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과 덕유산이 만나는 자락에 있는 전북 장수군 장계면 명덕리. 넓은 사과밭에 가지마다 매달린 연둣빛 사과는 이제 막 붉은빛으로 물들어가고, 사과밭 옆으로 펼쳐진 푸른 논은 서서 히 황금빛으로 변해가는 중이다.
마을에서 좁은 길을 따라 올라가자, 지리산과 덕유산이 한눈 에 바라보이는 산비탈에 잘 가꿔진 사과밭이 나온다. 사과밭 주 변으로는 소나무와 느티나무 등 갖가지 나무들이 ?창한 숲을 이루고 있고, 색색의 꽃들도 한껏 자태를 뽐내고 있다. 사과밭 과 ?밭 사이로 띄엄띄엄 작은 건물들이 서 있는데, 이곳은 서 울에 사는 임지수 씨(52)가 노후를 위해 마련해둔 집과 농장이 다.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지닌 목가적인 풍경은‘ 나무와 풀’이 라는 농장의 이름과 잘 어울린다.
사과밭과 꽃밭으로 둘러싸인 자연 속의 집
임지수 씨의 집은 도시에서 온 사람들이 전원생활을 위해 짓 는 대부분의 집들과는 다른 모습이다. 기품 있는 한옥도, 운치 있는 황토집도, 분위기 좋은 목조주택이나 통나무집도 아니다. 흔히‘ 집’이라 부르는 형태의 건물이라고는 작은 컨테이 너 두 채와 5평짜리 창고가 전부다.
“자연 속에 살고 싶어 시골로 들어오면서 사람들은 왜 자연과 담을 쌓고 성처럼 집을 짓는지 모르겠어요. 자연 속에서 는 집을 거창하게 지을 필요가 없는 것 같아요. 잠을 자는 최소한의 공간 정도만 있으면 됩니다. 그래서 집을 크게 짓는 대신 자연을 생활 속으로 끌어들이는 방법을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는 컨테이너를 이용했다. 잠을 자는 최소한의 공 간을 만드는 데에는 컨테이너가 가장 적당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 채에 280만 원인 6평짜리 컨테이너 두 채를 세웠는데, 컨테이너는 설치도 간단했다. 바닥에 마사토를 깐 뒤, 공기가 통하도록 50㎝ 정도 띄어 벽돌을 쌓고 그 위에 컨테이너를 올리기만 하니 집이 완성됐다.
그런 다음 컨테이너 한 채에는 임씨? 머무는 방과 다용도실을, 다른 한 채에는 손님을 위한 방과 관리인의 방을 배치했다. 방에도 책상과 책장 등 최소한의 필요한 가구만 놓았다. 컨테이너 앞 쪽으로는 데크를 넓게 깔아 현관처럼 만들었다.
컨테이너에는 최소한의 비용과 품을 들인 반면, 야외 공간에는 많은 공을 들였다. 주방과 욕실 등 집 안에 배치해야 할 공간들을 하나씩 따로 떼어내 야외로 옮겨 정성을 들인 것이다.
주방이 있는 2층 건물은 이 집을 대표하는 공간으로, 손님을 맞이 하는 거실 역할도 한다. 컨테이너와 달리 목재로 지어 주변의 자연 과 잘 어울리는 이 건물은 정자 아래 공간에 주방을 만들고, 주방 앞 쪽으로 데크를 넓게 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구조가 눈길을 끈다. 요리를 하는 주방과, 식사를 하는 식탁, 손님을 맞이하는 거실, 차 마시기 좋은 데크, 주변을 조망하며 쉬는 정자가 하나의 건물에 모두 들어 있는 것이다.
특히 주방에는 사방으로 창을 달아 바람과 햇빛이 잘 들도록 하 고, 조리대를 가운데에 놓아 주변을 바라보며 요리를 할 수 있도록 했다. 또 조리대에는 색감 있는 타일을 붙여 산뜻한 느낌을 살렸다.
