한 날씨에 동동거리고 서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볼거라고는 주차장 한쪽에 서있는 십자각형태의 종각뿐..... 30분 시간이 제법 길게 느껴 졌다. 왜 6시 30분인가 물으니.... 안쪽에서 영업준비를 하려면 그 시간이 되어야 한다나?? ㅊ암나~
이윽고 6시 20분이 넘어서자 잿빛 옷을 입은 여자 둘이 절집쪽에서 나오더니 매표소 문을 연다. 입장권이 4000원씩이니 우리식구 20명이면 8만원.... 작은 돈이 아니니 그걸 놓치지 않겠다는 것인듯 하다. 우리들 외에도 몇몇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기다리거나 아예 돌아서 내려가버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주차장이 일출을 보러 올라오는 사람들에 대비하여 깜깜한 새벽에도 매표원을 배치하였듯이 석굴암도 해뜨는 시간을 고려하여 더 일찍 매표를 시작하던지, 그 이전에 오는 사람들은 무료로 입장하게 하던지 해야 할 텐데 아무 기준이나 배려없이 단지 매표소 영업개시 시간만이 준수사항인것을 볼 때에 참으로 한심한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겨울철에는 그시간에도 아직 해가 안떠서 문제가 없지만 벌써 4월만 지나도 6시 전에 해가 뜨는데 그사람들이 일출을 보고나서 어디에 가 있으란 말인지???
관광객들의 동선(動線)을 고려한다던지 해맞이와 석굴암 관람을 연계하는 관광 편의제공은 안중에 없고 오로지 입장료 수익에만 전념하는 행태가 참으로 한심스러웠으며 일출을 보고나서 개방시간까지 할 일 없이 어슬렁거리게 되어버린 관광객이나 답사객들을 마치 무슨 부랑객이나 불법 범죄자로 취급하는 결례에 대하여는 참으로 할 말이 없었다.
이런 문제점들은 누가 시정조치를 해야하는지? 이렇게 해서 언제나 관광대국이 되려는지?.... 외국여행은 적자상태이고, 국내여행은 상대적으로 열세하여 문제라는 지적에 이런 사항들을 개선하려는 의지는 있기나 한건지? 석굴암은 누가 주지이고 이런 매표개시와 출입의 통제는 누가 책임을 지고 있는것인지 참으로 한심스러웠다.
6시 30분이 되어서야 표를 끊고 안으로 들어서는 심정은 이미 비비 틀어져 있었다.
<이미 아침해가 떴는데도 '야간통행금지' 팻말외에는 아무런 안내도 없는 경계초소......>
<영업시간이 표시된 매표소 안내문>
<십자각 형태의 종각이 주차장 지역에서 유일한 볼거리이지만 30분 넘게 들여다 볼것은 아니다....>
그래도 일단 안으로 들어서니 석굴암까지 가는 도로는 생각보다 깔끔하게 잘 관리되어 이른아침에 산보하는 마음을 상쾌하게 해주어서 그나마 울분을 삭힐 수가 있었다. 곧 마당이 나타나고 약수물도 보이는데 눈을 들어 위로 올려보니 거기에 석굴암은 보이지 않고 사당인듯한 절집 건물이 하나 보이고 그 뒤로 봉분처럼 둥근 지형이 보이는데 아마도 저것이 석굴암이리라...
학자들 주장에 의하면 석굴암(石窟庵)이라고 하면 잘못 부르는것이라고 한다. 즉, 암자가 아닌 석굴 사원이며 특히 자연석굴이 아니라 인공석굴이므로 石佛寺의 石窟이라고 해야 맞는 표현이라는 것이다. 원래는 앞부분에 보이는 목조건물 없이 바로 석굴암의 입구가 노출되어 있었으나 일제시대의 무분별한 도굴과 파괴를 거쳐 지난 시절에 이를 보수한다는것이 덜렁 앞쪽에 건물을 지어버렸다는 것이다.
