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깐수-정수일을 기억하시나요

이산저산구름 2006. 11. 2. 11:00
깐수-정수일을 기억하시나요
―한 지식인의 운명에 대하여

지식인에 대한 존재의 규명에서 사르트르는 지배계급에 의해 실용 지식 전문가가 된 사회적 노동자가 동일한 모순을 여러 수준에서 괴로워하기 시작하면서 진정한 지식인으로 태어난다고 말한다. 지식인이란 자기 내부와 사회 속에서 구체적 진실, 또는 그것이 지니고 있는 모든 규범에 대한 탐구와 지배하는 힘의 이데올로기 사이에 대립이 존재하고 있음을 깨달은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있다.

“분열된 사회 속에서 만들어진 지식인은 그가 사회의 분열된 모습을 내면화한 까닭에 그 사회를 증거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역사적 산물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어떤 사회도 자기 자신을 비난하지 않고는 그 사회의 지식인들에 대해 비난할 수 없다. 왜냐 하면 지식인이란 결국 그 사회가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오늘 이렇듯 진지하게 지식인에 대한 서구식의 고전적인 질문을 되씹는 것은 다름아닌 어느 동시대 사람 한 분을 모두에게 소개하고 싶어서다.

그의 이름은 정수일, 1934년 만주 옌지(연길)에서 태어나고 성장했다. 한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이른바 `깐수 사건'의 주인공이다. 그는 일찍이 전 중국에서 수재만을 뽑는 베이징대학 동방학부를 수석으로 나온 사람이며 제3세계에서의 지도력을 행사하려던 중국 정부에 의하여 발탁된 사람으로서 중국 국비장학생 1호가 되었던 이였다. 중국 탕자쉬엔 외교부장은 그의 동기생이다. 정 선생은 이집트와 모로코에 유학했고 중동에서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그는 동서 교역사와 실크로드학의 권위자가 되었으며 우리말에 중국어 일본어 영어, 그리고 전공인 아랍어와 포르투갈어 위구르어 티베트어 몽골어 등등 거의 열두 개 나라의 고대 언어에 정통하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어느 중국 고위층은 그의 재주를 아껴서 인척 여성과 결혼을 시키려고 하였지만, 그는 귀국을 결심하게 된다. 당시 그의 조국은 분단된 한반도의 북쪽인 조선을 의미하였다.

그는 중앙당으로 소환되고, 연구하는 학자가 아니라 공작원으로 변신하게 된다. 십이개 국의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고 박학다식하다는 것은 국가 권력의 다급한 총동원령에 따라서 그 효용 가치가 엉뚱한 방향으로 결정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그렇게 동원되었다. 중국 국적에서, 북조선 국적, 그리고 레바논 국적 등등 네 번의 `세탁'을 거쳐서 그가 취득한 최종 국적은 필리핀 체류 아랍인 2세가 되어 버렸다. 그의 아랍 이름이 동방 교역지의 하나였던 `깐수'가 된 것이 그 때문이다. 그는 여러 민족의 언어에 능통하고 박학한 실력 때문에 누구의 의심도 받지 않고 모 대학의 교환교수로 정착했다. 나는 남북 분단체제에서 벌어진 음습하고 피 냄새 나는 첩보전에 대하여 상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어느 정도 눈치는 채고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십여 년의 우여곡절을 겪을 때에도 `곰팡이'가 끼어들지 않도록 철저하게 `햇볕 아래 공개'하는 원칙을 세웠었다. 발표에 의하면 그의 상부 선은 구체적인 활동을 요구했고 그는 하는 수 없이 어느 월간지에 나온 것들을 팩스로 중국에 보냈다. 그야말로 원시적인 행위였던 셈이다. 그래서 세상이 떠들썩하게 `깐수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그는 직업 공작원이었으므로 그가 겪은 외로움과 고초는 우리네 진보인사가 받은 것과는 달랐을 것이다.