“음식을 만드는 사람이 행복하게 일할 수 있도록 조리대를 주방 가운데에 놓았어요. 실내에 있는 주방은 바람이 잘 안 통해 습기가 차고 지저분해지기 쉽지만, 야외에 주방을 만들어 창을 많이 내면 바람이 잘 통해 식기나 주방 기구들을 깨끗하게 유지할 수 있습니다. 너무 내추럴하면 오히려 누추해 보일 수 있기 때문에 조리대의 타일로 색감을 살려 포인트를 줬어요. 소박하고 자연스럽되 누추하 지 않은 것이 이 집의 콘셉트라고 볼 수 있지요.” 2층 건물은 임씨가 마을 어르신들과 함께 3일 동안 지었다. 거칠 게 다듬은 소나무로 뼈대를 엮고 벽체를 만든 뒤, 주방의 외벽에는 임씨가 직접 파스텔 톤으로 페인트를 칠해 내추럴한 느낌을 더했 다. 문과 창을 많이 내 자연 바람을 들인 주방에는 자연의 돌도 함께 들였다. 내벽의 한쪽을 마감하지 않고 돌담을 그대로 활용해 자연 스러운 느낌을 살린 것이다. 가끔 돌담 사이로 뱀이나 개구리가 나오기도 한다고.
2층의 정자에는 비가 들이치지 않으면서도 주변을 조망할 수 있도록 천장을 낮게 만들고 난간을 설치했다. 또 계단을 달아 1층의 주방과 컨테?너 쪽으로 연결되도록 했다. 정자 지붕에는 예스러운 느낌을 살려 길쭉한 모양의 너와를 올렸다.
집 밖으로 나와 자연과 어우러진 주방과 욕실
임씨의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또 다른 공간은 컨테이너와 정자 사이 에 있는 야외 욕실이다. 데크가 깔린 바닥에 하얀 욕조를 박고, 퍼걸러처럼 가로세로로 각재를 엮어 천장을 만든 뒤 덩굴식물인 산머루를 덮었다. 세 면에는 벽을 세우는 대신 나무 울타리를 쳤고, 입구 쪽은 막지 않고 터놓았다. 욕실 한쪽에는 바닥과 벽에 타일을 깔아 샤워 부스와 벽면대를 설치했다.
욕실은 사방이 벽으로 막혀 있지 않은데도 덩굴식물인 산머루의 넓은 잎들로 덮여 바깥에서는 안이 보이지 않는다. 알알이 푸르게 영글어 주렁주렁 매달린 산머루 열매들은 빨강·파랑·노랑으로 포인트를 준 타일의 색과 어우러져 욕실의 분위기를 산뜻하게 해준 다. 자연이 만든 숨 쉬는 푸른 벽이라고 할까.
“별을 보며 목욕을 하면 좋겠다 싶어 야외에 욕실을 만들어봤어요. 입구 쪽에 이동식 칸막이만 치고 욕조에 들어가면 누가 볼까 걱 정할 필요가 없고, 주변이 산이라 보는 사람도 없지요. 싱그러운 자연의 공기를 마시며 물속에서 편안하게 쉴 수 있답니다.” 컨테이너 뒤쪽에 외따로 떨어져 있는 화장실은‘ 자연’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친환경’을 테마로 한 공간이다. 목재로 지은 창고 건물 한쪽에 마련한 화장실에는 황토벽돌로 내부 마감을 했다. 황 토가 공기를 잘 통하게 하고 냄새를 흡수하기 때문이다. 바닥에는 구멍을 파지 않고 황토벽돌로 칸막이를 한 다음 발을 딛는 부분만 만들어놓았다. 용변을 본 뒤 옆에 쌓아둔 톱밥을 덮어두기만 하면 발효가 돼 퇴비로 활용할 수 있다고 한다.