지금도 누수나 결로현상을 어쩌지 못하고 에어컨을 설치하여 습기제거를 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 역시도 아랫쪽 암반 밑에 있는 샘물의 원리를 이해 못하고 배수시켜 버린 결과라고 하니 옛사람들의 지혜를 오히려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듯 하다.
그밖에도 석굴암이 원래는 전실부분이 굽어져 있었으나 이를 곧게 편것이라거나 토함산 해발 565m 높이의 석불의 방향이 정동쪽이 아닌 동동남 30° 인것은 흔히 알고 있는것처럼 동해바다 감포의 문무왕의 수중릉인 대왕암을 보고 있는것이 아니라 동짓날 해뜨는 방향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등의 과학적 사실들이 참으로 흥미로웠다.
그러나 정작 석굴암에 들어서게 되면 일본인 토목기사가 정리한 측량경험에 따른 제반 수치들의 의미라던지, 천정 덮개돌이 깨져 3조각이 났다던지, 본존불과 내부의 모든 조각상이 40개였으나 2개는 일제시대때 도난 당하고 현재는 38개라는 사실들을 일부라도 직접 만나보고 가능하면 만져보고도 싶었으나 앞을 가로막는 유리벽에서 더이상 들어가지 못하고 바라만 보아야 했다.
어찌보면 종을 보호하려고 치지 못하게 한 성덕대왕 신종이나 관람객들로부터 차단시켜 유리벽안에 가두어 놓은 석굴암이나.... 이해가 안가기는 마찬가지 였으며 그러한 조치들이 문화재들을 진정으로 보호하는것은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유리벽에는 '사진촬영금지'가 붙어 있고 뒷쪽에 책상 하나 놓고 앉은 보살이 계속 감시하고 나무라기 때문에 교도소 죄수 면회하고 나오듯이 아쉽게 밖으로 나와서도 입맛이 씁슬하기만 하다. 지금 대부분의 전시시설이나 박물관을 찾아가도 '후래쉬를 사용금지'시키고 있지 사진촬영 자체를 막는 곳은 거의 없다. 불빛을 반사시켜 유적을 보존하는데 어려움을 준다는것이지 노-후래쉬 촬영이야 무슨 문제가 있다는건지 알수가 없었다.
그러다보니 카메라를 휴대한 대부분의 관람객들이 몰래 카메라로 촬영하고 있었으며 그 보살님과의 언쟁이 끊임없이 이어져 국보급 문화재를 아낄줄 모르는 무식한(?) 사람들로 매도 되고 있었다.
<석굴암 전경....옛날에는 저 기와지붕의 목조건물 없이 석굴의 입구가 바로 보였다고 한다.>
<할 수 없이 나 역시 본존불을 몰래 찍었다......ㅠㅠ>
쓴소리 단소리
석굴암이 지닌 명성과 값어치에 걸맞는 관리가 필요할듯 합니다. 특히 일출을 보러 올라왔다가 석굴암까지 돌아보려는 사람들이 꽤 많은데에도 영업시간(?)을 고집하면서 6시 30분 이전에는 매표도 안하고 출입문 개방도 안하는 갑갑하고 답답한 행태는 개선해야 할 듯 하구여.... 실내 사진촬영금지나 유리벽 내부로의 접근금지도 다시한번 진지하게 재검토 해야할듯 합니다.
그 흔한 문화해설사나 자원봉사자의 안내도 없이... 기와불사만 열심인듯한 모습도 바뀌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필요시 답사를 원하는 진지한 단체에 한하여는 (미리 신청을 받아서) 석굴 안으로도 들어가게 해주고 사진도 찍고 만져도 보게 하며... 전문 해설사가 설명을 해주는것도 필요할듯 하구여....
ㅇ 불국사
토함산 석굴암을 영 찝찝한 기분으로 내려온 우리는 숙소로 돌아와 아침식사를 하고 불국사로 향하였다. 부처님 오신날을 앞두고 이런저런 행사가 복잡하였지만 그래도 불국사는 석굴암보다는 친절하고 친근했다.
