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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은해는 가시고 새날만 오시옵소서~

이산저산구름 2007. 12. 13. 11:20
묵은해는 가시고 새날만 오시옵소서~



1년의 마지막 날인 섣달 그믐날 밤을 제석 혹은 제야라고 하는데, 이는 한해를 마감하는 마지막 밤이란 뜻으로 이 날을 까치설날 또는 작은 설날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궁중에서는 연종제, 민간에서는 묵은세배

대부분 처음 들어보는 것일 법한 ‘연종제’는 궁중에서 행한 제석날의 의식으로, 각종 악귀를 쫓기 위해 여러 모양의 가면을 쓰고 놋쇠로 만든 제금과 북을 치면서 궁 안 여러 곳을 돌아다니곤 하였다. 이는 1년 동안의 묵은 잡귀를 쫓아내고 깨끗한 새해를 맞이하기 위한 행사로서 조선 말까지 계속되었다. 한편 민가에서는 섣달 그믐날 저녁에 사당에 먼저 절을 하고 설날 아침에 드리는 세배와 같이 부모님께 절을 올리는 묵은세배를 행하였는데, 이는 가까운 혈연에게만 드리던 것으로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조상님의 은덕에 대한 고마움을 빌고 부모님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뜻이 담겨 있었다.


새날을 준비하는 풍경, 대청소와 세찬 만들기

제석 다음 날이 바로 설날이므로, 제석날 설날 차례를 지내기 위해 여러 음식을 만드는 것을 세찬이라고 하였다. 세찬의 종류는 가문의 형편과 집안의 내력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으나, 어느 집이든지 시루에 멥쌀가루를 찐 것을 떡메로 쳐서 떡가래를 만들었다. 또한 친척이나 가까운 친지들에게 세찬으로 쓰이는 전복·육포·곶감·대추 등을 선물하기도 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각 지방의 도백들이 그 지방의 토산물을 궁중에 세찬(총명지)으로 바치기도 하였다. 이밖에 궁중에서는 제석 날 70세 이상 되는 관리들에게 쌀과 생선 등을 하사하였고, 내의원에서는 벽온단이라는 특수한 향을 만들어 임금께 진상하여 설날 아침에 그 향을 피우도록 하였다. 또 민간에서는 주부들이 세찬을 만들 때, 남자들은 외양간과 집 안팎을 깨끗이 청소하며 설 맞을 준비를 하였는데, 이것은 모두 묵은해의 잡귀와 액을 물리치고 신성한 새해를 맞으려는 조상들의 삶의 모습이었다.


까만 밤을 하얗게 보내는 수세와 새복을 부르는 복조리 걸기

섣달그믐날 밤에는 방이나 마루를 비롯해 부엌·곳간·변소 할 것 없이 집안 구석구석에 촛불이나 등불을 식구 수대로 밝혀 놓고 잠을 자지 않았는데, 이것을 수세 혹은 지킴이라고 하였다. 특히 이 날 밤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쉰다고 해서 날이 밝을 때까지 졸음을 참으며 잠을 자지 않았는데, 어쩔 수 없이 누군가가 잠이 들면 잠든 이의 얼굴에 그림도 그리고 눈썹에 밀가루를 발라 정말로 눈썹이 하얗게 세어 버렸다고 놀리기도 하였다.
또 정월 초하루 아침에 조리를 사서 돈이나 엿을 넣은 뒤 안방 문 위나 부엌에 매달아 두면 새해의 복과 행운이 들어온다고 믿었는데, 이러한 풍습에는 조리가 쌀을 일듯 복을 일어주고 모든 재앙을 걸러주기를 바라는 아낙들의 간절한 마음이 담겨 있었다.


날메주 국물을 마시며 시작하는 섣달그믐

섣달그믐날 새벽 궁중에서는 왕과 왕비를 비롯하여 아래 하인들까지 ‘무장’이라는 일종의 ‘날메주’ 국물을 마셨다. 항아리에 소금물 끓인 것을 식혀서 담고 거기에 메주를 뚝뚝 떼어 넣었다가 서서히 우러난 메주 국물을 마시는 것이었는데, 이는 새해를 맞이하기에 앞서 묵은해를 보내며 요상한 잡귀들을 물리치기 위함이었다. 고종 때 상궁을 지낸 김명길 씨의 말에 따르면 왕 내외분은 ‘무장’을 꼭 챙겨 드셨다고 전한다.


이밖에도 제석에는 산을 마주보고 “메산아! 메산아!”하고 크게 소리쳐서 그 소리가 메아리로 돌아오면, “명복 내 주고, 내 더위 다 가지고 가라”하는 기복 행사도 있었다. 이는 우리 민족의 뿌리 깊은 산신신앙을 엿볼 수 있는 주술 행위라 할 수 있겠다. 또 자면서 이빨을 가는 아이가 있는 집에서는 바람이 불 때 나무들이 서로 부딪쳐 소리가 나는 가지에 돌을 끼우면 이갈이가 낫는다고 하였으며, 섣달그믐의 무는 산삼과 같다고 해서 생무를 먹기도 하였고, 달걀을 오줌에 담갔다 삶거나 달걀을 직접 오줌에 삶기도 하였다. 오줌에 삶은 달걀을 먹으면 부스럼도 안 나고 장티푸스와 같은 돌림병에도 걸리지 않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밖에도 일 년 동안 모아둔 머리카락을 이날 저녁에 대문간에서 태우며 새해에 자신에게 돌아올 액이 소멸되기를 바랐고, 섣달 24일부터 그믐까지는 부엌의 신인 조왕이 자리를 비우는 기간이므로 이때를 틈타 집안이나 부엌을 수리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섣달그믐에 행한 많은 풍습들은 우리 민족의 뿌리 깊은 민속신앙을 엿볼 수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글 : 이광렬 동화작가
▶일러스트 : 백금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