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일생의 한번쯤 세상과 삶에 대한 고민이 확 밀려올 때가 있을 것이다. 특히 스무 살 무렵은 고등학교 시절까지의 갇혀있던 삶에서 벗어나는 시기라 그것이 훨씬 더 증폭되어 다가오기도 한다. 그리고 그 시기에 더욱 다가오는 누군가가 있다.
나에게는 그러했다. 삶과 존재에 대한 원천적 고민이 컸던 그 때, 알베르 까뮈가 나에게 다가왔다. 그래서 까뮈와 관련된 것이라면 어떤 책이든 다 찾아 읽으려 했고, 그를 찍은 멋있는 사진들도 여기저기 찾아다녔고, 그가 연극을 의미 있어 했다는 이유로 연극을 하는 열정을 부리기도 했었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내가 그 시절에 까뮈의 책을 얼마나 이해했을까 돌아보게 된다.
삶 속에서 직접 경험하지 못하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있음을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점점 깨닫게 된다. 지금 소개하는 까뮈의 ‘시지프의 신화’도 그런 경우에 해당하는 것 같다. 스무 살 이후 지금까지 삶을 어느 정도 겪고나니 비로소 이 책을 조금쯤은 더 이해할 수 있는 듯 느껴진다.
그렇다면, 내 스무 살 시절에는 이 책의 무엇을 그리 열심히 읽었고 무엇을 이해했을까 문득 궁금해지기도 한다.
‘시지프의 신화’에 대한 간단한 서평으로 ‘시지프의 신화’의 구절들을 읽어내면서 까뮈가 말하고자 한 것과 지금 내가 이해하는 부분을 연결해보려 한다.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한 가지뿐이다. 그것은 자살이다.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 이것이 곧 철학의 근본 문제에 대답하는 것이다.
이 세계 자체가 합리적이지 않다는 것, 그것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전부다. 그러나 부조리한 것이란 곧 이 불합리와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서 호소가 메아리치는 명석에의 격렬한 욕망과의 대결인 것이다.
같은 년 수를 살아가는 두 사람에게 세상은 항상 같은 양의 경험을 준다. 이것을 인식하는 것은 우리들에 의해서이다. 자신의 삶과 반항, 자유를 느낀다는 것 그리고 될 수 있는 한 많이 느낀다는 것, 이것은 곧 사는 것이며 또한 될 수 있는 한 많이 사는 것이다.
이렇게 나는 부조리에서 나의 반항, 나의 자유, 그리고 나의 열정이라는 세 가지 결론을 이끌어 낸다. 오직 의식의 활동에 의해서 나는 죽음으로의 초대였던 것을 삶의 규칙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리하여 나는 자살을 거부한다.
오늘날의 노동자는 자기 생의 매일 매일을 같은 일에 종사한다. 그리고 그 운명은 부조리하다. 그러나 그 운명은 의식을 갖게 되는 드문 순간에 있어서만 비극적일 뿐이다. 신들의 프롤레타리아인 무력하고 반항적인 시지프는 그의 비참한 전모를 알고 있다. 그가 산에서 내려오는 동안 생각하게 하는 것은 바로 이 조건에 대해서이다. 그의 고뇌를 이루게 했을 명찰이 동시에 그의 승리를 성취시킨다.
"산꼭대기를 향한 투쟁, 그 자체가 인간의 마음을 가득 채우기에 족한 것이다. 행복한 시지프를 상상하지 않으면 안된다." - Albert Camus
나의 반항, 나의 자유, 나의 열정으로 나는 ‘행복한 시지프’가 될 수 있을까? 삶의 언제쯤엔가는 그런 용기와 깊이를 가진 ‘행복한 시지프’가 될 수 있었으면 하고 바래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