정문을 들어서면 어쩐지 우리의 토속정원과는 거리가 멀어보이는 정원을 지나고 호수 위의 다리를 건너 비로소 천왕문을 지나게 되는데 좌우 생략하고 바로 청운교 백운교로 향하였다.
불국사의 상징처럼 떠오르는 청운교 백운교는 사람마다 책마다 그 위치가 다르게 되어 있으니 아래 17단이 청운교, 위의 16단이 백운교라고 현장 설명판에는 기재되어 있으나 유홍준 교수는 아래가 백운교라고 하니 우리로서는 알 수가 없다.
아무튼 불국사 설명에 의하면 불국사 예배공간은 왼쪽에 극락전, 오른쪽에 대웅전이 있는데 왼쪽으로는 연화교와 칠보교가, 오른쪽으로는 청운교와 백운교가 다리 아래의 속세와 다리 위의 부처의 세계를 이어주는 상징적인 의미라고 한다. 다만 현재는 그곳으로 직접 올라갈수는 없어 그저 바라만 보아야하고 특이나 청운교 백운교 아래에는 원래 구품연지(九品蓮池)라 불리우는 타원형 연못이 있었는데 이를 복원하지 않고 흙으로 메워 마당을 만든것이 못내 아쉽다고 하겠다.
<오른쪽의 청운교, 백운교.....>
<왼쪽의 연화교, 칠보교....> 불국사 대웅전 앞마당에는 잘 알다시피 다보탑과 석가탑이 서 있다. 쌍탑 1금당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하는데 그동안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보탑의 멋지고 화려한 아름다움에는 심취했을지언정 그 왼쪽에 묵묵히 서있는 석가탑에 대해서는 별반 관심을 보이지 않는듯 했다.
<불국사 대웅전 앞마당에 좌우로 서있는 석가탑과 다보탑....>
오른쪽 다보탑은 10원짜리 동전에도 새길만큼 워낙 유명한 탑이니 특별히 첨언할 말이 없지만 다만 4마리 석사자중 잘생긴 3마리는 일제시대때 도난 당하고 일부가 훼손되어 못생긴 사자 1마리만이 남겨져 있어 못생긴 나무가 숲을 지킨다는 말이 생각나는것이 참으로 아이러니하였다.
<다보탑에 한 마리 남은 석사자... 부분적으로 조금씩 훼손 된 덕(?)에 남아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과연 말없이 멋진 석탑이다. 삼층 탑의 지붕선은 직선으로 흐트러짐 없이 뻗었으나 끝에 이르러서는 살짝 들린듯이 보이게끔 아래는 직선을 유지하되 윗쪽으로는 처마선처럼 들어올린 맛이 참 멋있고 듬직하다. 그러고보니 국립경주박물관 본관이나 성덕대왕 신종이 매달린 종루의 지붕 실루엣도 이 석가탑 처마 느낌을 적용한듯 하다.
유홍준 교수는 그의 저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3편에서 불국사 건축의 오묘한 디테일을 보여주는 여섯가지 중에서 두번째로 이 석가탑의 탑 날개 직선의 묘를 예로 들었다.
그 첫번째 아름다움으로는 대웅전에 오르는 돌계단 옆구리의 소맷돌을 조각한 무늬가 마치 저고리 소매끝처럼 예쁘다고 하였는데 과연 간결하면서도 예쁜 모습으로 공그른 조각 솜씨가 일품이었다.
<대웅전 돌계단 소맷돌.... 이가 빠진 모습이 조금 마음에 걸린다... 반대쪽은 말끔하다>
불국사는 대웅전과 극락전을 함께 본전(本展)으로 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대웅전에서만 머물며 구경할 뿐 극락전에 들리게 되면 별로 볼것이 없다는 식으로 스쳐지나가거나 최근에 앞마당에 세워놓은 청동 복돼지에만 관심을 기울인다.
그러나 극락전에는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볼거리가 있으니 현판 뒷쪽에 감추어진 금돼지 조각이 그것으로 2007년 봄에 발견 되었다는 50cm 크기의 나무조각인데 이것이 알려진 뒤로 많은 사람들이 이 황금돼지에게 복을 빌러 오다보니 아예 극락전 마당에 청동으로 황금돼지를 만들어 놓은것이다.
