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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과 함께하는 가을의 향연

이산저산구름 2006. 10. 9. 17:05

문화유산과 함께하는 가을의 향연

산수화山水畵와 한시漢詩를 통通한 가을 사색思索

-기러기, 낙엽, 달과 바람

林亭秋已晩   숲 속의 정자에 가을이 벌써 저물어가니
騷客意無窮   시인의 생각 끝없이 일어나네
遠水連天碧   멀리 보이는 저 물빛은 하늘에 잇닿아 푸르고
霜楓向日紅   서리 맞은 단풍은 햇볕을 받아 붉도다
山吐孤輪月   산은 외로운 둥근 달을 토해 내고
江含萬里風   강은 만리의 바람을 머금었네
寒鴻何處去   변방의 기러기는 어디로 가는가
聲斷暮雲中   울음소리 석양의 구름 속으로 사라지네.

-이이李珥, <화석정花石亭>

유난히 무더웠던 여름이 언제 가는가 싶더니, 그런 우리의 의구심도 무색하게 어느덧 가을, 팔월 한가위를 맞는 청명한 계절이 왔다. 예전의 ‘나’이었을 우리 선인들에게 가을이라는 시간과 공간은 어떤 감흥을 불러일으켰을까.
자연을 섬기고 인간사와 우주 삼라만상의 이치를 깨닫고자 한 옛 사람들은 이 계절을 어떻게 체감하고, 어떻게 재현하였는지를 일별하여 잠시나마 가을의 의미를 생각해보는 것도 이 계절을 뜻있게 지나는 한 방법이리라 믿는다.
우리 선조는 산수山水를 우주의 근본으로 생각하였고, 단순한 대상 경물이 아니라 인간과 마찬가지로 생명과 정신이 깃들어 있는 심오한 존재라고 믿었다. 하여 인간 본성의 거울로서, 인생사의 모든 원리를 배울 수 있는 스승으로서, 때론 고단한 삶의 위안처로서 산수자연을 대하였다. 또한, 산수자연을 통한 정신의 지극한 함양과, 미적 관조를 통한 인간과 자연의 주객합일을 진지하게 추구하였다. 그러므로 산수자연 그 자체만이 아니라, 자연에 지대한 변화를 가져오는 계절의 순환과 그에 따른 봄, 여름, 가을, 겨울의 각기 다른 정취는 삶의 미적 재현에서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소재가 되었다.
이 같은 가치관이 반영된 산수화와 한시 몇 편을 골라보았다. 그런데 이 작품들이 각기 다른 풍경風景과 심상心想을 보여주면서도 대체로 공통적인 특징이 드러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어쩌면 우리나라 가을의 자연스러운 계절 현상 때문인 듯하다. 즉 우리는 ‘가을’이라고 하면 누구나 공통으로 단풍과 낙엽, 맑고 파란 하늘, 투명하고 서늘한 바람, 혹은 겨울을 재촉하는 가을비, 그리고 한가위의 둥근달 등을 떠올릴 것이다. 계절을 드러내는 이러한 자연현상과 대상들이 또한 우리의 심상에 일으키는 보편적 감흥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몇 안 되는 작품이나마 구체적인 예로써 이 가을을 색다르고 진지하게 수용할 동기로 삼아보자는 것이 이 글의 소박한 바람이다.

달과 기러기

이흥효의 「추경산수도秋景山水圖」를 보면 짙은 안개가 전경全景의 강물과 후경後景의 산봉우리들을 멀찌감치 떼어놓아 화면에 넓은 공간감을 주었고, 앞쪽 강가에는 작은 배 한 척이 떠있다. 왼편으로 날아가는 기러기 떼와 둥근 달이 가을의 고즈넉한 풍경을 잘 보여준다.
율곡의 시 역시 우리 가을의 선명한 자연 색채와, 둥근 달이 떠오르고 강물이 바람을 머금어 일렁이는 정중동靜中動의 표현이 절묘하다. 또한, 변방으로 날아가는 기러기를 쫓는 시인의 마음과 기러기의 울음소리가 구름 속으로 사라진다는 시의 말미末尾(尾聯)를 보면 시각적 심상을 청각적 심상으로 바꾸는

시적전환詩的轉換이 애잔한 가을 정취를 느끼게 해준다.
가을 밤낚시 장면을 묘사한 「어가한면도漁暇閑眠圖,」에도 한 쌍의 기러기들이 날고 있다. 우거진 갈대숲에 배를 대어두고 주전자에서는 차가 끓고 있는데, 낚시꾼은 한가하게 잠이 들었다. 서늘한 가을바람 속에 낚싯대 드리우고 꾸는 꿈은 어떤 이야기일까.