이 다음부터 실로 감동적인 지식인의 자기 결단과 선택이 이루어진다. 그는 국적이 필리핀이었으므로 국제법상 국외추방을 요구할 수 있었고 그가 처음에 갇힌 곳은 출입국과 관세법 위반자들이 수감되는 곳이었다. 그러나 정 선생은 자기의 국적은 분명히 북조선임을 주장한다. 그리고 최고형을 받게 된다. 그는 안정된 학문 탐구의 짧지 않은 세월을 남한에서 보내는 동안 중요한 저서와 논문들을 남겼고, ―그가 검거되기까지 자신의 진짜 신분을 밝히지 못하여 지금도 미안해하는― 부인도 얻게 되었다. 그녀는 사실은 정 선생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헤매이다 갖게 된 서재의 `지킴이'였다. 그는 방대한 자료와 주를 붙인 <동방교역사>의 원고 마지막 부분을 손질하다가 잡혀왔고 검사는 취조 중에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검사는 그의 마지막 원고를 관계 기관에서 찾아다가 검사실에서 정리하도록 충분한 시간을 주었다. 이 원고의 중요한 가치를 검사도 알았던 것이다. 그는 정 선생에게 사형을 구형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변호인단은 물론이고 재판부도 그의 곡절 많은 삶과 오랫동안 단절될 수밖에 없는 연구의 성과를 안타까워하면서 과거에 비할 수 없는 7년형을 주었다. 그리고 그는 전향했다. 그는 자신의 다른 길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에게는 전민족에 봉사할 시간이 별로 많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내가 그랬던 것처럼 메모일 뿐이라고 주장하면서, 법무부 노트에 깨알 같은 글씨로 자료도 변변치 않고 조명도 좋지 않은 독방에서 아내가 들여주는 최소한의 책들과 기억을 더듬어 가며 저술을 시작했다. 노트로 거의 사백여 권에 이르는 집필을 그는 수감된 5년 동안에 해냈다. 예전 같으면 어림도 없었을 작업이었지만 그는 마지막 설득 과정에서 이들 노작들을 감옥 밖으로 고스란히 보존해 내올 수가 있었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보다 더욱 전문적이고, 거의 박물적 지식을 겸비했던 중세 이슬람의 학자이며 여행가였던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 <도시들의 진기함, 여행의 경이 등에 대하여>를 세계에서 처음으로 초역해 냈다. 이것은 책으로 네 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이며, 중세시대 동방의 문화와 문명을 올바르게 자리매김할 귀중한 책이다. 알제리에서 바투타의 기록이 처음 발견되었고 프랑스가 이를 입수하여 식민지 경영에 필요한 만큼 요약하여 번역한 것이 유일하다고 한다. 이븐 바투타의 13만㎞에 이르는 30여 년의 여정은 동아시아의 근대와 문명에 대하여 깊이 성찰해야 할 이 시기에 절실히 필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

그는 이 외에도 서구인의 눈으로 본 동방세계에 대한 명저인 <율>과 당국의 양해로 간신히 보존한 <동방교역사>, 그리고 <동방교역사전>, 북한에서부터 해왔던 <아랍어 사전>을 보완 정리해 냈다. 나는 그의 노트와 그가 꼼꼼하게 그려낸 지도를 보면서 눈물이 나왔다. 그것은 구치소에서 휴지로 나누어 주던 손바닥만한 백지를 밥풀로 붙여서 만든 종이였는데 거기다 이븐 바투타가 여행한 육로 및 해로를 붉고 푸른 볼펜으로 정성스럽게 그려 놓았다. 이것을 어찌 그람시 선생의 <옥중수고>에 비길 것인가. 그는 그를 아끼고 키워 주었던 큰 나라 중국의 엘리트로 편안한 학문 생활을 하면서 더 높은 업적을 쌓을 수도 있었다. 조국의 북과 남은 이 소중한 재보를 헌신짝 같이 다루다가 결국은 말살해 버릴 뻔하였다. 아아,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과거에 얼마나 수많은 아까운 자산들이 그렇게 이름없이 말살되었던 것일까. 우리는 반세기 만에 겨우 이러한 것들을 추스를 만큼의 아주 작은 여유를 남북의 변화를 통하여 확보할 수가 있었다.

그는 8·15 사면으로 풀려나와 다시 학문에 정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국적이 없어져 버렸다. 여기서 다시 그의 고뇌와 선택이 시작되었다. 그는 `대한민국 국적'을 신청한다. 그에게 이미 남이나 북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며, 그이 말처럼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민족 앞에 밥값이라도 하려면” 자신의 구상을 빠짐없이 집필해 내야 하는 것이다. 그는 나와 헤어지기 전에 젖은 눈으로 중얼거린다. “분단시대의 지식인은 수의환향(囚衣還鄕)이 자신의 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북으로 돌아가는 장기수 선생들에게도 인사를 드리고 싶다는 것이었다. 나는 또한 그분들의 삼사십년에 걸친, 너무나도 길어서 추상적인 세월이 되어버린 어둡고 비좁은 독방의 삶을 다시 생각한다.

2000년 8월30일 소설가 황석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