이 현판뒤에 숨어서 천년을 지낸 돼지에게는 2가지 설화가 전해져 오는데 불국사를 창건한 김대성이 토함산에 자주 사냥을 다녔지만 다시는 살생을 하지 않기로 맹세하기 위해 몰래 처마밑에 돼지형상을 만들어 숨겼다는 것과 또 하나는 이 사찰을 중수하던 장난끼 많은 스님이 내림마루나 추녀마루 밑에 용이나 봉황을 만들어 넣는 대신 현판 뒤 처마밑에 몰래 이 돼지상을 만들어 숨겼다는 설화가 전해지며, 어느 향토 사학자는 돼지 형상이 서유기에 나오는 저팔계를 형상화한 것으로, 사찰 내 잡귀신을 물리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주장도 있으니 그저 단순한 재미로 이해하면 좋을듯 하다.
그밖에도 경주 최씨의 시조인 '최치원'이 금돼지의 자손이라는 전설까지 합쳐지면 경주와 황금돼지는 무관한것 같지는 않다.
<극락전 현판 뒤에 감추어진 황금돼지....>
또한 극락전 앞에는 대웅전 앞의 청운교 백운교처럼 연화교 칠보교가 있는데 연화교 돌계단에는 연꽃무늬가 계단을 따라 이어지도록 조각되어 있는데 평상시 통행하는 다리도 아닐뿐더러 미리 그런 지식을 갖고 있지 않다면 못본채 돌아서야 할 것이다.
<연화교의 연꽃무늬....>
그밖에도 극락전 밖으로 나와보면 경사진 비탈길에 극락전을 짓기 위하여 석축을 길게 쌓고 평탄작업을 하였는데 장대석을 가로 세로 걸친후 그 사이사이에 못난 자연석들을 채워넣은 축대의 아름다움이 한 눈에도 참 멋지고 아름답다. 유홍준 교수는 이 극락전 축대와 연화교의 연꽃무늬 새김을 세번째와 네번째 아름다움으로 추천 하였다.
<극락전 서측 축대....>
<대웅전 왼편의 회랑과 다보탑이 내려다보이는 모습....>
어찌 불국사를 돌아봄에 대웅전, 극락전 밖에 없을까마는 1박 2일이라는 일정의 제한에 따라 이 정도 돌아보고 만 아쉬움을 뒤로 한채 우리는 감은사절터와 문무대왕릉이 있는 동해권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 동해권 돌아보기
ㅇ 골굴사
주마간산(走馬看山)격으로 경주일원을 대충 돌아 본 우리는 감포 방향으로 가기 위해서 불국사에서 바로 갈 수도 있었지만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감포가도를 맛보기 위하여 일부러 보문단지로 가서 4번국도를 타고 추령터널을 지나 장항리로 향하였는데 길 옆에 골굴사라는 특이한 절이 있어 잠시 들려보기로 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골굴사(骨窟寺)는 약 1500년전 인도에서 건너온 光有스님 일행들이 자국의 사원 양식을 본따서 창건한 전형적인 석굴사원으로 불국사보다 약 200년 먼저 창건되었다는 것이며, 또한 골굴사는 그 옛날 화랑들이 수련하고 스님들 사이에서만 비밀리에 전수되어 왔다는 선무도의 총본산으로 불교무술의 선무도대학이 설립되어 있다.