  孤舟一泊荻花灣   외로운 배를 갈대밭에 대었는데
  兩道澄江四面山   두 갈래 맑은 강 사방은 산.
  人世豈無今夜月   인간 세상에 어찌 오늘과 같은 달밤 없으랴만
  百年難向此中看   한평생 이런 데서 보기는 어려워라.

-신광한申光漢, <한밤중에 날이 개자 달빛이 그림 같아 장탄 갈대밭에 배를 대었다 夜分後雨霽, 月色如畵, 舟泊長灘荻花灣>

그림처럼 아름다운 강가 갈대밭에 배를 대고 달빛 구경하는 정취를 노래한 시이다. 시인의 말처럼 아름다운 경관이야 많을 수 있지만, 그것을 감상할 수 있는 여유와 분위기가 마련되어야만 온전히 누릴 수 있는 귀한 기회가 될 수도 있다.

둥근, 그래서 기우는 달
가을의 또 다른 풍류를 들어보자.

  神仙腰佩玉(종종-한자없음: 찾아서 해주세요)   신선의 패옥 소리 짤랑짤랑 울리는데
  來上高樓掛碧窓   높은 다락 올라서 푸른 창을 걷노라.
  人夜更彈流水曲   밤이 들어 다시 유수곡 타는 소리 들리더니
  一輪明月下秋江   커다란 밝은 달이 가을 강에 지네.

-이첨李詹, <밤에 한벽루를 지나며 거문고 타는 소리를 듣고서
夜過寒碧樓聞彈琴>

높은 정자에 올라 누군가 뜯는 아름다운 거문고 소리를 들으며 강에 보름달이 지는 모습을 바라보니 신선이 따로 없다. 맑은 패옥소리와 강물에 잠기는 밝은 달빛의 만남이 읽는 이의 마음에도 신선한 가을 밤 정취를 일으킨다.
아마도 일 년 중에 가장 크고 밝다는 한가위 보름달이 가을 풍경을 대표하는 이미지가 아닐까 한다. 그런 까닭인지 가을을 그린 시나 그림에는 유난히 둥근 달의 형상이 자주 등장한다. 늘 넉넉함을 말할 때, 모자람 없이 그득하게 차있음을 비유할 때 한가위를 이야기하는 것처럼 둥근 달은 꽉 찬 느낌을 준다. 그만큼 완전함을 연상시키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완전함은 대체로 ‘떠나거나’, ‘기우는’, 그래서 안타까운 진행을 동반하곤 한다. 생명력 충만한 봄이나 여름과 달리, 우리는 가을이라 하면 외로움이나 그리움, 혹은 아쉬움과 회한의 감정을 쉬이 떠올린다. 늙음과 지나가버린 것, 잡으려 하였으나 그만 놓쳐버린 무엇, 죽음과 헤어짐, 덧없음과 무상함을 가을이란 계절에 덧붙여 상기하며,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대체로 진지한 사색과 반성에 빠지게 된다.
떠나는 친구를 전송하며 하응임河應臨이 지은 <송인送人>이란 시는 이별을 노래한다.

  草草西郊別   초라한 서쪽 교외의 전별이라,
  秋風酒一杯   가을바람에 술 한 잔 뿐.
  靑山人不見   청산에 아무도 보이지 않아
  斜日獨歸來   지는 해에 홀로 돌아오노라.

수식어가 거의 없이 헤어짐의 상실감을 담담하게 그리고 있다. 이런 감정의 절제가 오히려 시인의 쓸쓸한 마음을 더욱 극적으로 드러내어 저승길 가는 사람의 모습까지 연상케 할 정도이다. 서늘한 가을바람만큼 소중한 무엇을 끝내 놓쳐버린, 잃어버린 상실감을 잘 비유할 것이 있을까 싶다. 그래서 어느 시인은 “…가을바람 한바탕에 님 그리는 눈물…”이라 하여 님의 부재로 인한 외로움을 노래하였다. 또한, 서거정徐居正은 “…가을바람은 몹시도 정이 없어/국화에는 들지 않고 살쩍에만 들었나 보다.”라고 야속한 세월에 그예 늙고만 노년의 아쉬움을 가을바람에게 시비 걸어본다.

