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고 싶은 글

온달의 안해 평강공주

이산저산구름 2007. 5. 30. 09:23

* <북녘의 중세녀성일화>에서는 북측의 과학백과사전출판사에서 2006년 펴낸 <중세녀성일화집>의 이야기 한대목씩을 기획연재한다. 북녘에 전해 내려오는 여러 책과 이야기를 엮은 중세여성들의 일화집을 통해 옛 여성들의 지혜와 재능, 부드러우면서도 강인한 마음 등을 엿볼수 있다. 본분 그대로 실음으로 남과북의 단어나 표기법의 차이도 비교해 보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온달의 안해 평강공주

  평강공주는 고구려 평강왕의 딸이다. 그는 어려서 웬일인지 웃음보다도 울음이 더 많았다. 부왕인 평강왕은 어린 딸이 너무도 울기를 잘하므로 늘 엄한 기색을 띄우며 “네가 늘 울어서 나의 귀를 솔게 하니 커서 필시 점잖은 사람의 안해로는 되지 못할것이요 마땅히 <바보온달>에게나 시집을 보내야겠다.”고 롱담하며 달래군 하였다. 왕은 바보온달이 누구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항간에서 돌아가는 말만듣고 공주가 울면 “바보온달에게 시집보내겠다”고 말하군 했던것이다. 온달은 집이 몹시 가난하여 언제나 밥을 빌어 눈먼 어머니를 봉양하면서 구차하게 살아갔는데 덥수룩한 머리에 꿰진 옷과 낡은 신발을 걸치고 다녔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바보온달>이라고 불렀다.

1961년 남측에서 영화로 제작되었던 신영균, 김지미 주연의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평강공주가 나이 16살이 되자 부왕은 그를 상부 고씨에게 시집 보내려고 하였다. 그러나 공주는 고씨가 무슨 일에나 가문과 권세를 앞세우며 남을 천시하고 업수이 여기는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공주는 사뭇 어려움을 잊고 “대왕께서는 늘 말씀하시기를 너는 반드시 온달의 안해가 되리라고 하셨는데 오는 무슨 까닭으로 전일의 말씀을 달리하십니까? 보통사람도 한입으로 두말을 하지 않거늘 어찌 대왕께서 두번 다른 분부가 있겠사오리까.” 라고 하였다. 왕은 대노하여 “네가 내 말을 듣지 않는다면 내 딸로 될수 없으니 어찌 한집에서 살겠느냐. 네 갈데로 가거라!”하고 소리쳤다.

  공주는 서슴지 않고 금, 은, 기물 등 진귀한 물건들을 가지고 그 달음으로 대궐을 나와 길을 떠났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어 온달의 집을 찾은 그는 앞못보는 늙은 어머니에게 다소곳이 절을 하고는 온달이 있는 곳을 물었다. “내 아들은 가난하고 루추하여 귀인이 가까이 할 사람이 못됩니다. 그대의 몸에서 풍기는 꽃다운 향기가 범상치 않으며 그대의 손은 부드럽기가 솜과 같아 필시 천하의 귀인인가 하나이다. 그런데 어떻게 비천한 우리집을 다 찾아오셨나이까? 내 아들은 주림을 참다못해 느릅나무껍질을 벗기려고 산속에 갔소이다.”

  공주가 집에서 기다리다가 그를 찾아 떠나려는데 마침 온달이 느릅나무껍질을 한짐 지고 들어서는것이였다. 공주는 곧 자기가 찾아온 사연을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온달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여기는 녀인들이 다닐데가 아닌데 너는 분명히 사람이 아니라 여우귀신이다. 더는 나를 따라오지 말라!”고 하고는 돌아다보지도 않고 어디론가 훌쩍 가버렸다. 하지만 공주는 한번 먹은 마음을 굽히지 않고 온달의 집 사립문곁에서 하루밤을 지낸 다음 이튿날 아침에 다시 방으로 들어가 온달모자에게 자기의 진심을 말하였다.