석굴암과 불국사의 만만치 않은 입장료에 적잖이 놀란 우리는 입장료가 없는 골굴사가 또한 마음에 들었다.....ㅎㅎ
<골굴사 일주문...>
<입구에 포대화상이 있다.>
<TV에도 나왔다는 예불 잘 올리는 보살 개(犬)... 염주 목걸이를 하고 있다.>
<골굴사 전경..... 법당 윗쪽으로 파여진 굴마다 여러 부처들을 모셨다.>
<골굴암 마애여래 좌상... 보물 제 581호....최신 자재로 덧집을 씌운것이 이채롭다.>
마애석불이 모셔진 커다란 바위는 특별히 석회암 바위인듯 여기저기 바위 구멍이 많았으며 십여개의 커다랗게 파인 곳 마다 지장굴, 산신굴, 약사굴, 라한굴, 칠성단등이 오밀조밀 모셔져 있었는데 어찌보면 너무 많은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한, 두가지만 집중해서 정제되고 절제된 준비가 더 좋은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아직도 여기저기 구멍이 파여지고 여유공간이 있어 보이면 이런저런 설치를 하는 걸 보고 조금은 아쉬웠다. (過猶不及)
ㅇ 감은사지 삼층석탑
골굴사를 나와 감포로 가는길 오른쪽 하천이 바로 황룡사를 불태우고 大鐘을 몽고로 가져가려고 바닷길쪽으로 옮기다가 물에 빠뜨렸다는...그 대종천(大鐘川)이다. 혹시 어디선가 종소리가 들리지 않나 귀 기울여본다. ㅎㅎ
그 대종천 옆 도로 왼쪽으로 감은사 절터가 있었다. 도로변에서 약간 올라선 지형은 평평해 보였는데 2개의 탑중에서 왼쪽 탑은 전면 수리 보수공사중이었고 오른쪽 탑은 손님들을 맞아 우뚝 선채로 그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절터에 서서보니 역시 전형적인 쌍탑 1금당의 형태이며 금당 자리는 바닥 초석들이 그대로 남아 있어 멀리 바라다보이는 대왕암에서 용으로 변한 문무대왕이 쉽게 드나들 수 있도록 바닥에 통로개념으로 구멍을 낸 곳은 어디인지 살펴보게 된다.
<왼쪽 탑... 공사중이다>
<오른쪽 탑... 당당하게 서 있다>
<금당 자리....>
경주에 있는 삼층석탑중 가장 큰 규모이며 1탑중심의 사찰 배치가 삼국통일 직후 쌍탑으로 변해가는 최초의 가람배치라고 한다.
앞서 설명한대로 백제 정림사지 오층석탑으로부터 신라로 넘어온 석탑의 족보가 바로 이 감은사지 삼층석탑과 경주박물관 뒷뜰에 있는 고선사지 삼층석탑을 거쳐 불국사 석가탑에 이르러 완성된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다시 한번 찬찬히 돌아보니 과연 웅장하고 장중하면서도 어딘가 자신감과 힘이 넘치는 모습인지라 상륜부의 녹슨 찰주(擦柱)조차 흉하게 보이질 않는다.
옛날에는 바닷물이 이곳까지 들어왔을듯 싶으니 감은사는 해변가 사찰로 저 멋진 쌍탑을 거느린채 눈을 들어 대왕암을 바라보는 그야말로 그림같은 풍광이었을것으로 생각된다.
■ 에필로그
한달을 둘러보아도 부족하다는 경주. 그 옛날 수학여행때 밟아보고는 삼십년 넘게 찾아오지 못했던 세월속에서도 석굴암, 불국사, 첨성대 등등은 마치 상식처럼 머릿속에 맴돌고 있어 어쩐지 익숙한 이름들이었다. 그러나 철들어 찾아간 경주, 신라 천년의 古都... 경주(慶州)는 솔직히 그다지 만족스럽지는 못하였다. 특히나 석굴암에서의 유쾌하지 못한 기억들은 또다시 경주를 찾아올때까지 오래오래 남아 있을듯 하고, 경주박물관의 무신경한 에밀레종 관리실태는 담당자가 누구인지 궁금할 정도이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데 국보급 문화유산의 현주소가 조금은 안스러웠다.
다만 등산을 겸하여 올랐던 남산의 삼릉골에서 만난 기쁨과 환희가 이런저런 불편한 심기들을 씻어주었으며 다음에 다시 방문한다면 용장리나 남산의 다른 곳을 좀 더 세세히 살펴보고 싶다.
< 끝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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