그리고 기러기
앞서 그림과 시에서 보았듯이 만월의 이미지와 쌍을 이루어 대비되는 심상을 보여주는 가을 전령이 기러기이다. 산수화든 시문詩文에서든 가을을 소재로 한 작품에는 달과 기러기가 종종 같이 등장한다. 그런데 도시에 사는 현대인들에게 가을의 표상表象으로서 기러기는 낯설 수 있다. 원래 기후 변화에 민감하여 후안候雁이라고도 불리는 기러기는 계절을 물어오는 전령으로 통한다. 옛 사람들은 봄추위가 끝나면 북상하고, 가을 찬바람이 불면 남하하는 기러기의 이동을 보고 지기地氣와 인사人事의 변화를 짐작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떠날 때와 머물 때를 구분할 줄 알며, 차례와 질서를 지킬 줄 아는 새였기에 옛 선비들의 시화詩畵에서 자주 그려졌을 것이다.
초서도 잘 쓰고 문장이 뛰어났던 양사언楊士彦은 <가을의 외로움秋思>이라는 시에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기러기에게 묻는다.

  孤烟生曠野   외로운 연기 광야에서 피어나고
  殘日下平蕪   저녁 해는 벌판으로 지는데
  爲問南來(안-한자없음: 찾아서 해주세요)  남으로 온 기러기에게 묻노니
  家書奇我無   집에서 부친 편지는 없느냐?

충무공 이순신의 <한산섬 밤 노래 閑山島夜吟>에도 역시 “한산섬에 가을빛이 저무니/ 추위에 놀란 기러기 높이 나는구나./ 근심스런 마음에 잠 못 이루는 밤에/ 새벽달만 활과 칼을 비추는구나!” 기러기와 달을 통해 잠 못 이루는 우국충정을 읊었다.
「웅연계람熊淵繫纜,」(13p)은 임술년 10월 15일 경기도 관찰사가 순시巡視 중 연천 서북쪽에 들렀을 때, 연천 현감縣監인 신유한申維翰과 양천 현령縣令인 정선이 우하정으로 마중을 나가서 배를 타고 임진강을 올라가며 주위경관을 구경하며 그린 작품이다. 부감법으로 실경을 그린 화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들은 밤이 깊어 이슬이 밸 때까지 술을 마시고 뱃놀이를 즐겼다고 한다.
이처럼 가을은 강호江湖의 멋을 느끼고 야외에서 유흥을 즐기기에는 더없이 좋은 계절이기도 하다. 물론 오늘날이라면 공무 중 이런 여흥은 엄청난 문제가 될 것이다. 어쨌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면의 산수는 가을 정취에 맞춰 그다지 요란스럽지 않다. 대체로 봄이나 여름풍경을 옮긴 산수화가 생동감이 넘치는 데에 비한다면 고즈넉하기까지 하다.

낙엽, 그리고 바람
어쩌면 다음에 소개하는 정도전의 시에서처럼 가을이 ‘비움’의 계절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秋雲漠漠四山空   가을 구름 그늘 아득하고 온 산이 텅 비었는데
  落葉無聲滿地紅   낙엽은 소리 없이 떨어져 땅 가득 붉구나.
  立馬溪橋問歸路   시내 다리 위에 말을 세우고 돌아갈 길을 묻노라니
  不知身在畵圖中   나 자신이 그림 속에 있음을 알지 못하네.
-정도전鄭道傳, <김거사의 들집을 찾아 訪金居士野居>

가을 풍경에 젖어 물아物我의 구분이 사라진 경지를 보여주는 이 시는 그림 같은 사경寫景에 물아일체物我一體를 체감케 하는 정경情景의 조화가 돋보인다. 우리는 너무나 아름다운 경치에 사로잡히면 삼봉의 표현처럼 실제인지, 그림 속에 들어와 있는지 얼른 구분이 안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는 보는 것이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가 그림과 이미지로 보는 것을 먼저 숙지한 까닭이기도 하다.
이와 비슷한 권우權遇의 시가 있다. “대는 푸른빛을 나누어 책상에 스미게 하고/국화는 맑은 향기 보내어 나그네의 옷을 채우네/낙엽 또한 바람의 기운을 일으킬 수 있어/비바람 온 뜰 가득 절도 날아다니네.” 허균이 “또한 절로 뛰어나다”라고 평했을 정도로 사방이 고요한 가운데 낙엽 구르는 소리가 비바람 소리처럼 들린다고 표현한 시인의 기지가 절묘하다. 죽은 생명처럼 여겨지던 낙엽을 생동감 있는 주체로 만들어 기운을 일으킬 수 있다는 시적 묘사 역시 탁월하다. 조용함과 생생한 소리, 죽음과 생명이 서로 넘나드는 것이다. 대와 국화, 그리고 낙엽이 인간 존재를 넘어서는 이 짤막한 시는 우리 인간이 외부 대상을 이해하는 또 다른 차원을 열어 보인다.