“사람이 편하자고 자연을 오염시키면 안 되겠다 싶더라고요. 그래서 정화조를 묻지 않고 생태 화장실을 만들었어요. 어릴 때 봤던 화장실을 떠올리며 만들었는데 생각보다 쓸 만하더라고요. 설거지 를 할 때에도 밀가루를 사용하고, 세제는 되도록 쓰지 않아요. 오수는 미나리꽝으로 내려가 일차로 걸러진 다음 바닥의 마사토를 통과 하면서 다시 한 번 걸러져 내려가도록 했어요.”
도시 생활에 활기를 더해주는 나만의 공간
다른 집에서는 볼 수 없는 참신한 아이디어가 가득한 공간들을 보고 있으니 집주인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진다. 전북 남원이 고향 인 임씨는 결혼 후 서울에 자리를 잡으면서 20년 넘게 서울내기로 살아왔다. 그러나 젊었을 때부터 직장 생활을 해온 그의 마음 한 켠에는 늘 시골에 대한 그리움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어릴 적 외갓집에서 뛰어놀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과수원에 혼자 가만히 앉아 있으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더라고요. 처녀 땐 땅 많은 농촌 총각한테 시집가는 게 소원이었어요. 서울에 살면 서도 늘 언젠가는 내려가야겠다는 생각을 해오다가, 나이 오십을 터닝 포인트로 삼고 준비를 했습니다. 회사가 있는 곳이 광화문이라‘ 광화문 탈출’이라며 노래를 불렀지요.” 그는 5년 전인 2006년부터 준비를 시작해 곧바로 땅을 샀다. 장수를 택한 것은 내륙의 중심인 데다 서울에서 2시간 반 거리로 교통도 적당하고 고향과도 가깝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땅값이 싸고 과일이 잘되는 자연 조건이 과수원을 하려는 계획과 잘 맞았다.
장수에서도 해발 500미터가 넘는 곳에 위치한 이 터를 찾은 것은 햇빛과 바람 때문이었다. 햇빛이 잘 들고 바람이 많아야 과수원에 벌레가 생기지 않는데, 이곳은 지리산과 덕유산이 만나는 지점이어서 골바람이 들어오고 양지바른 남향이라 볕도 잘 들었다.
비탈진 터의 아래쪽에는 사과나무를 심고, 위쪽에는 소나무와 느티나무, 산수유 등 다양한 나무를 심어 조경수 농원을 가꿨다. 터의 아래쪽 가운데에는 집을 앉히고 집 주변으로는 갖가지 야생화를 심었다. 사철 꽃이 필 수 있도록 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도록 조경을 했고, 사이사이 나무 울타리를 세워 길을 냈다.
2007년 봄부터 시작해 여름까지 그는 이곳에 상주하다시피 하면서 농장의 틀을 완성했다. 애초에 집은 거창하게 지을 생각이 전혀 없었고, 머릿 속에 그려오던 대로 하나씩 만들어갔다.
그렇게 농장의 틀을 잡아놓은 뒤, 임씨는 주말은 물론 틈만 나면 이곳에 와서 농장을 가꾸며 지내고 있다. 대전에서 한의원을 하는 남편도 가끔씩 오고, 그가 없을 땐 지인들이 쉬었다 가기도 한다.
“사람들은 농장에 투자하는 돈으로 아파트나 상가를 사라고 하지만, 이곳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 니다. 마음 한 켠에 방이 하나 생긴 것 같다고 할까요? 언제든 쉴 수 있는 곳이 있고, 매만져주기를 기다리는 식물들이 있다는 것만으로 도 서울에서 생활할 때 당당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아요. 건강이 좋아진 것은 물론이고, 노년에 대한 걱정도 없어졌어요. 조경수 농장과 사과 농장이면 노후의 경제 문제가 모두 해결되니까요. 사실 노후엔 돈보다는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가 더 중요한데, 농장에 있으 면 심심할 겨를이 없을 것 같아요.”
