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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된 '진짜 리더십'을 만나보자(길어온 글)

이산저산구름 2008. 3. 26. 13:12
표현된 '진짜 리더십'을 만나보자
이주헌·미술평론가


뉴욕이 인구 100만 명을 넘어서 메트로폴리스가 된 것이 1860년이다.

이로부터 6년 뒤 당시 예술의 수도 파리에서 일군의 '파리의 미국인'들이 모여

미국에 국립 미술관을 세우자는 데 의기투합했다.

이 결의가 모태가 되어 1870년 4월 13일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문을 열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세계 미술의 살아있는 백과사전이다. 피렌체로부터 테베,

파푸아뉴기니에 이르기까지, 또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세계 모든 곳의 모든 문화가 망라되어 있다."

▲ 로이체‘델라웨어 강을 건너는 워싱턴’ 로이체는 미국 독립혁명의 경험을 그림으로 표현해 유럽의 개혁가들에게 영감을 주려 했다. / 이주헌 제공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관장 필립 드 몬테벨로의 이 자부심 어린 표현은,
이 미술관이 루브르와 대영박물관과 함께 옛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적 야심을
일정 부분 유산으로 이어오고 있음을 새삼 깨닫게 한다.

어쨌거나 나라 사이의 치열한 경쟁은 지금도 여전한 현실이고 국가 생존 전략 차원에서도
문화는 갈수록 중요한 자원이 되어가고 있다.
19세기에는 땅을 향해, 20세기에는 기술을 향해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다면,
이제는 문화를 향해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시장에서 흔히 '이탈리아 가구'니 '프랑스 패션'이니 하며 나라 이름이 브랜드처럼 운위되는 것은
국가의 문화 역량에 따른 후광 효과가 엄청나게 크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미국은 신생 독립국가임에도 일찍부터 문화적 기반을 튼실하게 갖춰
이른바 '수퍼 파워' 중의 '수퍼 파워'가 될 잠재력을 키웠다.
18만6000여㎡(5만6000여 평)의 공간에 200만 점이 넘는 문화 예술품을 소장한 데다
외관 자체가 보자르 스타일의 장려한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그 전략과 노력의 대표적인 상징이라 하겠다.

글로벌 리더로서 미국의 역할을 자임하는 미술관이니만큼,
이 미술관의 명화들로부터 리더의 참 모습을 발견해보는 것은 어떨까?
그런 감상에 도움이 되는 대표적인 걸작이 로이체(Leutze)의 '델라웨어 강을 건너는 워싱턴'과
다비드(David)의 '소크라테스의 죽음'이다.

독일계인 이매뉴얼 고틀립 로이체는 어릴 때 미국으로 이민 왔으나 성인이 되어 다시 독일로 돌아간 화가다.
1848년 유럽에서 혁명이 터지자 '델라웨어 강을 건너는 워싱턴'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었다.
유럽에 번지는 혁명을 보고 미국 독립혁명의 경험을 그림으로 그려 유럽의 자유주의 개혁가들을 고무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림은 동 터오는 새벽, 워싱턴이 도강(渡江) 작전을 감행하는 모습을 담았다.
델라웨어 강을 건너 벌인 트렌턴 전투는 미국 독립 투쟁사에 길이 남을 영웅적인 전투다.
1776년 독립 선언 뒤 미국 혁명군은 영국 군대의 압박에 전혀 맥을 못 추었다.
소년병, 농부 등 '오합지졸'로 구성된 혁명군은 도저히 영국군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연전연패하다 마침내 델라웨어 강 건너로 내몰리고 말았다.
하지만 사기를 잃지 않고 전의를 불태우던 혁명군은 워싱턴 장군의 지휘 아래
1776년 12월 25일 새벽 델라웨어 강을 건넜다.
그리고 뉴저지 트렌턴에 주둔해 있던 헤센 용병 부대를 급습해 900여 명을 포로로 잡고 트렌턴을 장악했다.
이 승전보로 미국은 혁명의 승리에 대한 믿음을 더욱 확고히 다질 수 있었고,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각국도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화가는 기념비처럼 서서 강 건너를 바라보는 워싱턴을 통해 그를 이상적인 리더로 표현하고 있다.
리더로서 워싱턴의 위대성은 그가 단순한 지휘관이 아니라 진정한 혁명가였다는 데 있다.
모든 위대한 리더는 다 진정한 혁명가다. 그들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이 이상과 비전을 갖도록 고무한다.
눈앞의 이익을 쟁취하는 데만 목표를 두면 그 목표가 흔들릴 때 조직은 무너진다.
설령 싸움에서 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리더가 고귀한 이상과 비전을 갖고 있고
구성원들이 이에 적극 공감한다면 그들은 최후의 일인까지 목숨을 다해 투쟁할 것이다.
리더는 그렇게 이익이 아니라 이상과 비전을 세일즈하는 사람이다.

