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관심은 자기파괴로 돌아온다 |
일명 안기부 X파일로 기소된 MBC 기자가, 대법원 판결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일부에선 소설보다 아름다운 판결이라 한다. 실상 너무나 당연한 것인데도 피고석에 섰던 기자 역시 무죄판결이 나올지 몰랐다며 눈물까지 글썽인다.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고 신기하게 비추어지는 세상이다. 현대판 호부호형이라 할 수도 있겠으니 이것 참 가관이다. 뇌물 혐의로 구속된 전 법관 재판은 동료 법관들이 모두 손사래를 친단다. 못하겠다는 것이다. 못하겠으면 법복 벗으면 될 거 아닌가. TV 화면을 노려보면서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내두르기 일쑤다. 이쯤 되면 국회에 진출해도 좋겠다. K1을 능가하는 격투기 단체들의 본거지가 아닌가, 그곳은.
내가 뉴스에 이렇게 열광하게 된 것은 예전 같았으면 전혀 기대도 하지 않았을 일이다. 적어도 내가 대안학교 학생이 아니었다면 그랬을 거란 얘기다. 대안학교, 기존 공교육의 문제점과 한계를 인식하고 그에 따른 대안으로 출범한 작은 학교다. 나의 좌파세포는 고등학교 3년 동안 모조리 배양되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부조리와 모순, 불평등의 사회상을 망막에 꿰어내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것은 크게 볼 줄 몰랐던 내가 어느 부분에 초점을 맞춰야 할지를 체화해갔던 과정이기도 하다. 조준을 하려면 한쪽 눈을 감아야 한다. 내가 감았던 눈은 무관심의 눈이었었다. 중학교를 다닐 때의 내 기억은 헐겁게 날조된 것이었다. 유독 숫자에 약했던 내게 가장 고역이었던 것은 번호제다. 오죽하면 같은 반 애 이름은 몰라도 그 애 번호는 알고 있었을까. 이것은 아직 어렸던 나에게 큰 문제로서 다가온다. 번호 말고, 이름으로 불러주세요. 나는 여전히 27번이었고 28번이었으며 34번 이상의 것은 되지 못했다. 존 테일러 개토의 ‘교사들의 일곱 가지 죄’에서 비슷한 대목이 언급된다. 학생들을 자기의 자신감이 아니라 교사의, 학교의, 성적의 평가로서 자신을 평가하게 한다, 고. 나는 지쳐 있었다. 하고 싶은 것은 많았지만 정작 되고 싶은 것은 드물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과 대화를 하지 못한 채로 자기합리화에 밥 빌어먹고 사는가. 그러고 싶지 않다. 정말이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도덕 선생이 우리나라에서 대학 못가면 사람대접 못 받는다 운운할 때 발끈하여 대들면서 나는 생각했다. 모두를 멍청이로 만드는 것은 어쩌면 안일일지도 모르겠다고. 당장의 안일, 당장의 평화, 수많은 당장들이 너울거리며 춤을 추었다. 장래 희망 실태 조사에서 사자돌림 삼종 세트에 일제히 올라가는 ?! 女碩湧? 손, 친구의 교과서로 종이비행기를 정갈히 접고 계시는 마의 89년생 여러분. 삐뚤어진 엘리트주의, 무조건 명문대 학적부터 오리고 보자는 ‘2호선을 타자’ 캠페인……. 그때의 나는 넓게 보는 것에는 아직 미숙했기에 시야에 잡히는 것만 보았지만, 내가 상아탑 진격특공대 자리를 내친 것은 나는 그렇게 나를 훼손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탈주병 딱지는 만만찮은 무게였다만, 그에 걸 맞는 근력 또한 길러진 것 역시 사실이다. 최근엔 급수가 좀 올라서 철면피를 얼굴에 덧대는 작업도 하고 있다. 바보가 되는 법은 간단하다. 벙어리 3년, 귀머거리 3년, 장님 3년의 이른바 조선시대 며느리 9년 수련과정을 거치면 된다. 그 동안 돋아나던 뇌세포들은 석화되고 성대엔 거미줄이 낄 것이며 눈은 피막으로 덮일 것이다. 인류의 조상이 분명 선악과를 먹었을 건대 선악의 구분은 어디에 있는가. 옳고 그름의 잣대는? 그조차 자신이 만든 것이 아닌 남의 것을 도둑질한다. 얼마나 자신을 방치해 두었으면 이 지경이 된단 말일까……. 이 사회의 일등공신 자들은 이 수련과정을 수석으로 졸업한 이들이리라. 그래, 하지만 새가 되어 밟힐지언정 돼지가 되어 구르지는 않는다. 날개가 짓이겨지고 지저분하게 밟혀도 본디 새는 날 수 있게 태어난 생물인 것이다. 자신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것은 결국은 자기 자신이다. 자신에게, 또 하나의 자신이라고 할 수 있을 사회에게 무관심함은 결국은 자기파괴로 돌아온다. 그 말로는 심히 처참하기 그지없다. 우리가 가져야 할 등불은 미미할지 모른다. 조작된 이성을 대중의 머리에 쏟아 붓는 매스미디어나, 그 대중을 노예화시키는 강자들이 끊임없이 진화작업을 펴는 까닭이다. 하지만 불씨는 꺼지지 않는다. 그것은 당연한 사회, 무관심을 가슴아파하는 사회의 출발일 테다. “어둠을 탓하기보다는 빛을 밝힐 촛불을 하나 켜는 것이 낫다.” 우리 학교의 철학이다. |
정예은 / 간디고등학교 3학년 (제2회 전태일청소년문학상 생활글부문, 전태일기념사업회이사장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