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 구룡령 옛길 ■, ■ 죽령 옛길 ■

이산저산구름 2016. 1. 19. 09:49

 

■ 구룡령 옛길

 

 

 

지정번호 명승 제29호
소 재 지 강원도 양양군 서면 갈천리 산1-1 외
지정면적 23,600㎡
지 정 일 2007년 12월 17일


구룡령 옛길은 양양군 서면 갈천리에서 홍천군 내면 명개리를 있는 고갯길로서, 해발 1,013m의 높은 고갯길이다. 양양군과 고성군 지방의 옛 사람들이 서울로 갈 때, 주로 이용하던 길로서, 구룡령 옛길은 보행자들이 다니던 길의 형태로 그대로 남아 있으며, 현재 차량이 다니는 구룡령 길은 56번 국도로 별도로 개설된 도로이다. 구룡령의 백두대간은 조침령에서 구룡령을 거쳐 진고개로 이어지는데, 구룡령 옛길은 노새와 사람이 수월하게 오를 수 있도록 완만하게 이어져 있다. 고개 정상에서 양양 방향을 보면 서북쪽으로 방태산이 있고, 홍천 방향으로는 남동쪽으로 오대산이 자리하고 있다. 구룡령 옛길은 양양 지역의 영동사람과 홍천의 영서사람들이 설악산·점봉산·오대산 등 백두대간 장벽으로 산지와 해안을 오가는 것이 힘들었던 두 지역을 연결해 준 유일한 통로였다. 이 옛길이 지나는 지역은 백두대간에서 가장 산림이 울창한 지역으로서, 구룡령 옛길은 한국의 대표적 옛길이라 할 수 있다. 구룡령 옛길은 산세가 험한 진부령·미시령·한계령보다 산세가 평탄한 지형에 조성되어 있으며, 현재까지 그 형태가 비교적 잘 보존되고 있다.

 


구룡령 옛길 주변에는 곧게 뻗은 노송이 아름답게 자라고 있고, 깊은 계곡과 천연림이 옛길의 정취를 나타내고 있다. 구룡령은 백두대간이 지나는 길목으로서, 용이 구불구불 휘저으며 하늘로 올라가는 것처럼 아흔 아홉 구비를 넘어 간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또‘아홉 마리 용이 고개를 넘어가다가 지쳐서 갈천리 마을 약수터에서 목을 축이고 고갯길을 넘어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전해지기도 한다. 양양·고성지방 선비들이 과거를 치르러 한양으로 갈 때, 용의 영험함을 빗대어 과거 급제를 기원하며 넘나들던 길이라 하기도 한다.


구룡령 옛길 입구에는 굽이져 흐르는 계곡이 있고, 길의 중간중간에 길의 위치를 표시하는 횟돌반쟁이·묘반쟁이·솔반쟁이 등이 자리하여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보여 줄 뿐 아니라 옛길 걷기의 흥미를 더해주고있다. 또한 구룡령 옛길에는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개발을 위해 주민들을 강제 징집하였던 애환의 역사가 서린 철광소와 케이블카가 남아 있고, 옛길 길가에는 1989년 경복궁 복원 당시 사용되어 밑둥치만 남아 있는 소나무 거목의 흔적이 남아 있는 등 조선시대와 근현대사의 역사가 함께 잔존하여 역사적 가치가 큰 소중한 명승이다. 고갯길 곳곳에는 솔반쟁이·묘반쟁이·횟돌반쟁이 등 다양한 사연을 지닌 독특한 지명들이 남아 있고, 희귀한 야생화와 약초·버섯 등을 흔하게 볼 수 있으며, 갈천약수와 산골 분교의 정취를 지닌 갈천분교 등이 위치하고 있다. 예전에 양양 지역 사람들은 소금·간수·고등어, 명태 등을 가지고 이 길로 영서지방으로 가서, 콩·팥·수수·녹두·깨·좁쌀 등으로 바꾸어 왔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곳의 옛 어른들은 구룡령 옛길을‘바꾸미길’이라고 하기도 했다.

 

 

 

죽령 옛길

 

 

지정번호 명승 제30호
소 재 지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수철리 산86-2 외
지정면적 151,115㎡
지 정 일 2007년 12월 17일


죽령 옛길은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과 충청북도 단양군 대강면의 경계에 있는 고갯길로서, 대재라고 부르기도 하며 소백산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죽령 옛길은 고갯마루의 높이가 해발 698m이며, 영주와 단양을 연결하던 옛길로서, 길을 따라 흐르는 계곡과, 길게 늘어져있는 수목 터널이 주변에 펼쳐지는 소백산 주요 능선 등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보여주고 있는 명승이다. 과거에 우리나라 동남 지역 교통의 대동맥이었던 죽령 옛길은 차량이 다니는 5번 국도가 개설되면서 폐도가되어 수십 년 동안 묻혀 있었으나, 1999년 옛 자취를 살리려는 취지에서 영주시에서 다시 복원하였다.

 


죽령 옛길은『삼국사기』에‘신라 아달라왕 5년(158년) 3월에 비로소 죽령길이 열리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동국여지승람』에‘아달라왕 5년에 죽죽이 죽령길을 개척하다 지쳐서 순사했고, 고갯마루에는 죽죽을 제사지내는 사당이 있다’고 전해지는 오랜 역사의 옛길이다. 또한 이곳에 조선시대에는‘죽령사竹嶺祠’라는 산신사당이 있었다. 죽령 고갯마루는 소백산맥이 영남과 호서를 갈라 놓는 길목에 해당하며, 삼국시대 이래로 봄·가을에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죽령 지역은 삼국시대 고구려와 신라의 국경 지역으로 오랜 기간 고구려와 신라의 영토 분쟁 지역이었는데, 551년(진흥왕 12)에 신라가 백제와 연합하여 죽령 이북 열 고을을 탈취한 기록과, 그 40년 뒤인 590년(영양왕 1)에 고구려 명장 온달 장군이 자청하여 군사를 이끌고 나가면서‘죽령 이북의 잃은 땅을 회복하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다짐한 기록 등이『삼국사기』에 남아 있는것으로 보아 그 당시 얼마나 중요한 요충지였음을 알 수 있다.


1910년대까지도 경상도 동북지방 여러 고을이 서울 왕래에 모두 이 길을 이용하였다. 청운의 뜻을 품은 과거선비, 관원들이며 온갖 물산을 유통하는 장사꾼들로 사시장철 번잡했던 이 고갯길에는 길손들의 숙식을 위한 객점, 마방들이 목목이 늘어 있었다.