“어릴 적 외갓집에서 뛰어놀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과수원에 혼자 가만히 앉아 있으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더라고요. 처녀 땐 땅 많은 농촌 총각한테 시집가는 게 소원이었어요. 서울에 살면 서도 늘 언젠가는 내려가야겠다는 생각을 해오다가, 나이 오십을 터닝 포인트로 삼고 준비를 했습니다. 회사가 있는 곳이 광화문이라‘ 광화문 탈출’이라며 노래를 불렀지요.” 그는 5년 전인 2006년부터 준비를 시작해 곧바로 땅을 샀다. 장수를 택한 것은 내륙의 중심인 데다 서울에서 2시간 반 거리로 교통도 적당하고 고향과도 가깝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땅값이 싸고 과일이 잘되는 자연 조건이 과수원을 하려는 계획과 잘 맞았다.
장수에서도 해발 500미터가 넘는 곳에 위치한 이 터를 찾은 것은 햇빛과 바람 때문이었다. 햇빛이 잘 들고 바람이 많아야 과수원에 벌레가 생기지 않는데, 이곳은 지리산과 덕유산이 만나는 지점이어서 골바람이 들어오고 양지바른 남향이라 볕도 잘 들었다.
비탈진 터의 아래쪽에는 사과나무를 심고, 위쪽에는 소나무와 느티나무, 산수유 등 다양한 나무를 심어 조경수 농원을 가꿨다. 터의 아래쪽 가운데에는 집을 앉히고 집 주변으로는 갖가지 야생화를 심었다. 사철 꽃이 필 수 있도록 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도록 조경을 했고, 사이사이 나무 울타리를 세워 길을 냈다.
2007년 봄부터 시작해 여름까지 그는 이곳에 상주하다시피 하면서 농장의 틀을 완성했다. 애초에 집은 거창하게 지을 생각이 전혀 없었고, 머릿 속에 그려오던 대로 하나씩 만들어갔다.
그렇게 농장의 틀을 잡아놓은 뒤, 임씨는 주말은 물론 틈만 나면 이곳에 와서 농장을 가꾸며 지내고 있다. 대전에서 한의원을 하는 남편도 가끔씩 오고, 그가 없을 땐 지인들이 쉬었다 가기도 한다.
“사람들은 농장에 투자하는 돈으로 아파트나 상가를 사라고 하지만, 이곳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 니다. 마음 한 켠에 방이 하나 생긴 것 같다고 할까요? 언제든 쉴 수 있는 곳이 있고, 매만져주기를 기다리는 식물들이 있다는 것만으로 도 서울에서 생활할 때 당당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아요. 건강이 좋아진 것은 물론이고, 노년에 대한 걱정도 없어졌어요. 조경수 농장과 사과 농장이면 노후의 경제 문제가 모두 해결되니까요. 사실 노후엔 돈보다는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가 더 중요한데, 농장에 있으 면 심심할 겨를이 없을 것 같아요.”
자연 속에서‘ 농부’와‘ 요리사’로 살고 싶다
자연이 불어넣은 생기 덕분일까. 서울과 장수를 오가고 직장 생활 을 하는 것만으로도 바쁠 것 같은데, 임씨는 요즘 식물에 대한 공부도 하고 있다. 식물을 키우려면 식물에 대해 알아야 한다며 한의대 대학원에서‘ 한방 건강’을 전공하고 있는 것.
또 농장에서 키운 농산물로 피자와 파스타를 만들어 파는 이태리 음식점도 구상 중이다. 서울에서 음식점을 먼저 낸 뒤, 5년 후 완전히 이곳으로 들어와 차릴 계획이라고. 이제 남은 인생은‘ 농부’ 와‘ 요리사’로 살고 싶다는 게 그의 바람이다. 온몸 가득 자연의 기 운을 채우고 다시 서울로 향하는 길, 그의 발걸음은 가볍기만 하다. 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