자연, 그리고 인생
한편, 옛 시인들은 대상을 보고 단순히 감성적 쾌快나 그 정서만을 토하지 않았다. 특히 가을을 주제로 한 시에는 자연의 섭리와 인생에 관한 깊은 통찰을 드러내는 작품들이 수다數多하며, 우리는 이 가을날을 좀 더 의미 있게 반추해볼 수 있을 것이다.
정도전은 “…이 몸은 이미 가을 구름과 함께 머물고 있으니/공명과 부귀는 다시 구해 무엇하리오…”라고 부귀공명에 집착하지 않고 어떤 곤란에도 굽히지 않는 호연지기를 가을 구름秋雲에 빗대어 다짐한다.
“그윽한 숲에 서풍이 불어와/ 가을빛이 홀연히 잎으로 오른다./ 느꺼워라, 이내 인생이여/ 늙어감이 어찌 이다지도 빠른가.” 보조국사 지눌 밑에서 승려가 된 진각국사 혜심慧諶의 <가을 느낌秋感>이라는 시이다. 가을은 왔는가 하면 어느새 가버리고 만다. 홀연히 가을빛이 느껴지는가 싶더니 그만 가버리는 것처럼 우리네 인생도 너무도 빨리 지나간다.

조선 후기 시인이자 광평대군의 후손인 이양연李亮淵은
<가을풀秋草>라는 시에서 순환하는 자연의 섭리를 이야기한다. “가을풀이여, 서리를 원망 말라/ 가을의 죽음은 새로 사는 길이라./ 도리어 땅에서 소생할 것이라/ 인생이란 풀만도 못한 것인가.”
조락凋落하는 가을의 계절감 속에서 빠른 세월과 인생의 덧없음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무상함을 넘어서는 삶의 이치와 유한한 인간으로서 필히 갖추어야 하는 겸허함의 미덕을 배울 수도 있다. 이것이 어쩌면 우리가 예술작품과 참된 자연을 대면하는 이유이고, 옛 사람들의 시화가 우리에게 돌려주는 참된 의미일 것이다.

가을, 그리고 우리
예전 선비들은 이른 새벽 연꽃이 있는 정자에 모여 박명薄明의 고요한 정적 속에서 연꽃이 봉오리를 열 때 나는 소리를 들으며 시상詩想을 떠올렸다고 한다. 시詩·서書·화畵 삼절三絶이 당연했던 시대, 심오한 시와 아름다운 글씨, 훌륭한 그림이 따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다룰 줄 알아야 했던 당대 사람들은 삶과 유리되지 않은 예술을 향유할 수 있었고, 오가는 계절의 멋과 향기를 미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정신적 여유가 있었다.
요즈음 웰빙이라 해서 다이어트와 운동, 식이요법, 건강식 등에 온통 신경을 쏟아 붓고, 한편으로는 너도나도 명품에 혼이 빠져 안달을 한다. 돈으로 건강을 사고, 고가高價의 브랜드를 소유하며, 사치스러운 생활을 보장해줄 수 있는 물질적 풍요만 있다면 곧바로 삶의 가치가 올라간다고 믿는 것 같다. 정말 그럴까. 물질적인 소유所有와 소비消費는 언제나 공허함을 남긴다. 물질적 가치에 대한 추구는 한계가 없으며, 그래서 매번 만족을 유보시키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신적인 가치는 자신의 삶 속에 쌓인다. 그런 측면에서 생각해보면 옛 선비 화가들이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이 여유롭고 풍요한 삶의 질을 누렸다고 여겨진다.
떠나는 기러기, 흙으로 돌아갈 낙엽, 완전하여 더 확연하게 기우는 보름달, 그리고 마음 서늘하게 스미면서도 매정하게 지나가는 바람, 비어가는 산과 헐벗은 나무, 적막한 고요에 잠길 강과 바다. 글에서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어쩌면 가을은 그렇게 빨리 스쳐가지만, 역으로 우리가 소중한 삶의 진정한 가치를 찾을 수 있는 사치와 여유를 허락하는 계절인지도 모른다.


이화영 _ 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