  온달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있는데 그의 어머니가 “내 자식은 지지리 못나서 귀인의 짝이 될수 없고 또 집이 보다싶이 어지럽기 그지없으니 귀인이 살만한 곳이 못되옵니다.”라고 거절하였다. 그러자 공주는 “옛사람이 말하기를 <한말의 곡식도 찧어서 함께 먹을수 있고 한자의 베도 기워서 같이 입을수 있다.>하였거늘 마음만 서로 통한다면 어찌 재물의 있고없고가 문제로 되며 잘나고 못나고가 문제로 되겠소이까?”라고 하였다.

충북 단양군 영춘면의 온달공원에 위치한 온달장군의 형상과 평강공주가 새겨진 기념탑. (네이버 백과사전)
  그리하여 공주는 그날부터 온달의 안해로 되였다. 공주는 자기가 왕궁을 떠날 때 가지고 왔던 금은패물을 팔아서 집과 밭, 소와 말, 가장집물을 사들여 집살림을 꾸렸다. 말을 살 때 공주는 온달에게 저자(시장)사람의 말을 사지 말고 나라말로서 병들고 수척하여 버리게 된것을 사오라고 당부하였다. 공주가 온달이 사온 말을 매우 정성스레 먹이니 말이 나날이 살찌고 튼튼해졌다. 공주는 온달에게 말타기와 활쏘기를 비롯한 무예를 닦을것을 권고하였다. 온달은 산과 들에서 사냥을 하면서 말을 달리고 활을 쏘았으며 무예를 닦기에 힘썼다.

  고구려에서는 매해 3월 3일이 되면 락랑언덕에서 사냥을 하여 집은 돼지와 사슴으로 하늘과 산천신령에 제사를 지내였다. 그날이 되여 왕이 사냥을 나가는데 여러 신하들과 5부의 군사들이 모두 따라갔다. 이때에 온달도 자기가 기르던 말을 타고 사냥에 나섰는데 온달이 항상 앞에서 달렸으며 잡은 짐승도 제일 많아서 사냥에서는 온달을 당할 사람이 없었다. 왕이 감탄하여 그를 불러 이름을 물으니 뜻밖에도 온달이라고 하였다. “그대의 이름이 온달이라나 혹시 그 <바보온달>은 아니겠지?”하고 물으니 “제가 바로 그 <바보온달>이로소이다.”라고 대답하였다.

  그후 외적이 고구려를 침범하자 온달은 고구려군의 선봉장으로서 수많은 적들을 쓸어눕히고 혁혁한 공적을 세우게 되였다. 평강왕은 온달의 공로를 높이 평가하면서 례를 갖추어 온달과 공주를 맞이하고 온달에게는 높은 벼슬을 주었다.

  그후 양강왕이 왕위에 오르게 되였는데 온달은 “지금 신라가 우리의 한북지역을 떼내여 자기들의 군현으로 만들었으므로 백성들이 통분하게 생각하고있으니 바라옵건데 대왕께서 저를 어리석고 변변치 않다 하지 않으시고 군사를 주신다면 한번 걸음에 우리 땅을 도로 찾겠습니다.”라고 요청하였다. 왕이 이를 허락하자 온달은 “계립령과 죽령의 서쪽지역이 우리땅으로 회복되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전투장으로 떠나갔다.

충북 단양군 영춘면에 있는 온달산성. 고구려 평강왕의 사위 온달이 신라군의 침입때 이성을 쌓고 싸우다가 전사하였다는 전설이 서려있다.
  온달은 전장에서 용감하게 싸우다가 아단성(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싸움에서 신라군사가 쏜 화살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그런데 그를 장사지내려고 하니 관이 움직이지 않았다. 공주가 와서 관을 어루만지면서 “생사가 결단났으니 아, 고이 돌아가시라.”고 하니 그제야 관이 움직이였는데 아마도 온달이 죽어서도 자기를 위하여 바친 공주의 정성과 깨끗한 마음을 잊지 못하였기때문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