당시 워싱턴의 군대를 본 한
프랑스 장교는 "헐벗고 보상도 없다시피 한데다가
소년에서부터 노인, 흑인 등으로 구성된 군대가 그토록 용감하게 행군하고 싸운다는 게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고 기록했다.

아이를 무등 태워 보이지 않던 구경거리를 보여주는 아버지처럼 리더는
이렇듯 조직원들의 영혼을 고무해 새로운 비전을 갖게 이끌어야 한다.

바로 그 비전으로 충만해 있었기에 그림 속의 군인들-앞쪽의 스코틀랜드 보닛을 쓴 남자와 흑인,
배의 앞머리와 뒷머리에서 노를 젓는 서부 출신의 소총수, 챙이 넓은 모자를 쓴 뒤쪽의 농부들,
여자로 보이는 붉은 옷의 병사, 그리고 깃발을 든 장교까지-은 모두 하나가 되어
갖은 고통을 감내하며 투쟁의 의지를 불태울 수 있었다.
▲ 다비드‘소크라테스의 죽음’ 침대에 앉아 한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다른 손으로 독배를 잡으려는 이가 소크라테스다. / 이주헌 제공
소크라테스는 요즘 활발히 논의되는 '코칭(coaching)' 리더십의 대표적인 원조로 꼽힌다.
그의 문답법은 제자들에게 문제가 생길 때 직접 답을 주지 않고
질문을 던짐으로써 스스로 답을 찾도록 한 것으로 유명하다.
누구나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있으며, 이 무한한 잠재력을 키워주는 것이
리더, 멘토, 스승이라 불리는 사람들의 역할임을 몸소 보여준 이가 소크라테스다.

이렇게 스스로 답을 찾으면 사람들은 그 의미와 가치를 끝까지 지키려 한다.
소크라테스 역시 그렇게 얻은 신념과 이상을 목숨을 다해 지켰다.
그가 피할 수도 있었던 독배를 받아 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비드의 그림에서 지금 침상에 앉아 한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다른 손으로 독배를 잡으려는 이가 소크라테스다.
그는 두려움과 흔들림이 없어 보인다. 강한 의지와 내면의 평화를 드러내며 영혼의 불멸에 대해 이야기한다.

주위에는 슬픔과 좌절에 빠진 제자들과 노예들의 모습이 보인다. 침상 끝에 묵묵히 앉아 있는 이가 플라톤이다.
소크라테스의 무릎에 손을 얹은 이는 크리톤이다.
그는 소크라테스의 부유한 친구로, 소크라테스에게 탈옥을 권했으나 끝내 소크라테스를 설득하지 못했다.
존경과 아쉬움이 교차하는 눈길로 소크라테스를 바라보고 있다.
저 공간 뒤편 계단으로 나가는 이들 가운데는 소크라테스의 아내 크산티페도 있다.
비극적인 장면을 보고 충격으로 쓰러질까봐 지인들에 의해 내보내진 것이다.

다비드는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프랑스대혁명이 발발하기 2년 전에 그렸다.

난세일수록 진정으로 갈구하게 되는 리더십이 이런 수평적이고 자기희생적인 리더십임을
진득하고 절절한 붓 놀림으로 표현한 그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